< 136잔. 쉽지 않은 길. >
3.
“자, 찍겠습니다. 웃으시고. 하나, 둘, 셋!”
- 찰칵!
번쩍이는 밝은 조명과 함께 찰칵이는 셔터음이 크게 들려온다.
아래위로 불편함이 가득한 쓰리피스를 입은 정환은 크게 번쩍인 조명 덕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쓰리피스는 참 오랜만에 입어본다. 아르센에서 일하던 시절 입었던 게 마지막이니 어쩌면 1년하고도 조금 더한 시간이 지났을 지금.
다행히 그때 입던 옷을 보관하고 있던 것이 오늘에서야 큰 도움이 된 것만 같다.
“차정환 바텐더님? 옆으로 돌아서 한 컷만 더 찍을게요. 괜찮으시죠?”
“네. 물론이죠. 이렇게요?”
“아. 좋습니다. 그럼, 갑니다!”
오늘은 월드 클래스 코리아 파이널에 진출한 참가자들의 프로필 촬영이 있는 날.
정환이 불편한 쓰리피스를 입고는 어색한 웃음을 연신 지어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실력이 제법 좋아 보이는 사진 기사는 유독 정환에게만 많은 자세와 많은 컷을 요구하고 있었다.
“좋네요. 잘 나왔어요. 허허. 이거, 찍을 맛이 나는데요?”
“좋은 사진 부탁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긴 촬영이 겨우 끝나고는 정환이 드디어 한숨을 돌린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시절의 모습을 갖추니 예전보다 더 과해지는 관심인 것만 같다.
정환은 촬영을 끝내고는 대기실로 들어선다. 대기실은 마치 연회장처럼 쓰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들로 가득했다.
총 8명의 바텐더. 이번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어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진 최종 8인이 저마다 어색한 기류를 내뿜고 있다.
정환은 대기실 안을 잠시 살펴보다가 구석에 놓인 작은 소파로 향한다.
어색하다. 어째서 그렇지 않겠나. 대회라는 게 하나의 교류의 장 역할도 한다지만 기본적으로 경쟁자들이지 않나.
몇몇은 모여 앉아 작은 그룹을 형성했지만, 그래도 사이에 자리한 어색한 기류는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벌써 나뉜 건가···.’
크게 나뉜 무리는 두 무리 정도로 보인다. 한쪽은 8명 중 정환을 포함해 5명이나 속한 서울권의 바텐더들
그리고 나머지 지역 출신의 바텐더들은 홀로 앉아 서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본다면 서울권 바텐더들 사이에서도 무리가 나뉘고는 있다.
정환을 뺀 나머지 넷 중 셋은 강남 소속 바텐더들로 정환과는 아직 교류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끝나셨어요?”
단 한 명만 빼고.
“아. 지웅 씨.”
멍하니 방안을 둘러보던 정환에게 누군가 물 한 병을 건네며 친숙하게 다가왔다.
다가온 이는 아르센의 이웃한 가게, 노벰버에서 일하던 서지웅 바텐더.
정환과 함께 스터디를 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대회에서 최종 스테이지까지 살아남았다.
“고마워요. 마침 갈증이 나던 참이라.”
“뭘요. 유독 정환 씨를 오래 찍던데요? 역시 모델이 좋나 봐요.”
“에이. 아니에요. 표정이 어색해서 그런 거겠죠.”
“여전히 겸손하시네요. 어때요? 대회는.”
“죽을 맛이죠. 지웅 씨는요?”
“글쎄요. 우선은 다행? 그런 생각이 먼저 드네요. 적어도 정환 씨랑은 다른 조니까요.”
최종 8인이 발표된 후 곧바로 결선을 치를 두 조 역시 발표가 되었다.
정환은 지웅과 다른 조. 아직 챌린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건 결승에서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겸손은 지웅 씨가 더 하시네요. 제가 다행이죠.”
“꼭 결승에서 만납시다. 우리 스터디가 얼마나 뛰어난 스터디였는지 보여주자구요.”
“그럼요. 연희 씨도, 재훈 씨도 기뻐할 겁니다. 꼭요.”
아직은 시작되지 않은 파이널 챌린지를 앞둔 두 사람의 사이에는 경쟁심이 자리하지 않고 있다.
“다른 조원분들이랑은 인사 나눴어요?”
“아직요. 조금, 어색하네요. 다들. 저도 그렇게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요.”
“흠. 그래요? 제가 소개해드릴까요? 저기 강남 출신 친구들은 조금 아는 편인데.”
“아뇨. 차차. 차차 친해지죠, 뭐.”
“그래요. 뭐. 교류니, 뭐니 해도 결국은 경쟁이니까요. 누군지는 다들 아시죠?”
정환과 같은 조에 배정된 바텐더를 보며 묻는 지웅의 말에 정환은 해맑은 표정을 보여준다.
지웅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자. 저기 세 사람은 얼굴은 알고 있죠? 왼쪽에 있는 둘은 정환 씨랑 같은 조에 속했고.”
“아. 네. 아까 가볍게 인사 정도만.”
“청담동 출신이에요. ‘바 마제스타’랑 ‘바 챌리스’. 경력은 각각 4년이랑 5년 정도구요.”
“아. 좋은 가게에서들 일하시네요.”
“그러니 여기까지 왔겠죠? 유명한 곳들이니까.”
지웅은 대기실을 조심히 돌아보며 정환에게 한 명, 한 명 참가자의 이력을 읊어준다.
아직은 강남이 바씬에 있어서는 정보를 얻기 가장 좋은 곳임은 분명해 보였다.
“저쪽에 앉은 사람도 같은 조죠?”
“날카롭게 생긴 분이요?”
“네. 저 사람은 지방 출신이에요. 저도 듣기만 했는데, 광주 출신이라네요. 실력이야, 뭐. 두말할 필요도 없을 거고.”
“광주요? 아.”
정환은 지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며 참가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지방 출신은 이번 대회 파이널에 딱 3명이 진출했다고 들었다.
광주에서 한 명. 또 제주에서 한 명. 마지막으로 부산에서 한 명이었다.
“그 옆에 혼자 휴대폰 보는 사람. 저 사람은 제주에서 온 사람이에요. 우리 조죠.”
“흠. 제주요? 제주면···”
“호텔 바 출신. 경력은 3년 정도.”
“제주도 호텔 바텐더라. 관광지고 외국인도 많으니까, 경험은 선수겠네요.”
“마지막으로 저기. 덩치 좋은 사람 보여요?”
“키 큰 분?”
“맞아요. 키도 크고 조금 인상파. 부산에서 왔다네요. 부산 출신에, 또 여기서 정환 씨를 제외하고 유일한 가게의 오너.”
“가게 오너요??”
정환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이라도 한 듯, 한 가게의 수장이 직접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다시 말하지만, 대회라는 건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기에 한 가게를 이뤘을 정도의 바텐더라면 참가를 꺼리기 마련이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도 있다는 거겠죠. 아시잖아요? 부산. 한때는 부산 출신 바텐더들이 대세였으니까.”
“쉽지 않겠네요. 지웅 씨랑 같은 조였죠?”
“네, 같은 조예요. 뭐, 서울 출신들이야 대략적으로 스타일을 안다고는 치지만, 지방 출신은 알 수가 없잖아요? 실력이야 당연히 좋겠지만, 뭐 그 이상을 알 수 없으니. 복잡합니다.”
클래식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플레어 바텐딩이 시장의 주류였다.
그리고 그런 플레어 바텐딩 문화를 주도했던 건 해변을 끼고 있던 도시인 부산.
부산은 수많은 플레어 바텐더를 배출하며, 한때는 바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부산 출신의 바텐더가, 오랜만에 클래식 바텐딩 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흐음.’
플레어 기반일까, 아닐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왜인지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정환이었다.
“단체 촬영 들어갈게요!”
대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촬영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환은 다시금 몸을 일으켜 촬영장으로 향했다.
4.
프로필 촬영이 끝나고 이주 후.
정환은 오늘도 정갈한 차림을 갖추고는 한 호텔의 작은 행사장을 찾았다.
쓰리피스는 아니다. 오늘은 그저 넥타이를 맨 깔끔한 정장 스타일.
바텐더라는 직업이 주는 인상이 있기에 복장만큼은 철저히 규제하는 대회였다.
“안녕하세요. 월드 클래스 코리아 파이널 개회식에 왔는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네. 고객님. 2층에 있는 그랜드 볼 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친절한 호텔리어의 안내를 받으며 행사장으로 향한다. 곳곳에는 월드 클래스 바텐더 대회를 홍보하는 현수막과 포스터가 자리를 빛내고 있다.
“대회 참가하시는 분이시죠?”
뭘까. 호텔과 바는 뗄 수 없다는 그 말이 현실인 걸까. 바텐더를 알아보는 게 드물디드문 한국에서, 그것도 대회에 참가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보는 이를 만나자 정환은 짐짓 놀란 표정이다.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저기···. 포스터에 온통 손님분 얼굴이셔서요···.”
하지만, 언제나 진실은 슬픈 법. 정환은 호텔리어의 손을 따라가자 보이는 큼지막한 자신의 포스터를 보며 이내 고개를 떨군다.
쓰리피스를 억지로 갖춰 입고 어색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정환이 포스터 속에서 건치 미소를 뽐내고 있다.
‘아···.’
유독 자신의 얼굴만 크게 보이는 것 같은 그였다.
“여깁니다.”
“···감사합니다.”
호텔리어는 정환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안내해주고는 자리를 떠난다.
정환은 입구로 다가가 신분을 확인하고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발대식이 있는 날이다. 무슨 이런 성대한 행사까지 참석해야 하나 싶지만, 오늘은 참가자들에게 중요한 날.
미리 조를 편성해 두었던 대회는, 바로 이 개회식 자리에서 각 조의 참가자들이 겪게 될 챌린지를 뽑게 된다.
마리아주, 칵테일 파티, 스피드 런, 마켓 투어. 이렇게 네 개로 나눠진 챌린지 중 하나를 뽑아 4인의 바텐더가 겨루는 것.
그게 제일 처음 펼쳐질 결선 1라운드였다.
정환은 안쪽에 정해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몸을 앉혔다.
“정환 씨!”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지웅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 하.”
어색하게 손을 흔든 정환은 앞에 제공된 작은 물컵으로 목을 축인다.
“친한 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정환이 포스터에서 보였던 건치 미소로 손을 흔들고 내릴 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같은 조에 배속된 한 바텐더. 광주 출신이라던 그 바텐더였다.
“촬영 때도 친하게 보이셔서요.”
“아. 네. 예전에 일하던 가게가 이웃한 사이라서요.”
“흠. 그렇군요. 좋겠네요. 서울은. 이웃한 가게도 많고.”
“모든 서울 바가 그런 건 아니죠. 그래도, 상권이 있는 곳은 그렇습니다.”
“그런가요. 상권이라. 지방은 그런 게 약해서···. 아. 소개를 안 했네요. 광주에서 바텐더 하는 이창혁입니다.”
“차정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종로의 아실. 맞죠?”
“절, 아세요?”
“바씬은 좁으니까요. 지방이라도 알 건 다 압니다.”
“그러셨···군요. 반갑습니다.”
조금은 메마른 대화가 둘 사이를 오간다. 첫 만남이기에 더 친근할 수도 있는데.
둘은 곧 경쟁을 펼칠 사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은 무미건조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바 씬에서 요즘 이름을 제법 알린 정환은 지방에도 알아주는 인사인 모양이다.
- 오늘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 사이로는 사회자의 행사 진행이 이어진다.
여느 행사와 같이 내빈을 소개하고 주최 측을 홍보하고. 또 대회에 대한 자찬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지루한 과정이었다.
“1라운드는 어떤 과제가 뽑혔으면 하세요?”
무미건조한 어투는 원래 가진 그의 성격인 걸까. 그는 어투와는 달리 계속해서 정환을 향해 말을 걸어온다.
아는 이가 없는 자리에서 이름이라도 들어본 이에게 조금은 더 가까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 다음으로 월드 클래스 코리아 파이널에 참가하는 바텐더의 명단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새 행사의 진행은 인사를 넘어 참가자를 소개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커다란 화면에는 어색한 모습으로 찍은 포스터 속의 그 프로필 사진이 바텐더들의 이름과 함께 웅장하게 떠다니기 시작했다.
“글쎄요. 하나같이 쉬운 과제는 없어 보이네요. 마켓 투어는 시간도 촉박할 거 같고, 칵테일 파티는 몸이 힘들겠죠. 스피드 런이 그나마 깔끔해 보이지만 변수도 많고···”
“흠. 그런가요. 그래도 제일 힘든 건 다른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랑 같은 생각인 모양이네요.”
- 씨익.
제일 힘든 과제가 무엇일까. 이런 주제가 오가던 둘 사이에 처음으로 웃음이 자리한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역시···”
“아무래도···”
“마리아주겠죠.”
“마리아주죠.”
둘은 그를 증명하듯.
동시에 같은 대사를 뱉어본다.
- 자, 이제부터 월드 클래스 코리아 파이널 1라운드, 챌린지 추첨식이 있겠습니다. 우선 A조 과제는 한국 지사장님께서 뽑아주시겠습니다!
사회자의 웅장한 소개가 지나고는 나이가 지긋한 한 노신사가 단상 위로 올라간다.
손을 흔들며 사업가스러운 미소를 한번 보여준 그는 네모난 통 안에 손을 넣어 작은 공을 하나 꺼내온다.
A조는, 아쉽게도 정환이 속한 조는 아니었다.
- A조의 챌린지는···! 두구두구두구두구! 칵테일 파티!입니다!
사회자는 입으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어가며 결과를 발표한다.
칵테일 파티. 쉽지 않은 과제가 A조에 배정이 된다.
“흠. 칵테일 파티는 아웃이군요.”
“두 조가 겹칠 일은 없으니까요. 남은 과제 중에 좋은 게 걸려야 할 텐데요.”
“뭐든 크게 상관이야 있겠습니까? 어차피···. 월드 파이널에선 전부 겪어야 할 챌린지들인데.”
앞서 나온 챌린지를 평하는 창혁의 말이 제법 의미심장하다. 벌써 다음을 내다보려는 걸까.
아니, 그만큼 실력에 자신도 있고? 어투 속에 묻은 자신감이 왜인지 그럴 것만 같아 조금은 그가 새롭게 보이는 정환이다.
- 다음으로 B조 챌린지 추첨을 위해선 본사 디렉터이자 아카데미 교수이신 김광수 디렉터님께서 고생해 주시겠습니다!
연이어 추첨은 정환이 속한 B조를 향해간다. 연단으로 올라서는 얼굴은 익숙한 얼굴인 김광수 디렉터.
그와 정환이 눈을 한번 마주친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 드르륵. 드르르륵.
김광수 디렉터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넣어 상자 속을 헤집는다.
그는 느낌이 왔다는 표정을 한번 지어주고는 이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B조에 속한 바텐더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가 높이든 손에 모였다.
뭐, 멀리서. 연단의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뭐가 나왔을까. 조금은 두근거리는 정환의 시선이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할 때.
- B조의 챌린지는···! 두구두구두구두구!
사회자는 앞서 보여줬던 그 소리를 또 입으로 내어가며 긴장감을 고조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 아! 네! 마리아주! 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