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35화 (135/175)

< 135잔. 도약. >

1.

“그럼, 첫 잔부터 시작해볼까?”

누구에게나 사랑방이라 불리는 공간은 언제나 소중한 법이다. 언제든 모여서 담소를 나눌 수 있고 별다른 약속 없이 들렀을 때도 친근한 얼굴들이 있는 곳이 사랑방.

여기, 종로에는 아실이라 불리는 하나의 사랑방이 있다.

“내가 디렉터인가 하는 그 양반, 재훈 씨가 편집장, 그리고 유 선배가 바텐더 역할을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오케이. 해보자고.”

“준비됐습니다. 최대한 여성의 입장을 대변해 보죠.”

“흠. 성민이라면 어떤 걸 봤으려나···.”

늦은 밤, 바라고 불리는 아늑한 공간도 영업을 마친 시간에 이곳 사랑방에 모인 이들은 모두 바텐더였다.

그레인 호텔에서 치프 바텐더로 일하는 정우, 아실의 바로 옆 가게 숲을 운영하는 재훈, 그리고 비강남권 바텐더의 대부라 불리는 유동경 바텐더까지 모두 아실에 모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동경은 종로에 열 가게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다 어느새 종로의 바텐더처럼 아실에는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대부라는 칭호에 걸맞게 친화력 하나는 남부럽지 않아 자연스레 이곳에 녹아든 그였다.

모인 이들이 정우와 재훈, 동경으로 끝은 아니다. 주변에는 봉황당의 오너인 주용과 아실의 윤수, 그리고 정환의 선배인 기준까지 자리해 모임이 제법 성대해 보였다.

“제일 첫 잔은 올드패션드, 그리고 네그로니, 마지막으로 B&B였어요.”

이들이 전부 모인 오늘의 주제는 정환의 월드 클래스 코리아 대회 2차 심사.

오늘 이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지난 상황을 복기(復棋)하고 있었다.

호텔이라는 회사에 소속된 정우가 김광수 디렉터의 역할을, 트렌디함을 대표하는 재훈이 이채현 편집장의 역할을, 그리고 바텐더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동경이 백성민 바텐더의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자세한 심사 결과를 알 수 없는 지난 2차 심사를 이렇게 돌아보려는 것이다.

“올드패션드, 네그로니, 그리고 B&B. 나왔습니다.”

정환은 2차 때와 같은 방법, 또 같은 느낌으로 잔을 만들어 이들에게 선보였다.

“흠. 올드패션드는 디아지오의 불렛을 쓴 거지? 기주 맛을 잘 살렸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네그로니도 색이 잘 나왔습니다. 맛이야,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겠죠. 가니쉬도 적당하구요.”

“B&B는 감탄스러운 수준입니다. 스터가 섬세했다는 걸 혀로 느낄 수 있었군요.”

이들은 심사 위원들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평을 들려주며 아직은 나오지 않은 2차 심사의 결과를 예상해 보고 있다.

정환은 연달아 다음에 제공되었던 잔인 코스모폴리탄과 솔 쿠바노, 갓파더를 이들에게 내보였다.

“코스모폴리탄도 색감이 아주 좋네요. 이쯤에서는 정환 씨도 의도를 알아챈 것 같은데요? 평소보다 색이나 마감에 힘을 더 준 느낌도 있고.”

“음. 솔 쿠바노가 주문된 것도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행운도 잘 살리셨고. 빌드를 천대하는 다른 바텐더들에게 꼭 선보여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갓파더는 말해 뭐하겠냐? 조니워커 블랙. 안 봐도 뭘 썼는지가 딱 눈에 보일 정돈데. 이거, 내가 그 회사 직원이었으면 만점 준다. 진짜.”

연달아 나오는 이들의 감상이 정환의 결과를 기대하게 했다.

친한 사이라서. 또 오래 볼 사람이어서. 이들이 객관적인 관점을 버리고 평을 내뱉는 건 아니다.

지금 나오는 평들은 어디까지나 바텐더로서 객관적인 평가들.

관계를 떠나서도 다음에 이어질 파이널 심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런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함을 이들은 모르지 않았다.

정환의 복기가 마지막을 향해간다. 다음으로 나오는 건 샴페인 플라밍고와 에비에이션. 그리고 하이볼.

샴페인 플라밍고가 나왔을 때는 오! 하던 반응이 에비에이션에서는 우와! 로.

그리고 마지막 하이볼에서는.

“미친놈···.”

“여기서 이걸···.”

“하아. 정말이지···.”

다들 경악하기에 이르렀다.

특히나 기주로 사용된 술이 윈저라는 걸 들었을 때 다른 바텐더들의 표정을 정환은 잊지 못한다.

허를 찔렀다는 생각과 함께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정환이었다.

“어휴. 저놈은 진짜. 난 어디 심사해달라고 요청이 와도 저놈 참가한다면 바로 거절할 거다. 어이가 없어서, 원.”

“뒤통수가 얼얼하긴 하네요. 재치···도 있고.”

“흠. 반응이 좋았다니 다행이지만···. 뭐. 맛이나 완성도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결론은 나쁘지 않다. 결국, 모든 잔을 보고 난 후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준비. 해도 되겠는데?”

합격을 염두에 두고 다음 심사를 준비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야. 사장님. 벌써 파이널이네요.”

“아직은 아니죠. 준비만 해두고, 너무 기대는 안 하려구요.”

“에이. 또 겸손하시기는요.”

“정말요. 너무 기대하면, 또 실망도 크잖아요.”

“놔둬. 쟤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잔뜩 들뜬 표정을 짓는 윤수와 혀를 내두르는 정우와 다른 바텐더들.

그 사이에 정환은 애써 들뜨지 않으며 평온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건방은 이미 내려둔 그였다.

“파이널 과제는 전부 나왔지?”

“네. 처음부터 공개를 하더라구요. 이번에도 크게 변화는 없어요.”

“저, 사장님. 그건 매년 같은 거예요?”

이야기는 이어져 다음 심사인 파이널로 향한다. 다들 별다른 반응 없이 아는 것처럼 넘어가는 과제에도 고개를 갸웃하는 이는 윤수였다.

아직은 클래식 씬이 어려운 그였다.

“아직 윤수 씨에게는 어려운 모양이군요. 제가 설명을 조금 드려도 될까요?”

“유 사장님이요? 저야 감사하죠···!”

확실히 대부라 불리는 사람답게 따뜻한 모습을 동경이 보여준다.

어린 바텐더, 또 이 씬에 새롭게 들어온 이를 다루는 건 그가 전문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최종적으로 뽑힌 8명이 두 팀으로 나뉘어 챌리지를 벌일 겁니다. 마리아주, 스피드 런, 칵테일 파티, 그리고 마켓 투어까지. 이 중 하나를 골라 한 조에서 한 명. 그리고 거기서 올라온 두 사람이 펼치는 게 결승이겠죠. 결승은 당일 전까지는 과제를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마리아주는 음식과 페어링하는 거고 스피드 런은 빠르게 여러 잔을 만드는 거 맞죠? 그럼, 칵테일 파티는 뭐죠?”

“손님을 초대해 일정 시간 동안 손님들께 파티에 쓰일 칵테일을 제공하는 과제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영업을 진행하고 최종 평가는 손님들 손에 맡기는 거죠.”

“흠. 몸도 힘들고. 제일 빡세 보여요!”

“뭐, 그래도 주문을 받는 형식은 아닐 겁니다. 펀치 스타일을 선보여 일을 줄이는 바텐더도 있고 또 미리 정해둔 메뉴만을 기계처럼 내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평가는 전적으로 손님들 손에 달렸고.”

“제일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반대로 다른 요소가 개입할 여지도 많죠.”

“복잡하네요···.”

유동경 바텐더의 설명을 들은 윤수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들려오는 챌린지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과제임을 바텐더인 윤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 마켓 투어는 뭐죠?”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게 하는 겁니다. 여기서 구매한 재료를 활용해 칵테일을 만들어 보이는 과정이죠.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제일 어려워 보이는데요?”

“흠. 쉬운 건 없지. 그렇게 본다면, 칵테일 파티도 피하는 게 좋고.”

“마리아주도 쉽지 않을 겁니다.”

설명을 차분히 옆에서 듣던 정우와 기준도 한마디씩 보태며 파이널 과제가 쉽지 않음을 토로한다.

바텐더이기에 더욱 저 과제들의 어려움을 잘 아는 이들이다.

“그래도···. 뭐. 정환이라면 크게 걱정은···.”

“그렇지? 나도 그렇긴 해. 저놈은.”

“저도 동의합니다. 정환 씨야 뭐.”

“확실히, 무언갈 보여줄 건 같단 말이죠.”

“차라리 어려운 과제를 뽑았으면 하는 마음도···.”

“네? 신 사장님! 너무 하세요!”

“아니, 그러면 또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

그래도 참가자가 정환이기에,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 그들이지만.

“다들 부담 주지 마세요.”

정환은 자신에게 과하게 몰리는 신뢰에 조금 부담감을 표한다. 이러다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다들 초상이라도 치를 분위기였다.

“부담은 무슨. 좋은 부담이지. 벌써 파이널이잖냐? 상금도 확정이고, 조금만 더 잘하면 해외도 나가는 거 아냐? 그것도 공짜로!”

“이 대회에 상금도 있었어요?”

“에이, 윤수 씨. 그건 아니다. 상금 없는 대회가 어디 있다고.”

“오, 우승자가 아니어도요?”

“8인에만 들면 기본 상금이 있어요. 우승 상금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만.”

“해외는 무슨 말이에요? 아! 월드 파이널!”

“그렇지. 월드 파이널. 세계 대회. 올해는 어디라더라?”

“방콕이라던데요.”

“방콕!”

“키햐. 죽이네. 정환아. 너 방콕 가봤냐?”

“아뇨···. 아직요.”

사실은 가본 적이 있다. 이건 일본에서 바텐더 생활을 하던 때의 이야기.

의외의 사실이지만, 방콕 역시 바 문화는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연이어 한 손에 꼽히는 선진국이기도 했다.

칵테일과 바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문화가 발전하는 요소는 간단했다.

많은 사람, 또 다양한 국가의 사람이 오가는 곳이 발전한다는 것.

1900년대 초에는 항구가 발달한 도시가 이런 요건을 충족했었고 70년대 이후로는 관광지가 이런 요건을 충족해 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사람이 오가며 입으로 레시피를 옮겨야만 했다.

외항이 발달한 곳도, 또 관광이 발달한 곳도 사람이 많이 오가며 자연스레 칵테일과 바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방콕은 오래전부터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사람이 오가는 것에 더해 발전하는 건 호텔 산업과 호텔에 속한 바 산업.

방콕에는 양손으로도 꼽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세계적인 브랜드의 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레인 호텔 역시 있었고.

“그래? 방콕 좋-지. 유명한 호텔은 물로이고 좋은 로드 바도 많을 거야. 크흐. 강가에 앉아서 칵테일 한 잔! 얼마나 좋냐? 아. 그레인 호텔도 있다던데. 거기서 묵어라. 내가 바우처 좀 구해줄게.”

“숙식은 대회 제공일걸요? 항공비, 체류비 모두 지원으로 알고 있어요.”

“허. 대박이네. 부럽다야. 대회를 나갔어야 했나?”

“정환이랑 같이요?”

“그건 좀 그렇지?”

“대답은···안 할게요.”

“그래. 고맙다. 기준아.”

이야기가 점점 흘러가더니 어느새 정환은 월드 파이널에 진출해 있다.

“에이, 벌써 그때를 생각하긴 이르죠. 김칫국이에요.”

“그런가? 그래도 뭐. 재밌잖아.”

언제나 그렇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여러 상상으로 자리에서 재미를 더한다.

부담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몫.

조금은 불편한 기색이 있을 법도 하지만, 정환은 저런 재미난 상상들 속에는 자신을 향한 강한 믿음이 있음을 알기에 그런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정말 조금의 믿음도 또 가능성도 없다면. 저런 이야기는 자리를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재미난 상상은 이어졌다. 어느덧 세계를 돌며 우승자로서 게스트 바텐딩까지 하고 있던 정환.

정환도 그런 이야기가 재밌어 웃으며 장단을 맞춰갔다.

바텐더들의 모임은 해가 뜨고 나서야, 그 막을 내릴 수 있었다.

2.

매번 이 순간은 떨려온다.

가끔은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이는 어쩔 수 없는 감정.

정환은 영업 준비를 하기에도 이른 시간에 홀로 아실에 나와 가만히 앉은 채 자신의 휴대폰만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2차 심사의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다. 정해진 시간은 오후 6시 무렵.

하지만, 바텐더라면 모두 알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 명단이 발표되기 이전에. 최종 8인에게는 개별적으로 연락이 온다는 것을 말이다.

당일 조금 이른 시간에 사전 연락이 전해진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평온한 마음으로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전화가 기다려지는 건 숨길 수 없는 그였다.

‘커피를 한 잔만···’

더 마실까.

허나, 이미 두 잔이나 비운 커피잔을 보며 정환은 그런 생각을 접기로 한다.

이리저리 걸어도 보고 괜스레 자리를 쓸어도 본다. 정환이 몸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 띠리리리리링.

- 깍!

손톱이 이에 뜯기는 작은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서는 벨소리가 울려왔다.

정환은 조심히 화면에 뜬 번호를 살펴본다.

기대했던 번호인지는 알 수 없다. 지역 번호로 시작하는 제법 형식을 갖춘 번호가 하나 있을 뿐.

이건 스팸일지도 모르는 번호지만, 정환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보기로 한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차정환 님, 휴대폰 맞으신가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형식적인 젊은 여성의 목소리. 제일 첫마디는 정환의 신분을 확인하는 말이다.

“네. 맞습니다. 차정환 본인입니다.”

정환은 경우 반대 손으로 전화를 잡은 손을 받치며 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연이어 들려온 말은.

- 축하합니다! 차정환 님께서 월드 클래스 코리아 바텐더쉽 파이널 스테이지, 최종 8인에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정환의 몸을 잠시지만, 공중에 방방 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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