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잔. 바에서. >
1.
“청소 깨끗하고, 접시랑 컵도 깔끔. 백바도 한번 싹-정리했고···. 아! 창문!”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하루를 준비하던 정환의 내심은 말이다.
허나, 그런 정환의 마음과는 달리, 곁에 선 사람의 마음은 조금 분주한 모양이다.
“창문을 닦아야겠어요! 전부 닦을까요? 아니다. 백바에 있는 술병에 광을 내는 게 먼저···!”
윤수는 어젯밤부터 안절부절못하고는 아실의 상태를 살피기 바쁘다.
“윤수 씨. 괜찮아요. 진정해요. 진정. 워.워.워.”
“진정하면 안 되죠! 하나라도 더 살피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 누가 보면 제가 대회 나가는 줄 알겠어요!”
윤수가 뱉은 말 그대로의 풍경이 펼쳐진다. 누가 본다면 오늘이 정환보다 윤수에게 소중해 보일 정도.
오늘이 정환의 월드 클래스 코리아 대회의 2차 심사 날인데도 말이다.
“사장님은 긴장되지 않으세요?”
“긴장되죠. 그래도 그걸 티 내면 안 되니까요. 바텐더가 손님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여서 되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인 바 저징이 그런 거잖아요. 손님으로 찾은 심사 위원을 상대하는 것.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은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에요.”
“후···. 그러셨군요. 전 또···.”
“윤수 씨가 이렇게 나서서 챙겨주니까 더 긴장할 필요가 없겠네요. 오늘 아실은 완벽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이죠? 정말 괜찮겠죠?”
“그럼요.”
누군가에게 보이고 또 좋은 모습을 선사하고. 이런 게 바의 일상이며 당연한 모습임에도 특별한 날이라 더욱 힘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이 다른 날보다 더 뛰어나다면 평소가 부족한 날이었다는 뜻임에도 윤수는 오늘을 더욱 뛰어나게 만들려 분주할 뿐이다.
“심사 시간은 나왔죠?”
“오픈하고 얼마 뒤요. 7시 반쯤? 그쯤 도착하신다네요. 다행이죠.”
“그때가 좋은 시간대인가요?”
“음-. 영업에 지장이 없으니까?”
“에이. 하루 정도는···!”
“하루도 안 되죠. 심사와 대회는 잠시지만 영업은 계속이니까요.”
“하여튼. 사장님도 참.”
윤수는 구구절절 흘러나오는 정환의 정론에 말이 막히고 만다.
남들이라면 대회를 위해 하루를 날리는 걸 상정할지도 모를 판국에 정환은 정론은 담대하기 그지없었다.
- 똑똑.
정환의 단호한 말에 윤수가 입을 닫고는 영업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아실의 문밖에는 그림자가 찾아오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이들이 여럿 웃는 표정으로 정환과 윤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뭐하세요들? 들어오세요, 얼른!”
윤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얼른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바빠요?”
“잠시 괜찮죠?”
“어휴. 평소랑 다를 게 없네요.”
아실을 찾은 이들은 같이 종로에서 동고동락하는 다른 바의 바텐더들.
숲의 재훈과 연희, 봉황당의 주용이 아실을 찾았다.
“오셨어요? 다들 같이 오다니, 우연이에요?”
아실이야 이제 종로에서는 사랑방이다. 숲과 봉황당 사이에 있는 자리도 그렇고 아실에 있는 윤수와 정환 역시 그런 역할.
하지만, 이렇게 단체로 갑작스레 방문한 적은 없기에 정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원차 방문했죠! 정환 씨 또 긴장하고 있으면 좀 풀어나 주려구요!”
“연희 씨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요. 오히려 이런 게 더 긴장될 수도 있는데···. 괜찮죠?”
“그래도 이럴 때 한번 와서 생색은 내고 가야죠. 하하. 긴장하지 말고 잘 해보세요. 마음 편하게 드시고.”
연희와 재훈, 주용은 저마다 진심과 장난이 반반 섞인 말들을 꺼내며 정환의 긴장을 풀어준다.
“응원은 언제나 감사하죠. 긴장은···. 네. 적당히 해보려고요. 손님 맞을 때, 언제는 긴장 안 하나요, 우리가.”
“크흐. 여전하네요.”
“그렇죠? 아까부터 저렇게 말씀하셔요!”
“좋네요. 평소랑 같은 모습이니. 뭐, 걱정도 사라집니다.”
“전 걱정도 크게는 안 했어요.”
시끌벅적한 풍경이 아직 문도 열지 않은 바에서 펼쳐진다. 이제는 옆 가게 바텐더의 대회 출전도 자신들의 일처럼 나서는 게 당연한 이들이 종로의 바텐더들.
이들의 응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건,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우선 챙겨두시죠. 클래식 칵테일 중 기주를 몇 개 전통주로 바꿔본 것들입니다. 중간에 창작 칵테일이 과제로 나오면 써볼 만할 겁니다.”
“시판되는 진을 새로 증류해 봤어요. 약하게 인퓨징으로 첨향한 것들도 있구요. 특색있는 맛을 내려면 써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환 씨가 드셔보신 것들로만 준비했습니다.”
하나씩 손에 들고 온 선물을 건네는 이들. 주용은 전통주를 트위스트한 레시피와 몇 개의 전통주를.
재훈은 새롭게 인퓨징해 맛을 더한 진을 건네며 정환을 응원했다.
과제가 정해지지 않은 심사이기에 이런 것들이 쓰일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받은 건 하나의 마음일 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정환이었다.
“감사해요. 다들.”
“편하게 하시고 끝난 후에 후회 없이 한잔합시다.”
“그래요. 그거면 되는 거죠.”
“자자. 다들 가요. 계속 있으면 더 부담돼요.”
응원은 짧고 굵게 이어지고 막을 내린다. 연희의 통솔하에 아실을 나서는 바텐더들.
정환은 손에 전해진 든든한 응원을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혼자가···’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든든함 속에서 아실은 영업시간을 맞이했다.
2.
- 똑딱. 똑딱. 똑딱.
바에는 시계가 없다.
누가 시간이 흘러가는 걸 알면서 술을 마시고 싶어 하겠나.
거기에 바라는 곳은 육중한 문을 두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임을 나타내는 곳이다.
누구든 무거운 바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문밖의 세상과는 단절되는 곳이 바로, 바.
셰이커를 들 때도 또 술병을 잡을 때도. 언제나 손님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바텐더의 손이기에 손목시계 역시 갖출 수는 없다.
그런 바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알 수 있는 건, 바 테이블 아래에 놓인 바텐더의 작은 플라스틱 시계가 전부.
너무 작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을 게 분명함에도, 윤수는 유독 똑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재료를 준비하고 또 때로는 타이머가 필요해 둔 작은 플라스틱 시계는 어느덧 7시 20분을 넘어 30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저기요? 윤수 씨?”
“네, 넷?”
“윤수 씨?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저 아까부터 두 번이나 불렀어요!”
“아. 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어휴. 안 그러시던 분이. 저 마시던 잔으로 한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거.”
“아. 네. 사이드카였나요?”
“아뇨. 스팅어···.”
“어, 엇. 네, 넵!”
“윤수 씨.”
어질어질한 상황에 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윤수를 보며 정환이 얼른 끼어든다.
정환은 가볍게 윤수의 어깨를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 좀 돌려요. 여긴 제가 맡을게요.”
“아. 아뇨!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실수한 바텐더의 손을 믿는 손님은 없다. 그건 아무리 관계가 돈독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
가벼운 실수를 하나 했다면, 잠시는 물러날 줄도 바텐더는 알아야 한다.
“잠시면 돼요. 잠시. 백사이드에 가서 재료 좀 가져올래요?”
“아···. 네. 그럼, 정말, 잠시만!”
윤수가 백사이드로 들어서자, 정환은 손님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전한다.
손님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너그러움을 보였다.
“윤수 씨가 오늘은 긴장이 가득한 모습이네요. 이제는 편해진 줄 알았는데.”
“차차 말씀드려야 했는데, 사실 오늘 작은 이벤트가 있어서요.”
“이벤트요?”
“제가 바텐더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2차가 인 바 저징이라고 여기 참가자가 운영하는 바에서 심사하는 거라···. 네. 윤수 씨가 조금 긴장한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대신, 이 잔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래요? 아···! 그래서! 어쩐지 오늘은 없던 예약석 표시도 있더니! 그래서였구나!”
“네. 맞습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늦었네요. 양해해주시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진행하겠습니다.”
“저야 상관없죠. 마침 손님도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구경은 해도 되는 거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슬금슬금 보시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티 나지 않게 잘 훔쳐볼게요! 힘내세요! 사장님은 잘 해내실 거예요!”
단골은 그저 많이 오기에 단골인 건 아니다. 서로에게 오가는 배려와 양해가 있기에 돈독함이 쌓여야 하는 것이 단골.
정환의 앞에 앉은 손님은 이해와 배려를 그대로 보여주는 아실의 단골이었다.
바 안에서, 그것도 영업시간에 시작되는 평가가 인 바 저징이다.
당연히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손님들에게 양해도 구해야 하는 게 사실.
다른 자리는 이미 모두 양해를 구해두었지만, 윤수는 또 잠시 깜빡한 모양이다.
앞서 받았던 주문인 스팅어를 마무리하자 백사이드에서 윤수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은 어느덧 7시 반.
이제는 똑딱거리는 소리마저 멈추려 할 때.
- 딸랑.
하는 긴장감을 한층 올리는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아실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하나와 젊어 보이는 트렌디한 차림의 여성 한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깔끔한 차림의 30대 남성이 한 명 더 아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정환은 이들이 평범한 손님이 아님을 얼른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실입니다.”
“차정환 바텐더님? 맞으시죠?”
“네. 제가 아실의 오너이자 바텐더, 그리고 대회 참가자 차정환입니다.”
“음.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는 모양이네요. 아. 시간을 너무 딱 맞춰서 왔나요?”
“이름이랑 약력 정도는 제공하니까요. 교수님도 참.”
“반갑습니다. 백성민입니다.”
별다른 고지 없이 바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평범한 모습을 내보인다.
그들이 평범하지 않은 이들임에도 말이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환은 서둘러 바 밖으로 나가 이들을 맞이한다.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심사는 시작 전이란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접객도 심사 항목이지만, 자리에 앉은 후 기본적인 수칙을 설명해 드린 후에야 진짜 시작입니다. 아직은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성민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는 바텐더답게 참가자의 심정을 잘 이해해주는 심사 위원으로 보였다.
인 바 저징이라는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막상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들을 본 후면 바로 굳을 수도 있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 편하게 안내해 드릴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물론, 정환은 아니었지만.
정환은 너스레와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유려하게 심사 위원의 말을 받아친다.
긴장하고 있지 않음도 알리고, 적당히 위트 있어 듣는 이의 기분도 나쁘지 않은 어투였다.
“사장님이 재밌으시네요. 가게가 참 이뻐요.”
“흠. 캐주얼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하군요. 좋아요.”
‘예약석’이란 아실에서 보기 힘든 푯말이 치워지고는 세 사람이 자리를 차지한다.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이지만, 아실의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잡지사의 편집장이라는 여성과 디렉터 직위에 있는 교수는 자리에 앉으며 간단한 감상평을 남겨본다.
그리고 조용히 바 안을 살피는 백성민 바텐더.
심사는 고지 후 시작이란 말을 했지만, 이미 시작된 것만 같았다.
“수건과 체이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정환은 그런 시선을 뚫고는 늘 하는 것처럼 첫 서빙을 준비한다.
그런 정환을 보고는 잠시 손을 들어 만류하는 김광수 디렉터.
“아. 우선, 수건만 받을까요?”
“네?”
“체이서부터는 평가 항목이라서요. 우선, 몇 가지 사항만 고지부터 드리고 빠르게 시작하도록 하죠. 그게, 영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네. 그러시죠. 그럼, 여기 수건부터 드리겠습니다.”
제법 칼 같다. 대회고, 또 주최하는 곳이 외국계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단호한 태도가 정환은 싫지 않았다.
간단히 젖은 수건만을 받아 손과 주변을 정리하는 심사 위원들.
그들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고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그럼, 시작해볼까요?”
라는 김광수 디렉터의 말로 2차 심사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