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잔. 서막. >
4.
“종로에 가게를 열고 싶습니다!”
큼직한 몸체에서 나오는 수줍은 어투가 묵직하게 나려 앉는다.
아마 진심이라는 게 담백하게 담겨 더욱 무겁게 내려앉는 것만 같은 말.
제법 큰 말이 들렸음에도 이를 들은 정환은 말 속에 담긴 진심만큼이나 담백한 미소로 화답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눈빛이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이런 말을 꺼낼 거라고···.”
“윤수 씨 이야기를 들으며 예상 정도는 했습니다. 숲과 봉황당을 둘러 보셨다고 하시더군요.”
“그저 둘러본 것만 가지고 말씀입니까? 보통은 바텐더가 이렇게 방문해도 참고만 하러 온다고 여기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있으니까요.”
“시간요?”
제법 큰 말을 꺼냈는데도 큰 반응이 오지 않는다. 동경은 이에 고개를 갸웃하며 어떻게 예상했는지를 물어간다.
“그저 공부만 하러 오신 거라면 영업시간에 방문하는 거로도 충분하죠. 오픈 전부터 가게를 보며 손질하는 재료, 준비하는 시간, 그리고 그동안 들려오는 말들을 보는 분은 단순히 공부나 참고만을 위해 오신 분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허. 제가 들어왔을 때부터···. 아니지. 그 전부터 누군가 종로에 가게를 열고 싶어 하는 걸 알고 계셨다는 말이군요. 이것 참. 허허.”
“가볍게 예상만 했습니다. 그게 유동경 바텐더님이실 줄은 더더욱 몰랐구요.”
젊은 바텐더가 실력이 좋아 거둔 성공이라 생각했다. 여기에는 조금 따랐을 것만 같은 운도 있었을 거고.
헌데, 대화를 나눠보니 이건 비단 실력과 운만으로 성공한 건 또 아닌 것 같다.
외관에서 보이지 않는 진한 연륜. 역설적인 그런 무언가가 더 보태진 느낌이다.
“가게를 처음 여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놀랍군요. 맞습니다. 조금 실례일 수는 있지만, 차차 설명도 드리고, 이렇게 인사도 드리려 했었죠···. 허허.”
유동경은 눈과 귀로 접한 상황이 신기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얼른 목을 축인다.
정환을 처음 만난 이들에게서 나오는 비슷한 반응이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목을 가볍게 적시니 다음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당장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없어도 묻긴 해야 하는 말.
앞에 서서 자신을 상대하는 이를 보니, 이제는 어떤 말이 나와도 놀랄 것 같지는 않은 그였다.
“제게 답을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종로의 주인도 아니며, 어디서든 누구나. 자신의 가게를 열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다짜고짜 남이 개간한 땅에 호미부터 들이밀 수는 없죠. 양해 정도는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동경 바텐더가 말을 이어갈수록 정환의 미간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정환은 저자의 말이 조금은 불편한 모양이다.
‘일부러···’
마치 일부러 저런 말을 꺼내오는 것만 같다. 정환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전 반대하겠습니다.”
!
“···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종로에 들어오신다면 곧 텃세를 부리실 수도 있겠죠. 어떻게 본다면 선발대 정도의 위치는 잡으실 테니까요. 다른 사장님들과도 대화를 나눴습니다만, 저흰 카르텔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저 크루 정도. 그 정도면 된다는 겁니까? 자격 검증도 필요 없고?”
“자격은 같은 바텐더가 평가할 항목이 아닙니다.”
“그럼?”
“손님.”
!
“자격이 없는 바텐더, 또 그런 바라면. 필시 손님에 의해 걸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 평가할 수는 없죠.”
정환은 ‘대부’라 불리는 상대의 위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밝혀간다.
조금은 단호해 분위기가 얼어붙을 수도 있는 상황.
정환은 잠시간 찾아온 정적과 눈빛 교환 사이에, 이런 분위기를 녹일 다른 말을 꺼내 본다.
“원하시던 대답이 되었나요?”
!
이번에도 진한 노련함이 그의 몸을 감싼다. 동경은 다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하하하! 이거 제가 졌습니다. 사과부터 드려야겠군요. 죄송합니다.”
“재밌었습니다. 조금 티가 나긴 했지만요.”
터져 나오는 너스레와 웃음에 정환 역시 미소로 답한다. 오가던 냉랭한 어투가 사라진 둘은 호탕하게 웃을 뿐이다.
‘떠본 거였겠지.’
정환은 조금 전 던진 저 ‘대부’의 물음이 자신을 시험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상권이라는 게 좋게 본다면 서로의 공생이자 상생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선수를 쳐 하나의 방벽을 세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유동경이라는 사람이 보고 싶었던 건 이곳 종로 골목의 진정한 목적.
인터뷰나 떠도는 풍문에 담긴 목적이야 누구든 멋들어지게 꾸며낼 수 있는 것들이다.
유동경이라는 ‘대부’는 젊고 또 새로운 저 바텐더들이 만들어 낸 이 종로의 바 골목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건 손님뿐이라···. 과연. 아르센 출신 바텐더답게 아주 낭만적인 답이었습니다.”
“스승님께 배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부끄러울 순 있지만요.”
“아뇨. 낭만이 천박한 농담이 되는 건 다른 분야로 족합니다. 적어도 바텐더라는 이들은 그런 걸 쫓을 필요가 있지요. 아주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를 열고 싶다는 말도 빈말이 아닙니다. 어떤 답이 나오든, 이곳에 가게를 열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단지 떠보는 말씀은 아니었군요?”
“뭐, 주인 행세를 하신다면 장단을 맞추는 척을 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곳을 뺏어 버릴 생각도 있었습니다. 실력이 좋아 제법 어려울 것도 같았지만 말이죠. 하지만, 역시 바텐더의 실력은 손끝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이런 분이 계신 곳이라면 왜 참여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좋은 바텐더와 바가 늘어날수록, 골목은 풍성해지니까요.”
“풍성해지면 또 손님이 좋아하고? 맞습니까?”
- 씨익.
두 사람은 오가는 대화 중 또 눈을 맞추고는 진득한 미소를 교환한다.
제법 통하는 구석이 있는 둘인 모양이다.
“이미 가게를 두 곳이나 운영 중이신 거로 압니다. 이번에도 직접 운영하실 예정인가요?”
“흠.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두 곳. 그 정도가 제 손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아서요. 이곳에 문을 연다면 사람을 보낼 생각입니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이제는 가게를 직접 운영해 봤으면 해서요. 실력도 좋고, 또 젊은 친구입니다. 경력은 5년 정도고.”
과연 대부라 불리는 사람답다. 함께 일하고 실력도 좋고. 거기에 경력이 5년 정도면 적당히 한 가게의 매니저로 앉힌 후 부려먹기 딱 좋은 시기다.
그런 시기에 그를 어떻게든 자신의 손안에서 굴리는 게 아닌 다른 곳에 보내 자신의 가게를 꾸려줄 생각을 하다니.
과연 ‘대부’란 별칭은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죠. 힘닿는 곳까지 돕겠습니다.”
“든든합니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정착한 후를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영업이야 독립한 후라면 그 친구의 몫이니 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 교류는 다르니까요.”
“교류야 어려울 게 있나요. 부담만 없으시다면, 언제든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좋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그 친구를 한번 소개하죠. 저도 자주 들를 겁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자주 드나들지도 모른다. 유동경 바텐더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아직은 이를 밖으로 말하진 않았다.
일이야 또 모르는 거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숲과 봉황당도 함께 해서 자리를 한번 만들겠습니다.”
“그러시죠. 연락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볼까 합니다.”
“더 드시지 않고요?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하하. 배려할 생각에 그러는 건 아닙니다. 숲도 가보고 싶고 봉황당도 가보고 싶어서요. 차정환 바텐더님의 잔을 마시니 더 궁금해지지 뭡니까. 어떤 기준으로 그분들을 택했을까 하고. 오늘은 세 곳 모두를 들리며 천천히 즐겨볼 생각입니다. 그런 재미가 있는 곳이죠, 여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정환은 그를 더는 잡지 못한다. 바 골목의 재미와 본질을 그대로 꿰뚫는 그였다.
“자주 봅시다. 또 뵙겠습니다.”
“들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들러주세요.”
늦지 않은 시간 찾았던 손님은 간단히 목만을 축인 후 자리를 뜬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 여러 바가 모인 종로의 바 골목은 그렇게도 즐길 수 있는 곳.
정환은 그런 모습이 딱 자신이 그리던 모습처럼 보여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을 찾아 직접 채워 넣기 바쁘던 곳에.
이제는 스스로 찾아오는 이가 생긴 날.
찾아온 이도, 누군가 찾아왔다는 사실도.
전부 마음에 들어 정환의 얼굴이 밝았던 날이었다.
5.
- 끼리리릭.
불이 꺼진 아실에서 작은 네모 상자만이 흐릿한 빛을 뿜어낸다. 그리고 들려오는 건 무언가를 꾸욱! 누른 채 아래로 질질 끌어 내리는 소리.
이런 소리를 내는 정환의 손에는 작은 마우스가 하나 들려있다. 여전히 얼굴의 미모를 한껏 숨겨주는 못난 안경의 알에는 흐릿한 모니터의 빛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제발···!’
정환은 살짝 긴장감이 도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고개를 거북이처럼 앞으로 내뺀 상태다.
- 끼릭.
마우스의 휠이 한번을 더 아래로 끌어 내려지자 이내 정환의 얼굴에 주름이 자리한다.
무언가를 조심히 보고 있는 그의 눈은 감겼는지 떴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
하지만.
- 월드 클래스 코리아 바텐더쉽 1차 합격자 40인.
이란 제목 아래에서.
- 차정환(Bar Asile)
이란 이름을 찾자, 그의 얼굴에는 얼른 안도감이 돌아온다.
“휴우.”
- 턱.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뒤로 젖혀진 고개 위로 은은한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긴장감이 일시에 빠져나간 표정이다.
‘생각보다 괜찮네.’
딱히 순위가 정해진 발표 목록은 아니었다. 허나, 정렬 방식을 알 수 없는 목록 중 상단에 있던 정환의 이름.
어쩌면, 1차 필기에서 제법 높은 점수를 받은 건지도 모른다.
- 끼리리릭.
정환이 마우스를 조금 더 내리자 다른 주제의 제목이 나온다. 이제는 2차를 대비해야 할 때.
정환의 마우스와 시선이 닿은 곳에는.
- 2차 인 바 저징(In Bar Judging) 관련 안내.
라는 두꺼운 글씨체의 공지가 자리하고 있다.
- 3인의 심사 위원이 참가자가 종사하는 업장으로 직접 방문합니다.
- 심사 항목은 당일까지 비공개며 현장에서 심사 위원의 판단에 의해 정해집니다.
- 심사 일자는 사전에 공지하며 업장은 원활한 심사를 위해 예약석을 제공해야 합니다.
- 심사 일자는 1주일 전, 심사 시간은 당일 공지 예정입니다.
- 심사 위원과의 사전 접촉은 부정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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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와 권위가 있는 대회인 만큼 자세히 규정된 2차 시험의 규정 사항들.
정환은 그런 규정들을 하나씩 뜯어보다가 마지막 항목에서 멈칫한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 서울 지역 3인 심사 위원
이라는 2차 시험에서 그가 마주할 심사 위원의 이름이 적혀 있다.
- 1. 김광수 님 (월드 클래스 아카데미 상임 디렉터)
- 2. 이채현 님 (우먼 앤 드링크 편집장 및 칼럼니스트)
- 3. 백성민 님 (2011 월드 클래스 코리아 우승자)
대회를 주최하는 주최사의 주류 아카데미 교수부터 맛 칼럼니스트, 그리고 몇 년 전 대회 우승자까지.
쉽지 않아 보이는 이력의 심사 위원들이 이름을 빛내고 있다.
‘뭐, 그래도···’
이들은 손님일 뿐이다. 정환은 무겁게 내려오는 이들의 이력을 보며 애써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인 바 저징이란 말 그대로 바 안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에 있어서 손님들의 이력 따위야 몰라도 될 일.
‘하던 대로 하는 거야. 그거면. 그래, 그거면.’
바 안에서라면 누구보다 빛날 자신이 있다. 정환은 스스로를 다독인 후에야 모니터에서 뿜어지는 빛을 끌 수 있었다.
- 챠카착! 챠카착!
어둠이 찾아온 아실 안에서는 끊이지 않는 셰이킹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