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잔. 깨어나다.
4.
콥스 리바이버(Corpse Reviver).
직역하자면,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린다는 말의 단어가 바로 이 칵테일의 이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잔을 받은 이가 어떠한 기사(奇事)를 겪은 정환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정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는 아니다. 그저 다시 살게 한다는 대목이 걸릴 뿐.
정환은 답을 뱉은 후 감히 앞에서 잔을 내민 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제가 왜 이 잔을 준비했는지 아시겠습니까?”
명진은 그런 정환의 모습에도 거침이 없다. 유함의 대명사이면서도 때로는 이렇게 단호한 것이 이명진이라는 바텐더.
그런 모습이, 오늘은 야박하게만 느껴지는 정환이다.
“…….”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일까. 도둑이 제 발을 저리듯 정환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안다면 어떻게? 온갖 생각이 정환을 스치고 갔다.
상식적으로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 상식의 바깥을 겉돈 이에게는 이렇게 들린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정답을 말하지 못하는군요.”
명진은 한숨과 비슷한 자세로 고개를 절레 저어버린다.
“리바이버 칵테일이라는 용어는 아시겠지요?”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아 혼란스러운 찰나.
정환의 머리에는 이어지는 명진의 질문이 스친다. 이건,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장(解臟)을 위한 칵테일입니다.”
콥스 리바이버는 대표적인 해장 칵테일의 일종이다. 찌르는 듯한 맛에 강한 향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맛이 그 옛날 19세기에는 마치 술을 깨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텐더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다. 리바이버 칵테일은 따로 분류를 빼놓았을 정도로 유명한 품목.
거기에 리바이버 칵테일의 대명사가 바로 콥스 리바이버니, 그 단어야 정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뜻은 모르시겠다는 거군요.”
“네?”
당혹스러움과 혼란함에 정환의 머리가 멈춰있을 때.
“정신 차리란 뜻입니다!”
탕!
명진의 우레와 같은 호통이 정환에게 쏟아진다. 말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은 그런 호통이었다.
“마, 마스터?”
“언제부터 오만이 배려와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까? 실력이 좋아서! 다른 바텐더의 것을 빼앗을까 봐! 다른 바텐더의 기회를 위해! 감히 당신이 그들에게 양보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배려라 생각하는 겁니까!”
이걸 다행이라 불러야 할까. 명진의 말은 교묘히 정환의 상황을 비껴가며 또 정환의 고민과는 맞닿아 있다.
본질적으로는 정확히 폐부를 노리면서 그 겉은 다행히 빗나간 호통이었다.
“제게 왜 아르센이 아시아 베스트에 드는 걸 거절했냐고 물었습니까? 후배들을 위해서? 다른 바텐더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냐고요? 단언하죠. 아닙니다.”
“그럼 왜…?”
“그때는 이미 내 몸이 성치 않았으니까.”
!
“작년과 비교해서는 기량이 한없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게 저 자신이었죠. 베스트라는 말을 듣고 올 손님에게 그 정도 퀄리티의 서비스를 보여줄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포기했던 겁니다. 다른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아니, 위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게 맞겠군요. 이딴 늙은이가 운영하는 가게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은 그런 자리에 오를 자격도 없을 테니까.”
단호하고 또 냉정하게. 명진은 얼굴에 늘 자리하던 인자함을 지우고는 말을 또박또박 뱉어갔다.
발음은 또 얼마나 좋은지 정확히 귓가에 박히는 명진의 말들이다.
“그런….”
호통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명진의 말을 들은 정환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제야 조금은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정환의 눈이다.
명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환을 마저 깨워보려 한다.
“잔을 드시죠. 우선. 정신부터 차리세요. 그리고. 마저 이야기를 나눕시다.”
호통을 칠 때와는 또 달리 어느새 차분해진 명진의 음성. 명진은 잠시 스승의 모습을 지우고 바텐더로 돌아왔다.
“네…. 마스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거라. 정환은 그런 명진의 의도를 알고는 서둘러 손을 잔으로 가져갔다.
콥스 리바이버 넘버 투.
제법 긴 이름의 칵테일이 정환의 손에 닿는다.
잔을 들어 올리자 한 방울밖에 들어가지 않았을 터인 압생트의 향이 강하게 코를 찌른다.
우선 향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 주는 칵테일이 이 콥스 리바이버였다.
호르르륵.
잔이 입술을 타고 혀에 닿자 시큼하면서 달콤한 맛이 입안을 채운다.
진으로 눌러진 시큼함이 과하지 않아 속을 편하게 해줄 정도였다.
후우우.
그리고 잔향을 내뱉자 나오는 건 바텐더의 의도. 깊게 숨겨둔 레몬이 본색을 나타내며 이를 마신 사람의 머리를 찌릿! 하게 만들어 버린다.
상큼함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 이름 그 자체의 맛으로 보였다.
“이제, 정신이 조금 드십니까?”
“다시 사는…기분이네요.”
정환은 조금 많은 의미를 담아 잔의 맛을 표현해 본다.
“얼마 전 한 좋은 바텐더에게 좋은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저에게 맞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정환 씨에게 더 어울리는 말 같군요.”
“얼마 전이요?”
얼마 전이라면 명진이 다녀간 곳이 아실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꽃이 떨어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는 말입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꼭 일어나고 만다.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한 바람을 탓할 순 없는 게 아니겠냐고.”
“…….”
“꽃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떨어지고 꽃이 떨어져야 거름이 생겨 다시금 꽃이 자라는 법입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정환은 다시금 자신을 조여오는 명진의 말에 입을 닫아 버린다.
늘 궁금하긴 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기사(奇事)가 일어났는지.
명진의 저 말을 대입한다면, 자신의 회귀 역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예정에 없던 은퇴를 하는 사람도 있고, 죽을 경험에서 살아나는 사람도 있죠. 그리고. 당신처럼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가진 천재가 나타나기도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걸 탓하며 숨죽이고 살아갈 겁니까?”
정확히 말해보자면 그런 의미로 남긴 말은 아니었다. 허나, 겹치는 부분과 가져올 부분도 충분히 있는 말.
일어날 일이었다는 말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유독 와닿는 정환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남에게 간절한 걸 뺏어 와야 하는가. 그런 고민은…분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오만이라는 겁니다.”
!
“만약 정환 씨 손에 누군가의 것이 뺏기고 또 누군가의 꿈이 막힌다면 그건 거기까지인 겁니다. 아르센보다 못해 아시아 베스트에 떨어진 곳이 있었어도 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정녕 원하는 게 있었다면, 그걸 갖출 능력을 갖췄어야 한다고.”
냉정하다. 꿈이란 없고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내용이 가득한 말.
어쩌면, 실력으로 정상 가까이에 닿아보았기에, 또 냉정함에 마주쳐 보았기에. 그런 세월을 보냈기에.
명진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정환 씨가 만약 그들을 생각해 나서길 망설인다면 그건 모욕입니다. 오만이고. 정녕 다른 그들을 생각한다면 벽이 되십시오. 넘는다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있는 벽!”
!
정환은 명진의 말을 듣고는 머리에 큰 충격이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손님이 바에 와서 바텐더에게 속을 터놓는다. 간단해 보이는 이런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바텐더가 전문적으로 보였기 때문.
잘 갖춰진 옷을 입고 자신의 분야에서 능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만으로 손님들은 바텐더를 한 명의 전문가로 보며 속을 터놓는다는 것이다.
손놀림이 어설픈 바텐더의 앞에서 속을 터놓는 손님은 없다. 손님이라면 바텐더의 모습을 보고 이를 평가할 테니까.
그렇기에 보이는 자신의 눈앞에 선 바텐더.
정환은 명진의 모습과 그가 지난날 걸어왔던 모습이 그림처럼 스치기 시작했다.
지나간 명진의 모든 지난날이, 결국 그의 말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몸이 상해도 계속 바텐더를 했던 이유가….’
이제야 알 것 같다. 다른 오너라면 일선에서 물러날 나이에도 명진이 계속 바를 지켰던 이유. 또, 몸이 상해가도 계속해서 바를 지켰던 이유를.
명진은.
언제나 후대에게 넘겨질 준비가 된 하나의 벽이었던 것이다.
입을 열고 총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환과 명진이 눈을 맞춘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명진 역시 정환이 알아챈 걸 알아챈 모양이다.
“무언갈 떠올리는 모양이군요. 그건 그저 늙은 바텐더의 주책이었을 뿐입니다.”
“낭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 주시는 건가요? 가야 할 때 갔어야 할 사람이 아니고?”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할 순 없죠. 그렇게 하셨다면. 그렇게 해야 했던 일…인 거겠죠.”
“이제야 제가 알던 정환 씨의 모습이군요.”
정답을 말하지 못하던 이가 정답을 술술 뱉어 온다. 명진은 이제야 얼굴에 힘이 완전히 빠지며 인자함을 모두 되찾는다.
정환은 그런 명진의 앞에서 남은 잔을 들고는 단박에 이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꿀꺽.
탁!
원샷.
시원함을 상징하는 그 원샷을 때리고는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정환.
다른 바에서는 민폐일지 몰라도, 여긴 자신의 가게다.
콥스 리바이버의 짜릿함이 일시에 몰려오며 정환의 머리가 저릿거린다.
그리고 점점 시원해져 가는 그의 머릿속.
이제는 깨어날 준비가 모두 끝난 그였다.
“제 말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금, 명쾌해졌으니까요.”
“선택까지 시간이 필요하진 않나요?”
“도전…해보려 합니다. 결과야 모르지만요. 만약 떨어진다면 그걸로 그만. 우승해도, 미안함은 없어야겠죠.”
명진은 오랜만에 바에 선 이 시간이 곧 끝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손님은 이미 털어 놓은 고민이 모두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자세를 풀려는 명진의 말을 정환이 막아선다.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는 정환.
“마스터의 마음도 후련하게 만들겠습니다. 꼭.”
정환은 오가던 이야기 중 들었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명진이 여전히 미련이 남은 이유.
그래서 바텐더를 찾아야 했던 이유.
아직은 자신을 넘어설 정도의 바텐더를 만나지 못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한국 대회 우승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씨익.
“세계 대회. 세계 대회 우승 트로피 정도는 가져오세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또 단호한 어투다. 하지만 인자함과 따뜻함이 가득 담긴 단호함.
정환은 그런 명진의 단호함이 싫지 않아 얼른 웃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는 거라면.’
월드 클래스 코리아에서 우승하면 자동적으로 세계 대회 출전 자격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 바텐더는 여기서 멈추지만, 정환은 그 이상을 노려보려 한다.
월드 클래스 코리아 우승자라는 타이틀과 세계 대회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코리아 우승 정도면 그레인 호텔의 제안에 적절히 장단을 맞추는 정도라면 세계 대회 우승자라면 그 제안에 상응하는 것들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수준.
남이 건넨 손에 달린 작은 트로피가 아닌.
조금 더 큰 트로피를 본격적으로 노려보기로 하는 정환이다.
“이제, 자리를 바꿔야겠군요. 몸이 조금 곤합니다.”
“앗. 넵넵. 여기로 오시죠, 마스터.”
“괜찮습니다. 부축까지야.”
명진은 자신이 썼던 도구를 정리하며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소매를 내리려 손을 들어 올리는 명진의 모습.
덜덜.
떨려오는 그의 손이.
오늘의 바텐딩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턱.
정환은 얼른 자리에 일어서서 명진의 소매를 잡는다. 그리고 말없이 천천히 이를 대신 내려주는 정환.
명진 역시 묵묵히 그런 정환의 도움을 받아내고 있다.
바 안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바텐더다. 바텐더가 손을 떠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정환이었다.
“휴.”
내심을 잘 표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탄식이 명진의 몸에서 빠진다.
정환은 그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격하게 움직여 그런 거니.”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미안하면 한잔 사시죠. 곧, 세계 대회에서 트로피를 타올 바텐더의 잔이 마시고 싶군요.”
“오늘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쉬면서 천천히. 맛을 음미할 테니. 이대로 길을 나서는 것도 무리지요.”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말이 많고 또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 명진.
정환은 조심히 명진을 자리에 앉히고는 천천히 바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에 있는 정환 씨는 오랜만이군요. 역시, 이 자리가 더 편하네요.”
“주문은 김렛이시죠? 고든스를 써서. 유럽판으로.”
“좋습니다. 암요.”
주문을 받고는 김렛을 만들어가는 정환의 모습.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은은한 셰이킹 소리가 아실 안을 채운다. 그리고 그런 음악을 배경 삼아 천천히 목을 축이는 손님.
젊은 바텐더의 앞에 나이가 제법 든 손님이 앉아 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제야.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 같은 바텐더와 손님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