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20화 (120/175)

< 120잔. 이어지다. >

1.

“사장님은 자리에 안 계신 모양이군요.”

윤수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중년인은 천천히 아실 안을 둘러봤다.

아련한 눈빛이 수상하지만, 그저 구경하는 거라며 조용히 시간을 줬던 윤수.

손님의 눈빛은 백바에서 가장 아련함을 한 번 더 뿜고는 천천히 바텐더에게 닿았다.

그리고 나온 말은 정환을 찾는 말. 윤수는 기억에 없는 손님을 보며 오랜만에 찾은 이라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아. 아실에 와보신 적이 있으셨군요.”

“처음 문을 열었을 때요. 오늘 계신 분은, 처음 뵙는군요.”

“장!윤!수!라고 합니다. 몇 달 전부터 아실에서 일하고 있는 신입이구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죠. 만나서 반가워요.”

“사장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혹, 꼭 보셔야 한다면 바로 불러드릴 순 있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다른 가게에 들리셔서요!”

“바로 앞에 가게라면···?”

“종로에는 오랜만이신 모양이네요. ‘숲’이라는 바가 새로 생겼거든요. 좋은 곳이죠. 아실과는 형제 가게 같은 곳이구요!”

바로 앞에 위치한 같은 업종의 가게. 이를 두고 형제 가게라 부를 수 있는 업계가 몇이나 될까.

손님은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아 오늘도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곧 다른 바도 하나 더 생길 예정이에요! 전통주를 컨셉으로 하는 바죠. 거기도 좋은 곳이 될 겁니다.”

“말씀하신 곳들은 꼭 가 봐야겠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은 앞에 계신 분께 한잔을 부탁하죠.”

그런 인자한 손님의 모습이 싫지 않아 함께 웃어 보이는 윤수의 모습.

바텐더도 사람이기에 손님에 따라 받는 인상은 매번 달라진다.

이렇게 인자하게 웃어주는 손님은, 언제나 바텐더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네요. 한잔 정도가 전부이실 텐데, 괜찮으실까요?”

“좋지요. 처음부터 딱 한 잔만 할 생각으로 오긴 했습니다. 그 이상은 힘들기도 하구요.”

“늦은 시간인데, 전작은?”

“아뇨. 해외에 있다가 와서인지 시차가 잘 적응이 안 되는군요. 잠을 설치다 산책을 나와 걷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허허. 첫 잔입니다.”

“아. 한국에 오랜만에 오신 거군요. 멋지셔요!”

“아닙니다. 그저, 은퇴 후 잠시 여행이라.”

던져지는 많은 힌트에도 바텐더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한다. 어쩌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 앞에 앉은 이가 누구일지 예상도 못 하는 걸지도 모른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장님만큼의 실력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뭐든 주문만 해주세요!”

바텐더가 자신감을 잃으면 잔 속에서 맛은 사라지고 만다. 비교 대상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할 자신만은 있는 윤수.

윤수는 팔뚝을 잡으며 자신 있게 주문을 물어갔다. 젊은 바텐더의 혈기가 온전히 손님에게 닿는 듯했다.

“김렛으로 부탁하죠. 진은 고든스를 써주실 수 있을까요?”

“고든스 김렛. 확인했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이네요. 저희 사장님도 항상 김렛은 고든스로 만드시죠.”

윤수는 자연스레 뒤로 돌아 백바로 손을 옮겼다. 손이 닿기 쉬운 곳에 위치한 주종이 바로 진.

핸드릭스, 탱커레이, 비피터, 넘버 쓰리 등 수많은 진을 쓸던 윤수의 손이 한 곳에서 멈춘다.

고든스라 적힌 평범한 병이 있는 곳에서.

“혹시, 괜찮으시다면 뒤쪽에 있는 고든스로 가능할까요?”

그러자, 손님은 조금 구체적인 주문을 꺼내오기 시작했다. 앞에 내어놓은 병이 아닌 뒤쪽에 있는 고든스를 고르는 손님.

무언가를 알고 주문하는 걸까. 윤수는 슬쩍 돌아 손님과 눈을 맞췄다.

“이건, 유럽과 면세점에서 판매하는 고든스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조금 더 도수가 셉니다. 47.5도에요!”

“전 그게 입에 맞더군요.”

“그럼, 이걸 써야죠! 알겠습니다!”

나이에 비해 시력이 좋다. 뒷줄에 놓인 술을 한 번에 알아보다니.

감이 없는 바텐더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47.5%의 유럽판 고든스를 꺼내 준비를 마쳤다.

앉은 손님의 자리에서는 뒷줄에 놓인 술병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 탓! 탓! 탁!

조금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셰이커가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플레어 바텐딩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눈을 즐겁게 하기에는 충분한 움직임.

몇 번의 절도 있는 동작 끝에 셰이커는 캡을 닫고는 경쾌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준비부터 셰이킹 과정까지. 조금은 플레어의 향수가 묻은 동작에 손님은 눈매를 날카롭게 했다.

클래식 바에 맞게 바꾼다고는 바꾼 것 같은데, 뿌리는 지울 수 없는 모양이다.

- 살가각! 살가각! 살가각!

나쁘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고 손으로 테이블을 치며 소리를 감상하는 손님의 모습.

윤수는 바를 즐겨 찾는 손님이라. 그렇게 여기며 소리에 더욱 힘을 준다.

바에서 즐기는 건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맡는 것. 마지막으로 맛보는 것이다.

- 촤아아아아악! 차악!

연녹빛 액체가 아래로 쏟아지며 잔에 담긴다. 싱그러운 향을 풍기며 잔을 채워가는 술.

라임의 찌르는 향이 향기로워 감상하던 손님은 슬며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잘 만들어진 김렛이 한잔 놓여 있다.

“주문하신 김렛.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향이 아주 좋군요.”

“가게가 조금 한산해서 더 그럴 겁니다. 다른 향이 섞이질 않아서요. 좋은 시간대에 오셨네요.”

“그런가요? 허허. 늦어서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훨씬 편하군요.”

“저희 사장님 말씀이지만, 바에 오기 늦은 시간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문이 닫히는 시간만 있을 뿐이죠.”

“좋은 말이네요. 그나저나, 손이 아주 빠르시더군요. 묘기처럼도 보이고.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동작 같던데.”

“이전에는 플레어 바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해서요! 막 불도 뿜고 하는···! 저야 동작을 전부 바꾸고 싶었지만···, 사장님이 그것보단 조금만 고치는 게 좋을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지금은 자세도 잡히고 예전처럼 칵테일도 편하게 만듭니다! 혹시 보기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그럴 리가요. 아주 경쾌하고 좋았습니다. 소리도.”

보이는 것만큼 들리는 말도 기분이 좋다. 누군가에 대한 칭찬에 이렇게 미소 짓는 건 아주 가까운 이만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님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그런 모습을 얼른 감춰본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노즈에서 풍겨오는 향이 나쁘지 않다. 잘 살린 재료 본연의 향에 적당히 섞인 술의 향.

누구보다야 아직은 못해도, 실력이 나쁜 바텐더의 작품은 분명히 아니었다.

- 호르르륵.

그런 작품이 입술을 타고는 손님의 입안을 채운다. 상큼하게 퍼지다가 이내 찌르듯 치고 오는 술의 타격감.

김렛(*송곳). 그래, 김렛이라는 이름 그 자체의 맛이었다.

‘기본이 잘 잡힌 바텐더···.’

아직 본인 특유의 맛을 내는 기술은 부족해도 기본은 확실히 해줄 수 있는 바텐더.

손님은 앞에 서서 술을 마시는 손님을 조심히 바라보는 그를 보며 그렇게 평을 내렸다.

기본이 잘 잡힌 바텐더는.

아마, 이 씬에서 가장 귀한 바텐더일지도 모른다.

피니쉬까지 모두 감상한 손님이 천천히 잔을 내려둔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싫지 않아 그대로 즐겨보는 손님의 모습.

“입에는 맞으신가요?”

“좋네요. 아주 좋습니다. 기대했던 그 맛, 그대로여서 더 좋군요.”

“다행이네요. 편하게 즐겨주세요.”

늦은 새벽 한옥 바에는 잔잔한 조명까지 내려 더욱 고요한 분위기가 아실 안을 채워간다.

맛을 한번 표하고는 어색하지는 않은 정적이 둘 사이에 자리 잡은 순간.

바텐더는 그런 정적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퇴 여행은 어떠셨나요?”

손님이 앞서 했던 말만으로 대화의 주제를 찾는 윤수였다.

“적당했습니다. 딱히 가고 싶은 마음에 떠난 여행은 아녔기에···.”

“여행이요?”

“한국에 있으니, 받아들이기가 힘들더군요. 은퇴했다는 사실이.”

“아.”

이런. 주제를 잘못 찾은 것만 같다. 나오는 이야기가 무거워 윤수는 순간 아차하는 감정을 느꼈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래도, 여행을 하다 보니 여러모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도 같습니다. 확실히, 여행이 그런 맛은 있더군요.”“정말 다행이네요! 좋은 선택이셨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나는 법이죠.”

“그러게 말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르기에 손님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 그리고 바텐더 역시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곳. 역설적이게도 바라는 공간은, 그런 곳이다.

“원치 않으셨던 은퇴였군요. 아쉬우셨을 것 같습니다.”

“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요.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고. 그래서 미루다가 늦어 버렸을 뿐. 그래도 다행인 건, 남길 건 전부 남겼다는 것. 그 정도겠지요.”

- 조르르르르륵.

덤덤히 자신의 지난날을 뱉는 손님의 물잔에 물이 채워진다. 손님이 남긴 무언가가 이어져 물줄기가 제법 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았다면 뒷모습이 더 아름다웠을 텐데 말입니다.”

손님은 속에 있는 말을 끌어 한마디를 더 뱉어본다. 얼굴을 모르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르기에 나올 수 있는 그의 속마음.

이럴 때는 친하게 지내는 실력 좋은 제자들보다 처음 보는 숫기 묻은 바텐더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 뚝.

“이형기 시인의 ‘낙화’네요.”

물줄기가 끊기자 바텐더는 손님이 던진 말을 알아본다. 손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이를 긍정했다.

중학교 때였나. 어디선가 들어본 유명한 시를 윤수는 모르지 않았다.

“‘시’라는 것도 참 재밌지 않습니까? 때로는 이렇게 상황에 맞아떨어지니까요.”

“마치, 바텐더가 적절한 상황에 내미는 한잔처럼요?”

“그렇다면 더욱 좋죠. 허허. 제게 맞는 잔이라도 떠오른 겁니까?”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거 같습니다. 다만···, 아직 미숙해서요. 저희 사장님이셨다면 좋은 잔을 추천해주셨겠지만요! 사장님이 실력이 좋으시거든요!”

“그런가요? 아쉽군요.”

“대신.”

아마 사장이라 불리는 이 앞에서는 이런 말을 못 할지도 모른다. 손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바텐더가 방긋 웃으며 손님을 바라본다.

그의 웃음이 진한 위로처럼 보여 손님은 애써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추천할 수 있는 ‘시’는 있을 거 같습니다!”

“‘시’···?”

“네. 제가 좋아하는 ‘낙화’는 조금 달라서요!”

따뜻하게 마주하는 두 눈빛. 아무런 편견 없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 없이.

그래서 나올 수 있는 말에 손님은 귀를 기울였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바텐더는 조금 어른스러운 어투로 고치더니, 진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조지훈 시인의 ‘낙화’입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도 있지 않을까요? 꽃은 져야, 꽃이니까요. 말씀처럼, 남긴 것이 있다면, 다시 다른 꽃이 피어날 겁니다.”

- 씨익.

과하지 않게. 또 무례하지 않게. 최대한 손님의 상황을 생각해 말을 뱉어가는 바텐더의 모습.

손님은 그런 바텐더의 말을 듣고는 진한, 그리고 따뜻한. 특유의 그 인자한 미소를 보여준다.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들은 말을 종합해 손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을 골라 전했을 뿐.

마치 술을 섞듯이 손님의 말을 섞어 최고의 위로를 바텐더가 만들어 낸 것이다.

오로지, 손님을 위해.

손님은 찬찬히 들은 말을 곱씹으며 입꼬리를 올린다. 술을 잘 섞는 바텐더는 많고 많다. 자신도 많이 만나왔고.

허나, 자신이 평가하기로 진정 실력 좋은 바텐더는. 어쩌면 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 잘 섞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손님으로서 지금의 감성을 토하자면 지금, 이 공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처럼 느껴지는 그였다.

과거를 빼고, 지금만 놓고 봐도 말이다.

“좋은 바텐더군요. 윤수 씨는.”

인자한 표정을 안은 손님의 입에서는 극찬이 나온다. 말을 뱉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더욱 좋을 그런 말이.

허나, 손님의 신분을 몰라도. 바텐더에게는 더없이 좋은 말일 뿐이다.

잔잔하지만 또 기분 좋은 정적이 둘 사이에서 들려왔다. 아쉽게도 바에 자리한 이런 정적은 언제나.

- 딸랑.

하는 새로운 소리로 인해 깨어지기 마련이다.

“어, 사장님?”

“아. 윤수 씨. 불이 켜져 있어서요. 아직 퇴근 안 했···? 아. 손님이 계셨네요.”

‘숲’에서 볼일을 마친 정환이 여전히 불이 켜진 아실로 돌아온 것이다.

바텐더의 말이 향하는 방향으로 손님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익숙한 체형에 익숙한 재킷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정환.

그런 정환의 눈에는 이내.

익숙한 인자함이 들어온다.

!!!!!!!

정환은 완전히 돌아선 손님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만하면 잘 놀라지 않는 정환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 그리움이 함께 걸린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짧고 굵은 한마디.

“마, 마스터!!!!!”

!!!!

정환의 입에서 나오는 저 단어가 나오게 하는 이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임을 모르지 않는 윤수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 쿠웅!

작은 엉덩방아 소리만이 아실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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