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잔. 홀로. >
4.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요.”
김태현 교수와 윤현민 부장이 다녀가고 얼마가 지난 후.
아실에는 종로를 대표하는 바텐더들이 모여 차담을 나누고 있다. 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장식한 건 한잔의 커피.
그리고 손님의 자리에 앉은 이들은 ‘숲’의 오너인 재훈과 전통주 믹솔로지스트인 주용이었다.
“흠. 확실히 월드 클래스 코리아 정도에서 우승한다면 아실이 받는 주목도는 달라질 겁니다. 그때는 일반 손님들이나 미디어가 아닌 바씬의 관계자들이 주목하겠죠. 물론, 아실 뿐 아니라 여기 종로도 주목할 테고.”
함께 종로의 바 골목을 만들어 가는 이들은 제법 객관적인 관점에서 지난날 정환이 받은 선물을 평가해 갔다.
“저, 임 사장님, 신 사장님. 우리 사장님이 대회만 나가시면 우승은 확실한 거죠?”
“그건 모르는 일이죠. 윤수 씨. 대회는 또 다른 거니까요.”
“장담하진 못합니다. 당일 컨디션도 있고, 또 과제도 있으니까요. 거기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을 수도 있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면···?”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아시잖아요. 어디든, 밀어주는 곳이야 있기 마련이니까.”
“에이. 설마요. 월드 클래스나 되는 대회에서···”
“뒤에 ‘코리아’가 붙는다는 걸 잊으면 안 되죠.”
“···아, 아니에요! 사장님은 우승하실 수 있을 거예요!”
윤수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처럼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실력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긴 합니다.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최악을 생각하자는 말이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신 사장님도 참. 겁먹었잖아요!”
조금 달래어주는 말이 주용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윤수가 안심한다.
이제는 점포를 계약하고 내부 공사에 들어간 주용을 부르는 그의 말이 ‘사장’으로 바뀌어 있다.
“공사는 잘 되어 가는 중이죠? 주용 씨.”
정환은 오가는 이야기를 듣더니 슬쩍 화제를 돌려본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는 아직 답을 내놓고 싶지 않아 보이는 그였다.
“순탄합니다. 좋은 매물을 선점해 두셨더군요. 거기가 아니었다면 별로였을 겁니다.”
“아실에서 한 골목 뒤에 있는 거기 맞죠? 거긴 완전 한옥 느낌이던데요!”
“주용 씨 가게라면 그런 느낌이 어울릴 거 같아서요. 미리 가계약을 해뒀었죠.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두 달 정도면 마무리가 될 겁니다. 그때는 시작해야죠.”
“메뉴 정비나 다른 건 문제 없으시죠?”
“재훈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거, 여기 와서 두 분께 도움만 받네요.”
“‘숲’에서 시범적으로 내놓는 메뉴들이 다들 인기가 좋습니다. 바로 시그니처로 삼아도 될 정도로요. 이번에 새롭게 인퓨징한 술들도 기대가 크고요. 조만간 맛보러 오시죠.”
“꼭 그래야겠네요. 이번에는 어떤 걸?”
“캄파리에 카카오를 인퓨징한 것도 있고 버번에 베이컨을 인퓨징한 것도 있죠. 꼭 전통주가 아니어도 서로 의견 정도는 교환하고 있습니다.”
“버번에 베이컨이라. 쓰읍. 입에 벌써 침이 고이는데요.”
“언제든 놀러 와요. 다음 주 월요일에 단체로 한번 시음회나 열까요? 다른 분들도 불러서. 정우 형이나 기준 형도 불러서요.”
“전 좋습니다. 아실도 쉬는 날 아닌가요?”
“어, 말씀은 감사하긴 한데···.”
‘숲’에서 연구 중인 술로 시음회를 열자는 말에 정환은 슬쩍 발을 빼는 반응을 보인다.
월요일은 공식적인 아실의 휴일.
이미, 일정이 있어 보이는 그였다.
“그날은 이미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이요? 윤수 씨는?”
“음. 정우 형도 기준 형도, 그리고 사장님과 저도. 다-들. 약속이 있습니다. 그날!”
일정을 묻는 말에 윤수의 목소리가 커진다. 어깨를 쫙! 벌리고는 배까지 내밀며 당당하게 말하는 윤수의 모습.
작은 동물이 몸짓을 불려가며 적을 위협하는 듯 귀여운 모습이다.
“마스터가 돌아오시기로 해서요. 월요일에 다 함께 뵙기로 했어요. 형들도, 또 윤수 씨도요.”
“정말요?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언제 오시는 거예요?”
“아마 오늘 저녁 비행기 도착인 거로 알고 있어요.”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마스터가 신신당부해서요. 정우 형만 조용히 모시러 다녀오기로 했어요.”
“이야. 그래도 아쉬우실 텐데.”
“오늘은 그레인 호텔에서 하루 쉬시고 내일 집에 가신다고 하시네요. 정우 형이 방을 잡은 거 같더라구요. 전 내일쯤 전화 한 통 드리려구요. 월요일에 뵙기로 했으니까.”
“그렇죠. 이제 시간이야 많으니까요. 저도 한번 인사는 드려야 할 텐데!”
“천천히요. 아마, 아실에도 한 번쯤은 오실 거예요. 월요일에도 여기서 뵐 수도 있구요.”
“미리 말씀해 주세요. 잠시 인사라도 드리게요. 오랜만이네요.”
“마스터라면, 아르센의 그 이명진 마스터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흐음. 대단한 분이셨다던데.”
“대단하다 뿐인가요! 전설이죠! 전설!”
“유, 윤수 씨···. 그 정도는···.”
명진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재훈은 이미 아는 사람이기에 조금의 반가움을, 주용은 모르는 이에 대한 호기심을 표했다.
윤수만이 여전히 들뜬 지금이다.
“그럼, 편하게 아무 때나 들러주세요. 여유 있을 때. 아무 때나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이거, 괜히 저 때문에 시음회가 취소되는 거 같아 죄송하네요.”
“시음회라고는 해도 우리끼리 하는 건데요, 뭘. 언제든 편하게 와요. 오늘 와도 좋고. 우리야 언제든 모일 수 있잖아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이런저런 대화를 조금 더 나눈 재훈과 주용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용의 가게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야 자리를 뜨는 이들이다.
“영업 잘하구요. 나중에 봬요.”
“네. 들어가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윤수와 정환만이 남았다.
“자, 우린 또 하루를 시작해 볼까요?”
“그럼요!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아실은 그렇게 또 하루를 시작했다.
5.
평범한 영업시간이 유려하게 흘러갔다. 평소와는 하나 다를 것 없어 보였던 하루라고.
윤수는 마지막 남았던 손님의 빈잔을 치우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실이야 언제나 안정적인 공간이지 않나. 손님도 적지 않고 손님을 맞이하는 바텐더마저 안정적인 곳.
언제나처럼 평온함을 안은 듯한 이곳에서 하루 역시 그렇게 흘러갔다.
단 하나, 이곳의 주인인 정환만 빼고.
남들은 모를 수도 있다. 실력 있는 바텐더란 자신의 의중을 손님에게 내보이지 않는 실력 역시 갖추고 있을 테니까.
다만, 이런 바텐더도 같은 공간에 있는 이에게는 모든 걸 감출 순 없었는데, 그 공간은 바로 바 안이라는 공간이었다.
잠시 돌아서는 순간, 그리고 잠시 멈칫하는 순간.
윤수는 정환의 얼굴에 슬쩍 아리는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특별하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고민이 조금 있는 모습.
차라리 주변에 털어놓는 성격이라면 말이라도 보태볼 텐데. 아쉽게도 차정환이라는 이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오늘은 마감이 조금 빠른 것 같네요. 그렇죠, 윤수 씨?”
“···어, 네. 그렇네요. 아직 1시가 안 됐는데 벌써 비었네요. 더 올 손님은 없으시겠죠?”
“흠. 보통은 두 시간 정도는 잡고들 오시니까요.”
막막한 정적 속에서 윤수가 사장의 눈치를 보는 걸 정환도 알아챈 걸까.
정환은 먼저 말을 걸어오며 애써 표정을 감춰본다. 그마저 눈에 보여, 씁쓸한 윤수였다.
“폐점 준비하죠. 오늘은 이만해도 되겠어요.”
“그럴까요? 손님은···?”
“준비하면서 혹시 오시면 맞이해도 되구요. 그래도, 아마 없을 거 같아요.”
“넵! 마감 준비하겠습니다.”
마감이라곤 하지만 할 게 그리 많은 건 아니다. 하루 사용된 식기를 세척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
오늘 사용되지 않은 재료를 백사이드에 있는 냉장고로 옮기는 것. 그리고 가게를 청소하는 것 정도가 마감의 내용.
마감을 조금 이르게 한다는 건, 집에 가는 시간도 빨라진다는 뜻이다.
조기 퇴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건 바텐더도 마찬가지. 윤수는 얼른 몸을 움직이며 마감에 열중했다.
- 솨아아아.
싱크대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흠. 일찍 마치면 ‘숲’에 들렀다가 가야겠어요.”
“‘숲’에요? 아. 인퓨징한 술 때문에요?”
“네. 말 나온 김에 맛을 보고 가죠, 뭐. 쓸만하면, 제가 조금 얻어 올게요.”
“‘숲’도 곧 마감이지 않나요?”
“한잔 정도 마실 시간이야 나지 않겠어요? 서둘러 보죠, 뭐.”
마음은 심란해도 새로운 술에 대한 관심은 여전한 걸까. 윤수는 그런 모습이 또 바텐더스러워 정환을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먼저 가시죠, 사장님.”
“네?”
“먼저 들어가셔요. ‘숲’에 들렀다가 가시려면 그래도 일찍 가보시는 게 좋잖아요.”
“아뇨. 같이 마감하고 가요. 괜찮아요.”
“들어가세요. 저번에는 저 먼저 보내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마감하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쓰읍. 저도 가끔은 한몫하게 해주셔야죠! 자꾸 그러시면, 저 버릇 나빠져요?”
“···혹시 손님이라도···”
“한, 두 팀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게 못 미더우시면 어쩔 수 없구요.”
“아뇨. 못 믿다니요. 윤수 씨야 이제는 혼자도 충분하지만···.”
“그럼, 다녀오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제가 ‘숲’으로 달려갈게요.”
그리고 나오는 조금 배려심 깊은 윤수의 말. 윤수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정환을 먼저 보내려 애를 썼다.
시간이 지나면 고민은 사라진다.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라질지도.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최대한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게 주변인의 배려일 것이다.
윤수는 잠시라도 빨리 고민을 잊고 다른 것에 정환이 집중하길 바라며 그를 얼른 이곳에서 내보내려 했다.
그의 따뜻함이 전해졌는지, 정환은 자리에 멈춰 밝게 웃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오늘 하루만 윤수 씨한테 신세 좀 질까요?”
“이런 신세는 대환영이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숲’으로 오시구요.”
“그럼요.”
“따로 말씀 안 하셔도 되니까, 정리 끝나면 바로 퇴근하세요.”
저렇게까지 나오는 사람에게 더 버티는 건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정환은 윤수에게 짙은 미소만 한번 보여주고는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내일 봬요!”
라는 따뜻한 윤수의 인사말을 뒤로 아실을 벗어나 골목의 끝으로 향하는 정환.
아실에는.
윤수만이 홀로 남아 공간을 지킨다.
시간은 이제 새벽 1시가 조금 넘어가는 늦은 시간. 더 올 손님은 없을 거란 생각에 윤수는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하루 고생한 잔을 정성스레 씻겨 갔다.
늘 존경하는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도 좋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홀로 바에 남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홀로된 지 약 10분 정도가 조금 지났을 무렵. 요란한 물소리가 조금은 멈출 기세를 보일 즈음에, 다른 소리가 하나 섞이며 아실을 채운다.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는.
- 딸랑.
이라는, 아실에 새로운 얼굴이 드는 익숙한 소리였다.
“?”
이 시간에? 하고 뒤를 잠시 돌아보던 윤수가 아차! 하고는 얼른 고무장갑을 벗는다.
아직은, 영업시간이 끝나지 않은 참이었다.
“어,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물소리가 너무 커서 오시는 줄도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윤수는 장갑을 벗음과 동시에 얼른 바텐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업시간이 아직 남았고 또 바텐더가 있다면 언제나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정환의 철학과도 같은 이 신념을 모르지 않았기에 조금 남은 시간임에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윤수였다.
윤수는 손을 마른 수건에 닦고는 얼른 손님에게 나아갔다.
윤수의 마중을 받는 손님은 편안해 보이지만 정갈한 재킷을 걸친, 그리고 얼굴에는 인자함이 가득 걸린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잔잔하게 퍼지는 그의 ‘인자한’ 미소가 윤수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