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잔. 선물의 조건. >
3.
“조건···이요?”
예상이 가는 점이 없진 않았다. 못해도 간단한 교류나 이전에 있었던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줄 것.
그 정도의 조건은 정환도 예상을 했지만, 왜인지 윤현민 부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것보다 클 것처럼만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쪽에서 뭘 받는 조건이라기보다는 바텐더님께서 어떤 조건을 달성해주셔야 저희가 표를 던질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겁니다. 물론, 동의하신다는 가정하에 말이지요.”
윤현민 부장은 엎질러진 물이라는 표정으로 정환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원래 계획했던 선물과는 조금 틀어져 차마 정면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이해가 안 되어서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해도 상식적인 제안은 아니어서···.”
윤 부장은 조금 남은 마티니를 마저 비워내고는 길게 잔향을 뿜어낸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솔향이 그의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우선, 드렸던 서류를 다시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조금 이상한 점이 있을 겁니다.”
정환은 그의 말에 맞춰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 중 한 장을 넘겨 다음 장을 펼쳤다.
찬찬히 이를 읽어 내려가는 정환. 정환의 눈에 무언가 조금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날짜가···?’
“2015년···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가 건넨 서류에는 ‘2015년 아시아 베스트 50 후보 목록.’이라는 지금과는 조금 맞지 않는 시기가 적혀 있다.
지금은 2013년이다. 이제는 고작 한 달도 남지 않은 게 2013년인 걸 고려해도 여기 보여야 할 건 2014란 숫자일 터.
2015년 후보 명단이란 건, 적어도 당장에 쓰일 목록은 아니란 뜻처럼 보였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지금 투표하고 이를 모아 발표하는 건 분명 2014년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아실에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건 아마 2015년은 되어야 할 것 같군요.”
2014년 말에 투표해 2015년 중순에 발표하는 게 그해의 베스트 바 명단.
못해도 1년이라는 시간이 뜨기에 정환은 무언가를 알아채는 눈치다.
“···그럼 그 1년이 비는 동안 무언가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눈치가 제법 빠른 바텐더다. 세상 돌아가는 생리도 나이에 맞지 않게 밝은 이고.
윤현민 부장은 그런 생각에 이 바텐더 앞에서는 모든 걸 털어놓아도 좋을 거라,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입이 덤덤히, 자신의 사정을 뱉어갔다.
“정확하십니다. 먼저, 사과의 말씀도 전하는 바입니다. 일방적인 선물이라 생각했지만 일이 꼬여서···. 회사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 계획은 2014년 투표에도 아실을 포함하는 거였습니다. 다만···”
“윗선이군요.”
“음. 역시 정환 군은 이해가 빠르군. 아카데미 회원권이 실무자에게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임원급으로 올라가야 주어지는 권한이긴 하네. 목록이야 실무자가 만든 걸 참고한다고는 해도, 명분은 필요한 법이지.”
“명분이라면···?”
“회사는 가능성이 있는 곳에 표를 던지고 싶어 합니다. 임원들을 설득하려면 가능성이라는 게 보이는 지표가 필요하겠죠. 이번 회의에서 나온 말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아실은, 아직 지표가 부족하다는···.”
실례인 걸 알고 있다. 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의 실력이 온전히 지표로 모두 나타나는 건 아니란 걸 방금 뼈저리게 느꼈고.
허나,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윤현민 부장은 조금 줄어드는 목소리로 전해야 할 말을 모두 전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빙 둘러 가는 느낌이어도, 아직 젊은 아실과 또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에게는 주어질 포상이 작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표를 만들어라···.”
“방송이나 잡지 인터뷰도 했고 SNS에서도 요즘 인기가 많은 곳인데···. 냉정하네요.”
“회사는 보수적이야. 임원은? 말할 것도 없지. 눈에 보이는, 또 업계에 공인받는 지표가 아니면 만족 못 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야. 다들 자리보전에만 목숨을 건다고. 눈에 보일 만큼 확실하지 않은 곳에 거는 모험 따윈 상상도 못 하지.”
기준과 정우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 한마디씩 보태어 본다. 기준은 이런 처사가 조금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정우는 이제는 제법 회사원다운 반응을 보여준다.
“실력에 대한 점이라면 분명하게 제가 어필했습니다. 김 선배님도 많이 도와주셨고. 허나, 일정 조건을 달성한다는 전제하에 15년 투표.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윤현민 부장은 말을 마치며 슬쩍 정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딱히 미안해할 일은 아님에도 한 말이 있어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보는 그였다.
“아닙니다. 죄송하다니요. 순전히 아실에만 득이 되는 일인데 이렇게 나서 주신 거잖아요.”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선정된 후에는 그레인 호텔과 여러 제휴를 맺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일전에 있었던 세미나처럼.”
“흠. 실무자에게는 이름난 바텐더를 초청하는 것도 좋은 실적이니.”
전할 말이 모두 전해지자 잔잔한 침묵이 이들 사이에 자리한다.
정환은 잠시간 찾아온 침묵 속에서 눈을 몇 번 움직이고는 꼭 물어야 할 걸 물어본다.
“말씀하셨던 조건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정환의 질문이 나오자, 윤현민 부장은 김태현 교수와 잠시 시선을 맞췄다.
김태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이 열린다.
“크게 무리한 조건은 아닐 겁니다. 메인 대회 수상 경력. 딱 그거 하나면 됩니다. 그거라면 임원진도 충분히 납득할 겁니다.”
!
조금은 작지 않은 이야기였다. 윤수는 또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메인 대회라면···?”
“월드 클래스 코리아.”
슬쩍 말을 되묻는 윤수에게 읊조리듯 정환이 대회의 이름을 말해 본다.
지금 시기에, 또 다음 투표 전까지. 그리고 메인 대회.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나오는 대회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월드 클래스 코리아.
유명 주류 회사가 후원하는 대회로 바텐더 업계에서는 가장 메인으로 분류되는 대회가 바로 이 대회였다.
국가별로 대표를 뽑아 월드 클래스 세계 대회 출전권이 주어지기도 하는 이 대회는 아마 바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대회일 것이다.
“세계 본선에서 성적을 내는 것까지 바라는 건 아닙니다. 한국 우승.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시겠지만, 그레인 호텔이 투표하면 따라오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그 조건만 맞추신다면, 다다음 해에 아실은 순위권 진입도 확실히 노려볼 수 있을 겁니다.”
윤현민 부장은 이름이 모두 나온 김에 눈에 힘을 주고는 확신을 가진 채 말을 이었다.
그레인 호텔은 바씬에 영향력이 적지 않은 곳으로 한 국가의 회원들이 움직일 수 있게 선동 정도는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화려한 수상 경력이 붙는다면 자연스레 다른 아카데미 회원들도 아실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가능성이 있는 곳에 투표한다는 회사의 방침도 맞추고, 아실 역시 순위권 진입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아실에도, 또 자네 커리어에도 나쁠 건 없는 제안으로 보이네. 아. 우선, 이건 투자자로서 하는 말은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고. 사실, 대회다 뭐다 이런 걸 신경 쓰는 것보다야 가게만 운영하는 게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좋지 않겠나? 나 역시 들어보니, 자네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처럼 보여 이렇게 윤 부장과 함께 온 거네. 난 신경 쓰지 말고 잘 고려해 보게.”
“···답은 언제까지 드려야 할까요?”
“즉답은, 힘드신 모양이군요.”
“시간이···, 조금은 필요합니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조건에도 정환은 즉답을 망설인다. 대회와 관련해서는 한 번도 언급이 없었던 그.
언제나 대회에 나가보란 제안은 받았을 그였을 텐데도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모습이다.
“2월이면 월드 클래스 코리아 참가 접수가 마무리됩니다. 그전까지. 그전까지만 답을 주시면 됩니다.”
“그전까지는 꼭 답을 드리겠습니다.”
정환은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우선 시간을 달란 말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당장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없었기에 말을 전한 거로 만족하는 윤현민 부장.
운은 띄워놓았으니,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이다.
“흠. 당장 답은 나오지 않을 거 같군. 어떤가? 그만 일어나지. 오늘은 그게 좋을 거 같군.”
“그래야겠군요. 아쉽지만, 다른 잔은 답이 나온 후 천천히 즐겨보기로 하죠.”
김 교수와 윤 부장 두 사람은 몸을 일으키며 아실을 떠날 준비를 마친다.
더 남아 있어도, 오늘은 온전히 이 공간을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오늘 와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좋은 제안이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자. 더 보채면 분위기 어색해지네. 잘 고려하겠지. 정환 군. 난 잘 고민해 보게. 연락은 늦지 않게 주고.”
“네. 교수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또 오겠네. 조만간 봄세.”
두 사람은 호텔맨 다운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는 아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바텐더들 사이로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왜? 왜? 뭔데? 뭐가?”
정우는 이런 분위기가 싫어, 이곳의 중심이자 이런 분위기의 원천인 정환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물었다.
조금 전부터 어둡던 그의 얼굴이 누가 보아도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아뇨···. 그냥 아까 들은 말 때문에.”
“고민할 필요나 있냐? 뭐 어때. 한번 해보고 안 되면 그만인 거지.”
“안 될 리는 없지 않을까요? 정환이 정도면. 세계 본선은 몰라도 코리아 정도면···.”
“그건 또 다르지. 대회야 나가서 당일 컨디션도 봐야 하고 과제도 봐야 하는 거니까. 안 맞는 과제 나오면 그냥 꽝이라고.”
“그건 그렇죠. 그래도···.”
“사, 사장님은! 그래도 잘하실 겁니다! 우승하실 거예요! 무조건!”
이어지는 여러 응원과 걱정에도 정환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건 대회의 결과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정우 형.”
“왜, 또?”
“아까, 김 교수님이 하신 말씀. 진짜예요?”
“뭐가? 나온 이야기가 좀 많아야지.”
“아르센요. 마스터께서는 그레인 호텔이 아르센에 투표하는 걸 반대했다고···.”
“아. 그거? 응. 사실이야.”
“왜요?”
“나야 모르지. 그분의 속셈을 누가 아냐?”
“역시 그런가요···.”
“뭣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
“네?”
“아까 말했잖아. 마스터. 다음 주면 오신다고.”
!!
“마, 맞다! 다음 주에 오면 뵙기로 했었죠!?”
“응. 그때 직접 여쭤봐. 그럼 되는 일을.”
“그래야겠네요. 고민도 조금 있고···.”
“짜식. 여전히 마스터 앞에서만 순한 양이지.”
“어쩔 수 있나요. 그걸 부러워하면 안 되죠.”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억울한 거다. 기준아.”
“그거나, 그거나요.”
명진이 다음 주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떠올리자 정환의 표정에서 수심이 조금 사라져 간다.
정환이 유일하게 속에 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단골 바텐더, 명진이었다.
‘그분이라면···, 그래!’
답을 알려 주실지도 모른다.
어느새 수심이 완전히 사라진 정환의 얼굴에는 기대까지 아려갔다.
정환은 다음 주를 조금 더 고대할 이유가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