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잔. 이른 선물. >
2.
한잔은 딱 맞고 두 잔은 너무 많으며 세잔은 모자라다.
마티니를 논할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만화가 제임스 서버의 말이 윤현민 부장의 머리를 스친다.
한 번도 저 말에 공감한 적은 없었는데. 아마, 오늘은 조금 다른 것만 같다.
그의 앞에는 차정환이라는 바텐더가 만든 마티니가 한잔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얼른 비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잔은 과할까 봐, 또 한잔을 더 시키면 부족할까 봐.
그는 감히 잔을 들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실력을 가늠하려 했었다.
지금 옆에는 자신이 일하는 곳인 그레인 호텔의 현장 책임자 신정우 치프도 있지 않나.
허나, 미처 반응을 숨기지 못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마는 그였다.
“입에는 맞으신가요?”
이건 알면서 묻는 게 분명하다. 현민은 자신에게 마티니의 맛을 물어오는 정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승리를 확정한 사람의 세레모니 정도라고. 그에 대해 들은 말이 없었다면, 인성 부분은 따로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맛···있습니다. 입에도 딱 맞군요. 탱커레이와 베르무트의 향을 제대로 살린 기분입니다.”
“탱커레이가 첨향이 많은 진이라서 조금 까다롭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베르무트를 더 넣으려면 너무 드라이하게 바뀔 가능성도 있죠. 가볍게 스윙을 해 에어링을 조금 시킨 다음 스터해 봤습니다. 저는 평소 마티니에 비피터를 주로 써서 이번에는 이렇게 해봤습니다.”
“아···, 그럼···”
비피터로 만든 마티니도 한잔 마셔볼까. 그런 말을 하려다, 윤현민 부장은 오늘 이곳에 온 것이 단지 술만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님을 떠올리고는 얼른 말을 삼켰다.
“크흡. 어떻게, 확인은 된 거 같나?”
“깜짝 놀라신 모양인데요. 저번에도 드셔보신 거 아니었나요? 아. 그때는 셰이크. 이번에는 스터인가요?”
자연스레 나오는 그의 반응을 보며 정환을 이미 겪어본 선배들이 재밌다는 표정을 짓는다.
김태현 교수와 정우는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알았던 모양이다.
“말씀드렸지만···평가나 그런 걸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차정환 바텐더님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괜찮습니다. 손님은 언제나 바텐더의 실력을 확인할 자격들이 있으신걸요.”
“···그런가요.”
도의상 해야 할 말을 하나 꺼내고는 윤 부장이 체이서로 입을 씻는다.
입안에 강하게 남은 마티니의 향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마셨던 맛이 진짜였는지 우연이었는지. 그날 마셨던 에스프레소 마티니 역시, 굉장하더군요.”
“흠. 정환 군이 셰이크에도 일가견이 있지. 어쩌면 그쪽이 전공일 수도 있고.”
“에이. 정환이는 스터에서 더 빛을 내죠. 셰이크가 보이긴 그렇게 보여도 섬세한 건 스터거든요.”
“저는 셰이크 쪽에 한 표···”
“오. 기준 군이 나랑 좀 통하는군.”
“저는 스터 쪽에···.”
“역시, 윤 부장님!”
어느새 완전히 윤현민 부장은 아실에 녹아들어 다른 이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한잔은 칵테일로 주변과의 벽을 허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바텐더의 역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까 뭐 하실 말씀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응? 아. 그렇지. 잠시.”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 정우가 김태현 교수에게 말을 묻는다.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흘렸던 그의 말을 정우는 놓치지 않았다.
김태현 교수는 잠시라는 말을 남기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손님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는 표정을 한번 지은 그가 윤현민 부장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만. 더 지체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정우 군이야, 알아둬도 나쁠 건 없고.”
“치프는 아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아시는 게 좋을 테죠.”
“그럼, 정환 군만 들을 준비가 되면 되는 건가? 정환 군. 잠시 괜찮겠나?”
손님들이 잘 어울리기에 잠시 멀어졌던 바텐더를 김 교수가 불러온다.
정환은 잔을 씻느라 적신 손을 닦고는 얼른 이들에게 다가왔다.
“네. 교수님. 무슨 일이시죠?”
“아니. 난 아니고, 여기 윤 부장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말이지. 오늘 이렇게 온 것도 그것 때문이네.”
“윤 부장님께서요? 편하게 하시죠. 안 그래도 지금은 조금 여유가 있네요. 체이서. 채워드릴까요?”
“아. 부탁합니다.”
윤현민 부장은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비웠던 체이서를 받아 들며 다시금 입을 적신다.
매번 입을 깔끔하게 하고 마티니를 새로 맛보려던 그였기에 체이서가 남아나질 않았다.
“흠. 저번 세미나 때 제가 드렸던 말씀은 기억하시나요?”
“다음에 꼭 한번 아실에 오시겠다는 말씀하셨었죠.”
“그다음에 한 말은 기억하지 못하시는 모양이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은 한다. 선물을 가져오겠다던 말. 허나, 여기서 말하기에는 조금 상황이 맞지 않아 보여 정환은 이를 애써 삼켰다.
“시간이 조금 흐른 것 같네요. 뭐라고 하셨었죠?”
“선물을 가져오겠다고···. 그런 말을 했었죠. 기대하셔도 좋을 거란 말도.”
“아. 기억이 나네요.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선물이란 윤 부장의 말이 나오자 이야기를 듣던 모두의 시선이 그의 옆자리로 향한다.
묵직한 무언가를 땅에 내려놓았을까, 그런 시선에도 잠시. 주변에는 그의 서류 가방 말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오늘 원래라면 그 선물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일이 조금 꼬여서, 복잡해지긴 했지만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 해도 선물인걸요.”
“정석적인 답이군요. 사실, 선물이라고는 해도 마냥 선물이라 부르기엔 모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버렸지만요.”
그의 말이 조금 수상하다. 선물은 그저 선물일 터. 헌데, 변했다는 건 무슨 말일까.
모두의 고개가 갸웃거려갈 즈음.
윤현민 부장은 서류 가방을 다리 위로 올리고는 거기서 무언가를 꺼내 보인다.
“이게, 원래라면 제가 드리려던 선물이었습니다.”
꺼낸 서류 봉투를 정환에게 내미는 윤현민 부장의 모습. 바텐더에게서 손님에게로 무언가가 나간다는 바의 법칙이 잠시 깨어지는 순간이다.
“확인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바텐더님만 괜찮으시다면.”
“흠.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군.”
“부장님. 저거 설마···?”
김태현 교수는 이를 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정우는 살짝 기겁하는 표정이다.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저는 적당하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말입니다.”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래서 벽에 부딪힌 찰나기도 합니다.”
“역시 그런가요.”
“방법이야 다 있지 않겠나. 우선, 정환 군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
서로 의미심장한 말을 주고받은 이들의 시선이 정환에게 몰린다. 정환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천히 서류 봉투를 열어 갔다.
열린 봉투 사이로 나오는 한 뭉치의 서류. 그리고 그 첫 장을 본 순간, 바 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표정이 정환의 얼굴을 장식한다.
!
정환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아시아 베스트 바 50. - 그레인 호텔 투표 예정 목록.]
이라는 이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정환은 이제 눈마저 껌뻑거리며 천천히 윤현민 부장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김태현 교수는 잔을 들며 재밌는 반응이라는 듯 크게 웃어 보인다.
“이거, 정환 군의 저런 표정을 바에서 볼 줄은 정말 몰랐군. 재밌어. 암.”
“놀랄 만도 하죠. 이제 1년인데요.”
“아직, 정식은 아닙니다.”
“뭐길래 그렇게들 말씀하세요? 저도···.”
덤덤한 다른 이들과 달리 내용을 모르는 기준이 몸을 앞으로 쭉 내뺀다.
바 테이블을 살짝 넘어 서류를 엿본 기준은.
!!
“아, 아시아 베스트!?”
정환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여줄 뿐이다.
“예?”
멀리서 다른 일을 하던 윤수마저 달려온다. 바텐더라면, 저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외의 유명 음료 회사가 후원하며 만들어진 일종의 시상식으로 매년 월드 베스트 50과 대륙별 베스트 50을 정해 이를 세간에 발표하는 시스템은 미슐랭 같은 다른 가이드가 없는 바 업계에서는 제일 공신력이 있는 하나의 지표이자 훈장이었다.
베스트 50에 선정된다는 게 곧 실력이 좋은 것을 뜻하진 않는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아 보이지 않는 손들도 있었으니까.
허나, 이건 대기업이나 브랜드라는 걸 등에 업은 곳들에 해당하는 이야기.
개인이 운영하는 로드 바가 만약 이곳에 이름을 올린다면. 이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다는 제법 큰 명예임이 분명했다.
정환은 회귀 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에 이 칭호를 받는 걸 꿈꿔왔다.
일본에서 일하며 아시아 베스트가 아닌 월드 베스트에 선정된 곳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는 그였지만, 그건 단지 그의 실력만으로 이룬 건 아닐 터.
정환은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에 저 이름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독립한 것도 없진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때 노렸던 건.
아시아 베스트가 아닌, 월드 베스트였지만.
“···이걸 왜 그레인 호텔에서···?”
정환의 어깨너머로 서류를 본 윤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아직 바씬이 돌아가는 방향을 잘 모르는 이다.
“베스트 50을 선정하는 건 베스트 아카데미라고 부르는 단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서라네. 바텐더, 교육자, 기자, 요리사, 그리고 업계 관계자까지. 수많은 이들이 소속되어 있지. 그리고 당연히.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호텔 바를 가진 그레인 호텔에도 이 아카데미 소속의 회원이 있고.”
김태현 교수는 그런 윤수를 위해 자세한 설명을 들려준다. 전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조금 묻은 설명이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이걸···,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건가요?”
기준은 잠시 멍하게 있더니, 조금 순박한 질문을 던진다. 김태현 교수는 귀엽다는 듯 웃고는 여기에도 설명을 덧붙였다.
“안 되지. 당연히. 원칙은 말일세. 허나, 알지 않나? 호텔은 회사네. 회사는 때로는 원칙 같은 걸 깨기도 하는 법이라네.”
“···꼭 투표해야 하는 곳이 몇 곳 정해져 있다고 압니다만···.”
현실적인 김 교수의 설명이 나오는 도중, 처음으로 정환의 입이 열린다.
정환 역시, 이 시스템에 대해 모르진 않아 보였다.
“맞네. 꼭 투표해야 할 곳이 정해져는 있지. 한 회원이 받는 표는 총 6표. 자신이 속한 업장은 제외하고 국내에 투표할 수 있는 건 4표. 해외는 2표지. 해외야 다른 호텔 바와 제휴를 맺어 투표하는 게 당연한 말이고, 나머지 4표 중 3표 역시, 다른 회원이 속한 업장에 던지는 게 관례라네.”
“···교환 투표란 말이군요.”
“음. 어쩔 수 없는 생리지. 상생이고. 그래야, 그레인 호텔도 순위를 유지할 게 아닌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 기준은 무언가를 새로 배웠지만 영 편하진 않은 모습이다.
“거절하는 곳들도 있다네. 내가 현역에 있을 때, 그런 곳이 있긴 했지. 지금은 없어진 곳이지만. 아주 좋은 곳이었고 좋은 바텐더도 있었어. 허나, 거기 마스터가 투표를 원치 않았지. 아르센이라고. 뭐, 그런 경우도 있으니 이렇게 사전 방문을 해서 의사를 묻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네. 회사는 적어도···”
“의지도 있고 또 가능성이 있는 곳에 투표하길 원하니···.”
“정확하네, 정환 군. 마치 겪어본 사람 같구만.”
당연히 겪어본 일이다. 일본에서 일하던 당시 호텔 헤드 바텐더를 역임하며 바라봤던 하나의 생리.
정환은 그때는 다른 이의 일처럼 여겼던 것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조금은 놀란 눈치다.
“그럼, 그 남는 한 표를 제게 주신다는 건가요? 아실에?”
직설적인 정환의 물음이 입을 타자 김 교수는 답을 윤현민 부장에게 미룬다.
윤 부장은 슬쩍 뜸을 한번 들이고는 지금의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길 원합니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일이 쉽게만 풀려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