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잔. 반가운. >
1.
이별이 슬픈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그 이별이라는 감정에 사람이 한없이 멈춰있을 순 없다는 것.
그것 역시 이별이 슬픈 이유 중 한 대목을 차지할 건 분명해 보였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 바텐더에게 조금은 슬플 수도 있는 이 굴레 속에서 정환은 오늘도 새로운 손님을 맞으며 바텐더답게 살아가는 중이다.
아실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다이키리, 네그로니, 그리고 올드 패션드요!”
“넵. 주문 확인했습니다.”
“여기 물 좀 더 주시겠어요?”
“네, 잠시만요! 지금 갑니다!”
“사장님, 세 명 자리 있나요?”
“안쪽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어쩌면,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이별을 잊게 해줄, 아실의 선물일지도 모를 분주한 하루.
정환은 평소와 같은 움직임으로 아실을 채운다.
“부족한 건 없으시죠? 예. 없으실 거예요.”
“저, 사장님? 손님들 신경 좀 쓰시죠? 많이 부족하거든요?”
“에이, 설마요. 정 부족하시면 한번 쫓아내 드릴까요?”
“어련히요.”
그러던 중 멈춰 손님과 농담을 주고받는 정환. 정환의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둘 있어, 오늘의 기분이 조금 달래어지는 것만 같다.
아르센에서 함께 일했던 기준과 정우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정답게 잔을 나누고 있었다.
“부족한 거 없으니까, 가서 일 봐. 여기 진상은 나한테 맡기고.”
“야. 한기준이. 내가 진상이란 말이냐?”
“본인도 아는 것 같네. 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기준 형만 믿어요.”
“어쭈? 이게 형들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다?”
“형들도 다르시니까요.”
“내가 오늘 가져온 소식 들으면 그렇게 반응하지 못할 텐데?”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려구요. 안 믿어요.”
“후회한다, 너?”
“눼에, 눼에. 전 갑니다-!”
언제 보아도 정우는 사람을 참 장난스럽게 만들어 준다. 대하는 태도가 편해진 만큼, 정우에게서는 늘 밝은 에너지를 받는 정환이다.
“하여튼,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내가.”
“엄밀히 말하면 형이 키운 건 아니죠. 정환이가 잘 큰 거지.”
“너까지 이러기냐?”
“흠. 저도 이제 짬이···.”
“하여튼. 이것들이.”
둘은 자연스레 아실에 녹아 정환에게 편안한 풍경이 되어 준다. 오늘 같은 날, 그들이 이곳에 찾아온 게 싫지 않아 정환은 밝게 웃어 보였다.
한참을 영업이 이어지던 중.
1부 영업이 끝나고 2부가 시작되려던 무렵에 손님이 한번 싹 빠지고는 교체되는 시기가 찾아온다.
자연스레 들락날락하며 교체되는 아실 안의 구성원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건 정우와 기준이 전부였다.
“응. 다음 주. 다음 주 수요일? 그쯤에 오신다고 하시더라.”
“드디어 돌아오시는 거네요!”
“정말요?”
막간을 이용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정우와 정환, 그리고 기준.
정우의 한마디가 입을 타자, 정환과 기준의 반응이 격해진다.
오랜만에 듣는 누군가의 소식이, 전해진 탓이다.
“무슨 말씀들 나누세요? 형들 표정이···?”
멀리서 다른 일에 열중하던 윤수만이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다음 주에 오신대요, 윤수 씨!”
“크흐. 거의 1년만인 거죠?”
“1년은 조금 안 됐지.”
“···오신다면, 누가?”
윤수를 향해 되짚어 주는 말에도 듣는 이는 감을 잡지 못한다. 평소라면 친절히 풀어서 설명해줄 사람들이 이 선배들임에도, 오늘은 이들 역시 그를 챙길 여유가 없다.
“어디서 오시는 거죠?”
“유럽에서 바로 오시는 건 아니죠?”
“일본. 지금 일본에 계시거든. 들어오시는 날 하루 그레인 호텔에서 쉬게 하시고 집에 보낼 생각이야. 바로 집에 들어가면 또 정리다 뭐다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잖아.”
“잘하셨어요! 맞아요. 부지런하시니까요.”
“이야. 그럼 그날 바로 공항에라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서라. 안 그래도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 내가 조용히 가서 모셔올 테니까, 다들 잠잠히 기다려. 오신 다음에 따로 연락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후. 당장 뵙고 싶은데 어떻게 참죠?”
“어떻게 참긴. 할 일들 하면서 참아야지. 그분 성격 몰라서 그래? 일 제대로 안 하고 마중 같은 거 나갔다가는 불호령이라고.”
“그건 그렇죠. 맞네요. 형이 고생해 주셔야겠어요.”
“그게 뭐 고생이라고.”
“날짜는 바로 잡는 거죠?”
“응. 다음 달이면···, 1주년이니까.”
1주년이란 말이 나오자 셋의 표정이 동시에 아련하게 변해 간다. 동시에 같은 무언가가 셋의 머리를 스친 모양이다.
윤수만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챙기러 오시는 거네요.”
“역시···.”
누군가를 떠올리는 기준과 정환의 턱이 들린다. 그리고 덧붙여지는 정우의 말.
“그런 분이잖아. 마스터는.”
!!!!
조금은 구체적인 정우의 말이 입을 탄 후에야 윤수는 이제까지 흘러가던 말을 모든 정황을 이해한 표정이다.
턱이 아래로 쭉! 하고 빠져버린 윤수가 눈마저 동그랗게 뜨고 떨리는 고개를 정환 쪽으로 돌린다.
“마스터라면···?”
지긋이 고개만 끄덕이며 네가 떠올리는 그 사람이란 표정을 지어주는 정환.
윤수는 그제야, 완전히 놀람이란 감정을 얼굴에 표하고 만다.
“대애애애애바아아악!”
조금은 커다란, 고성과 함께.
손님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인 시간대였다.
“깜짝이야. 왜 네가 놀라고 그래?”
“윤수 씨는 처음 뵙겠네? 그렇지?”
“그렇죠. 윤수 씨는 마스터 출국 후에야 아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저, 저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응?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나? 아, 접점이 없어서 조금 그런가?”
“저랑 같이 가면 되는 거죠. 뭐 어때요.”
“마스터가 사람 싫어할 분은 아니시니까요.”
“크흡! 저, 정말 제가 만날 수 있는 거죠? 하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정말 감사해요!”
윤수는 다른 아르센 출신 바텐더들보다 더 기뻐하며 명진을 만나길 기대하는 눈치다.
누가 본다면, 아르센 출신은 윤수밖에 없는 거로 보일 정도였다.
“그 전설의 마스터를 드디어···!”
요즘 조금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윤수의 열정이 다시금 도는 모양이다.
그렇게 아실 안이 바텐더들의 기대로 한창 가득 차려 할 무렵, 이제는 2부 영업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언제나처럼 아실의 변화를 알리는 건.
- 딸랑.
이라는 문 열리는 소리였다.
“어? 이거, 다들 동문회라도 하는 건가?”
반가운 목소리가 반가운 인물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몰라도, 이곳 아실에서는 한 번쯤 마주할 수 있는 얼굴이 이들을 반겼다.
이곳의 투자자 중 한 명인 김태현 교수였다.
“김 교수님?”
“어,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정우와 기준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매번 아실을 오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르센처럼 자주 보진 못하는 게 이들의 현실이었다.
“오셨어요?”
“김 교수님, 안녕하세요!”
정환과 윤수는 반대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이였기에 이들에 비해서는 반가움이 덜 했다.
“이거, 다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아르센에 온 것 같구만. 허허. 오랜만이야, 다들.”
“여기 앉으세요. 같이 한잔해요.”
“맞아요. 여기로 오세요.”
그때는 서로 서 있는 공간이 달랐지만, 지금은 같은 곳에 있는 이들이 합석을 권한다.
정우와 기준은 옆자리를 정리하며 그를 맞으려 했다.
하지만.
“아. 잠시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서 말이지.”
김태현 교수는 애써 이를 사양하며 잠시 머뭇거리는 모양새였다.
“지 교수님도 오셨어요?”
“이야, 지 교수님도 오랜만인데.”
아르센의 바텐더들은 그들답게 추억의 이름을 꺼내 본다. 늘 붙어 다니던 지동철 교수. 정우와 기준은 단박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지동철 교수님은 2학기부터 일본에 교환 교수로 가 있으실 텐데요?”
허나, 정환은 그들이 헛다리를 짚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흠. 뭐. 같이 앉아도 크게 상관은 없으려나.”
김태현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며 합석을 일행에게 묻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의 뒤에서 비슷한 복장에 비슷하게 정갈한 차림의 중년인이 하나 더 모습을 나타냈다.
“어, 어, 어! 윤현민 부장님!?”
일행이 모습을 나타내자, 제일 먼저 반응하는 건 정우였다. 그의 직장 상사이자, 그레인 호텔에서 F&B 부서를 총괄하는 윤현민 부장이 아실로 들어섰다.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직속 상관이나 불편한 관계는 아니지만, 의외의 인물을 맞이했기에 조금 놀란 모습이다.
“신정우 치프도 계셨군요. 아. 우선, 오랜만입니다. 차정환 바텐더님.”
윤현민 부장은 정우와 간단히 아는 척을 하고는 정환에게 인사를 건넨다.
적당히 내려간 고개가 딱 호텔맨의 자세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찾아주셨군요.”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좋은 곳이군요.”
“많이 부족합니다. 편한 곳으로 앉으시죠.”
김태현 교수와 윤현민 부장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정우와 기준의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한 자리를 딱 띄우고 앉는 것이 나름의 배려로 보였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허허. 아니지, 정우 군이 이런 걸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니지 않았나?”
“예, 뭐···. 불편한 분은 아니니까요. 호텔 내에서도 필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분이 윤현민 부장님이신걸요.”
“그래? 이거, 윤 차장. 아니지. 윤 부장. 사내 평판이 좋구만, 그래. 허허허.”
“신정우 치프가 필드에서 잘 해주셔서 그런 겁니다. 어정쩡한 관리자였으면, 개입했을 겁니다”
“훈훈하구만! 훈훈해! 응? 아주!”
오가는 이야기가 훈훈하다. 이 정도면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셔도 괜찮을 정도.
김태현 교수는 둘 사이에서 적당히 완충재 역할을 하며 균형을 맞춰갔다.
“자자. 윤 부장. 주문부터 하지. 우선, 확신을 가져야 자네도 이야기를 꺼낼 게 아닌가?”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함이 없는 걸 확인하자 김 교수는 주문으로 나아간다.
슬쩍 나온 말이 의미심장해 보였지만 아직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단계.
김 교수는 자연스레 자신의 주문을 뱉어갔다.
“난 늘 먹던 거로.”
“사이드카. 주문 확인했습니다.”
“그렇지. 이 맛에 단골 가게에 오는 거지. 자, 윤 부장은?”
재차 주문을 물어오는 김 교수의 말에 윤현민 부장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금 노골적인 주문을 가져온다.
“···마티니로 부탁드립니다.”
안광을 빛내는 그의 눈빛이, 단순히 마시고 싶은 잔을 주문하는 이의 모습은 아니다.
“마티니. 확인했습니다. 혹, 즐겨 찾으시는 진과 베르무트는 있으실까요?”
“진은 탱커레이로, 베르무트는 카···”
정환은 여느 주문처럼 이를 받고는 자세한 취향을 물어간다. 바텐더의 질문을 받은 손님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다.
“카르파노 안티카 포뮬러 있지? 그걸로 하면 될 거야. 올리브는 안 채운 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다른 목소리로 주문이 완결된다. 윤 부장의 주문을 마무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우였다.
“우리 호텔 스탠다드랑 비교하려고 하시는 거죠?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어때요.”
정우는 힐끔거리며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 속에서 어색함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오는 주문과 초성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
당장 그레인 호텔에서 모든 칵테일의 맛을 책임지는 치프 앞에서 다른 바텐더의 맛과 비교하려 하니, 윤 부장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괜찮아요. 정환이 실력이야 제가 제일 잘 아는데요, 뭘. 이참에 객관적으로 한 번 더 확인하시는 것도 좋죠.”
“아니, 뭘 평가하려는 그런 건···”
“쟤도 그런 거 신경 쓰는 애도 아니구요.”
“···그럼.”
정우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는 윤 부장에게 슬쩍 어깨만 털어 보일 뿐이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고, 또 이제는 익숙했으니까.
“마티니. 주문 확인했습니다.”
정환은 오가는 두 직장인의 대화 사이에서 아무런 개입 없이 주문만을 받아 간다.
이제는 명백히 자신의 실력을 보겠다는 의도가 확실한 상황.
그래도 정환은.
- 달그라아아악. 달그라아아악.
평범하게. 또 평소와 같이.
차분하게 마티니를 만들어 갈 뿐이다.
- 달그라아아악.
유려하게 믹싱 글라스를 타는 바 스푼이, 홀로 청아한 소리를 울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