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잔. New Kids On The. >
1.
“윤현민 부장? 그 사람이 왜?”
마감이 가까운 늦은 저녁, 한적한 시간대.
아실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리해 정환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얼마 전, 그레인 호텔로 정환을 초청했던 정환의 사형 정우였다.
“아니, 세미나가 끝나고 이상한 말을 해서요.”
“이상한 말? 왜? 뭐라디? 별로래?”
“좋았대요. 다음에 또 보자고.”
“평범하구먼, 뭘.”
“다음에는 아실로 온다나? 아무튼, 그런 말을 했었어요. 선물도 있다고.”
“쓰읍, 그래? 그 양반이 한번 들른다는 말은 나쁜 말은 아니지만···. 선물 같은 걸 할 양반은 아닐 텐데?”
“그렇죠? 딱딱한 사람 같던데.”
“암. 딱딱하지. 딱딱하고말고. 펜대만 굴려서 F&B로 부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야. 모르긴 몰라도 속에 구렁이 열댓 마리는 달고 있을 거다.”
정우는 가볍게 잔을 들며 정환에게 윤현민 부장에 대해 알려준다. 그의 옆자리가 두 자리 정도 비어 있어, 누군가 올 것만 같아 보였다.
“김태현 교수님 후임인 거죠?”
“응. 몇 년 정도 됐을 거야. 퇴사 후에 바로 그 자리에 올랐으니까, 직속? 김태현 교수님이야 워낙 이 바닥에서야 유명한 사람이니까. 부담도 되는 자리였을 텐데 그런 말이 싹 들어가게 했으니, 그 양반도 대단한 사람인 거지.”
“능력은 있는 사람이란 거네요.”
“능력 있지. 전형적인 호텔맨이고.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냐. 아니지, 그건 내가 같은 회사 사람이라서 인가? 외부에서는 모르겠다.”
“애매하네요. 선물은 또 뭘까요?”
“깊게 생각하지마. 능구렁이가 뭐 어디 대놓고 티를 내겠냐? 이럴 때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야. 술이나 한 병 사서 오면 다행이지, 뭐.”
“흐음.”
“근데, 별 상관은 없지 않나요?”
지나간 사람이 놓고 간 말에 대해 고민하는 정환과 정우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다.
윤수는 해맑은 표정을 하며 제일 직설적인 말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아무리 그레인 호텔 부장이라도 사장님이야 자영업자잖아요? 딱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때로는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말들이 해답인 경우도 있다.
“그렇죠. 별 상관은 없는 사람이죠.”
“해봤자 스카웃 제의? 그 정도 아닐까? 그게 선물이라기에는 애매하긴 하다. 여기가 이렇게 잘 되긴 하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 회사원이 영업상 하는 말이지 뭐. 말 그대로 너한테 별 영향도 없고.”
정우와 정환도, 윤수의 정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장님이야 실력으로 승부하시는 분이니까요! 뭐 어때요! 그레인 호텔 부장이든 뭐든!”
다음에 이어지는 윤수의 말이 조금 낯뜨거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둘이다.
- 딸랑.
그렇게 이야기가 넘어가려 할 때, 아실의 문이 열리고는 새로운 손님 두 명이 안으로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윤수는 재빨리 막내답게 손님을 맞으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 일행이 있어서요.”
“안녕하세요.”
“어? 두 분은···?”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알아보는 정환. 정확히 이름은 몰라도 두 사람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하는 그였다.
“아. 왔네. 여기로 와. 여기. 자리 잡아 놨으니까.”
정우까지 나서서 둘을 자신의 옆으로 부른다. 자연스레 미소짓고는 정우의 옆으로 두 손님을 안내하는 정환.
새롭게 아실에 들어온 두 사람은, 정환이 세미나에서 만났던 그레인 호텔의 신입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뵙네요.”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치프께서 초대해 주셔서요!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많이 배우러 왔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름은 아직 모른다. 그저 얼굴만 익혔던 이들. 한 명은 장난기가 가득해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잔을 달라고 했던 그 바텐더였고 다른 한 명은 유독 아는 게 많았던 소극적인 여성 바텐더였다.
잊지 못했던 두 사람을 다시 마주한 정환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여기로 앉으세요. 이렇게 다시 뵌 것도 인연이네요. 오늘은 편하게 드시고 가세요.”
“들었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들 주문해. 마시고 싶은 거 잔뜩들 마시고, 배울 거 단단히 배우고.”
“넵!”
“넵!”
“우리 애들 중에 제일 성적 좋은 애들로 먼저 데려온 거니까, 알아서 잘 좀 봐줘.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고. 앞으로 가끔 이렇게 둘씩 데리고 와보려고. 다들 네 세미나 끝나고 말들이 많아서. 괜찮지?”
“그럼요. 계산만 철저히 해주신다면.”
“쓰읍. 그건 좀. 단체 할인 어떻게 안 되냐?”
“절대요. 바가지면 몰라도.”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만.”
오가는 농담이 싫지 않아 정우는 장난스레 웃어 보인다. 아실이 최대 3인, 그 이상은 별채로 모셔진다는 걸 잘 아는 그였기에 이렇게 나눠서 신입들을 아실에 데려오려는 것처럼 보였다.
배려도, 또 후배를 위하는 마음도. 진하게 묻은 정우의 모습이었다.
“무슨 이야기하고 계셨어요, 치프? 밖에서 보니까 진지해 보이시던데요.”
“자자.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알지? 쉿.”
앞서 오갔던 이야기를 묻는 신입의 말에 정우가 얼른 정환과 윤수에게 눈치를 준다.
상사의 뒷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가 없는 곳에서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아. 제 이름은 아시겠죠? 그래도 다시 인사해요. ‘아실’을 운영 중인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아. 맞네요. 저희야 사장님 이름을 알지만요! 전 그레인 호텔의 신입 바텐더 유형준이라고 합니다!”
“그레인 호텔의 신입 바텐더, 박희경이라고 해요.”
정환은 능숙하게 대화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간다. 세미나를 듣는 이들이 많았기에 몰랐던 이들의 이름을 이제야 듣는 정환.
“윤수 씨도 여기로 와서 인사들 나눠요. 여긴, 그레인 호텔에 신입 바텐더분들이에요. 여긴, 우리 가게 신입 장윤수 씨에요.”
“엇! 넵! 안녕하세요! 장! 윤! 수! 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환은 새로 알게 된 이들에게 또 새로운 사람을 소개한다.
윤수는 언제나 새로운 바텐더를 만나는 걸 언제나 즐거워했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바텐딩을 괴롭게 배워온 그였기에 비슷한 경력의 신입을 만나면 부러움과 함께 이야기 듣길 즐겨왔던 윤수.
오늘도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활기차기 그지없어 보였다.
“다들 멋지네요! 호텔 바텐더라니! 처음 뵈요!”
“윤수 씨가 더 멋져요. 벌써 메이킹도 하신다면서요?”
“아뇨. 저야 뭐···. 플레어에서 조금 근무를 해서요! 또 스승···, 아니. 사장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빠르게 배우고 있습니다!”
“와. 더 대단한데요? 플레어라니!”
일을 배워간다는 처지가 비슷해 세 사람은 빠르게 친해지는 분위기다.
굳이 나눈다면 이들은 정우의 제자들이고 윤수는 정환의 제자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같은 뿌리를 공유한 이들일지도 모른다.
“자자. 이제 주문부터 하자. 뭐들 마실래? 바에서 말만 할 거야?”
“음. 전 주문을 정해놓고 왔어요!”
“저도요.”
“뭐로?”
“에스프레소 마티니!”
주문을 묻는 정우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를 뽐낸다. 일전에 세미나에서 마셔보지 못했던 정환의 그 잔을 찾아보는 두 사람이다.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에스프레소 마티니. 알겠습니다.”
“와. 드디어 마셔보네요!”
“제가 만든 거랑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요.”
“아마, 많-이. 많이 다를 거다. 그래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말고.”
헛된 기대하지 말란 말 일까. 정우는 잔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실망하지 말란 말을 전했다.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 역시 커지기 때문일까. 듣는 이들은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언제나 늘 같은 소리가 들리며 에스프레소 마티니가 완성되어 간다. 세미나에서 들려왔던 소리와 전혀 다르지 않아 신기한 이들의 눈빛.
- 촤아아아아! 촥!
그런 눈빛을 가득 머금고 잔에는 에스프레소 마티니가 담겨 이들의 앞으로 나왔다.
“와! 가까이서 보니 더 향이 진한데요? 대박이다.”
“음. 노즈가 강하네요. 에스프레소 차이도 있을까요?”
두 사람은 잔을 받아 드는 자세가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에스프레소 차이도 있고 그때는 색에 조금 더 신경을 썼었죠. 아무래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요. 오늘은 맛에 더 힘을 줘 봤습니다.”
“얼른 마셔. 원래 칵테일은 만들고 난 직후가 제일 맛있는 거야.”
“넵! 잘 마시겠습니다!”
- 호르르르륵.
형준과 희경은 잠시 잔을 뜯어보더니 얼른 입으로 이를 가져간다.
바텐더기에 눈앞에 놓인 맛있는 잔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그들이다.
잔이 입술을 타고 목을 넘어가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상상했던 맛, 그 이상을 맛본 이들의 표정이 딱 이럴 것이다.
“와···.”
“이게···.”
그리고 나오는 짧은 감상평. 기다란 그 어떤 평가보다도 바텐더들이기에 나오는 이런 평이 더욱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직접 만든 에스프레소 마티니를 며칠 전 마셔본 이들이기에 더욱 적나라한 반응들이다.
‘그래서···?’
희경은 잔을 놓고는 옆에 앉은 치프, 정우를 바라본다. 심드렁하게 입에는 견과류를 씹고 턱을 괸 엉뚱한 모습.
허나, 조금 전 그가 전했던 말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너무 실망은 하지 말고.
잔을 마시기 전에는 이 잔을 만든 사람을 겨냥한 말이라 여겼다. 잔을 마신 지금은, 저 말이 자신들을 향한 말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 그녀였다.
“···갈 길이 머네요.”
“그러게요···.”
장난기 가득하던 형준도 또 학구열이 넘치던 희경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엄숙하게 잔을 내려다본다.
처음 마주한 높은 벽에 이들은 조금 좌절감을 맛보는 걸지도 모른다.
“다들 하면 되는 거야. 쟤 열심히 하거든. 쟤처럼만 해. 그럼 너희도 되는 거야.”
“열심히···요?”
“그럼. 매일 일찍 나오고. 빠릿하게 행동하고. 또 좋은 사람한테 배우고. 쟤가 딱 그랬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정우도 알고는 있다. 정환의 실력이야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니까.
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듣지 않으면 이들이 느낄 좌절감을 알기에 애써 위로해주는 그였다.
“여기도 자주 와서 배우고. 주변에 실력 좋은 사람이 있어야 빨리 늘어.”
괜히 데려왔을까. 어두운 후배들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슬쩍 정우를 스치고 가려 할 때.
“저 결심했어요!”
형준이 다시금 밝은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어간다.
“응?”
“저 여기 더 자주 와야겠어요! 와서 많이 배워야겠어요!”
“그, 그렇지. 좋은 자세네. 바텐더는 응? 많이 경험해 봐야 성장하는 거야. 그, 그래!”
“확실히···, 여긴 좋은 공부가 될 거 같아요. 저도 자주 와야겠어요.”
연달아 나오는 희경의 말도 조금은 희망적. 이제 막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이기에 어쩌면 높은 벽 앞에서 좌절보다는 더 큰 희망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좌절감이 신입을 키우는 것이다.
“자주 와요. 윤수 씨랑 같이 와서 연습해도 좋구요.”
“저, 정말요?”
“윤수 씨. 괜찮죠?”
“저야 너무 좋죠! ‘숲’에도 동료들이 많아요! 같이 연습하면 재밌을 거예요.”
“음. 나쁘지 않네. 일종의 스터디가 이렇게 형성되나? 그레인 호텔도 종로니까, 종로 스터디. 괜찮네.”
“그렇죠?”
“전 할래요!”
“저두요! 치프. 그래도 되죠?”
“뭐, 업무 시간 외에 또 공부하겠다는 데 응원해 줘야지. 대신, 정환이 네가 한 번씩 애들 봐줘야 한다? 알지? 네가 말 꺼냈잖아.”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가끔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숲’에는 재훈 씨도 있구요. 아. 이제는 주용 씨도 있네요.”
뜯어보니 종로는 신입들에게 제법 좋은 교육의 장이다. 실력 좋은 알짜배기 바텐더만이 모인 곳이 종로가 아닌가.
어차피 다른 신입들을 봐주는 와중에 여기 몇 명이 더 해진다고 해서 딱히 힘들어질 일도 없기에 정환은 흔쾌히 이를 받는다.
바씬에 실력 좋은 바텐더가 늘어나면, 이는 전체적인 씬의 성장이 될 수 있다.
“이야. 너희들 운 좋은 줄 알아. 돈 내고 배우는 사람도 있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예? 그런 경우도 있어요?”
“에이, 치프. 거짓말하지 말아요.”
“···있어요. 가···끔.”
“윤수 씨? 알아요?”
이어지는 이야기 중 윤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옛날의 이야기.
같은 바텐더들은 윤수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 함께 얼굴을 붉히며 육두문자를 꺼내왔다.
깊어지는 이야기만큼, 조금은 가까워지는 것만 같은 이들의 사이.
시간은 이야기와 함께 걸으며 어느덧 아실은 얼마 남지 않았던 마감 시간에 가까워졌다.
이들은 정환의 잔과 윤수의 잔을 차례로 맛보며 아실을 제대로 즐긴 하루였다.
“슬슬 일어나자. 마감해야지, 여기도. 너희는 내일 휴무지?”
“네. 첫 휴무!”
“좋네. 더 놀다 들어가든가.”
“치프는요?”
“에이. 나 눈치 있어. 피곤도 하고. 너희끼리 놀아.”
“같이 마시고 가시지···”
“됐네요.”
정우는 자리를 정리하며 먼저 몸을 일으킨다. 오래도록 직원들을 붙잡고 있을 성격은 아닌 정우.
정우는 계산 후 집으로 향한다며 신입들에게 시간을 양보했다.
“이대로 가긴 아쉽긴 하네요.”
“가볍게 한잔 더 하고 들어가요. 어때요?”
“전 좋죠.”
희경과 형준은 뒷 약속을 잡고는 조용히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진다. 의사를 물어오는 작은 시선.
그들의 시선이 오늘 친해진 한 사람에게 닿는다.
“어? 저요? 전 마감을 해야 해서···.”
“기다리죠, 뭐. 저쪽에 내려가면 늦게까지 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
“그래요. 아님, 저희가 마감 좀 도울까요?”
윤수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보이는 이들이다. 로드 바와 호텔 바의 방식이 다른 만큼 서로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들은 로드 바, 바텐더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먼저 들어가요, 윤수 씨.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게요.”
“아, 아뇨, 사장님! 마감하고 가도 됩니다! 일은 다 하고 가야죠!”
“괜찮아요. 이렇게 여러 이야기 듣는 것도 공부에요. 가서 더 친해지고 와요. 여긴 저한테 맡기고.”
“그래도···.”
“쓰읍. 말 안 들으시면, 아까 말한 스터디 안 합니다?”
“가, 갈게요!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환이 슬쩍 옆구리를 잡고 화내는 척을 하자 윤수는 얼른 앞치마를 벗고는 바 밖으로 나선다.
내심, 이들을 따라나서고 싶었던 그였다.
“조심히들 가요. 또 봐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또 올게요! 스터디도요!”
“간다.”
“내일 뵈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웅성거리던 마지막 손님이 떠나자 아실에는 편안한 적막이 자리한다.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분위기를 싹 지우고는 정환 홀로 남은 아실 안.
요즘 들어 이런 시간이 없었기에, 정환 역시 이런 시간이 싫지 않아 홀로 아실 안을 정리해 갔다.
늘 해오던 일이기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정환은 안을 정리하고는 내친김에 마당까지 정리해 보려 밖으로 나선다.
새벽녘 조용해야 할 거리지만 주변 식당가와 술집 덕분에 마냥 조용하진 않은 종로의 골목.
마당을 쓸어가는 아실의 대문으로 몇 무리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골목을 스쳐갔다.
정환은 이 역시 고즈넉한 종로의 풍경이라. 그리 여기며 시간을 즐길 뿐이다.
- 슥. 슥.
“어이, 최 사장. 같이 가. 같이. 택시 탈 거 아냐?”
정환이 그렇게 마당을 가꿔가고 있을 때. 대문을 타고는 술향기 진한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리고 슬쩍 대문 앞으로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청바지 차림의 한 사내.
짧은 수염이 거뭇하고 주름 제법 있는 얼굴에 머리는 덥수룩해 범상치 않은 외관의 사내였다.
그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슬쩍 돌리자.
‘어···?!’
- 슷.
정환은 놀라 순간 빗자루를 멈추고 만다. 왜인지, 지나가는 저 사내를 아는 눈치였다.
“택시는 얼어 죽을···. 걸어가. 걸어.”
뒤를 돌아선 사내는 걸걸한 목소리를 뽐내며 손을 흔든다. 그의 목소리가 익숙해 정환은 확신을 얻는 듯한 표정.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정환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골목 밖으로 향하고 말았다.
맞다. 가까이서 보니 드는 생각은 그것.
그런 생각에 정환은 잠시 빤히 그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꼭 만나고 싶던 사람을 만난 이의 잔잔한 미소가 정환의 얼굴에 걸린다.
“···왜 그럽니까? 뭐 문제라도?”
너무 빤히 본 걸까. 멈춰 서 뒤를 보던 사내는 정환의 시선을 의식하고 만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가 정환을 바라봤다. 정환의 시선이 조금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아. 아뇨.”
“너무 빤히 보시길래. 허허. 난 또 날 아는 사람인가 했네.”
다행히 사내는 사람 좋게 한번 웃고는 다시 돌아, 가려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저, 저기! 괜찮으시면 한잔하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평소답지 않은 정환의 말이, 돌아서는 그의 옷깃을 잡는다. 정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조금의 설렘이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