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잔. 귀인. >
5.
“어···?”
걸음을 걸어 잔을 향해 다가가던 정우가 멈칫한다. 정우는 방금 말이 들려온 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그런 생각에 정우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안 되겠습니까?”
정우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멋들어진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 재차 의사를 전해온다.
그레인 호텔에서 F&B를 총괄하는 사람인 윤현민 부장이다.
“아, 아뇨. 부장님이 드신다면야···.”
양복쟁이의 눈치를 봐서 나선 게 자신이었다. 헌데, 그런 양복쟁이가 나선다니 뭐라 말을 하겠나.
평소에야 이렇게 나서는 사람도 아니고 딱히 이번 일에도 그리 관심은 없어 보였던 이였기에 정우는 조금 의아할 뿐이다.
‘속에 구렁이는 한 열 마리 품은 사람인데···.’
바텐더 출신으로 현장을 잘 알던 김태현 교수와는 달리 순전히 펜대만을 굴려 가며 저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윤현민 부장.
모르긴 몰라도 속에 구렁이가 열댓 마리는 있을 거라. 그런 생각에 정우는 조금 조심스레 자리를 양보했다.
멀리서 저벅이며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에 맞춰 정우는 조심히 옆으로 물러날 뿐이다.
딱히 큰 걱정은 없다. 단순히 이 사람의 의도를 모를 뿐. 허나, 이 잔을 만든 사람은 조금 특별하지 않나.
맛이나 무언가를 평가하려는 이의 시선이라면, 크게 걱정되진 않는 정우였다.
“괜찮지?”
“그럼요.”
정우는 물러나는 와중에도 정환에게 슬쩍 말을 던져 본다. 그저 걱정이 담긴 말이지만, 적당히 조심하라는 사람에 대한 경고 역시 담긴 한마디였다.
“양보, 감사합니다. 신정우 치프.”
윤현민 부장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정우를 지나쳐 잔 앞으로 다가선다.
정환과 다시금 인사를 주고받는 그의 모습이 절도 있어 마치 누군가와 닮아있다.
경력이 제법 쌓인 호텔맨들은 알 수 없는 이런 분위기를 절로 풍기는 법이다.
“어떻게, 따로 마시는 법은 있습니까?”
소매 끝단을 살며시 풀며 윤 부장이 정환과 눈을 맞춘다. 이쪽 계열 관계자인 만큼, 만든 이에게 물어볼 법한 질문을 알맞게 던진 그였다.
“편하게 드시면 됩니다. 원두는 드셔도 좋지만, 술이 있을 때 함께 드시면 덜 텁텁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간단한 눈빛과 대화를 끝낸 후 윤현민 부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
마티니 글라스라 불리는 대명사격인 잔에 담긴, 마티니와는 역설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잔의 에스프레소 마티니.
그는 아래위로 잔을 살피며 여전히 층을 이루며 색을 나눈 잔에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잔이 완성된 후 오간 대화가 짧지 않았다. 여러 질문이 오갔고 그에 대한 장황한 설명까지.
원래 칵테일이라는 건 만든 후 15분에서 20분 내로 마실 걸 추천한다.
롱 스타일로 만든 드링크라도 그 정도의 시간이 추천되는 만큼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임에도 잔은 여전히 자신의 향과 색을 품은 그대로였다.
‘이걸 계산해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바텐더 출신은 아니지만, 알 건 대부분 알고 있다. 직업에 대해 그 정도의 열정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윤현민 부장은 지금 정환이 만든 잔을 보며 더욱 느끼는 게 많아 보였다.
하나의 잔을 만들며 잔이 오래 유지되도록 하는 건 이를 의도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이 잔을 만든 바텐더는 잔 후에 이어질 일들을 예측하며 잔을 길게 풀어 놓은 거라.
윤현민 부장은 눈으로만 보고도 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바텐더는 때로는 손님을 깨우기도 또 재우기도 해야 한다. 이 말은 직관적으로 손님을 깨우고 재운다는 말뿐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바텐더는 자신이 했던 말에 제법 충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윤 부장은 조심히 잔을 코로 가져가 이미 날아갔어야 했을 노즈를 맡아 본다.
진한 커피 향이 잔에 아려 마치 술이라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재료의 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노즈를 이렇게 강하게 잡으면···’
팔레트에서 느껴질 타격감이 약해질 텐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잔을 입으로 향했다.
- 호르르륵.
원두를 걸러내며 거품과 함께 입으로 흐르는 에스프레소 마티니.
포근한 거품이 입술을 감싸며 마치 피곤한 오후에 한잔의 라떼를 마시는 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그런 포근함이 가시는 순간 혀에 닿는 하나의 느낌.
‘······!!’
이럴 리가 없는 대. 노즈를 살리려면 필연적으로 죽었어야 할 팔레트가 강하게 그의 혀를 치고 나온다.
타격감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드카 자체의 깔끔한 술맛이 그의 혀를 때리고 갔다.
윤현민 부장은 순간 느껴진 놀람을 차마 얼굴에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 후우우우.
딱히 감정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은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
윤 부장은 얼른 잔향을 내뱉으며 앞서 지었던 표정을 숨기기 바쁘다.
잔향을 뱉으니 안에서는 다시금 커피 향이 올라와 입안을 한번 씻고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
자신도 모르게 그만 탄성을 뱉고 마는 윤현민 부장. 실력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야 막연히 가지고 있던 그였지만, 이건 그런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그런 맛이었다.
경력, 수상 외에는 지표로 보지 않는다던 조금 전의 자신이 부끄러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마저 드는 그였다.
“입에는 맞으신 가요? 괜찮으시면, 다른 분들에게 설명을 조금 해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맛을 알아야 실습하기에는 편할 거라서요.”
시음이 끝나자 정환은 그에게 평을 들려달라 청한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군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와중에, 유일하게 이 잔을 마신 자의 의무가 바로 이것.
윤 부장은 멀뚱히 껌뻑거리는 눈으로 정환을 한 번 보고는 잔을 내려뒀다.
“···노즈는 커피 향이 강합니다. 팔레트에서 술맛이 약할 거란 예상과 달리 팔레트도 아주 잘 잡혀 있더군요. 피니쉬는 예상 가능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거 같습니다. 단맛도 적당하고 타격감도 있고, 밸런스 역시 좋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신입들을 보며 읊어가는 맛에 대한 평가.
조금 쉽게 말해보자면.
그저 맛있다는 뜻이다.
윤현민 부장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정환은 윤 부장이 돌아간 후에야 다음 실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수많은 바텐더가 동시에 셰이커를 올려 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떠셨어요?”
양복쟁이들의 자리에서도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윤현민 부장이 그리 칭찬에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기에 다들 방금 들은 말에 한마디씩 보태보는 분위기.
그런 와중에 신승민 본부장만이 윤 부장에게 다가와 직접적인 말을 묻는다.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래요? 저야 저런 말들은 잘 몰라서요. 하하. 맛있다는 뜻이죠?”
“······.”
신승민 본부장의 물음에 윤현민 부장은 쉬이 답하지 못한다. 앞서 했던 말이 있어서일까.
그는 그저 고개만 묵묵히 한번 끄덕이고는 누군가를 손짓으로 불러왔다.
“네. 부장님.”
조금은 젊은 대리급의 양복쟁이가 그의 앞으로 조심히 다가왔다.
“‘아실’에 대한 자료. 전부 모아 주세요. 오너인 차정환 바텐더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겁니다. 참고할 업장 목록에도 상단으로 올려두고요. 또···, 진행 중인 ‘그 목록’에도 올려두세요.”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이, 신승민 본부장의 물음에는 꼭 맞는 답이 된 것만 같았다.
6.
“자, 다들 오늘 시간은 유익하게 보내셨나요?”
“네에에에!”
“다행이네요. 당연히 해주실 말씀이지만, 진심이라고 믿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아실도 꼭 들르겠습니다!”
“오늘 재밌었습니다!”
실습이 끝나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자 정환은 자리를 마무리하는 말을 이어간다.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 만큼 당연히 좋았다는 평이 이어지지만, 진심이라 믿고 싶은 정환이었다.
다들 아실과 정환을 언급하며 하루의 감상을 들려준다. 오늘의 세미나는 딱딱한 이전의 교육과는 달리, 마치 바에서 한잔한 것 같은 담백함이 가득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바씬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에는 분명 호텔 바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기라성같은 바텐더들도 호텔 출신인 경우가 많았죠. 여러분 역시 그렇게 되실 거라 믿습니다. 손님을 깨워주고, 또 때로는 조져주는. 그런 바텐더가 되시길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정환이었습니다.”
정환이 마지막 인사와 함께 허리를 접자 이내 손뼉 치는 소리가 크게 지하를 채운다.
신입들도, 또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양복쟁이들도 마찬가지. 진심이야 본인들 외에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반응이라면 오늘 있었던 행사는 나름 성공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자. 다들 이대로 자리 정리하고 30분 뒤에 위층 교육장으로 집합합시다. 세미나는 이거로 끝. 고생하셨습니다.”
정우가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말을 하자 신입들은 주변 집기만을 치우고는 우루루 지하 바를 빠져나간다.
저마다 정환과 나누고 싶은 대화는 많아 보였지만, 회사원은 단체 생활이 중요한 법이다.
“고생했어. 오늘 고맙다야. 잘하더라. 너 해봤냐?”
“형도 참. 제가 언제는 뭐 못하는 거 봤어요?”
“그래. 그건 그렇지. 짜식. 하여튼, 기특해. 저거 현수막, 가져갈래?”
“···됐거든요. 나중에 밥이나 사요. 비싼 거로.”
“기대해. 쉴 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형.”
“난 위로 또 올라 가봐야 해. 간다? 조심히 들어가고. 전화할게!”
“들어가요. 형.”
정환은 가볍게 짐을 싸며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해 갔다. 그리고 그런 정환에게 다가오는 한 명의 양복쟁이.
조금 전 정환이 만들었던 잔을 마셨던 윤현민 부장이다.
“저, 차정환 바텐더님?”
“아. 네.”
“윤현민 부장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 잔을 마셨던.”
“그러셨군요. 부장이시라면···?”
“F&B 부서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김태현 교수님이 한때 재직하셨던 자리였죠.”
“아. 네. 반갑습니다. 차정환입니다.”
어색하게 다가온 이에게는 어색한 답이 나갈 수밖에 없다. 둘은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는 명함을 교환할 뿐이다.
“오늘 좋은 강의, 감사했습니다. F&B 신입들에게 좋은 양분이 될 겁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했죠. 쉽게 해볼 수 없는 경험이니까요.”
“그런가요? 너무 능숙하셔서 마치 경험이 있으신 거 같던데요. 하하.”
너무 티가 났나. 아무렇지 않게 전해 오는 칭찬이지만, 정환은 슬쩍 등골이 서늘한 말이다.
경험이야, 많았으니까.
“예. 하···하. 감사했습니다.”
정환은 상황도 대화도 어색해 얼른 자리를 뜨려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계약된 일을 잘 처리했으니,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기도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오늘도 ‘아실’은 여시는 건가요?”
“그래야죠. 사정만 허락한다면 정해진 날 외에는 문을 닫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요. 쉬는 날이?”
“매주 월요일입니다.”
“월요일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곳에 계신다는 말씀이겠군요.”
“그렇···죠?”
“좋네요. 조만간, 아실에 한번 들르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언제든 편히 찾아주십시오.”
무슨 손님으로 온다는 말을 이렇게 거창하게나 할까.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편히 오란 말을 전했다.
손님으로야 누가 오던, 어떻게 아는 사람이 오던 무슨 상관이겠나.
그런 생각에 정환은 아무런 부담 없이 그의 말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그때는···괜찮은 선물을 가져가도록 하죠.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다음에 나오는 그의 말이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네···?”
“아. 아닙니다. 아직은 조금 이른 이야기죠. 그때 뵙죠.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신 본부장님과 다른 절차는 이야기가 되셨나요?”
“아, 네. 대부분은요.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어 보이더군요. 그레인 호텔이잖아요.”
“오늘 강의비도 곧 입금될 겁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자리로도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윤현민 부장은 애써 말을 흐리고는 정중히 허리를 접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접어가는 허리를 각도가 바텐더와 닮아 역시 호텔맨과 바텐더는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였다.
‘이상한···사람이네?’
정환은 맞은 편에서 비슷하게 허리를 접고는 짐을 전부 챙겨 어깨에 걸쳤다.
그저 이상한 사람이라.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라. 그렇게 평가하며 그레인 호텔을 빠져나가는 정환.
아직은 그가 어떤 선물을 가져올지, 정환도 모르는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