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잔. 신입에게. >
3.
“종로에서 클래식 바 ‘아실’을 운영 중인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아실에서 멀지 않은 대로변에 자리한 그레인 호텔. 같은 종로이지만 사뭇 다른 분위기를 뿜는 곳에서 정환은 자신을 소개하며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잘 다려진 셔츠와 깔끔한 조끼를 걸친 젊은 바텐더들이 눈을 빛내고 있다.
그레인 호텔에서 하반기에 새로 채용한 신입 바텐더들이다.
그레인 호텔이라는 제법 큰 브랜드를 등에 업어서일까, 그들의 어깨는 넓게 펴져 있었고 자세는 각이 잡혀 보기가 좋았다.
호텔에서 일하는 바텐더가 모두 이들처럼 신입으로 시작하는 건 아니다.
정우처럼 경력을 쌓고 들어오는 이들도 있고 이렇게 신입으로 시작하는 이들도 있는 곳이 바로 호텔.
허나, 호텔이라는 이름의 회사에서 전력을 다해 키워주는 이들은 외부에서 온 다른 바텐더가 아닌 바로 이들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아실’에 와보신 분도 있을까요? 아. 네. 몇 분 있으시군요. 어떠셨나요?”
“좋았습니다!”
“캐주얼해서 더 편한 느낌이었습니다.”
“호텔 바와는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힙한 느낌이었어요.”
“그렇죠. 다들 잘 보셨네요. 물론, 로드 바이기에 호텔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
정환은 차분히 세미나를 시작하며 가볍게 참석한 신입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간단한 문답을 통해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건 이전 생에서부터 정환이 세미나에서 주로 쓰던 방식이다.
“그럼, 혹시 아예 다른 로드 바를 방문한 적이 없는 분도 계신가요? 흠. 적지만 분명 있긴 하네요. 호텔 바는? 아. 다들 호텔 바는 가보셨군요. 영리하네요. 여기서는 당연히 그렇게들 답해야죠. 잘했어요.”
- 하하하하하.
문답을 주고받으며 간단히 농담도 섞는다. 가볍게 흘러가는 와중에도 적당히 필요한 주제를 건드리는 모습이 이를 주관한 사람들의 눈에는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잘하네요.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던데.”
“흠. 아직 초반이니까요.”
세미나가 펼쳐지는 그레인 호텔의 지하 바에는 바텐더와 강의자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모든 바텐더를 총괄 지휘하는 신정우와 또 다른 양복쟁이들.
신승민 본부장이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인과 대화를 나눈다. 호의적인 말투가 묻어 나오는 그의 옆에는 묵묵한 표정의 키 큰 중년인이 자리하고 있다.
“윤현민 부장님은 ‘아실’에 가보셨나요?”
신승민 본부장이 그런 묵묵한 사내에게 친근히 말을 붙여간다. 부장이란 직책을 단 그는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에 호텔 배지까지 똑바로 붙어 있어 한눈에 봐도 호텔맨처럼 보였다.
“아뇨. 아직 가본 적은 없습니다.”
“신기하네요. F&B를 총괄하시는 분이면 괜찮은 바는 전부 가보시지 않았나요?”
“그러긴 합니다만···”
들려오는 말이 여러 정보를 전해준다. 부장이라는 직책과 F&B를 담당한다는 말.
무언가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며 그가 한때 몸담았던 직책인 것만 같다.
지금의 강단에 서고 있는 김태현 교수. 그가 한때는 이곳 그레인 호텔의 F&B부서의 총괄부장이기도 했었다.
어쩌면, 윤현민이라는 사내는 그 후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괜찮은 곳이 아니어서 일지도 모르죠.”
“네?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인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미나도 제가 동의한 거죠. 하지만 인기가 많다는 게 실력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에 판단을 내릴 순 없습니다만, 글쎄요. F&B 부서에서 참고하는 바의 목록에는 없는 곳입니다.”
“흠. 냉정하시네요. 신정우 치프의 사제고 아르센 출신이지 않습니까? 강성원 대표와의 인맥도 있고. 실력은 좋을 텐데요.”
“신정우 치프의 실력이야 인정합니다. 9년이 넘는 경력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분은 다릅니다. 인맥과 인기가 바텐더의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흐음. 복잡하네요. 저 같은 회사원은 잘 모르겠군요.”
“저도 회사원입니다. 그저, 보는 자료가 본부장님이랑 다를 뿐이죠.”
“그럼, 바텐더는 어떤 지표로 평가를 해야 하는 겁니까?”
딱히 따지는 어투는 아니었다. 정말 궁금증을 담아 윤현민 부장에게 말을 물어보는 신승민 본부장.
윤 부장은 말을 물어오는 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무겁게 입을 연다.
이들의 앞에서는 정환이 셰이커를 잡는 법과 스터하는 법에 대해 열띤 강론을 펼치고 있다.
“직접 잔을 마셔 볼 수 있다면 제일 좋습니다. 다만, 모든 바텐더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우선은 지표로 한 번은 거른 후, 검증된 이들의 잔을 마셔보고 참고하는 편입니다.”
“저기 차정환 바텐더는 그 거름망에서 걸려 나간 사람이다, 이 말로 들리는군요.”
“뭐. 그렇게 보셔도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바텐더는 우선 업계에 들어온 경력. 그 경력을 먼저 봐야 하니까요.”
“음. 그게 유일한 지표인가요? 그렇다면 이해가 되네요. 이제 2년 차라고 했죠, 저분은.”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지표는 그렇습니다. 다른 것도 없진 않습니다. 권위 있는 대회의 수상 경력. 그것까지 종합해서 일단은 목록을 만들어 두는 편입니다.”
“업계 경력과 수상 경력이라. 객관적이네요. 말씀처럼.”
“차정환 바텐더. 저도 많이는 들었습니다. SNS에서도 뜨고 있고 방송도 출연하고···. 이건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말이지만 김태현 선···아니. 교수님이 아실이라는 곳의 투자자란 말도 있더군요.”
“김 선배가요? 허어. 그럼, 또 이야기가···”
“말씀드렸지만 인맥은 객관적인 자료는 아닙니다. 그래서 참고 목록에도 없는 거죠. 다만···”
윤현민 부장은 말을 조금 흐리며 저 멀리서 열심히 젊은 바텐더들의 자세를 고쳐주는 정환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조금의 흥미가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우연히 기회가 생긴다면 마셔보고 그 평가가 바뀔 수는 있습니다.”
그가 이번 세미나에 동의한 건 무언가 다른 목적도 있어 보였다.
그의 흥미가 가득 묻은 시선이 한 바텐더의 동작을 직접 고쳐주는 정환에게 닿았다.
“자, 어깨에 힘을 조금 더 빼고 해볼까요? 라인이 중요해요. 코와 턱, 그리고 명치. 이렇게 선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서 스트로크와 스냅을 주는 거죠.”
“이, 이렇게 말씀인가요?”
“좋아요. 조금 전보다는 훨씬 좋네요. 계속해 보세요. 팔꿈치만 안으로 넣고.”
정환은 바텐더들 사이를 돌며 조금 전 자신이 알려줬던 자세를 하나씩 잡아주고 있다.
아직은 셰이커를 잡는 자세가 어색한 이들은 말 그대로 정석이라 부를 수 있는 정환의 자세를 배워가고 있다.
- 살가각! 살깍! 살각!
얼음과 물만이 든 셰이커들이 점점 소리를 잡아간다. 정환은 바텐더들 사이를 걸으며 소리만으로 이들의 자세가 바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중이다.
“셰이커는 정직합니다. 들려오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건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뜻이죠. 자세야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라인과 스트로크, 스냅. 이 세 가지 만큼은 꼭 지켜야 늘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이걸 몸에 완전히 익힌 후에야 각자의 방식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실습이 끝나자 정환이 다시금 앞으로 나가 방금 배운 걸 정리해준다.
신입들은 그런 정환의 말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기법을 익혔으니까 직접 이걸 이용해서 칵테일을 만들어 봐야겠죠?”
- 오오.
- 지금? 바로?
- 메이킹 교육도 하는 거야?
다들 칵테일이야 만들 줄은 안다. 여러 레시피를 외우며 조주기능사라는 자격증을 갖춘 이들이니까.
허나, 호텔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교육 중에는 따로 메이킹 과정이 없었기에 정환의 말이 나오자 조금 웅성거리는 분위기였다.
“자. 어떤 칵테일을 만들어 볼까요? 혹시, 따로 만들어 보고 싶은 칵테일들이 있으세요?”
이어지는 정환의 질문에도 이들이 쉽게 답하지 못한다. 이건 회사원들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
이들은 조용히,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신입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우가 조용히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다들 내 눈치 볼 거 없어. 난 상관없으니까. 편하게들 말하라고. 하나라도 더 배워들 오고.”
다른 바텐더가 여는 세미나였다면 메이킹을 말렸을 수도 있다. 여긴 회사고 엄연히 절차가 있으니까.
허나, 정환이라면 이는 조금 별개의 이야기.
정우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재량의 한도에서 정환이 마음껏 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자. 치프께서도 허락하셨네요. 편하게 해보죠. 음, 주문. 그래요. 주문한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해볼까요? 거기 앞에 앉은 분. 어때요? 한 잔 주문해 보시겠어요?”
정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환이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게 일을 진행한다.
마치 손님에게 주문을 받듯 한명을 골라 말을 물어가는 정환. 주문이라는 말을 쓰니, 왜인지 정환의 몸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저, 저요? 음···. 전, 새로운 칵테일? 아직 안 배운 새로운 칵테일을 하나 배워보고 싶습니다! 조주기능사 시험에 안 나오는 칵테일로요!”
“조주기능사에 안 나오는 칵테일이라. 좋은 주문이네요. 바에는 여러 주문이 빗발치죠. 거기에 호텔맨은 안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죠. 새로운 칵테일을 꾸준히 공부해 두는 게 분명 좋을 겁니다. 좋아요. 또, 다른 주문은 없나요?”
정환은 한 명의 의견을 듣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다들 우물거리는 와중에 유독 한 사람이 정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소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얼굴에 표정까지 짓궂어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었다.
“저쪽 분도 할 말이 있으신 거 같은데요? 주문해 보시겠어요?”
“엇. 저 말씀입니까?”
“네. 거기 두 번째 줄에 남성 분.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셔 보이시던데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주문이라는 말을 하셔서···. 아직 로드 바는 안 가봤지만, 가본다면 꼭 해보고 싶은 주문이 있긴 해서요. 헤헤.”
“편하게 해보세요. 치프께서도 허락하셨으니까요. 이것도 경험이죠.”
정환이 편하게 말하라 하자 지목받은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는다.
해도 되는 말일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정환은 인자한 표정을 짓고는 턱을 들어 끄덕인다. 일종의 재촉이었다.
“그···, 만화에서 보니까 이런 주문을 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혹시, 저희에게 어울릴 만한 한잔. 이런 주문도 가능한가요?”
- 하하하.
- 푸하하하하.
재촉 끝에 나온 주문에 주변이 웃음바다가 되고 만다. 바텐더가 아니라도 다들 상상해봤을 주문에 모두가 크게 웃는 분위기였다.
- 찌릿.
한 사람만 빼고.
옆에 선 정우만이 눈빛을 조금 사납게 바꿨다. 편하게 하란다고 마냥 편하게 하는 건.
회사원의 미덕은 아닐지도 모른다.
“재밌네요. 알겠습니다. 그 주문도 우선 받겠습니다. 바에서는 한 번쯤 들을 수 있는 주문이니까요.”
“엇.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회사 생활이 조금 걱정되는 직원의 주문을 정환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여기 모인 다른 이들과 달리, 정환은 틀에 박힌 회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두 주문을 모두 만족할 칵테일이 하나 떠오르네요. 마침 연습한 기법인 셰이킹도 들어가고. 물론, 조주기능사에는 나오지 않고 또 호텔 바텐더인 여러분들에게도 어울리는 그런 잔이죠. 제가 먼저 만들어 볼 테니, 한번 보고 여러분도 실습해 보도록 합시다.”
재밌는 주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환은 천천히 바 안으로 걸어갔다.
정환은 이미 이들에게 보여줄 잔을 정한 것처럼 보였다.
정환은 몇 개의 재료를 준비하고 셰이커를 앞에 두더니 이내 뒤로 돌아 구석에 놓인 조금 한 기계를 만지작거린다.
세미나를 준비하며 장비의 위치를 미리 살펴두었기에 필요한 걸 찾는 일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다.
- 위이이이이잉.
정환이 손을 댄 기계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위용을 뽐낸다. 아직 바 안을 경험하지 못한 신입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눈치다.
- 솨아아아아악.
웅장한 소리를 뿜던 기계가 한 줄기 까만 액체를 아래로 토해낸다.
이제야 정체를 알아보는 신입들. 고소한 커피 향이 이들을 반기며 정환이 만진 기계가 에스프레소 머신임을 표했다.
정환은 잘 뽑힌 에스프레소를 셰이커에 넣고는 다른 재료들을 더하기 시작했다.
보드카와 MR. BLACK이라 적힌 커피 리큐르, 그리고 시럽과 얼음을 넣은 뒤에야 닫히는 그의 셰이커였다.
정환이 셰이커를 올려 든다. 일시에 모이는 신입들의 시선. 거기에 뒷줄에 자리한 회사원들의 시선까지 모이니 조금은 부담이 될 법한 상황.
정환은 이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셰이커를 흔들어갈 뿐이다.
-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정석적인 자세에서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정확히 기준점에서만 오가는 정환의 셰이커.
앞서 보여준 얼음과 물만 넣었을 때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또 실전처럼 보이는 자세가 이들을 반긴다.
맛을 계산하고 이를 풀어가며 만드는 모습이 물과 얼음만으로 보여주던 셰이킹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 촤아아아아악!
셰이커는 뚜껑을 열고는 안에든 액체를 잔에 토해내기 시작한다. 까만 액체 위로 거품이 끼어 포근한 느낌을 가득 안은 술.
아래에는 에스프레소처럼 어두운색이, 위에는 마치 라떼처럼 포근한 거품이 낀 술이 잔에 내려앉았다.
정환은 가니쉬로 원두를 몇 알 토치에 태워 그 위에 올린 후, 잔을 완성했다.
“조주기능사 레시피에도 없고 또 호텔 바텐더에게 어울리는 한잔···”
- 스윽.
“에스프레소 마티니. 나왔습니다.”
정환은 잔을 코스터에 올린 후 이름과 함께 이를 앞으로 살포시 밀어냈다.
잔에서 풍기는 깊은 커피 향이 넓은 그레인 호텔의 바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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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프레소 마티니(Espresso Martini).
(보드카 + 에스프레소 + 시럽 + 커피 리큐르)
- 자세한 설명은 다음 화에... 두둥!
- TMI) 제가 참 좋아합니다. 머신이 있는 곳이면 꼭 주문하는 칵테일입니다!
- 달콤하지만 상큼하진 않은. 시트러스한 맛이 없는 달콤한 칵테일을 원할 때면 꼭 시키는 잔입니다.
- 칵테일 중 달다는 설명이 있는 칵테일은 대부분 과일 맛인 경우가 많은데요, 이 녀석은 그렇지 않아서 좋습니다.
- 커피 대신 매일 마시고 싶습니다..ㄹㅇ루다가..
- 전 사용되는 커피 리큐르로 깔루아보다는 MR블랙을 선호합니다! 옙! 제 취향을 글에 썼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