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잔. 세미나.
1.
“요즘은 어때? 바쁘냐?”
조금은 어색한 모습으로 아실에 들어섰던 정우. 무언가 풍기는 분위기가 처음에는 남달랐지만, 정우는 어느새 평소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아실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용을 처음 만난 다음 날 호텔에서 마주한 이후, 정우가 아실을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 형한테도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조금 바쁜 편이에요! 저 세 번째 가게를 열 사람을 찾았거든요. 전통주를 다루는 바텐더를 찾았어요. 지금은 ‘숲’에서 일하고 있구요. 거기서 일만 익숙해지면 여기 종로에 가게를 열 거에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해서일까. 정환은 기다렸다는 듯 정우의 질문에 말을 다다다 쏟아내며 밝은 기운을 연신 뿜어냈다.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가는 정환의 모습이 마치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어른들에게 자신의 하루를 쭉 일러바치는 아이의 모습처럼 천진난만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경기도의 한 양조 마을에서 주용을 만난 이야기부터 그를 설득해 곧 종로에 가게를 열게 할 거란 이야기.
전통주를 이용한 칵테일 메뉴의 개발은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명진의 뜻이었던 만큼 정환은 이 이야기를 정우에게도 얼른 들려주고 싶었다.
마침 일이 잘 풀렸을 즈음 큰 형이 이렇게 찾아오니, 정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며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기 바쁘다.
“잘됐네. 마스터가 좋아하시겠다.”
정우는 그런 동생이 귀여운지 누구와 닮은 인자한 미소만을 얼굴에 지을 뿐이다.
이럴 때는 장난기가 쑥 빠진 정우의 얼굴이다.
“곧 돌아오신대. 여기도 이렇게 바뀐 걸 보면 좋아하실 거야.”
“그렇죠? 술을 조금이라도 드실 수 있으면 더 좋으실 텐데요.”
“어느 정도 회복하셨으니 가볍게는 괜찮으실 거야. 뭐. 알게 모르게 드시고 있을지도?”
“그쵸? 해외에서는 또 다른 바를 가봐야 직성이 풀리실 분이니까요.”
“사모님이랑 전쟁 중이겠지. 뻔해. 마스터도 참 단순하시다고.”
두 사람은 그리운 어떤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에서 정우는 어느새 이야기를 뚝 그치고는 쭈뼛거리며 무언가 정환의 눈치를 살핀다.
이건 필시 하려는 말이 있는 거라. 오래도록 사람을 상대했던 정환은 이런 반응을 모르지 않았다.
“형. 오늘 이상해요. 아까 들어올 때도 그렇고. 뭐 하실 말씀 있어요? 편하게 하세요.”
“그지? 티가 조금 나지? 어색했냐?”
“네. 그냥 당당히 쳐들어오셔서 할 말 하시고 가셔야죠. 저한테 못할 말이 뭐 있으시다구요.”
“쓰읍. 그래. 그건 그렇긴 하다.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도 그렇지.”
“부탁…할 게 있는 거죠? 말씀하세요. 형 부탁인데요.”
“이야. 다 들어 줄 것처럼 말하네?”
“들어 보고요?”
“그냥 말이라도 그렇게 해, 인마. 설마 무리한 부탁 하겠냐.”
“겁나는데요? 뭐예요.”
이래 보여도 둘은 제법 깊은 사이다. 시간이야 고작 이제 1년을 조금 넘게 봐왔지만, 그 농도가 다르지 않나.
평소 동생들을 친근하게 대해도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어려워하는 이가 정우임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늘 가벼움 속에 진중함을 숨기고는 홀로 무언가를 끌어안았던 사람이, 아르센의 매니저 신정우였으니까.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아도, 그가 아랫사람에게 무언가를 쉽사리 부탁하지 못하는 이임을 정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왜 바텐더들이 하는 세미나…라고 있지 않냐.”
“세미나요? 강의 같은 거 말하는 거죠?”
“응. 그거. 신입들 교육 차원에서 게스트 바텐더를 불러서 세미나를 진행하려 하는데…혹시, 될까?”
정우는 연신 볼을 긁적이며 가져온 본론을 꺼내 본다. 정환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이런 부탁이 영 어색한 모습이다.
“제가요? 그레인 호텔에서요?”
“그렇…지. 이번에 하반기에 신입을 대대적으로 뽑았거든. 그 교육 과정에 또 이런게 필요해서.”
“그레인 호텔이면 실력 좋은 바텐더도 많지 않나요? 아니, 다 떠나서…형이 있잖아요. 왜 굳이 저를…”
그레인 호텔이면 국내 호텔 체인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대형 브랜드였다.
호텔에 붙은 바만 따져본다면 국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바를 갖춘 곳이 그레인 호텔.
거기에 신정우라는 실력 좋은 이가 치프로 일하는 곳 역시 그레인 호텔이기에 정환은 자신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온 이유를 알지 못하는 눈치다.
“음…. 뭐,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긴 한데, 일단 호텔이라는 게 사정이 또 있어서 말이지.”
“사정이요?”
“얼마 전에 호텔에서 마주쳤던 직원 기억해?”
“어, 그 기획팀이라던 분?”
“응. 기획팀에 신승민 본부장이라고. 대외적인 행사랑 홍보 같은 건 다 그 양반 작품이거든. 안목이 좋아. 마케팅도 잘하고.”
“그분이 갑자기 왜…?”
“그레인 호텔이 ‘바’로 유명은 해도 그거야 업계 내의 이야기잖아? 아무래도…”
“얼굴마담이 필요한 거군요. 티비에 한 번 비췄던 제가 딱이고.”
“그렇지. 아무래도 펜대 잡은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봐. 유명한 바텐더인 네가 신입들 교육을 시켰다! 뭐, 그런 타이틀이 필요한 거지.”
“하아. 완전 쌩 신입이에요?”
“거의 그렇지. 그래도 F&B로 들어온 애들은 아냐! 우린 바텐더를 따로 뽑으니까!”
“참…, 위로가 되긴 합니다만….”
“해…줄 수 있어?”
은근슬쩍 다시 저자세로 향하는 정우의 모습에 정환이 슬쩍 진땀을 흘린다.
누군가를 세미나의 형식으로 가르친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기존에 바텐더를 하던 이들이 아닌 호텔의 신입 바텐더라니.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이 분명해 보였다.
“저랑 친하다고 하셔서 곤란해진 거죠?”
“아니, 뭐. 친한 건 사실이니까.”
“흐음. 부담되긴 하는데…, 진짜 제가 해도 되는 거예요?”
“야. 정환아. 네 실력이야 내가 보증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
“경력이 짧잖아요.”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딱히 비약적인 실력의 상승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역시, 그건 그렇지?”
정환이 점점 부탁을 들어줄 기색을 내보이자 정우의 얼굴에는 얼른 화색이 돈다.
정우는 은근한 표정을 지어가며 정환에게 어필하고 있다.
“하아. 참. 언제 해야 하는 건데요?”
“당장은 아니야! 애들 호텔 교육 1,2주 받고 난 후쯤? 그때 한 번 와주면 좋지.”
“주제는요?”
“자유! 너 마아-음대로 애들 개조시켜도 된다! 그건 내가 책임질게!”
“쓰읍. 그건 좀 매력적인데요?”
“그렇지? 기왕이면 팍팍! 좀 가르쳐 주라. 차정환 비스무리한 놈이 하나라도 좀 나오게.”
“하아. 그게 쉽나요. 강의비는 챙겨주는 거죠?”
정환은 조금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확정적으로 정우의 부탁을 들어주는 말을 전한다.
부담이야 되는 일이다. 허나, 부담이라도 이건 부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
정우라면. 아르센에서 동고동락하며 즐거운 시절을 보냈던 매니저 신정우의 부탁이라면.
정환이 딱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인마! 형이 위에 잘 말해서 팍팍 챙겨주라 할게! 차비도 줄까? 응?”
“술도 마음껏 쓸 수 있는 거죠?”
“아휴. 기주로 무엇을 쓰시든 자유랍니다. 왜? X.O로 사이드카 한 번 만들래? 좋지-!”
정환의 입에서 정우의 부탁을 승낙하는 말이 나오자 정우는 연신 몸을 움직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호텔의 치프라는 자리가 단순히 바텐더의 일만 하는 자리는 아니기에 더욱 부담이 컸던 정우였다.
“고맙다. 정환아. 안 그래도 너 다녀간 후로 내가 얼마나 시달렸던지! 내가 딱 2주 참다가 이렇게 와버렸다. 진짜 고마워!”
“뭘요. 형도 많이 도와주시잖아요. 다음에 제가 필요할 때 한 번 더 도와주셔야 해요?”
“당연하지. 하나 달아둬.”
그렇게 정우는 정환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에야 아실을 떠날 수 있었다.
자세한 일정은 출근 후 조율한 뒤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실을 떠난 정우.
며칠이 지나고, 정우에게서 정확한 세미나 일정이 정환에게로 전해졌다.
2.
정우가 아실을 다녀가고 2주가 지난 날. 정환은 도구를 챙긴 가방을 들고는 종로의 한 대로를 걸어간다.
오늘 그가 향하는 곳은 아실이 아닌, 그렌인 호텔이었다.
“어, 정환아! 여기! 여기!”
호텔의 정문을 들어서자 마중 나온 정우가 연신 손을 흔든다. 바텐더스럽게 재킷을 걸친 정우가 문앞까지 나와 정환을 마중했다.
“정우 형.”
“자-알 왔어. 오느라 고생했지?”
“같은 종로인데요, 뭘. 시간은요?”
“아직 여유 있어. 지금은 다른 교육 중이고. 보자아. 한 30분? 30분 후면 다들 내려오겠다.”
“어때요? 신입들은. 다른 교육은 형도 하셨죠?”
“다들 그렇지 뭐. 그래도 호텔이라고 다들 조주기능사 자격증 정도는 가지고 있어. 아직 실전 경험은 없고.”
“그래요?”
“준비는 좀 했어? 오늘은 뭐로 하려고?”
“글쎄요. 이것저것 떠오르는 게 있긴 했는데 우선 가서 교육생들 상태를 좀 봐야죠.”
정우는 친근한 표정으로 정환을 안내하며 말을 이어갔다. 자세한 수업 내용은 서로 오간 것이 없기에 정우도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크게 준비한 건 없는 정환이다. 이런 세미나가 어렵고 가볍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경험이 또 없는 건 아니니까.
정환은 이전 생에서 수많은 세미나를 개최하고 또 많은 바텐더를 교육한 경험이 있었다.
“부담은 가지지 말고. 그래도 겉모습 정도는 갖춰주라. 로드 바랑은 조금 또 달라서.”
“나름 준비해 왔어요. 할 거면 제대로 한다니까요.”
“그래. 너만 믿는다. 자. 이쪽으로.”
정우는 호텔 안을 누비며 정환을 지하에 있는 바로 안내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중세풍의 고풍스러운 바.
일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그레인 호텔의 지하 바가 오늘은 조금 이른 시간에 정환을 맞이한다.
불이 전부 켜진 바 안의 풍경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 신정우 치프.”
바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바텐더들보다 정환을 먼저 반기는 건 양복을 입은 이들이다.
그중 한 명은 일전에 안면을 튼 기획팀의 신승민 본부장이었다.
“차정환 바텐더님. 이렇게 또 뵙는군요. 이번 세미나,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초청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그레인 호텔도 이제 차정환 바텐더님 같은 이 ‘스타’ 바텐더! 그런 분들을 최대한 육성해볼 예정입니다. 오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환은 얼른 장단을 맞추며 그와 함께 정수리를 맞댄다. 초청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온전히 거짓처럼 보이진 않는 정환이다.
‘뭐, 나도 이력서 한 줄 느는 거니까.’
그레인 호텔이나 되는 곳에서 세미나를 개최한 건 훗날 경력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생에서 정환에게 부족한 건 이런 것들. 여러 매체를 통해 인지도는 늘었지만, 그건 업계 내의 평판이나 경력과는 조금 다른 부분일 것이다.
정우의 부탁을 들어주는 형식으로 왔지만, 오늘의 자리를 잘 마무리하면 이는 정환에게도 훗날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정환은 신승민 본부장 뒤로 선 몇 명의 양복쟁이들과 목례만을 나누고는 정우와 함께 안쪽 바를 향해 걸어갔다.
정환을 흘긋 보고는 무언가 속닥이는 말을 나누는 그들이다.
“이해해. 나중에 사진 찍으려고 다들 몰려와 있는 거야.”
“그렇게까지 해요? 제가 뭐라고….”
“이거도 우리 나름 행사라서. 다들 알잖냐. F&B니 뭐니 해도 그냥 호텔맨들이야. 김태현 교수님이 특별한 거였지.”
“저야 뭐 상관은 없죠. 형이 고생이겠네요.”
“말도 마라. 팔자에도 없는 회사원 생활. 질린다. 네 덕에 한동안 숨통이나 트이겠지.”
“저한테 잘하세요. 그럼.”
“잘하지 않냐? 더 잘해?”
“더요!”
장난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안쪽에 널따란 바 공간에 닿는다. 정환은 그런 공간 가운데 놓인 무언가를 보고는 슬쩍 표정을 찡그렸다.
“형….”
“이해해. 회사야. 회사.”
정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스타’ 바텐더 ‘차정환’ 바텐더 특별 세미나. - 그레인 호텔 신입 연수.]
라는 작지만 촌스러운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아….’
차마 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정환은 서둘러 바 안에 들어가 짐을 풀 뿐이다.
그렇게 정환이 준비를 끝마쳐갈 즈음.
멀리서 바 문이 열리고는 한 무리의 신입 바텐더들이 줄을 맞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