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07화 (107/175)

107잔. 점점.

4.

“잘 지내셨나요?”

영업이 시작되기 전 아실을 찾은 주용에게 정환은 한잔의 커피와 함께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던 건 아니었다. 둘은 고작 3일 전에 이 자리에서 마주했고 제법 긴 시간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딱 3일이 지나고 난 후 다시 찾은 이가 바로 주용. 주용의 얼굴에는 제법 깊은 피로감이 자리해 그리 편히 지내진 못한 모양이다.

“…잘 지내진 못했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잠을…통 못 자서 말이죠.”

잠을 못 잤다라. 말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정환은 슬쩍 미소 지을 뿐이다.

왜 못 잤을지는 잘 알고 있다. 밤새 그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광경이 떠나질 않았을 테니까.

“매일 밤 떠오르더군요. 그날…손님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좋은 기억이죠.”

“나름 괴롭기도 했습니다만.”

“싫으셨나요?”

“…….”

싫었냐는 말에 주용은 단호히 답하지 못한다. 싫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설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결심은 선 모양이군요. 어떻게, 바로 물어도 괜찮을까요?”

본론이 더디게 다가오자, 정환은 곧바로 본론을 향해 달려간다. 시간은 이미 많이 양보했던 정환이다.

“…많이 고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답을 내려도 되겠더군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제가 내린 답은…”

주용은 본론을 향해 곧바로 물어오는 정환의 말에 눈을 깊게 뜨고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들려준다.

“해보겠습니다.입니다.”

‘됐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 씨익.

정환은 답이 들리자 곧바로 입꼬리를 찢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내미는 그의 손에는 제법 밝은 기운이 서려있다.

“그전에.”

순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일어선 정환을 주용이 손을 들어 막아선다.

아직은 할 말이 남아 있는 그였다.

“미리 확답을 받아야겠습니다.”

“확답이라면?”

“돕겠다는 말. 그걸 정확히 짚어두고 싶군요. 정환 씨를 믿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짧게 봤지만, 충분히 믿을 사람으로는 보이니까요. 하지만, 일이라는 건 또 다른 문제죠. 정확히 서류상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도움을 준다는 것과 구체적인 범위를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서류로 확인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저쪽에서도 제법 고민할 줄 알았는데. 근엄하게 뱉어가는 나름 고심한 조건에도 즉답이 나오니 주용은 이내 맥이 탁! 하고 풀리며 표정을 풀고 만다.

“즉답이라니…. 당신은 정말 이 일에 진심이시군요.”

“그만큼 주용 씨의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바의 골목. 그걸 위해서 말입니까?”

“네. 종로에 터를 잡을 때부터 전통주는 계속해서 구상했던 숙원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물려주신 숙제기도 했죠.”

“그렇다면 직접 하시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뇨. 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맞습니다. 결국, 이 문제의 결론도 손님이니까요. 손님께 더 좋은 잔을 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하는 게 맞습니다.”

절절하게 전해져 오는 정환의 말에 주용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미소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맞는 말이다. 제법 감동적인 말이고. 거기에 이상도 조금은 묻어 있지 않나.

애초에 이런 말로 설득했다면 넘어갔을까. 감동도 있고 사연도 있지만, 그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전해지는 절절한 사연이기에, 주용은 더욱 마음이 굳건해지는 중이다.

“좋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죠. 일전에 말씀 나눴던 것처럼 우선은 저도 ‘바’에서 일을 조금 배워야겠죠. 돌아가는 프로세스야 안다지만, 현장은 또 다를 테니까요. 우선은 거기부터 도움을 요청합니다.”

“‘숲’의 오너인 임재훈 바텐더와는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될 때부터 그곳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레시피를 연구하는 것과 손님을 대상으로 맛을 선보이는 것, 또 보완하는 것까지. 이것도 자율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보장. 하겠습니다.”

“그리고 차정환 씨가 직접 그 칵테일을 만들어 보고 밸런스 역시 잡아줘야 합니다. 이것까지. 제 조건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주용은 3일 동안 고민하며 준비한 자신의 조건을 다다다 쏟아내며 정환의 의중을 확인한다.

3일 동안 그의 머리를 지배했던 여러 생각 중에는 정환이 재해석해 보여줬던 맛 역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큰 틀을 믹솔로지스트인 자신이 잡는다. 그리고 나머지 디테일은 실력 좋은 바텐더인 정환이 완성하고.

얼핏 듣기에도 이상적인 이 분업 과정 역시 그의 결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했다.

“기회를 주신다면, 그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군요. 다음 주부터 당장 서울로 옮겨올 예정입니다. 그때에 맞춰 준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신변 정리에도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요.”

“오실 때에 맞춰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그럼, 공장은?”

“그대로 둘 예정입니다. 자동화도 해두었고 일할 사람도 구해뒀습니다. 공장에서 직접 빚은 술도 이용하고 숙성 중인 녀석들도 있으니까요. 아마, 기존에 맛보지 못한 시도를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결심이 서고 서로의 합의점을 찾자 일을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주용은 지난 3일 동안 고민뿐 아니라 ‘만약’이라는 그 약을 다시 접하고는 여러 미래를 그려본 눈치였다.

“최소 3개월. 최대 6개월. 그 정도 후에는 독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금은 괜찮으실지요? 필요하시다면, 투자처를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뇨. 자금은 제가 준비한 돈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리 큰 가게를 열 것도 아니고. 아실 정도. 그 정도의 크기로 만족할 생각입니다. 괜찮겠죠?”

“가게는 전적으로 주용 씨의 취향대로 꾸미셔도 좋습니다. 제가 참견할 바가 아니죠.”

“좋네요. 그럼,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거로 하시죠.”

“다음 주 전에 시간은 없으실까요? 미리 약속을 잡아 ‘숲’의 임재훈 바텐더와 만나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주말 정도에 다시금 종로에 오겠습니다. 그때, 같이 뵙죠.”

“잘 통하실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죠. 이제는 한배를 탄 사이니.”

말을 마친 주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환을 한 번 바라본다. 이제는 한배를 탔다는 그의 말이 싫지 않아 정환 역시 비슷한 눈빛으로 답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용 쪽에서 먼저 뻗어가는 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게는 각자가 꾸려가겠지만, 결국 하나의 골목을 이끄는 건 정환 씨가 해줘야 하는 역할일 겁니다. 기왕 함께 탄 배. 선장이 잘 이끌어 주길 바랍니다.”

“시작도 전에 부담을 주시는군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될 겁니다. 기대하죠.”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 꽈악.

정환은 주용이 내민 손을 반가이 잡고는 마지막 말을 전한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눈빛의 성질이 3일 전과는 많이 다른 지금이다.

“주말에 뵙죠.”

“연락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제 재훈까지 모여 함께 나눠야 한다. 오늘은 결심이 선 걸 확인한 거로 충분한 날.

의사를 전한 것만으로 주용은 오늘을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주용은 이전과는 달리 후련한 등으로 아실을 등지고는 종로의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점차 모습을 갖춰가는, 또 선명해지는.

종로의 바 골목을.

5.

주용이 종로로 이주를 결심하고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숲’에도 출근을 시작하고 거처까지 서울에 마련한 그.

“일은 할 만해요?”

정환은 이렇게 ‘숲’에 들를 때마다 그의 근황을 살펴보고 있다. ‘숲’의 신입 바텐더 교육도 가끔은 정환이 봐주고 있었기에 둘은 생각보다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일은 할 만합니다. 현장도 재밌네요. 손님도 많아서 여러 정보를 모으기도 나쁘지 않고요.”

“메이킹은 아직이죠?”

“네. 손을 놓았던 시간도 있고 아직은 바텐더로서 배울 게 많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정해진 규칙은 저도 따라야죠.”

이른 시일 내에 가게를 열 사람이기에 조바심을 낼 수도 있다. 허나, 주용은 그런 모습 없이 차분히 바씬에 정해진 룰을 따라가며 바텐더로서 모습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정환은 사람을 잘 만났노라. 내심 자신의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정환이 주용과 그렇게 안부를 주고받고 있을 때, ‘숲’의 백사이드가 열리며 다른 이가 대화에 참여한다.

‘숲’의 오너인 바텐더 임재훈이었다.

“아. 재훈 씨.”

“주용 씨께서는 잘 적응해주고 계십니다. 연구도 이번 주부터 다시 시작한 참이죠. 곧, 보여드릴 성과가 나올 겁니다.”

“벌써요?”

“말씀을 들어보니 머릿속에 구상해 두신 레시피가 많으시더군요. 함께 발전시켜 가는 중입니다. 어느 정도 퀄리티만 갖추면, 정환 씨께도 보여드리겠습니다. 메이킹도 금방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손님을 대하는 것만 익히시면요.”

재훈은 자연스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을 이어간다. 정환의 부탁으로 주용을 받아들인 그였지만, 막상 만난 후에는 두 사람이 더 죽이 잘 맞는 중이란 말이 요즘의 상황이었다.

칵테일 연구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던 이들이 재훈과 주용이었다.

재훈 자체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며 창작 칵테일에 관심이 많았던 바텐더.

둘은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내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는지 요즘은 아주 잘 딱 붙어만 다닌다.

“이번 주중에 연희 씨께 가게를 맡기고 공장에 내려갔다 올 생각입니다. 정환 씨도 함께 가시시죠.”

“음. 아실은 아직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아서요. 월요일이 아니면 무리가 있을 거 같아요.”

“시간을 맞춰보죠. 오크통에 숙성시킨 소주를 시음해볼 시기라서요. 좋은 기주가 될 겁니다. 또, 진이나 보드카를 재차 증류해 인퓨징도 시도할 예정입니다.”

“직접이요? 이야, 장난 아니겠는데요? 저도 꼭 나눠주세요.”

“당연하죠. 대신, 레시피가 나오면 밸런스 잡는 쪽은 정환 씨가 봐주셔야 할 겁니다.”

딱 그리던 모습이다. 아직은 완성은 아니라도 정환이 그리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

실력 좋은 바텐더가 한 골목에 모여 서로의 기술과 지식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손님에게는 더 발전된 한 잔의 술을 건넨다.

정환이 종로의 바의 거리로 만들 구상을 하며 그리던 모습이 바로 이런 것.

정환은 얼핏 모습을 갖춰가는 자신의 구상에 웃음을 지으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실에 들어서니 윤수가 정환을 반겨준다.

이렇게 정환이 ‘숲’을 챙기는 날이면 이제는 윤수가 직접 아실의 문도 열고 홀로 준비까지 도맡아 하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다녀오셨어요? 준비는 다 해뒀어요. 오픈 전까지 푸욱-. 쉬시면 됩니다.”

성장은 골목이나 정환에게만 일어난 건 아닌 모양이다. 정환의 옆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윤수도 차츰, 한몫하는 바텐더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고마워요. 요즘 든든해요, 윤수 씨 덕분에.”

“예? 갑자기요?”

“진짜. 진짜 든든해서요.”

“흡. 뭐. 예. 제가 한 든든하죠! 헤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제가 정성을 가-아득 담아서 내려드릴게요.”

“좋죠! 부탁드려요!”

“잠시만요!”

하나둘 모습을 갖춰가는 풍경에 정환은 싫지 않아 밝음을 뿜어내 본다.

진한 커피 향이 잔잔히 아실 안을 채우며 기분을 더욱 밝게만 했다.

‘이대로만….’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꿈꾸던 거리는 곧 모습을 갖출 거다. 정환은 오늘따라 그런 행복한 생각을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 딸랑.

오늘의 기분과 커피향, 그리고 싫지 않게 들이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에 정환이 한창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누군가 아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나며 감상이 끝이나고 만다.

아직은 이른 시간에 아실을 찾은 사람은.

“정우 형!”

다름 아닌 정환의 사형이자 그레인 호텔의 치프, 신정우 바텐더였다.

“아직, 오픈 전이지?”

늘 편안한 모습으로 아실을 찾던 그가, 오늘은 조금 어색하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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