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잔. 손맛.
2.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잔을 보여주겠다는 정환의 말에 다른 손님들 역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오늘 이곳을 처음 들린 손님도, 또 이곳을 몇 달째 단골처럼 들리는 손님도. 모두, 자리하고 있는 아실이다.
시선이 몰리자 조금은 웃음기가 정환의 입가에 돈다.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흥미로웠던 걸까.
다들 기대하는 눈치는 있어 보였다.
아실의 단골이면 다른 바도 제법 아는 사람일 테고, 또 숲을 다녀온 손님이라면 시그니처란 말도 익숙할 수 있다.
허나, 조금은 이들이 머리에 품고 있는 하나의 생각이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말에 시그니처나 오리지널을 떠올렸던 손님들은.
아마, 정환의 잔을 보고는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반응이 예상가지 않는 건 아니다. 허나, 거짓이나 허언을 뱉은 적은 없는 정환.
정환은 그저 꿋꿋한 자세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정환은 손을 옮겨 잔이 모인 곳에서 하나의 잔을 가져왔다. 보통 칵테일은 각종의 모양이 이쁜 유리잔에 담겨 제 색을 뽐내곤 한다.
그와 반대로 지금 정환이 잡은 건 색을 뽐내기에는 좋지 않아 보이는 잔.
정환은 여러 잔 속에 파묻혀 있던 하나의 구리 머그잔을 손에 들고는 이를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준비되는 건 제법 간단한 재료들이다. 빨간 라벨이 붙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술병이 하나 놓였고, 연달아 라임, 시나몬 스틱,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병이 하나 더 테이블 위로 나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는 조금 탁한 색에 옅은 노란 빛을 품고 있다. 건더기는 없지만 기포감은 있어 보이는 액체.
병마저 완제품으로 나온 게 아닌 빈병을 사다 정환이 넣은 것처럼 보여 이게 무엇인지, 아직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재료가 모두 준비되자 정환이 빠르게 손을 움직인다. 재료보다 더 간단한 방법으로 잔을 만들어 가는 정환.
구리로 만든 머그잔에 얼음을 하나 담고는 이를 식혀둔 정환이 그 위로 술을 계량하기 시작한다.
빨간 라벨이 붙은 병에는 ‘스미노프’라는 글이 적혀 있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낸다.
보드카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한 브랜드를 모두가 알아보는 눈치다.
그리고 더해지는 반 개의 라임. 라임은 스퀴저에 몸을 맡겨 몸의 모든 수분을 짜내고 만다.
정환은 이를 웨지(Wedge) 모양으로 잘라 그대로 잔에 퐁당! 하고 빠트렸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잔의 완성. 정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을 들고는 남은 잔을 마저 채워갔다.
포옹.
살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병이 열린다. 그리고 잔잔한 기포와 함께 머그잔을 채워가는 액체.
치이이이익.
마지막으로 시나몬 스틱을 토치로 살짝 그을려준 정환이 이를 잔 위로 올리며 칵테일이 완성되었다.
정환은 이를 코스터에 올려 조심히 손님의 앞으로 밀어냈다. 구리로 만든 머그잔에는 물방울이 송글 맺혀 한눈에 봐도 냉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와. 잔이 정말 예뻐요!”
“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향 한번 맡아봐요!”
“여기까지 시나몬 향이 전해져.”
잔이 앞으로 내밀어지자 다른 손님들도 크게 반응하며 이를 주목한다.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잔이라는데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겠나.
다들 여기서 한잔 이상씩은 마시며 이미 이곳의 매력에 빠져 있기에 다들 저 잔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게 아실의 시그니처란 말씀이죠?”
잔을 주문한 손님은 정환을 보며 잔의 정체를 묻는다. 시그니처냐 물어오는 질문.
이에 정환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를 보고는 손님 역시 그럴 거 같았다는 표정을 지어왔다.
“실은 이걸 마셔본 적이 있어서요. 이거, 모스코뮬…? 아닌가요? 보드카에 진저에일을 섞은 그 칵테일요.”
손님은 차분히 자신이 받은 잔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펍이나 클럽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인 모스코뮬이 손님의 입에서 나왔다. 저 모스코뮬이란 술은 언제나 구리 머그잔에 담겨 나오기에, 손님은 쉽게 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맞습니다. 이건 모스코뮬입니다.”
“…아실의 시그니처를 보여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 불만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음. 제가 드렸던 말씀은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칵테일. 이라고만 말씀을 드렸었죠.”
정중히 물어오는 손님의 말에 정환은 살포시 웃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실제로 그가 시그니처니 오리지널이니 하는 말은 입에 담은 적이 없기에, 이는 거짓은 아니었다.
“음. 조금 헷갈리네요. 전 그게 시그니처 칵테일을 말하는 줄 알았거든요.”
“‘시그니처’는 사실 바텐더가 특히 자신 있는 칵테일을 말합니다. 기존에 있는 칵테일일 수도 있고 창작일 수도 있죠. 그 가게에만 있는 칵테일은 ‘오리지널’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음. 어렵네요! 그럼, 제가 숲에서 마신 건 오리지널인가요?”
“오리지널이면서 시그니처일 수도 있는 거죠.”
사실 명확하게 나누기는 어렵다. 시그니처란 말도 오리지널이란 말도 이제는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으니까.
허나,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드셔보시죠. 아마, 다른 모스코뮬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이건, 아실에서만 마실 수 있는 모스코뮬이니까요.”
지금 앞에 놓인 이 잔은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것. 정환은 마치 그를 보증하듯 가장 자신 있는 눈빛을 하고는 손님의 앞에 서 있다.
“네. 한번 마셔볼게요! 궁금해요! 뭐가 다른지!”
손님은 밝게 답하고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차게 식어 냉기가 잔뜩 담긴 잔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기가 송글 맺혀 입에 닿을 때도 냉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잔.
그에 맞춰 살짝 매콤한 향이 올라와 미리 코를 자극해둔다. 시나몬의 향인지, 다른 것의 향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호르륵.
술이 입술을 넘자 차가운 기운이 입안에 가득 담긴다. 그리고 전해지는 라임의 상큼함.
보드카 특유의 무미가 라임에 힘을 실어 주는 것만 같아 라임으로 만든 술, 그 자체를 마시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기포감이 더해진 생강의 알싸한 맛이 싫지 않게 어울려 상큼함을 더욱 가중케 했다.
앞서 코를 자극했던 매운 향기 덕에, 상큼함이 더욱 돋보이는 것만 같다.
손님은 한 모금의 잔을 입에 넣고는 그대로 정환을 바라본다. 눈은 동그랗게 떠져 잔뜩 의문을 품은 모습.
꿀꺽.
그대로 정환과 눈을 맞춘 채 술을 겨우 넘긴 손님이 이제야 입을 열며 정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와! 이거 정말 달라요! 이게 모스코뮬이라구요!?”
그리고 나오는 열정적인 반응. 손님은 앞서 모스코뮬을 마셔본 경험이 있는 만큼, 정환이 만든 이 모스코뮬과 다른 곳에서 맛봤던 모스코뮬의 차이를 그대로 느낀 모양이다.
그저 실력의 차이라 볼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모스코뮬이라는 칵테일을 만드는 방법이 너무 간단하지 않나.
셰이킹도, 또 스터도. 아무런 기교 없이 만들어진 술이 이 모스코뮬.
손님은 그럼에도 확연히 전해지는 두 모스코뮬의 차이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거, 정말 모스코뮬 맞아요? 이전에 마신 것보다 훨씬 진하고 맛이 강해요!”
씨익.
손님이 이렇게 차이를 알아주면 바텐더는 기뻐한다. 정환은 그런 모습에 입을 크게 웃고는 얼른 차이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을 불러왔다.
“아마, 이 녀석 때문일 겁니다.”
정환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유리병이 들려있다.
“음. 진저에일! 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진저비어입니다.”
“비어면…, 맥주?”
“알콜은 없고, 그저 음료이긴 합니다. 대신, 탄산수에 생강 향만 첨가한 진저에일과는 달리 진저비어는 직접 생강과 재료를 넣어 ‘양조’한 음료기에 더 맛이 강하기는 합니다.”
“어, 그럼?”
“네. 여기, 아실에서. 직접 만든 진저비어를 쓴 겁니다.”
정환은 말을 마치며 냉장고에서 작은 캔을 하나 가져왔다. 그의 손에 들린 캔에는 ‘진저에일’이란 글이 적혀 있다.
촤아아아.
간단하게 캔을 따고는 다른 잔을 가져와 보드카, 라임즙과 섞어 또 다른 모스코뮬을 만들어 가는 정환.
정환은 이를 작게 소분해 자신을 지켜보던 다른 손님과 앞에 앉은 손님에게 건넸다.
“어! 이거에요! 이거! 제가 마셨던 건 이거!”
모스코뮬을 주문한 손님은 정환이 진저에일로 만든 모스코뮬을 맛보고 나서야 이전에 자신이 마셨던 모스코뮬과 같다는 말을 한다.
확실히 진저비어로 만든 것과는 맛의 결이 조금 다른 모스코뮬이었다.
“진저비어를 만들어 쓰는 바도 많습니다. 다만, 바텐더마다 술을 계량하고 또 맛을 잡는 기준점이 달라서요. 그에 맞춰 진저비어의 맛도 변하겠죠. 이건 아실에 맞춰 만든 진저비어로 만들었으니, 아실에서만 마실 수 있는 모스코뮬입니다.”
진저비어야 요즘에는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도 많이 나오는 형국이다. 허나, 바텐더는 각자가 추구하는 맛이 있는 법.
셰이킹이 없어도, 또 스터가 없어도. 바텐더는 이렇게 자신의 손길을 묻혀 맛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뭐가 더 나은 맛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이건 정환의 손길이 묻은 맛일 뿐.
말 그대로.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잔임은 분명했다.
“전 아실에서 만든 모스코뮬이 더 취향에 맞아요! 알싸한 향이 싫지 않아서요!”
손님은 그런 바텐더의 노력에 보답하듯 정환이 가장 좋아하는 말을 들려준다.
미소 짓는 정환의 모습이 좋아서일까.
“그, 사장님? 저도 진저비어로 만든 아실의 모스코뮬! 하나 해주세요.”
“어? 여기! 여기도요!”
“저도요!”
손님들은 앞다퉈 아실만의 모스코뮬을 주문하기 시작한다.
아마 정환이 소분해 나눠준 진저에일로 만든 모스코뮬을 맛봤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건 일반적인 모스코뮬과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런 궁금증에 저마다 잔을 주문하는 손님들.
정환은 밝게 웃으며, 이런 주문을 하나씩 다 받아냈다.
“네! 아실의 모스코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3.
솨아아아.
뽀득뽀득.
영업을 마친 아실 안에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잔이 닦여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손님의 목소리도, 또 바텐더의 멋들어진 메이킹 소리도 없는 아실 안.
그런 아실 안에는 두 명의 바텐더가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일상에 지친 두 바텐더 사이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자리했다.
“사장님도 엉뚱한 면이 있으세요, 참. 오리지널 칵테일을 보여주실 것처럼 잔뜩 분위기를 잡으시고는 모스코뮬이라니요! 재료 준비하실 때 깜짝 놀랐어요!”
그런 정적을 먼저 깨는 건 아실의 바텐더 윤수였다. 윤수는 조금 전 아실을 휩쓸고 간 하나의 주제를 꺼내며 정환에게 말을 걸어갔다.
“그랬어요? 전 오리지널이라 말한 적이 없는데….”
“노리셨으면서!”
“재밌잖아요. 손님들도 좋아하시고.”
“기대하신 분들도 있다구요! 저도 그랬고!”
“기대요?”
“사장님의 오리지널 칵테일을요! 아! 이렇게 실력 좋은 사람이면 어떤 창작 칵테일을 보여줄까! 하는 그런 기대요!”
윤수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앞서 정환이 보여준 모습에서, 그도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도 오리지널 칵테일을 하나 만들어 두면 좋을 텐데요.”
윤수는 못내 아쉬운 듯 말을 하나 툭 던지고는 일에 열중했다. 이런 윤수의 말을 들은 정환의 얼굴에도 하나의 고민이 아린다.
오리지널 칵테일이라.
정환 역시 아실을 처음 런칭하며 이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클래식에 분명히 중점을 두지만, 정환 역시 바텐더로서 도전해 보고 싶은 잔은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언제나 현실은 냉혹하고 적당한 타협은 필요한 법이다. 새롭게 연구를 걸쳐 나올 칵테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또 정환에게는 그럴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차분히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은 연구의 성과가 더딘 것도 사실.
최근 ‘숲’도 생기고 또 방송 출연에 이런저런 일까지 겹쳐, 한동안은 그런 연구조차 더 힘을 쓰지 못한 게 정환이었다.
오늘 지나갔던 일도 있고 윤수의 저런 말도 들리니, 정환의 머리에는 다시금 오리지널 칵테일에 대한 작은 욕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윤수 씨.”
“네. 사장님.”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긴 하겠죠?”
“네? 뭐가요?”
“오리지널 칵테일요.”
“음. 제 생각은 그래요. 혹시, 계획이 있으세요?”
“해보고 싶은 시도는 늘 있었어요. 이제는 ‘숲’도 제대로 문을 연 거 같고, 또 따로 외부 활동도 없을 테니까요. 한번, 해볼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럼, 하셔야죠!”
윤수는 든든한 말을 들려주며 정환을 응원한다. 그런 말이 큰 힘이 되어 웃음이 절로 지어지는 정환.
정환은 머리에 스치던 생각을 조금 굳히기로 한다.
“해 봐야겠네요. 그럼. 슬슬 움직여 봐야겠어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뭐든 도울게요!”
“아뇨. 아마, 여기서만 해야 할 일은 아니라서요. 휴일을 써야 할 겁니다. 일하는 날도 아닌데 막 부를 순 없죠.”
“전 괜찮아요! 도우면서,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싶습니다!”
윤수는 언제나처럼 열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환을 돕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뭐, 윤수와 함께 다니는 것 역시 나쁘진 않을 거 같다. 실력도 나쁘지 않고, 또 열정도 넘치지 않나.
쉬는 날에 부르는 게 조금 걸리지만, 본인이 괜찮다니 이마저도 괜찮아 보이는 정환.
정환은 결심이 선 김에.
“윤수 씨.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저랑 잠시 어디 좀 다녀올까요?”
당장에 할 일을 찾아보려 한다.
“어디라면?”
“새로운 칵테일. 그 재료를 찾으러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