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잔. 만석.
6.
“밀리언 달러….”
잔을 받아든 노신사는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며 잔을 바라본다. 정확히 이름이 기억나는 건 아니다. 아니, 들었던 것 같지도 않고.
다만, 겉으로 보이는 불그스름한 색이며 포근해 보이는 거품에 또 올라오는 달콤한 향기까지.
전체적으로 보이는 느낌이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와 왜인지 이 잔을 마셔본 기억이 있는 것만 같다.
이게 그저 바라는 마음인지, 혹은 정말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아마 시대적으로 봐도 맞을 거 같습니다. 보기보다 오래된 칵테일이라서요.”
“오래되었다면…, 1970년대에 이미?”
“네. 역사가 100년 정도 되는 칵테일입니다. 70년대에도 이미 유행을 한 번 탔던 칵테일이구요.”
“그렇군요….”
답은 하지만 쉽사리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손님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
너무 비싼 칵테일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마 아닐 거라. 그저, 아니면 어쩌나. 혹여나 아닐까 봐. 손님은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하는 것뿐이다.
“드셔 보시죠. 만약 이 잔이 아니라면, 다른 칵테일을 또 생각해 보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감사한 바텐더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손님은 손을 들어 올린다.
조심히 잔을 잡고는 향을 맡아보는 모습. 향에서 역시 아직 확신은 서지 않는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꼭 해야 하는 법.
손님은 잔뜩 결심이 선 눈빛을 눈에 담고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호르르륵.
생각보다 거침없이 잔을 들이키는 손님. 달걀흰자가 만들어낸 포근한 거품이 입술을 적시며 고급스러움을 물씬 표를 낸다.
마치 솜사탕을 입에 머금듯 포근한 촉감이 그의 입술을 안았다.
그리고 그런 포근함을 타고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달콤한 파인애플 주스의 향과 그레나딘 시럽 속 석류의 향.
두 개의 만남을 진이 적당히 무게감 있게 받쳐줘 조화롭게 섞인 것만 같은 맛이 입안을 채운다.
술의 무게감이 가볍게 훑고 간 그 자리에는 과일 향만이 남아 입을 넘어 코까지 채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금도, 당시에도 감히 꿈을 꾸지 못했지만. 열대 국가를 탐험하는 것 같은. 아니, 조금은 고급지게 여행하는 것만 같은.
그런 맛이 입안에 포근히 담겼다.
“아….”
그리고 그런 기분과 맛이 파파팟! 하고 불러오는 건 조금 오래된 아련한 기억.
1976년. 그토록 그립던, 그 시절의 기억이었다.
투욱.
손님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앞에서 지켜보던 바텐더인 정환은.
아마 자신이 낸 답이 맞았기에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걸 모르지 않아 보였다.
맞나요? 맞으실까요? 어떠세요? 맛은요? 그 시절의 맛이 맞습니까? 등.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간다.
바텐더라면 평범하게 물을법한 그런 말들. 허나, 지금은 그런 말이 쉽사리 나오지도. 또 나와서도 안 됨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정환은 ‘바 테이블’이라 부르는 팔 한마디 넓이의 공간을 두고는 손님과 떨어져 그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주변의 밝고 동적인 분위기가 애써 이런 기분을 감춰주는 것만 같다. 때로는 조심스럽던 아실 안의 활발한 분위기가 유독 감사하게 다가오는 오늘.
정환은 슬쩍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조용히 손님의 감정이 추슬러지길 기다린다.
바에는 암묵적으로 전해지는 규칙 같은 것이 있다. 이건 보통 손님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 또 바의 영업에 지장이 가지 않게 할 것, 그리고 취기를 표하지 말 것 등.
대부분은 손님이 기준이 되는 규칙들이다.
정환은 그런 수많은 규칙 중 오늘 유독 하나의 규칙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바 테이블에 눈물이 닿게 하지 말 것.
처음에는 그저 손님에게 하는 말처럼 이 규칙이 느껴졌다. 바에서 토를 할 것 같으면 당장 뛰쳐나가 문밖에다 하고 오라는 말처럼, 그런 규칙으로만 느껴졌던 문장.
헌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건, 바텐더가 지켜야 하는 규칙인 것만 같다.
스윽.
정환은 곱게 접힌 수건을 가져가 새로운 수건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정환은 적절히 이를 내밀며 손님의 손에 쥐여줬다.
바 테이블에 눈물이 닿게 하지 말 것.
바텐더가 있는 바라면. 손님의 눈물이 테이블에 닿기 전에 바텐더가 이를 닦아 주면 그만이다.
홀로 바에 앉아 잔 앞에서 울고 있는 손님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아라.
정환은 이제야 그 규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손님은 말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호흡을 추스른다. 오히려 이렇게 한번 몰아치고 가는 감정이 있은 뒤라면 쉽게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게 사람의 감정이기도 했다.
후우우우.
한참을 숨을 고르고야 손님이 얼굴을 편다. 잔잔히 물기가 남은 그의 얼굴이지만, 이제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조금, 괜찮으신가요?”
“시간을 주셔서. 훨씬 마음이 편해진 느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이 잔이 그때 그 잔이 맞는 모양이군요.”
“네. 정확합니다. 그 역시 감사드립니다. 너무 똑같아서…. 꼭 그때에 와 있는 것만 같아서…. 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잔을 찾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정환은 애써 찾은 평온 속에서 손님의 감정을 한 번 더 건드려 본다.
이건 궁금해서 묻는 말은 아니다. 그저 물어야 하기에 묻는 말.
감정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때로는 속으로 삼켜야 해소되고 또 사라지는 감정이 있지만.
때로는 밖으로 표현하고, 또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해소되는 감정도 있다.
정환은 오늘 앞에 앉은 손님의 감정은 겉으로 발산해야 해결되는 감정이라. 그런 판단에 애써 말을 물어보는 지금이다.
“…찾는 잔을 알려주신 분이니 당연히 말씀드려야지요. 그저 거국적인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후회. 후회란 말이 맞겠지요. 이걸 이제라도 찾는 이유가.”
“…후회라면?”
“아내가 참 좋아했던 칵테일입니다. 결혼하고 한참 후에도 칵테일 두 잔에 코를 꿰였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은 아니다. 아직 더 예상가는 말도 있고. 정환은 묵묵히, 손님의 입에서 말이 나오길 기다려 본다.
나오지 않아도, 그대로 좋다는 생각으로.
“아마 더 빨리 찾지 그랬냐는…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 먹고 살기 바빠서. 다들 하는 그런 핑계가 있었지요. 어쩌다 한번, 그때 그 칵테일이 참 맛있었다는 아내의 말에도 다시금 그 칵테일을 마시러 가볼 생각 따위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일 거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요.”
“…….”
누구나 그렇다. 지나고 나서야 떠오르는 게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때의 감정과 생각.
그건 어떤 계기가 있고 난 후에는, 언제나 큰 후회와 함께 회한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 손님처럼.
“몇 달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얼굴을 보고는 그러더군요. 그때 마셨던 칵테일이 참 맛있었다고. 이름이 늘 궁금했다고. 한 번만 더 마셔보고 싶다고….”
손님은 말을 이어가며 감정이 다시 차오르는 듯 고개를 떨구고 만다.
그의 어깨의 떨림이 유독 슬프게만 보였다.
“이렇게 값비싼 이름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참 좋아했겠지요.”
“어느 순간의 칵테일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맛있었다는 기억이죠. 하지만, 그때 그 당시의 분위기나 상황, 또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기에 맛있었다고 떠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사모님 역시…, 그러셨을 겁니다.”
값비싼 칵테일을 만들 줄은 알아도 여전히 값비싼 위로는 전할 줄 모른다.
다들 바텐더라면 손님의 상처를 치유하고 또 부둥켜안고. 그런 멋들어진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허나,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법.
정환은 이런 상황에서 손님에게 건네야 할 적절한 말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12년의 경력도 초라해진다. 아니, 이건 그 어떤 경력을 가진 바텐더가 와도 마찬가지일 터.
정환은 건네본 위로의 말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저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장가가던 날. 또 손주를 봤던 날. 그런 날에. 그저 적당한 바에 가서 그때 마셨던 칵테일을 한잔이나마 더 마셔봤다면. 그랬다면. 그래도 갈 때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렇게라도…. 이름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내를 보내고 몇 달…. 이 밀리언 달러를 찾아 여기저기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걸, 이제야 찾는군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장님. 진심입니다.”
“아닙니다. 이제라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바텐더로 손님 앞에 서는 게 어색했던 적이 있을까. 정환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며 어떤 행동을 보여줘야 할지 알 수 없다.
하하하하.
아니, 어제 그래서!
오빠! 이거 색 좀 봐봐! 사진 찍어! 사진!
음, 조금 달달한 것도 좋구요! 힘든 하루를 보낸 회사원에게 어울리는 잔! 이런 주문도 되나요?
물론이죠. 잠시만요!
여긴 아까 거기랑 분위기가 또 다르네?
저분이죠? 티비에 나온 분!
주변은 이런 정환의 속을 알지도 못하고 평화롭게 밝은 분위기를 내뿜는다.
2부 영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손님들이 점점 자리를 채워가는 아실의 안.
빈자리는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더니 어느새 끝자리에 앉은 노신사의 옆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를 채웠다.
만석까지는 한 자리만이 남은 아실.
그런 아실의 사장인 정환은 조금 전 건넸던 자신의 말이 만족스럽지 않아 여전히 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렵다. 바텐더라도 모르는 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바텐더로서 가지고 있을 뿐.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텐더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도 분명 있을 텐데. 정환은 그런 생각에 손님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떠올려 본다.
정환의 앞에서 손님은 그토록 자신이 찾던, 누군가 그리워하던 그런 잔을 만난 것이 싫지 않아 온전히, 또 홀로. 잔을 그대로 즐기고 있다.
‘잔…’
할 수 있는 게 떠오른 것만 같다. 이에 몸을 움직이는 정환.
정환은 그대로 셰이커와 재료를 챙겨 새로운 잔을 만들기 시작했다.
챠카챡!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셰이커는 활기차게 흔들리며 술을 섞어갔다.
그리고.
촤아아아아.
한 줄기 불그스름한 액체가 다시금 잔에 담겼다. 옆에 놓인 잔과 닮아있는 모양의 잔.
정환은 이 잔을 잡고는 그대로 노신사의 옆자리로 이를 밀어냈다.
“……?”
코스터와 체이서, 그리고 수건과 함께 마치 누군가 앉아 있는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한 잔의 밀리언 달러.
그 모습이 이상해 노신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정환을 바라봤다.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다른 말도 없이, 정환은 그저 이 말만 남기고 뒤로 슬쩍 물러났다.
정환이 떠난 후에야 뜻을 알아챈 손님이 고개를 꾸벅이며 연신 감사를 전한다.
정환은 눈으로 인사를 받고는 그대로 자리를 피했다.
바텐더는 때로는 손님에게 손님의 시간을 줘야 한다. 지금은 ‘두 사람’의 시간이 더 중요한 때라.
바텐더로서 정환의 판단은 그랬을 뿐이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 또 후회가 남은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적절한지 바텐더도 알지 못한다.
다만, 바텐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한 잔의 술을 건네는 것.
1976년의 바텐더도. 2013년의 바텐더도. 그게 전부였을 뿐이다.
딸랑.
문틈 사이로 밤바람이 불어와 문에 달린 종을 울린다. 들어온 사람은 없음에도 손님을 알리는 소리.
정환은 그 소리가 난 문을 한 번 보고는 다시금 끝자리를 살핀다.
노신사의 몸이 조금 옆으로 기울어 마치 일행이 옆자리에 앉은 것만 같다.
‘아.’
빈틈없이 이어가다 딱 한자리가 비어있는 아실의 안.
하지만.
오늘도 아실은 만석이라고.
정환은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