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칵테일.
5.
“1976년…. 37년 전이네요.”
37년이라. 이전 생에서 살았던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숫자가 들리자, 정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덧 그렇게 흘렀군요. 그때는 마냥 좋았던 시절입니다만.”
“젊으셨을 때니까요.”
“글쎄요. 젊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었다는 게. 가장 크겠지요.”
노신사는 한숨처럼 말을 뿜어내고는 아련한 손으로 테이블 위를 쓸었다.
정환은 그 행동에 맞춰 잔에 물을 채워 그의 앞으로 내민다.
노신사는 물을 한잔 삼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1976년, 그때는 사회에 막 던져져 처음으로 일자리라는 걸 잡았을 때지요. 4월부터 일을 했으니, 5월. 그즈음이었겠군요. 이 칵테일이라는 녀석을 처음 맛본 것도.”
“첫 월급이군요.”
“허허허. 맞습니다. 첫 월급. 당시에는 돈에 대한 개념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처음으로 손에 쥔, 이 큰돈. 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그게 참 행복한 고민이었지요.”
“당시에는 칵테일도 비쌌다고 들었습니다. 큰 결심이 필요하셨을 텐데요.”
“암요. 당시 열흘 치 일당. 그 정도를 하룻밤에 다 써버렸으니. 큰 결심이 없이는 힘든 일이었지요.”
노신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가며 다양한 표정을 보여줬다. 그는 때로는 웃기도, 또 때로는 아련하게도. 다양하게 바꿔가며 표정을 지어가는 그.
정환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써 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영화에서 본 멋진 칵테일 바가 떠오르더군요.”
“개방적인 분이셨네요. 당시에 칵테일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 아마…. 그 사람 덕분일 겁니다.”
딱 이때쯤. 정환은 여기서 이걸 물어봐야 함을 느꼈다. 때로는 묻는 이가 있어야 나오는 말도 있는 법이니까.
“그 사람이라면…?”
“당시에는 제 여자친구. 얼마 후에는 제 아내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축하한다. 성공하셨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텐더라는 명찰을 달고 오래 일하다 보면 육감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지금 정환은 저런 말보단.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멋진 척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같이 봤던 영화 속 칵테일 바에 가자며 먼저 전화를 걸었었지요.”
“당시에는 흔하지도 않았을 텐데요.”
“그래도 몇 곳…. 마실 수 있는 곳이 있긴 했습니다.”
“미8군 앞 이태원 아니면 큰 호텔. 그 정도인가요?”
“잘 아시는군요. 다만, 이태원은 퇴폐적인 느낌도 강했고 내국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도 많았지요. 갈 수 있는 곳이라곤…. 호텔에 있는 바. 그게 전부였습니다.”
“몇 곳의 호텔에 바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흠. 명동, 성수동, 그리고 소공동에 있는 호텔이 유명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제가 갔던 곳은 명동이었고요.”
“사보이 호텔이군요.”
“호오.”
노신사는 자신의 말에 맞장구치며 적절히 받아주는 바텐더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 당시를 살아본 적도 없을 텐데. 저 바텐더의 지식이 제법이다.
“뿌리가 궁금해서요. 제가 일하는 직업이 어떻게 발전해왔나, 따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분입니다. 사장님은.”
정환은 답 대신 그저 고개만 숙이고는 여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표했다.
“뭐.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이 뭘 알겠습니까? 전화를 끊으니, 문득 겁이 났습니다. 해서, 바로 명동의 사보이 호텔 지하로 달려갔습니다. 해가 어슴푸레 지더니, 그곳에 불이 켜지더군요.”
“구디구디군요. 지하면.”
“사보이 호텔의 구디구디. 유명했지요.”
“구디구디는 지금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와인 정도만…. 네. 그렇게 다루고 있을 겁니다.”
“흠. 얼마 전에 다시 가보니 그렇더군요. 이름에 설레긴 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풍미했던 분 중 사보이 호텔 바텐더 출신인 분들이 많습니다. 좋은 곳에 가셨네요.”
“뭘 알고 그랬겠습니까. 허허. 그저 유명하다니 갔지요. 갔더니, 멋들어진 셔츠에 조끼. 그리고 넥타이를 맨 바텐더가 유리잔을 닦고 있더군요. 영화에서 봤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예습하러 가신 건가요?”
“예습이라…. 그것보다는. 컨닝이었지요.”
컨닝이라는 손님의 말에 정환이 이해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바텐더로 살아왔기에 정환은 저 말을 모르지 않았다.
때로는 바에서 데이트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먼저 바를 들리는 남자들이 있다.
작은 자존심이지만, 이런 곳이 처음이란 걸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저 때만이 아닌 요즘도 가끔 일어나는 일.
정환은 그런 재미난 모습에 슬쩍 웃음 지었다.
“바텐더와 공모하신 거네요. 그럼.”
“그렇지요. 허허. 당장에 초면인 바텐더를 잡고 말을 물었습니다. ‘내가 여길 와본 적이 없는 촌놈에 돈도 얼마 없습니다. 한두 잔만 마신다면 여기서는 도대체 뭘 시켜야 합니까?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고? 결혼할 여자 앞에서 멋진 척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당…차셨네요.”
“허허. 패기가 넘쳤지요. 그때는 20대였으니.”
그래도 저렇게 당차게 물어오는 이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과연 낭만이 가득했던 시대라. 정환은 고개를 절레 저을 뿐이다.
“뭐라고 하던가요, 바텐더는?”
“젊은 놈의 객기가 퍽 마음에 든 눈치였습니다. 호의적이더군요. 여자들은 색이 이쁜 걸 좋아하니 ‘그래스하프’를 시키라더군요. 또 ‘탐-카린스’도 나쁘지 않다고. 세련된 발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해서 하루 내도록 외웠던 거로 기억합니다. 허허.”
“그래서…!”
정환은 탐-카린스와 그래스하프를 주문했던 저 손님의 전작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절에 마셨던 칵테일을 오늘 이 자리에서 되돌아본 것이다.
“예. 그때 시켰던 걸 오늘 그대로 마셨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는 칵테일이 그게 전부란 말이 맞을 겁니다.”
“요즘에도 더러 그러시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실전에서는 잘 통하셨나요?”
“음. 잘 통했던 거 같습니다. 아내는 그래스하프를 참 좋아했지요. 한참을 그 잔을 앞에 두고는 내려다봤던 거로 기억합니다. 색이 참 예쁘다며….”
손님은 말을 뱉으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정환은 차마 그런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 자신도 반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귀했을 겁니다. 그렇게 색이 예쁘고 또 접하기 어려운 칵테일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제 아내도. 그래서 한참을 잔을 내려두고는 천천히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둘 모두…, 다음 잔을 주문하기는 어려웠으니까요.”
“가격이 역시 만만치 않았을 테죠….”
“아마, 한 잔씩. 그러니까 두 잔을 더 주문했다면 한 며칠은 빈속으로 지내야 했을 겁니다. 당시 양주란 녀석의 가격은 그랬으니까요. 아마, 아내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제가 겁내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이제야 시중에서도 쉽게 칵테일의 재료가 되는 술을 구할 수 있는 시절이다.
허나, 저 때는 칵테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수를 써 술을 수입해야 했던 시절.
술을 만드는 바텐더의 인건비는 고사하고라도 칵테일의 재료가 되는 술의 가격만도 무시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바텐더도 알고 있었겠군요.”
“허허. 전날 마주쳐서 전한 말도 있고, 또 나름 멋을 냈었다지만 차림도 남루했었습니다. 거기에 한 잔을 시켜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잔을 노려만 보고 있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바텐더는 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손님 앞에 서있는다. 다만, 생각이 없는 건 아닌 이들.
그들은 손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되고, 또 나름의 판단이란 걸 내린다.
물론, 이를 손님에게 티 내는 건 아니다.
“여기겠군요. 서비스가 나온 시점은.”
그저 이런 판단에 근거해 알맞은 접객을 내놓을 뿐.
정환은 자신이 그때 이들의 앞에 선 바텐더라는 생각을 하며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허. 마치 그때 거기 계셨던 분 같군요. 허허. 딱, 그때였던 거 같습니다. 맞아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설명이나.”
“그거까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그저, 한잔 자기가 사도 되겠냐는 말을 했던 거 같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그 바텐더의 이름도 얼굴도. 또 했던 말도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제가 집중했던 건, 그분은 아니었으니까요.”
자신이 마신 칵테일은 기억해도 바텐더를 기억하는 이는 적은 편이다. 이건 바텐더의 비극이자 어쩔 수 없는 숙명.
저마다 잔을 즐길 때는 자신의 잔과 상황, 그리고 함께 하는 이에 집중한다.
바텐더는 그저 한 걸음 떨어져 손님과 잔, 그리고 상황을 빛내는 풍경이 될 뿐이다.
“흠….”
하지만 때로는 바텐더도 기억에 남아 이들과 함께 빛을 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정환이 놓인 상황이 그런 상황일지도 모르고.
정환은 전해지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다시금 턱을 잡았다. 만약에 자신이었다면 손님에게 어떤 잔을 권했을까.
그런 생각에 지나간 손님의 이야기를 되돌아보는 그.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처음으로 바에 온 사람, 그리고 그렇게 여유가 좋지는 않은 사람.
거기에 옆에는 사랑하는 이를 둔 사람. 그런 손님.
그런 손님에게 바텐더는 어떤 잔을 권해야 할까. 고민이 한참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힘이 되고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것만은 기억이 납니다. 예. 죄송하지만…, 기억은 이게 전부입니다.”
손님은 마지막 힌트를 정환에게 던져준다. 무려 37년 전에 있었던 기억을 최대한 살려 보는 손님.
정환은 앞선 생각들이 스치는 중 저 말까지 더해지자, 어렴풋이 하나의 칵테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계열에 달콤하고 포근한 칵테일…. 거기에 힘이 되는 말이라. 그럼….’
그래도 아직 확신을 내리기에는 부족하다. 해서, 정환은. 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혹시, 바텐더가 이런 말을 덧붙이진 않았나요?”
“어떤 말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칵테일이라고.”
!!!!
기억이란 건 참 재밌다. 가만히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더니 작은 계기만 하나 생기면 파파팟! 하고 떠오르는 게 사람의 기억.
지금 손님은. 정환이 던진 작은 계기 덕분에 잊었던 한 기억이, 머리에 파파팟! 하고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번쩍! 들리는 그의 고개가, 지금이 딱 그러함을 그대로 표현했다.
“마, 맞습니다! 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완전 같지는 않지만 마, 맞아요! 아주 값비싼 칵테일을 자신이 한 잔 사겠다고! 가격은 걱정하지 말라며 장난도 쳤었지요! 나중에는 꼭 직접 사서 마시라며! 모, 목표로 삼으라고!”
손님은 기억이 떠오른 게 좋아서. 또, 자신이 찾던 칵테일에 다가온 게 좋아서.
그렇게 목청을 높여본다. 들뜬 자세로 몸까지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씨익.
반대로 바텐더 역시 기뻐한다. 어려워만 보이던 난제의 답을 찾아가는 이의 즐거움. 그런 환희가 정환의 얼굴에 걸렸다.
“어떤 칵테일일지 예상이 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네.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색도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고 또 느낌과 맛도 비슷합니다.”
“아아…! 드디어! 아니…, 이제야!”
손님은 감정이 차오르는 듯 손을 떨며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정환은 혹여나 모를 가능성에 얼른 그를 진정시킨다.
“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선 진정하시죠.”
“마셔볼 수…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우선 드셔보시고, 판단해 보시죠.”
“부탁드리겠습니다! 꼭 좀…!”
제발 답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스치는 같은 생각.
바텐더도, 또 손님도. 같은 생각을 하며 잠시간의 정적을 맞았다.
정환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재료를 준비했다.
복잡했던 추론 과정과 달리 재료는 간단했다. 진과 스위트 베르무트, 그리고 그레나딘 시럽과 파인애플 주스가 차례대로 정환의 앞에 놓였다.
정환은 윤수를 불러 다른 재료를 하나 더 받더니, 이내 준비를 마친다. 마지막으로 윤수가 가져온 재료인 달걀 한 알이 셰이커 옆에 놓였다.
정환은 이를 계량하며 실없는 소리를 꺼내기 시작한다.
“바텐더들이 자주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거죠. 이건 아주 고전적이고, 또 오래된 농담일 겁니다.”
“농담…말씀입니까? 갑자기?”
“간단한 말장난이죠. 한번 맞춰보시겠습니까? 문제는 이렇습니다.”
실없는 소리가 나오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계량한 술을 전부 넣고 달걀도 흰자만을 분리해 셰이커에 넣은 정환.
준비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바텐더라면, 손님에게 얼마까지 서비스로 제공할 수 있을까요?”
“예…?”
“편하게 답하셔도 됩니다. 농담이니까요.”
“그, 글쎄요…. 그날 마신 칵테일의 가격보다는 싸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럴 거 같군요.”
“그런가요? 아쉽게도 답은 아닙니다.”
“그럼…?”
씨익.
정환은 자신에게 답을 물어오는 손님에게 답하지 않고 그대로 셰이커를 들어 올렸다.
마치, 답은 이 안에 있다는 듯이.
그리고 시작되는 그의 셰이킹.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절도있는 스트로크가 앞을 향해 뻗어간다. 손님은 마치 그 모습이 자신을 과거로 데려가는 것만 같아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촤아아아아!
셰이킹이 끝나자 불그스름한 빛을 가진 액체가 잔으로 떨어졌다. 손님이 설명했던 색과 닮았고 거품마저 끼어있어 포근한 느낌도 눈으로 받을 수 있는 잔.
스으윽.
정환은 천천히 이를 손님의 앞으로 밀어냈다.
“답은 이 칵테일의 이름과 같습니다.”
“……?”
“바텐더가 손님에게 서비스로 낼 수 있는 가장 큰 금액. 그리고 이 칵테일의 이름은…”
손님은 잔을 밀어내며 말을 걸어오는 정환의 모습이 순간 37년 전의 그 바텐더와 겹쳐져 보였다.
마치 그때처럼 장난기를 입에 머금고는 뱉어오는 바텐더의 마지막 말.
“밀리언 달러. 즉, 백만 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칵테일이 손님의 앞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