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95화 (95/175)

95잔. 기다리던.

1.

“종로 세실로…. 가게 이름은 아실.”

저녁에 가까운 오후 무렵.

불이 꺼진 집을 나서며 한 사내는 되뇌듯 휴대폰 화면에 담긴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었다.

어색하게 다려진 셔츠와 주름이 조금 져버린 재킷. 그리고 멋들어지게 광이 난 구두를 신은 그가 신발장에서 거울을 한 번 다시 살폈다.

“음.”

만족스럽다. 그런 생각에 사내는 한 번 웃고는 신발장 옆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젊었을 적인 것 같다.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지만 저 때는 온통 까만색투성이인 사내의 머리.

세월이 하 무상하게도, 그때와 지금은 달라진 게 많아 보이는 사진이다.

‘시간이…’

뭐, 이 정도면 늦진 않겠지. 요즘에야 사람이 몰리는 곳이라지만 오늘은 평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사내는 오늘 향할 곳을 한 번 머리로 떠올려 봤다.

오늘은 바에 가는 날이다. 바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고 또 가보는 곳.

평소 이런 곳을 자주 가는 사내는 아니었다.

딱히 술을 즐기지도, 또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가끔가다 집에서 따보는 한 캔의 맥주.

그게 사내가 즐기는 유일한 술이라 불러도 무방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바라는 곳에도. 가본 기억은 분명 있으니까.

사내는 마지막으로 재킷의 단추를 여미고는 어깨를 한 번 털었다.

이제는 떠날 준비가 모두 끝난 그.

중문이 닫히고 현관문마저 열리자 그가 떠나온 집에는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하다.

이미 몇 개월째, 그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덜컥.

열린 문으로 사내의 몸이 반도 전부 나가기 전. 사내는 잠시 돌아서서 신발장을 돌아봤다.

조금 전 자신이 살펴보던 젊었을 적 사진을 한 번 더 보는 사내의 모습.

그는 그 사진에서 자신의 옆에 선 이를 쓰윽 보고는 입을 살포시 열어 본다.

“다녀올게요.”

탁.

문이 닫힌 신발장 위 사진에는 한 인상 좋은 중년의 여성이 사내의 어깨에 기대서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2.

“윤수 씨. 준비는 끝났죠?”

“네. 사장님. 여기 과일만 다듬으면 끝이에요.”

“그래요? 그럼, 그거 끝내고 같이 갈까요?”

“네? 어딜요?”

영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을 무렵.

정환은 한창 영업 준비에 몰두하는 윤수에게 일의 진척도를 물었다.

그리고 왜 그리 서두르냐는 질문에 손가락으로 바깥쪽 골목을 가리키는 정환.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 끝에는, 무언가 분주한 사람들이 가득한 새로운 바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아, 숲! 오늘 오픈 날이죠?”

“네. 간단히 인사라도 하고 오려구요.”

“프리 오픈 때 다녀오시지 않았어요? 하. 하필이면 월요일이라…! 괜히 지방에 친구 보러 다녀왔나 봐요! 저도 갔어야 했는데!”

“과일 얼른 다듬고 같이 가봐요. 아직 본 적은 없죠? 숲.”

“네! 금방 끝낼게요! 완성된 모습은 처음이에요!”

오늘은 재훈이 문을 여는 숲이라는 새로운 바의 오픈 날. 이미 프리 오픈까지 끝낸 재훈의 가게는 오늘 정식으로 문을 열며 손님을 받는다.

정환은 같은 골목에 자리한 동업자로서, 또 친구로서. 그곳을 응원하러 잠시 얼굴을 비출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수는 새로운 바가 열린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바텐더와 만나며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 이가 윤수가 아닌가.

숲에는 새롭게 일하는 바텐더도 셋이나 더 있다고 하니, 이번에는 선배 바텐더가 아닌 ‘동기’라 부를 이들도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설레는 그였다.

“끝! 끝입니다! 가시죠!”

얼른 과일을 손질한 윤수가 자리를 정리하고는 앞치마를 벗었다.

웃으며 함께 아실을 나서는 두 사람.

정환의 손에는 적당히 깔끔한 화분이 하나 들려 있어 축하하는 이의 모습에 어울렸다.

“재훈 씨!”

“정환 씨. 아, 윤수 씨.”

밖에서 주변을 살피던 재훈이 얼른 이들과 마주친다. 멀지 않은 거리기에 가게 밖으로만 나와도 마주칠 수 있는 이들.

이들은 반갑게 인사하며 오늘의 감상을 나눈다.

“어때요? 오늘이 시작이네요.”

“떨립니다. 프리 오픈 때랑은 비교도 안 되네요.”

“잘하실 겁니다. 긴장하지 마세요.”

“잘. 해야죠. 감사합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여기서 더…요?”

“그럼요. 아직 한참.”

“하. 네. 그래야죠. 참, 이거 받으세요! 선물!”

“어휴. 매일 보는 사이에 뭐 이런걸….”

“축하드립니다! 임 사장님!”

“윤수 씨도 고마워요. 영업 전에 이렇게 와주시고.”

“에이. 1분도 안 걸리는 거린데요! 당연하죠!”

“그래도요.”

늘 마주하는 사람이지만 챙길 건 챙겨야 한다. 오늘이 바텐더에게, 또 새롭게 자기만의 가게를 여는 사람에게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는 누구보다 정환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정환은 멀쩡해보이는 재훈의 속이, 얼마나 울렁거리고 있을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후우.”

긴장이 가득 차오르는 듯 계속해서 한숨이 그의 몸 밖으로 나온다.

정환은 그 모습이 꼭 얼마 전 자신의 모습만 같아 밝은 미소로 바라볼 뿐이다.

“잠시 들어가시죠. 윤수 씨. 우리 직원들은 본 적 없죠? 소개해 드릴게요.”

“어, 그럴까요? 사장님, 괜찮죠?”

“그럼요. 잠시 들어 갔다 와요. 난 인사 나눈 적이 있어서요. 천천히 인사하고 가게로 와요.”

“넵! 금방 가겠습니다!”

“재훈 씨. 힘내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가게로 오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정환 씨. 나중에 들릴 게요.”

정환은 윤수를 숲으로 들여보내고는 홀로 돌아섰다. 화환과 여러 장식이 가득한 새 가게를 뒤로 걸어가는 정환의 모습.

분명 오늘 가게를 여는 사람은 재훈인데. 왜인지 모르게 정환의 어깨 역시 조금은 설레어 가는 것만 같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숲이라는 새 가게가 이 골목에 자리 잡았다는 건.

정환이 꿈꾸던 골목이 이제 시작되려 한다는 뜻일 테니까.

자신이 오래도록 꿈꾸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데 누가 설레지 않겠나.

정환은 그런 모습을 애써 감추려 아실로 얼른 돌아와 속을 누를 뿐이다.

딸랑.

잠시 후, 윤수가 돌아온다. 무언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안에 들어오는 윤수의 모습.

“재밌었어요? 인사들은 잘했고요?”

“네! 사장님! 완전 신입도 한 명 있고 또 저랑 비슷하게 경력직도 있어요! 다른 한 명은 임 사장님이랑 친한 분이라는 데, 매니저를 맡으신 데요!”

“연희 씨 말씀이죠? 저랑도 아는 사이에요. 같이 스터디 했었거든요.”

“정말요? 대박이네요! 이야. 이렇게 하나둘, 가게가 늘어나면 여기 종로에서도 따로 스터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곧 그렇게 되겠죠.”

“완전 좋아요! 저 매일 참석할 거예요! 완전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하하…. 그, 그래요?”

그때쯤이면 당신은 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할 텐데. 정환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저런 들뜬 모습에 물을 뿌리기 싫어 말을 삼켰다.

“그러려면, 우리 아실이 항상 무게를 잡아줘야겠죠? 다른 가게도 생기고 또, 다들 잘 되려면요.”

“물론이죠!”

“숲도, 재훈 씨도. 사실은 우리를 믿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몸에 힘은 좀 풀구요.”

“헤헤. 넵!”

그렇게 잠시간의 여유를 즐긴 사이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픈 시간이 다가왔다.

“자, 그럼. 영업, 시작하죠.”

정환은 언제나처럼 힘차게, 아실의 문을 열었다.

3.

“데킬라 사워, 노네임, 그리고 옥보단. 맞으시죠?”

“네! 맞아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영업이 한창이던 늦지 않은 저녁.

아실은 평일임에도 그리 여유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손님과 살을 부대끼고 있다.

얼마 전 방송을 타며 얼굴을 알린 만큼, 정환을 알아보는 이도, 또 굳이 검색까지 해가며 찾아오는 이도 많은 아실이었다.

그래도 대기 손님이 없다는 건 좋은 징조일지 모른다. 몇 팀의 손님이 아실 안을 보고 발걸음을 돌리긴 했지만, 그들이 발걸음을 돌린 방향은.

정환이 바라던 것처럼, 재훈의 ‘숲’이 있는 코너 쪽이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골목 밖도 적당히 사람이 오가는 것만 같다. 아마 숲도 제법 괜찮게 영업 중일 거라.

정환은 보이지 않아도, 감히 그런 예상을 해볼 수 있었다.

솨아아아아아!

“블루 블레이저! 나왔습니다!”

“와!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더 화려한 데요!”

“전 플레어 출신이라서요! 다음에는 더 재미난 것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윤수를 뽑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건 절대 블루 블레이저 때문에 하는 생각은 아닌 정환.

방송과 SNS를 통해 유입된 손님들이 젊은 세대인 만큼, 그들에게 다가설 때는 가끔 이렇게 윤수의 퍼포먼스가 큰 도움이 되곤 했다.

“자, 데킬라 사워, 노네임, 그리고 옥보단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찍어도 되나요?”

“그럼요. 안에도 찍어도 됩니다.”

“어, 나중에 바텐더님이랑도 찍고 싶어요!”

“저, 저랑요? 아, 넵. 물론이죠.”

방송으로 유명해진 만큼 호사 역시 충분히 누리고 있다. 유명인처럼 손님들과 사진을 찍을 때면, 정환은 어색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토록 내내 바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기에 여유도 있고 이제는 경험치도 쌓여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게 평일.

거기에.

손님들이 몰릴 때는 알 수 없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누군가 나눈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1부와 2부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짧은 텀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1차부터 바로 오는 이들이 찾는 시간이 바로 1부라 부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2차나 3차로 오는 조금 늦은 시간이, 바로 2부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9시 무렵이 되면 1부 손님들이 슬쩍 빠져나가며 여유로운 시간이 잠시 자리한다.

약 1시간 정도지만 적당히 손님도 빠지고 안에는 이전 같은 정적도 찾아오는 아실의 내부.

정환은 이때 찾아오는 아실 고유의 분위기 역시, 싫지 않았다.

딸랑.

그렇게 정환이 1부 영업을 마치고 잠시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을 때.

누군가 아실의 문을 힘겹게 밀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색하게 다려진 셔츠와 주름진 재킷을 입은, 백발이 성성한 한 사내였다.

“어서 오세요.”

정환은 반색하며 그를 반긴다. 요즘 정환이 가장 좋아하는 손님이 바로 이런 손님.

나이가 조금 있는, 중년을 넘긴 나이의 손님을 정환은 요즘 유독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입니다.”

“편한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선 노신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구석 끝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조금은 두리번거리던 그의 표정이, 손님층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아실은 SNS와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곳이다. 방송이야 티비를 탄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SNS로 재확산 된 후에야 더 화제가 되지 않나.

아실 안에 앉은 이들은 그런 문명을 부담 없이 누리는, 젊은 층들이 주류를 이뤘다.

“여기 젖은 수건입니다. 물과 탄산수가 있는 데,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냥 물이면 될 거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정환이 더 이런 세대의 손님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다. 정환이 언제나 꿈꾸던 바의 모습은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허들을 낮춰 젊은 층의 유입에는 성공했지만, 반대로 중장년, 그리고 노년층이 생각보다 적어, 정환은 나름 이것도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처음이라고 하셨죠?”

“아, 네. 간단히 먹었습니다. 처음. 맞습니다. 방송을 보고….”

그래도 여전히 티비를 보는 이들은 나이가 제법 있는 세대들이다. 그렇기에 방송을 탔을 때도 이런 효과를 조금은 기대했던 정환.

마침 찾은 손님의 백발이 성성해, 정환은 그런 생각이 잘 통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셨군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바텐더, 차정환입니다.”

“반갑습니다. 티브이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군요.”

“감사합니다. 편집을 많이 해주셔서 좋은 모습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겸손하시네요.”

노신사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조용히 이를 접어 자신의 옆으로 밀어 둔다.

간단한 손놀림에서 보이는 손님의 인품이, 그리 나쁘진 않은 것만 같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에 이런 손님을 모실 수 있는 건.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자리를 윤수에게 맡기고는 앞에 앉은 나이든 손님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주문, 하시겠어요?”

“흠. 따로, 메뉴판은 없는 모양이군요.”

“네. 저희가 따로 메뉴판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대신, 취향이나 즐겨 드시는 맛을 알려주시면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바는 워낙에 오랜만이라….”

처음은 아니란 말인데. 제법 의미심장하게 들려오는 말에 정환은 조용히 주문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손님은.

“탐-카린스. 그런 이름이 있죠?”

조금 예스러운 발음으로 클래식한 칵테일을 주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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