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1.
“자자. 시작합니다! 시작해요!”
어색했던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끝나고 2주 후.
조용히 맞이한 평범한 하루에, 아실 안이 무언가로 뜨겁기 시작했다.
단골 손님과 함께 머리를 맞댄 윤수, 그리고 아실의 가족과도 같은 정우와 기준, 그리고 재훈까지.
평범하지 않은 멤버들이 모인 아실에는 평소와는 다른 물건까지 걸리며 이들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약간 옆으로, 윤수 씨. 조금만 더 옆으로.”
“이, 이렇게요?”
“그렇지. 이제야 화면이 나온다. 오케이.”
윤수는 의자를 밝고 올라서, 천정에 달린 무언가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손이 무언가를 살짝 눌러두자, 이내 빛이 발하며 반대편 벽에는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우가 직접 가져온, 빔 프로젝터였다.
“오케이. 화질 좋네.”
“우와. 사장님. 진짜 저 방송에 사장님 나오시는 거예요?”
“허허. 차 사장. 대박일세. 대박.”
오늘은 정환이 찍은 방송이 전파를 타는 날. 자연스레 모인 단골과 지인들이 한곳에 모여, 정환이 나오는 방송을 아실에서 시청하려 하고 있다.
정적이던 아실의 분위기가, 오늘 하루는 축제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다.
“오오. 나온다.”
“아니네. 아직 아니네.”
“중간에 나온다고 했어요. 기다려 봐요.”
“어, 그럼 한 잔 더 마셔도 되는 거지?”
“엇. 나도. 나도. 마시면서 기다리지.”
“에이. 저기 나오는 거 마셔야죠.”
“그럴까?”
저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게 내려온 스크린에 시선을 던진다.
스크린에는 강 대표가 나와, 이제는 익숙한 모습으로 요리를 만들어 갔다.
“잘하셔. 하여튼. 강 대표님은 잘하신다니까.”
“실제로 가서 보니까, 지켜보는 사람도 많더라구요. 정말 분위기가….”
“MC는? 직접 본 거야? 어때? 이뻐?”
“작가는요? 진짜 리액션 저렇게 해요? 리얼이구요?”
방송에 나온다는 게 여간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않나. 손님과 지인들은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하고 온 정환에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예쁘죠. 정말요. 작가님도 진짜 리액션 저렇게 하세요.”
정환은 적당히 올라간 어깨로 장단을 맞추며 함께 방송을 보고 있다.
뭐, 내용이야 다 아는 내용이긴 했다. 다만, 어떻게 편집되어 나올지는 아직 정환도 모르는 상황.
악마의 편집만 없어라. 그런 마음으로 정환 역시 흥미 가득한 눈빛을 하고 스크린에 시선을 던졌다.
“어어! 나온다! 나온다!”
촬영 때는 아직 한참 남았던 거 같은데.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정환이 등장한다.
이게 바로 편집의 힘일 터. 정환은 어색하게 화면을 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야. 자막보소? 잘생겼다? 너무하네. 이거. 바텐더를 실력으로 해야지!”
“실력으로 하면 더 한 자막 나가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쓰읍. 그런가?”
“와. 사장님 화면빨 예술! 대박이에요!”
“차 사장. 선 자리 좀 들어오겠는데?”
“아, 아닙니다. 하하…”
다 함께 방송을 보기로 한 게,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라라라-.
정환은 자신의 등장에 맞춰 저런 노래가 나왔을 즈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편집이 가미된 화면은, 실제로 자신이 겪었던 현장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존잘.
대박.
칵테일이 잘생기고 사장님이 맛난 그!
저런 채팅이 있었나. 조금은 오글거리는 채팅을 잡아낸 편집팀에 정환은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이야. 제대로 밀어주네?”
“강 대표님 입김이 있었을 테니까요.”
“정환아. 방송 더 하자고 안 해?”
“어, 끝나고 나서는 그런 말이 있긴 했었죠.”
“진짜?”
실제로 촬영이 끝난 후 이전에 심드렁하게 정환을 지나쳤던 이철승 피디가 다가와 연신 정환에게 굽신거린 일은 있었다.
우선 한 번만 더 출연해보고 고정 출연까지 해볼 생각이 없냐는 말도 들렸었고.
강 대표 역시 적절히 권하긴 했었지만, 정환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한다고 하지! 야. 제2의 강 대표님. 하면 좋잖아?”
“아뇨. 생각보다 체질에 안 맞아서요. 손님 앞에 있는 게 훨씬 편해요.”
“그런 사람치고는….”
잘하고 있다. 기준과 정우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정환의 고집을 알기에 말을 일축했다.
실제로 정환은 한동안 이철승 피디라는 그 피디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미 방송을 찍은 게 2주 전. 그때부터 끈질기게 달라붙은 피디는, 얼마 전까지 정환에게 방송 출연을 또 제의하며 계속해서 연락을 해오고 있다.
물론, 정환이야 매번 거절하고 있지만.
“오. 데킬라 사워. 좋지.”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요? 사장님! 저거 한잔 만들어 주실 수 있어요?”
“아. 나도. 차 사장. 같은 거로.”
방송이 이어지며 정환이 칵테일을 만드는 장면까지 나아간다. 적절히 꾸며낸 화면에서도 정환이 만들어낸 칵테일의 색감은 아무런 꾸밈이 없다.
편집 때 혹시 유의해야 할 점 있을까요? 전부 반영은 힘들어도 기준점은 피디님께 부탁드릴 수 있어서요. 민감한 장면이나 이야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방송이 끝나고 편집을 물어오던 작가의 말. 거기에 정환이.
칵테일에 아무런 꾸밈도 없었으면 해요. 색감이나 보정, 그리고 자막으로 꾸미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주문을 덧붙였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디가 여전히 정환에게 구애하고 있는 만큼, 이런 주문이 잘 녹아든 편집본이었다.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화면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맞춰 정환이 아실 안에서도 셰이커를 흔들었다.
동시에 펼쳐지는 모습에서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는 단골들.
어디면 어떤가. 그런 생각에 이들은 화면과 눈앞의 정환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리고.
촤아아아아악.
이번에도 화면에 맞춰 쏟아지는 데킬라 사워. 정환은 아실 안을 채운 손님의 수만큼 이를 만들어 조심히 이들 앞으로 밀어냈다.
화면으로 보이는 칵테일을 그 자리에서, 또 똑같은 사람이 만든 잔으로 맛을 본다.
이 정도면, 바에서 즐길 수 있는 최대한 즐거움일 거라. 모두 같은 생각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지금.
“노잼이래. 크크. 정환이가 노잼이긴 하지.”
“에이. 차 사장님은 얼굴이 대유잼인걸요.”
“맞아요!”
“아휴. 여기서는 말도 못하겠네요.”
서로 알지 못하던 이들도 한자리에 앉아 다 함께 농담을 주고받는 이 자리가 정환은 싫지 않았다.
- 불쑈! 한 번 하겠습니다!
그런 감상 속에서 방송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간다. 노잼이란 채팅창을 극적으로 보여주더니 정환의 한 방을 제법 멋들어지게 편집해둔 방송국 사람들.
이런저런 효과음과 CG가 합쳐져, 정환의 한 방이 더욱 효과적으로 보인다.
“푸하하하! 불쑈?”
“이야. 사장님. 불도 다뤄요?”
“윤수 씨가 같이 간 건가?”
“이야, 차 사장. 방송감이 있네, 있어.”
다들 정환의 말에 크게 반응하며 방송에 몰입한다. 이들 역시 정환이 불을 다루거나 역동적인 바텐딩을 선보이는 건 본적이 없기에 놀라는 눈치.
다만, 몇 명. 여기 앉아 있는 바텐더만이 슬쩍 굳은 표정을 하며 정환을 빤히 바라본다.
이들은, 곧 나올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다.
“아니…지?”
“너…이 자식…?”
“서, 설마…, 정환 씨?”
기준과 정우, 재훈은 표정을 굳히며 어두운 얼굴로 정환을 노려봤다.
“그…, 죄송합니다.”
정환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하고 떨굴 뿐이다.
“하아.”
솨아아아아!
방송은 무심하게 잘 잡힌 구도로 정환이 불을 뿜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두운 조명 아래 파란 불꽃이 떨어지며 마치 유럽 신화 속의 신과 같이 보이는 정환의 모습.
“오오오오!”
“사장님!”
“차 사장!!”
“저거 완전 멋져요!”
짝짝짝짝!
짝짝짝짝!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도, 바텐더들의 표정만이 어둡다.
블루 블레이저. 나왔습니다.
기어코 그 이름마저 뱉어버리고 마는 화면 속 정환의 모습.
“꼭…그랬어야 했냐?”
“하…. 연습…해두야 겠죠?”
“제가 죽을 맛이죠…. 종로로…몰릴 텐데.”
“소리가 들리는구나…. 블루 블레이저 주문하는 소리가….”
“아….”
바텐더들은 곧 정환이 보여준 모습 덕에 쏟아질 주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짐을 느끼고 있다.
“사장님! 저것두요! 저 다음 잔은 저 블레이저? 저거로 해주세요!”
“나도! 나도 저걸로 해주게!”
“우리 이참에 통일할까요?”
“좋지!”
당장 여기만 봐도 그렇지 않나. 방송에서 화제가 된 칵테일은 언제나 그 주문량이 바에서 늘어나곤 한다.
블루 블레이저는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 칵테일이다. 계량하는 양도 적지 않고 만들 때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많은 칵테일.
이들의 눈에 서리가 앉은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하…. 조, 좋죠. 브, 블루 블레이저!”
정환은 애써 다른 바텐더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바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뭐, 다른 사람들은 힘들지 몰라도, 블루 블레이저의 주문이 늘어나는 게 정환에게는 그리 큰 문제 거리는 아니다.
곧 정환에 대해 알아보고 몰릴 손님이 저 블루 블레이저를 연신 주문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정환.
정환은 실력에 자신도 있고 또 준비도 완전해서 그런 걸까.
아쉽게도. 그저 그런 이유만으로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블루 블레이저는 한 번 만들 때 쏟아야 하는 정성이 있는 만큼 정환에게도 쉬운 칵테일은 아니니까.
대신, 정환에게는.
“유, 윤수 씨!”
플레어 바텐더 출신의, 윤수가 있을 뿐이다.
“네, 네?”
“블루 블레이저! 부탁합니다!”
“어…, 네. 알겠습니다. 블루 블레이저야 뭐, 어렵나요.”
수많은 불쑈와 플레어 쇼를 치른 윤수에게 블루 블레이저는 그리 어려운 축에 속하지 않는 칵테일이다.
늘 다루던 불을 다루는 게 무에 어렵겠나.
평소 다루던 칵테일과 달라 조금은 연습을 해야하는 다른 클래식 바텐더들과 달리.
윤수에게 이건 누워서 떡 먹기일 뿐이다.
정환은 만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텐더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저 치사한 놈!”
“당했네요.”
“하. 플레어 출신을 뽑았어야…!”
솨아아아아아!
바텐더들의 원성을 뒤로 윤수의 손에서는 화려한 불꽃이 크게 펼쳐진다.
크게 웃으며 손뼉 치는 손님들.
아실 안이 오늘은 조금 떠들썩한, 그런 날이었다.
2.
- 자. 이제 요리가 끝났으니까, 이걸 그냥 먹기는 좀 그렇잖아요? 여기 딱 맞는 술. 곁들일 술을 한 잔 만들어 주실 분을 모셔보려고 합니다. 제가 말했죠? 오늘 게스트 한 분 있다고. 흐흐. 다들 놀라실 겁니다. 선생님? 여기 나와주세요.
어두운 거실에서 반짝이는 티비만이 소리를 뿜는다. 그리 큰 크기도 아닌데 왜 이리 티비가 멀게만 느껴질까.
쇼파에 앉아 리모컨을 잡은 나이가 제법 든 남성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낙이라 부를 만한 게 그리 많지 않은 요즘이다. 이건 나이를 먹어가며 떠올린 작은 생각.
그런 삶 속에서 한때는 ‘바보상자’라 불리던 저놈이, 이제는 유일한 낙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저런 놈을 보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그런 말도 유행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저놈을 보지 않으면 시류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보상자 속 저 사내는 참 마음에 든다. 전문가에 또 실력이 있고 아는 것도 많은 게 딱 보이지 않나.
허나, 저 방송국이 표현하는 인터넷 방송이라는 건 아직 모르겠는 게 지금 이를 보는 이의 심정.
뭐, 크게 알 필요도 없나. 어차피 티브이 방송으로 보여주니까. 그런 생각에 방송을 보던 한 남자는 피식하며 헛웃음을 칠 뿐이다.
- 어이구. 반응이 좋네. 역시. 이거 봐봐요. 다들 잘생겼다고 하네. 흐흐. 잘생겼죠? 저랑 좀 닮았고. 아니라고? 에이.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래도 참 좋아진 세상이다. 이제는 저 바보상자로 지식을 쌓는 세상이 아닌가.
요리사도 요식업자도. 또 게스트로 나온 직업을 모르는 저 젊은 청년도.
무언가를 이제는 카메라에 대고 알려주는 시대.
화면을 보던 남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들린 맥주캔을 입으로 옮겼다.
그리고.
- 제가 아까 이분을 부르면서 선생님이라고 했죠? 맞습니다. 제 술 선생님. 전 그렇게 불러요. 사업하면서 메뉴 구상할 때 도움도 받고, 또 술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분이 여기 선생님이에요. 선생님? 인사 한번 해줘요.
이어지는 젊은 청년에 대한 소개가 거창하다. 맥주를 마시던 사내는 그런 생각에 잠시 시선을 화면에 고정했다.
‘술 선생님…?’
술 선생님이란 말에 반응하는 남성. 술이란 주제는 언제나 남자들을 설레게 하는 걸까.
아마 그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다음에 오는 말에서.
- 안녕하세요. 바텐더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내의 동공은 더 커져 버렸으니까.
‘바텐더…?’
바텐더란 단어를 들은 사내는 잠시 맥주캔을 내리고는 몸을 앞으로 당겨 방송에 집중했다.
…. 종로 맞습니다.
…‘플레어 바텐더’라고 부르시는 분들입니다. 저랑은 분야가 다른 분들이죠.
이어지는 여러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는 사내. 그는 누군가를 뜯어보듯 정환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은 긴가민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그였다.
하지만.
… …. 이분이 클래식 칵테일은 제가 알기로 이거. 이겁니다. 진짜.
이어지는 강성원 대표의 말이 하나 더 그의 귀를 간지럽히자.
“클래식…!”
사내는 입을 열고는 돋보기를 가져와 인터넷에서 저 차정환이라는 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겨우겨우 자판을 눌러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주름이 제법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