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잔. 푸른 불꽃.
6.
“불…쑈요?”
처음 본다. 이건 아마 집에서 화면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정환은 강 대표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아리는 걸 이번 생과 이전 생을 통틀어 처음 목격했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불쑈란 말에 다른 시청자들처럼 강성원 대표 역시 플레어 바텐딩을 먼저 떠올렸을 테니까.
플레어 바텐더와 클래식 바텐더. 그 명확한 영역의 구분 속에서 이를 넘나드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것 역시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윤수처럼 플레어에서 클래식으로 반대로 클래식에서 플레어로. 이렇게 영역을 넘어가며 이직하는 이들이야 없진 않았다.
허나, 윤수만 해도 무려 한 달 이상의 시간을 연습에 쏟으며 매진하지 않았나.
하나의 영역을 넘어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건, 제아무리 비슷한 카테고리 속에 묶인 이들이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정환의 말에 강 대표가 더 놀라는 걸지도 모른다. 정환의 실력이야 누구보다 인정하는 강 대표지만, 정환이 플레어까지 다룰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조금 간단하겠지만요.”
“이야. 우리 선생님 플레어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플레어 바텐딩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이건, 클래식에 속하는 그런 불쑈니까요.”
정환은 여유롭게 말을 뱉고는 빠르게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재료들이 정환의 앞으로 놓인다. 위스키와 금속으로 만든 머그잔, 그리고 물을 끓일 수 있는 포트가 테이블로 올라왔다.
정환은 마지막으로 설탕을 조금 준비하고 레몬 껍질을 잘라가는 것으로 준비를 마치려 했다.
“제법이네요.”
이를 세트장 밖에서 보고 있는 스태프 중 한 명이 지나가듯 말을 던진다.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한 남자.
조금 전 정환을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 피디였다.
“송 작가.”
“네. 이철승 피디님.”
그는 조용히 송미영 작가를 불렀다.
“아까…, 내가 좀 재수 없었나?”
“…조금요?”
“역시 그렇지…?”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
피디인들 ‘진짜’인 줄 알았겠나. 허우대는 멀쩡하고 나름 셰프니 바텐더니 평론가니 하며 방송가에 기웃거리는 이들이 한둘도 아니고.
매번 그들에게 당하고 나서야 후회하던 그는, 이번에도 사람을 넘겨짚은 게 제법 패착인 모양이었다.
강 대표의 소개가 있긴 했지만, 그저 친한 사이기에 꾸며주는 말일 거라 여긴 걸 보니, 자신도 점점 감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그였다.
“마스크 좋고 실력도 좋고. 거기에 방송에 감도 있어. 이거…, 잘 닦으면 제2의 강 대표 나온다.”
“강 대표님까지요?”
“딱 그래. 저게 강 대표님 처음 봤을 때 모습이라고.”
“그럼, 더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근데…, 내가….”
“…잘 좀 하시지…. 인상이 안 좋을 텐데요.”
“됐어. 방송쟁이가 뭐 있어? 구차해도, 비굴해도 일단 잡아 봐야지. 끝나면 나 비굴해진다? 말리지 마. 제대로 할 거라고. 사과. 반성도 곁들일 거야.”
“에휴. 네. 그러세요.”
처음부터 잘하지. 송 작가는 그런 생각에 고개만 절레 저을 뿐이었다.
세트장 밖의 상황을 모르는 정환은 평온하게 준비를 모두 마쳤다.
포트에서 끓는 물이 연기를 토해내며 이제는 시작해도 됨을 알려왔다.
정환은 잘 데워둔 두 개의 금속 머그잔에 각각 위스키와 끓인 물을 담더니, 이내 이를 한 곳에 합쳐버렸다.
위스키와 끓인 물이 섞인 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열기를 나타냈다.
“조명을 잠시 꺼주시겠어요?”
“예. 조명 좀 꺼주세요, 감독님. 여기 좀 어둡게. 그래야 불이 잘 보이죠.”
“넵. 잠시만요!”
정환이 불을 꺼달란 요청을 하자 곧바로 강 대표도 나선다. 그리고 들려오는 조명 감독의 답.
그들 역시 기대하는 모습이 있는 듯, 세트장의 조명은 빠르게 어둠을 불러왔다.
조명이 꺼지자 정환이 작은 토치를 꺼내왔다. 그리고 위스키와 물이 섞인 잔에 대고는 토치를 당기는 정환.
딱, 딱!
화아악!
토치가 짧은 열기를 토해내자, 이내 푸른 불꽃이 머그잔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끓인 물에 위스키의 알콜이 합쳐지니 쉽게 붙어오른 불이었다.
정환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머그잔과 빈 머그잔을 양손에 들고는 이를 자신의 눈높이까지 옮겼다.
두 개를 건배하듯 겹쳐두고는 눈에 힘을 주기 시작하는 정환.
그리고.
솨아아아!
점점 두 개의 잔이 멀어지자, 정환의 불쑈가 시작된다.
푸른 불꽃이 붙은 액체는 한쪽 머그잔에서 다른 머그잔으로 쏟아지며 불꽃의 아치를 그려갔다.
정환은 술을 뿜는 잔을 자신의 머리 높이로, 그리고 술을 받는 잔을 하복부 높이로 옮기며 폭포처럼 쏟아지는 불꽃의 아치를 더욱 선명하게 했다.
파란 불꽃이 어둠속에서 빛을 내며 길다란 채찍처럼 모습을 뽐냈다.
솨아아아!
불꽃은 계속해서 방향을 옮겨간다. 잔에서 다른 잔으로 술이 전부 쏟아지면 얼른 위치를 바꿔주는 정환의 모습.
술은 잔에서 잔으로 옮겨지며 계속해서 불꽃의 아치를 만들어 갔다.
채팅창은 이미 느낌표로 가득하고 저마다 감탄을 나타내는 말로 채워지고 있다.
조명이 꺼져 푸른 불꽃이 폭포처럼 아치를 그리는 게 화면으로도 선명하게 전달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솨아아아아!
아치가 점점 길어진다. 대각선 방향으로 손을 옮겨가며 자유자재로 허공의 술과 불꽃을 조절하는 정환의 움직임.
제법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조금의 흘림도, 또 튐도 없는 유려한 모습이 정환의 몸을 탔다.
당연한 말이지만, 화려한 음악도 또 뿜어지는 거대한 화염도 없다. 하지만, 푸른 불꽃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조율하는 바텐더의 모습과 어울려 더 멋들어지는 지금.
이 칵테일을 처음 고안한 바텐더는 이런 모습을 보며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바커스보다는 하데스를 위한 술.
그런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환은 우아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술을 다듬어갔다.
뿜어지던 불꽃이 한쪽 잔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무리 단계.
한쪽 잔에 수습된 불꽃은 그대로 유리잔에 담긴다. 아직은 유리잔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푸른 불꽃이었다.
정환은 그런 유리잔 위로 설탕을 한 스푼 가져와 우아하게 이를 털어냈다.
파르르륵!
불꽃은 설탕에 반응하며 작은 폭죽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뿌려지는 레몬 껍질의 에센스.
껍질을 살짝 눌러주니, 껍질이 머금은 에센스가 넓게 잔 속으로 퍼져갔다.
화르륵!
불꽃은 그런 에센스와 만나 잔 속에 크게 번져간다. 마지막으로 생명력을 발하는 불꽃.
정환은 이내 머그로 유리잔 위를 막아 그 마지막 불꽃을 그대로 꺼트렸다.
잔의, 완성이었다.
“블루 블레이저(blue blazer), 나왔습니다.”
정환은 잔을 손끝으로 밀어내며 이를 카메라에 보여줬다. 위스키를 물에 탄 것 같은 색을 뿜는 잔. 그런 잔 위로는 연기가 슬쩍 피어올라, 더욱 잔이 풍성하게만 보였다.
잔을 채운 연기가 마치 위스키의 향을 가득 품은 것처럼만 보였다.
“흐으음. 이야. 여러분. 이거, 진짜 향을 맡아보셔야 합니다! 흐흐. 이거 말도 안 되네, 진짜. 위스키를 특별한 걸 썼나? 아니죠?”
반응은 바로 정환의 옆에서 나온다. 채팅창을 읽을 틈도 없이 반응하는 강성원 대표.
연기가 퍼지며 전해지는 진득한 위스키 향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들며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다.
세트장 밖에서 이를 구경하던 스태프 사이에서도.
오?
우와.
진짜 난다.
대박.
여기까지?
강 대표의 반응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넓게 퍼지는 연기처럼, 향 또한 진하게 퍼지는 잔이 세트장 한가운데 놓였다.
“아니, 선생님. 이게 진짜 클래식 칵테일이에요? 이야, 신기하네. 완전 플레어 칵테일 같은데. 쓰읍.”
강 대표는 그림이 잘 나와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잔을 만들기 전 정환이 했던 말은 플레어 바텐딩보다는 클래식에 가깝다는 말.
강 대표는 그 말이 궁금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 있다.
“네. 이건 플레어 방식으로 만들어낸 클래식 칵테일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플레어 바텐딩. 그 원점에 해당하는 칵테일이죠.”
“원점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래?”
“최초의 플레어 바텐딩이 이 블루 블레이저를 만드는 거였다고 합니다.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했던 현대 바텐딩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리 토마스가 발명한 칵테일이죠. 방식은 플레어지만, 역사는 클래식이라 부르기에는 충분한 그런 칵테일입니다.”
“19세기? 이야. 말도 안 돼. 허허.”
칵테일을 만드는 과정은 플레어였지만 마무리는 클래식처럼 끝난다.
정환은 클래식 바, 즉 오센틱 바의 바텐더답게 멋들어진 설명으로 칵테일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조금 길어진 설명이었지만, 딱히 노잼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 채팅창이었다.
강성원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잔으로 다가섰다.
“마셔봐도 되죠?”
“그럼요.”
“따뜻한 칵테일이네. 이런 스타일을 핫 토디라고 부릅니다. 따뜻한 칵테일도 많아요, 여러분. 일단, 제가 한 번 마셔 볼게요. 흐흐. 부럽다구요? 에이. 방송을 위해서! 제가 먹는 겁니다. 예.”
채팅창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잔을 드는 강 대표. 온기를 머금은 잔이 그의 입술을 데웠다.
그는 천천히 잔을 삼키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아….”
아련한 반응이 그의 입을 탄다. 적당히 알콜이 날아가 부드러운 느낌의 액체가 입안을 채우자, 방송으로 노곤해진 그의 몸이 추욱, 처지는 것만 같았다.
위스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그였음에도, 이건 제법 괜찮은 한 잔처럼 느껴졌다.
“좋네요. 말로 표현하기 아쉬울 정도입니다. 예. 여러분. 이건 꼭 한 번 드셔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붑니다. 예. 아, 집에서 따라 하진 마시고요! 불나요!”
말을 뱉으며 그의 얼굴에 오른 홍조에, 또 한 번 채팅창은 난리가 난다.
말로 표현하는 게 와닿은 것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건 더 선명한 지금이었다.
이제 생방송을 종료합니다. 곧 순위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참가자는 전원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강 대표의 입에서 잔이 떨어지자 방송 종료를 알리는 안내가 들려 온다.
이제는 방송을 마무리해야 할 때.
“자. 여러분.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고생해주신 우리 술 선생님! 마지막으로 인사 한마디 해주세요.”
“네. 여러분, 오늘 감사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린 간단한 칵테일은 직접 해보시고, 블루 블레이저처럼 만들기 힘든 칵테일은 언제든 바를 들려서 맛봐 주세요. 바, 어렵지 않아요-! 바텐더, 차.정.환. 이었습니다!”
정환은 근엄하게 불꽃을 가지고 놀던 모습을 지우고는 양손을 들며 해맑게 웃었다.
“자, 다음 주에 또 봅시다. 안녕-!”
“안녕-!”
활짝 웃는 두 사람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환의 첫 방송 출연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