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91화 (91/175)

91잔. 마리아주.

3.

“그래서, 하겠다고 하셨나요?”

영업이 끝난 아실.

아실 안에는 이제 일상적인 풍경처럼 정환과 윤수, 그리고 재훈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오늘 이들의 주제는 조금 전 이곳을 다녀간 한 손님에 대한 이야기.

이들 모두 아는 사람인, 강성원 대표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간을 조금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당장 확답을 드리긴 애매한 거 같아서요.”

재훈의 가게에 조언을 전하러 왔던 강성원 대표. 그는 종로까지 온 김에 정환까지 만나며 지난 시간 지고 있던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 선물을 가져왔다.

그가 가져왔던 선물은 다름 아닌 방송 출연 제의.

자기만의 가게를 꾸려가는 이들에게는 제법 큰 선물임이 분명해 보였다.

“요즘 사장님 너무 바쁘시지 않나요? ‘숲’ 오픈 준비도 하셔야 하고 또 영업도 하셔야 하잖아요.”

“방송이 지금 당장 잡힌 건 아니라서요. 6주 후 촬영. 2주 후 방영이라고 하네요. 그때는 숲도 마무리 단계일 테니까요. 출연도 우선은 일회성이기도 하고.”

“절묘하네요.”

“아마 노리신 거겠죠. 그런 분이시니까요.”

방송 계획을 들은 재훈과 정환이 따뜻하게 웃어 보인다. 아마 이 선물은 그저 정환만을 위한 건 아닐 터.

방송이 촬영되고 또 전파를 타는 시기가, 미묘하게 재훈이 문을 열 ‘숲’의 오픈 시기와 겹쳐져 있다.

둘은 강성원 대표가 이를 알고는 제안한 걸 거라. 말하지 않아도 서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요? 아. 사람이 너무 몰리는 것도 생각은 해야겠네요. 어휴. 이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전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윤수는 이것저것 옆에서 본 것을 토대로 의견을 피력해 본다. 아직은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에는 부족한 식견이었지만, 나름 봐야 할 건 전부 보고 있는 그였다.

윤수의 말처럼 아실은 현재 포화 상태에 가까웠다. 평일이야 그런대로 지낼만한 분위기지만 주말만큼은 포화 상태란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

여기에 방송 출연 후 유명세까지 더해진다면, 손님은 더 늘어날 것이고, 이는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될 지도 모른다.

정환은 늘 아실 고유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재훈을 불러 독립을 앞당긴 것 역시 그런 이유.

어쩌면, 방송 출연을 정환이 고사할지도 모른다. 윤수는 그렇게 예상했다.

하지만.

“사실…, 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정환의 입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네? 괜…찮으시겠어요?”

“‘숲’이 있으니까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임 사장님도 모셔오는 손님이 있을 테고 아실에서 넘치는 손님만 해도 적진 않잖아요?”

“원래 구상이라면 그렇긴 하죠. 하지만, ‘숲’이 처음 구상보다는 규모가 커져서요. 아마,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숲’이 처음 구상보다는 크기가 커졌다는 것.

앞서 재훈은 아실을 찾아와 숲의 규모를 키웠다는 말을 전했었다. 이미 투자자와 이야기도 끝났다고 했고.

직원을 둘 셋은 더 써야 할 정도의 크기가 숲이란 공간.

그렇다면, 지금의 아실보다는 더 많은 손님을 ‘숲’이 수용할 수 있을 거란 정환의 예상도 크게 틀린 예상은 아닌 거로 보였다.

“확실히…, 숲은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커졌습니다. 바 좌석이 15좌석 정도고 홀도 4인 테이블이 6석 정도니 무리는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숲을 직접 만들고 있는 재훈까지 이렇게 말하니 고민거리는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결정만이 남은 상황.

“재훈 씨가 나가는 건 어떨까요?”

그런 상황에서, 정환은 이를 재훈에게 넘겨본다.

“네?”

“전 이미 미디어를 한 번 탔잖아요? 이번에는 재훈 씨가 얼굴을 알려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아뇨….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때는 가게 마무리 작업도 있을 거고 제일 바쁠 때일 겁니다. 또, 골목을 직접 기획한 정환 씨가 나서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번 방송은, 손님만 모아서 될 일은 아니니까요.”

“…역시 그런가요?”

단호히 이를 거절하는 재훈. 재훈은 스케줄도 또 원래 목적을 위해서도 정환이 나서는 게 맞다는 말을 전한다.

“저어, 그런데 손님만 모아서 될 일이 아니란 건 무슨 말씀이죠?”

그리고 그런 말에 고개를 가로 기울이는 윤수.

그는 마지막에 붙은 재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의미심장한 말끝에 재훈과 정환만이 살짝 웃는다. 아직, 윤수가 따라가기에는 두 사람은 조금 앞서가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도 모아야죠. 여기가 진짜 바의 골목이 되려면.”

“그러니까, 그게 누구를…?”

“다른 바텐더. 정확히는 오너 바텐더겠죠. 실력도 좋고, 또 이런 상권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이들로.”

!

“아마 장사가 잘되는 걸 본다면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 겁니다. 인터뷰 후에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긴 했었고요. 아직, 가게가 아실 뿐이라 더 나아가진 않았지만요.”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그때는 아실 뿐 아니라 ‘숲’도 문을 열었을 테니까요. 알짜배기를 알아볼 사람은. 모이겠죠.”

“허어.”

나오는 큰 이야기와 앞을 내다보는 둘의 모습에 윤수는 혀만 내두를 뿐이다. 이런 생각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던 그였다.

“스케줄도 수용할 인원도 부족함은 없겠군요, 그럼.”

“네.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고민거리가 하나씩 사라진다. 이제는 명확해지는 정환의 결론.

“한번 해 봐야죠.”

결론은 명쾌했다.

4.

예. 사장님. 미리 보내드린 대본은 보셨죠? 러프해요. 흐흐. 그런 게 없는 방송이라니까? 나도 미치겠어요, 아주. 준비? 술이랑 재료는 방송국에 이야기해서 쫘악-. 깔아두라고 해뒀죠. 예. 흐흐. 몸만 오세요. 몸만. 도구 같은 거 챙겨와도 좋고. 예. 그때 봅시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다가온 방송 촬영 날. 정환은 몇 주 전 강성원 대표와 나눴던 통화를 기억하며 짐을 꾸렸다.

술과 재료도 준비해야 하나 걱정했던 것도 잠시, 생각보다 방송국이란 곳에서 준비해줄 수 있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정환은 가볍게 셰이커와 스푼, 믹싱 글라스 등 손에 익은 물건만 챙기고는 아실을 빠져나왔다.

“가시는 건가요?”

“네. 재훈 씨. 오늘 잘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환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제 가게처럼 해보겠습니다.”

작은 골목의 코너를 도니 익숙한 인물이 정환을 반겼다. 공사 마무리 단계를 살펴보던 재훈이 그 주인공.

오늘 그는 자리를 비우는 정환 대신 아실에서 하루 게스트 바텐딩을 펼치게 된다.

미리 손님들께 인사도 하고, 또 정환이 없는 자리도 채우기 위해서였다.

“직접적인 홍보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여기 골목을 최대한 알려주세요. 정환 씨 실력이면, 충분할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해봐야죠.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재훈과 작별한 정환은 방송국을 향했다. 언제나 TV로만 보던 방송국을 마주하니 웅장한 느낌마저 드는 정환.

정환은 정문에서, 강 대표를 만나고 나서야 그 웅장한 건물 내부로 향할 수 있었다.

“어이구, 사장님. 오느라 안 힘들었어요? 차 보내준다니까.”

“아뇨. 편하게 잘 왔습니다. 먼저 와 계셨군요.”

“흐흐.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이 방송이란 것도. 들어갑시다.”

강 대표는 출입이 제한된 구역 내부로 정환을 안내했다. 자연스레 방송국 안을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새삼 그가 유명인인 걸 다시금 느끼는 정환이다.

“자. 여기가 오늘 방송할 우리 세트장. 이쪽은 주방, 이쪽은 사장님이 움직일 바. 백바는 나름 보기 좋게 꾸며는 놨던데, 만족이 되려나 모르겠네요. 흐흐.”

강성원 대표는 자연스레 정환을 안내하며 촬영이 이어질 세트장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가득한 공간 사이로 놓인 작은 주방과 백바,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까지.

여러 경험을 쌓으며 12년을 바텐더로 보낸 정환에게도, 이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오늘 정환은 여기서.

칵테일을 만들어야 한다.

“백바는 충분해 보이네요. 주종만 보면 아실보다 다양한데요?”

“그렇죠? 흐흐. 방송국이 돈이 많아. 부탁할 거 있으면 지금이라도 다 말해요. 아직 시작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충분합니다. 과일이나 얼음도 있나요?”

“얼음은 말씀하신 것처럼 커다란 거 하나. 그리고 과일도 대부분 있어요. 요리에 쓴다고 말하고 우리 회사에서 내가 챙겨왔다니까? 흐흐.”

“신경 많이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자. 갑시다. 안에서 기다리면 돼요, 이제.”

세트장을 둘러본 두 사람이 대기실로 돌아가려던 때.

“강 대표님!”

누군가 강 대표를 부르며 이들을 불러 세웠다.

“아. 피디님. 작가님.”

방송국의 피디와 작가였다.

“손님 오셨어요? 오늘 게스트?”

“네. 흐흐. 인사해요. 여긴, 이제 제 술 선생님. 종로에서 바 운영하시는 차정환 사장님입니다. 차 사장님. 여긴, 우리 피디님. 그리고 작가님.”

강 대표는 차례로 정환에게 피디와 작가를 소개해줬다. 30줄 후반으로 보이는 피디와 앳되어 보이는 작가 한 명.

둘에게 정환은 나서서 명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텐더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종로에서 ‘아실’이란 바를 운영 중입니다.”

“안녕하세요. 작가, 송미영이에요.”

“아. 네. 뭐. 마스크가 좋네. 강 대표님 부스 담당하는 피딥니다.”

비슷한 자세로 인사를 해오는 작가와 고개만 까딱이며 정환을 훑어보는 피디.

피디는 명함을 한 번 쑥 보고는 시선을 정환의 얼굴에만 고정했다.

“모델 아니에요? 대표님. 말만 바텐더고 모델 쓰는 거죠?”

“에이. 또 이런다. 모델은 무슨. 흐흐. 그만큼 잘생기긴 했죠? 진짜 바텐더예요. 가게도 운영하는 분인데. 그런 말씀 말아요!”

“그래요? 젊어 보이는데, 성공했네.”

“나한테는 선생님이라니까. 오늘, 잘 좀 부탁합시다. 예.”

“뭐. 잘하시면 잘 편집해드리는 거죠. 강 대표님이야 우리가 할렐루야! 하지만.”

“으이구!”

피디는 대충 어깨를 으쓱하고는 세트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저 얼굴 잘생긴 바텐더를 하나 구해왔구나. 하면서 정환에게는 큰 관심을 주지 않는 그였다.

뭐, 이런 반응은 이제 익숙하니. 정환은 그런 반응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정환과 강 대표의 앞에는 작가만이 남아 있다.

정환은 시선을 돌려 자신 앞에 선 작가를 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본다.

이 작가 역시, 방송에서 늘 보던 인물이다.

“그 방송에서 늘 맛보시는 분, 맞으시죠?”

“아. 네. 하하. 방송 보셨나 보네요. 맞아요. 덕분에 요즘 호사를 누리고 있죠.”

“술은 좀 하시는 편이세요?”

“가, 갑자기요?”

“오늘은 술도 드셔야 하니까요.”

씨익.

정환은 깜짝 놀라며 반응하는 작가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방송에서 보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는 그녀.

송미영 작가는 한 번 뻘줌한 표정을 짓더니, 스토리보드를 확인하며 오늘 방송의 컨셉을 살폈다.

“아. 맞네요. 보자. 오늘 컨셉이…마리아주. 였죠?”

불어로 마리아주(marriage). 영어로는 페어링(pairing)이라고도 부르는 음식과 술을 곁들이는 걸 말하는 그 단어가 오늘의 주제.

정환도 강 대표에게 컨셉을 미리 받아서 봤기에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네. 대표님이 만든 음식과 어울릴 칵테일.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구성이라고 들었습니다.”

“흠. 뭐. 일단 컨셉은 그렇긴 한데요. 우리 방송이 또 컨셉, 그대로 흘러가는 방송은 아니어서요. 적당히 채팅창이랑 흐름 잘 보시면서 해주시면 될 거예요. 편하게 하세요.”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휴. 제가 잘 부탁드리죠. 사고 안 나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선생님, 잘 좀 부탁해요! 흐흐.”

“네.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시작 전에 알려드릴게요.”

두 사람은 작가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는 대기실로 몸을 옮겼다.

널따란 대기실에 앉은 정환은 조금 두근거리는 모습이다.

“긴장하는 거 아니죠?”

“네? 조금요…?”

“크흐. 우리 선생님 긴장하는 모습을 다 보네, 내가.”

“처음이라서요.”

“인터뷰는 잘 하셨더만.”

“방송은 다르죠. 또, 오늘은 라이브잖아요?”

“그렇긴 해도 알아서 다 잘라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흐흐. 평소처럼만 합시다! 평소처럼만.”

강 대표는 늘 보여주는 너스레로 정환의 긴장을 달래준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나고 정환의 호흡이 조금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시작 1시간 전입니다. 세트로 나와주세요-!”

라는 한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환은 긴장을 조금 떨쳐낸 표정으로 세트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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