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잔. 실타래.
1.
딸랑.
아실의 문이 열리고는 몸을 반쯤 접은 사내가 하나 안으로 기어가듯 들어온다.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만, 그는 이곳의 사장인 정환이었다.
“사장님?”
“유, 윤수 씨…! 살려줘요!”
“괜찮으세요?”
윤수는 안으로 들어오며 몸을 던지듯 쓰러지는 정환을 겨우 받아 부축해 낸다.
정환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늘 아실의 문을 여는 건 정환의 몫이었다. 이건 윤수가 들어오고 난 뒤에도 변하지 않았던 일.
정환은 언제나 아실에 먼저 나와 그 공간의 하루를 자신이 직접 시작해 왔었다.
허나, 그런 모습이 바뀐 건 몇 주가 되지 않은 일이다. 요즘 아실의 오픈은, 언제나 윤수가 담당하고 있다.
“오늘도…‘숲’에 다녀오신 거예요?”
윤수는 당장 영업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정환을 맞이했다.
그리고 물어오는 ‘숲’에 다녀왔냐는 말.
여기서 말하는 ‘숲’은.
재훈이 열려고 준비하는 새로운 바의 이름이다.
“괴, 괴물이야! 재훈 씨는 괴물이 분명하다고!”
“오늘은 또 뭘 하고 오신 거예요?”
“회의…. 회의, 또 회의…!”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연 건 아니다. 다만, 재훈의 성격이 성격이었기에 매번 회의가 열려 정환은 거기에 끌려다니는 중이다.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 재훈이었다. 그는 바의 골목을 만들겠다는 정환의 말에 진심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정환만큼이나 진지해 보였다.
그는 정환과 함께 만들 골목의 전체적인 그림까지 구상하며 자신이 열 ‘바 숲’의 컨셉을 맞춰가는 중이다.
일의 세부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진행은 더욱 빨랐다. 그는 정환과 종로를 돌아본 다음 날 바로 투자자를 설득했고, 그 다음 주에는 바로 점포의 계약을 마쳤다.
업체를 이용해 공사에 들어간 게 2주 전. 공사 기간은 약 2달이 걸린다고 했으니, 곧 아실의 옆에는 새로운 바가 문을 여는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그래도 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여기 앞에서 바로 코너만 돌면 나오는 그 가게였죠?”
“네. 옛날부터 거길 봐뒀었거든요. 마침 재훈 씨도 마음에 들어 해서 거기로 확정했죠.”
“완전히 이웃이 되는 거네요. 자주 볼 수도 있겠고. 좋아요, 전.”
고생은 언제나 사장의 몫이다. 그저 가까이에 새로운 바가 생겨 교류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윤수는 기쁠 뿐이다.
딸랑.
아직 영업이 시작되기 전, 아실의 문이 열린다. 지친 기색으로 문을 돌아보는 정환.
정환은 아실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금 식겁하는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있던, 재훈이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다.
“화, 환영인가?”
“아닙니다.”
“재훈 씨. 아니, 임 사장님!”
“윤수 씨. 잘 있었죠? 차 사장님 좀 빌려 갔으면 하는데요.”
“또…요? 저 다하고 왔잖아요!?”
“크기가 크기인 만큼 처음부터 직원을 몇 명 고용해야 할 거 같아서요. 투자자분은 방금 승낙하셨습니다. 정환 씨도 좀 봐주시죠.”
“끄응….”
도와준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격언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정환.
지나가는 말로 뭐든지 시켜달라던 정환의 말을, 재훈은 해맑게도 그대로 받아 버렸다.
정말 뭐든지 도움을 청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정환이다.
“해, 해야죠…. 갑시다….”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정환은 아직 영업까지는 조금 남은 시간에 다시금 ‘숲’으로 끌려갔다.
윤수를 돌아보는 정환의 눈빛이 조금은 애처로웠다.
2.
“사장님. 저기 아래쪽에 새로 공사 중인 곳 보셨어요? 어떡해요?”
“모서리 돌면 나오는 집, 말씀이세요?”
영업이 한창인 평일의 저녁.
아실은 주말과는 달리 단골로 자리를 채우며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단골이 가득한 만큼 조금은 더 자유로운 아실 안의 분위기.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 젊은 여성 단골이 잔뜩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제가 오면서 봤는데, ‘바’래요! 그것도 칵테일 바!”
그녀는 제법 진심이 묻은 말투로 정환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 좁은 골목에! 예? 똑같은 한옥 컨셉에! 예? 또! 또! 젊고 잘생긴 바텐더에! 예? 이거 표절 아니에요!?”
짧게 지나치며 봤다고 하기에는, 제법 자세한 그녀의 설명.
“자세히…보셨네요. 하하.”
정환은 그저 웃으며 여유로울 뿐이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요!”
“괜찮아요. 아는 분이 여는 가게라서요. 저도 준비 단계에 참여하고 있어요. 문 열고 나면, 꼭 한 번 들려보세요.”
“네? 그래도 되는 거예요? 경쟁 업체, 그런 거 아니에요?”
“아뇨. 바는 그런 개념이 잘 없어서요. 한 곳만 쭉 다니는 분도 많지는 않아요. 여기서 맛보는 칵테일이랑, 또 거기서 맛보는 칵테일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난 또. 걱정했죠.”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훈이 문을 열 곳이 제법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제는 밖에서 봐도 그곳이 바라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 같고 또 사람들도 알음알음 알아가는 눈치.
만약, 문을 연다면. 반응이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 ‘숲’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 거예요. 거긴, 아실과는 또 다른 칵테일을 드실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칵테일요?”
“네. 아실은 아무래도 조금 클래식한 칵테일을 파는 곳이잖아요. ‘숲’에서는 조금 창의적인 창작 칵테일을 많이 선보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사장님께서 그런 쪽에 관심이 많으셔서요.”
“우와. 정말 다르긴 하네요!”
“한 잔은 아실에서, 또 한 잔은 숲에서. 그렇게 즐겨주세요.”
“저야 의리를 지키려고 했지만, 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한 번 가봐야겠네요!”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다. 이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영원한 진리.
정환은 아실이 문을 열기 전, 마리너스라는 곳에서도 헬퍼로 일하며 분명하게 도움을 받았다.
그때 정환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사람이 재훈.
이번에는 정환이 그 도움을 돌려줄 차례였다.
힘든 건 사실이다. 가게 하나를 운영하며 또 다른 가게에 대한 일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힘들지 않겠나.
하지만, 힘들고 난 후 얻는 것의 가치는 또 다른 이야기.
정환은 자신이 꿈꾸던 거리가 점점 구색을 갖춰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싫지 않은 요즘이었다.
“흠. 클래식에 아실, 크래프트에 숲. 이런 느낌인가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정환에게 윤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윤수는 정환의 최측근에서 일하는 만큼, 정환이 그리는 그림의 모습을 아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곧 늘려가야죠.”
“기준 형이랑 정우 형도 한몫하는 그림이겠죠?”
“그럼요. 그리고 윤수 씨도 나중에는 한몫해줘야죠.”
“제, 제가요?”
“그럼, 그냥 나중에 쌩하고 가버리려 하신 거예요? 냉정한 면이 있으셨네요?”
“아뇨! 저도 한몫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조금 경쾌한 느낌의 바도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해요. 윤수 씨가 그런 곳을 하나 맡아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도 같구요.”
“말씀만 들어도 설레네요! 열심히 해서! 꼭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조금 더 먼 훗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기준도 정우도 명진의 당부가 있었기에 아직 2년은 더 지금 일하는 곳에 몸담고 있어야 할 테니까.
허나, 이미 15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온 정환에게는, 그 2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우선은 오늘에 집중합시다!”
“네, 사장님!”
아실의 하루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주말이 아닌 이상 손님이 많기는 해도 정환과 윤수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범위.
아실은 평범함이라는 고유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딸랑.
그리고 그런 평범함을 깨트리는 익숙한 소리.
“어?”
“와!”
“설마?”
“오, 여길?”
“마, 맞지?”
그 소리가 들리고 난 후 손님들의 고개가 일제히 문을 향하며 입이 열렸다.
손님들의 고개가 향한 곳에는 홀로 아실을 찾은 한 손님이 사람 좋게 웃으며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명한 사람이라도 온 걸까. 다들 아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아는 것처럼 입을 모았다.
섣불리 다가서진 않는 모습이, 딱 유명인을 본 일반 대중의 반응이다.
정환은 그런 반응 속에도 평범히 나서 손님을 맞았다. 여전히 손님들의 시선은 정환과 새로 들어온 인물에게 고정인 상태였다.
“강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흐흐. 차 사장님. 아휴. 오랜만입니다. 격조했죠?”
아실 안으로 들어온 손님은 아르센에서 연을 맺었던 강성원 대표.
요식업에 종사하며 이런저런 사업을 크게 하던 그는 정환을 늘 술 선생님이라 부르며 여전히 교류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잘 못 만나긴 했지만.
“워낙 바쁘신 분이시니까요. 그래도 요즘은 방송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화면이 잘 받으시던데요?”
“아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팔자에도 없는 방송 하느라 죽겠구먼. 흐흐. 근데, 실물이 낫긴 하죠?”
“그럼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작년 중반기쯤. 그러니까 1년 정도 전. 강성원 사장은 새롭게 구상 중인 캐주얼 펍과 관련하여 정환에게 칵테일을 배워갔다.
그리고 계속 연락하며 이를 보완, 결국 새롭게 런칭한 그의 펍 사업은 연전 연일 대박을 기록하며 고공행진 중이다.
정환이 소개했던 톰 콜린스와 하비 월뱅어, 그리고 프로즌 다이키리가 강 대표의 손에서 재해석되어 시중에서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요즘이다.
‘이전 생에는 없는 일이었지.’
정환이 회귀 후 바뀐 일 중, 가장 거국적인 일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펍 사업으로 대박을 터트린 강성원 대표는, 원래 정환의 기억보다 약 1년에서 2년.
그 정도의 시간을 당겨 벌써 방송가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수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체이서는 어떻게 드릴까요?”
“시원한 냉수로 주십쇼. 흐흐. 처음 보는 분이네?”
“지, 지난달부터 일하고 있습니다! 장윤수! 라고 합니다! 영광입니다!”
너무 바빴기에 한동안 아실에 들르지 못했던 강성원 대표. 제법 오래된 단골이지만, 덕분에 윤수는 그를 오늘 처음 본다.
방송에서나 보던 이를 처음 봤기 때문일까. 윤수의 모습이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흐흐. 뭐가 또 영광이래요. 그냥 밥장사하는 아저씨인데요.”
“아, 아닙니다! 요즘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저도 자취 중이라 아주 유용해요!”
“그래요? 아휴. 고맙습니다. 예.”
강성원 대표는 수건으로 얼굴을 한 번 닦고는 숨을 돌렸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인사에도 그는 사람 좋게 웃고는 같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유명인의 겉치레나 올라간 어깨 따위는, 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오늘은, 시간이 나셨나 보군요. 요즘 바빠 보이시던데요.”
그런 그에게 정환이 다가선다. 오래된 단골인 만큼 직접 주문을 받으려는 정환.
성원은 정환을 보고는 연신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휴. 말도 마요, 아주. 방송에 사업에 바빠 죽겠어요.”
“좋은 일이죠. 방송 효과도 좋을 텐데요?”
“에이, 뭐 그건 나름? 흐흐. 아휴. 그것보다 오늘은 또 재훈 씨 때문에 더 죽을 뻔했네.”
“재훈 씨요?”
“요 밑에 가게. 거기 잠시 갔다 오는 길이에요. 아주 전화기에 불이 난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그냥 가서 해결 보자! 이러고 좀 전에 갔다가 그냥-! 몇 시간을 잡혀 있었네. 흐흐.”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과한 재훈의 열정은 이미 정환이 온몸으로 받는 중이다. 아무래도 정환 하나로는 모자랐는지, 재훈은 강 대표의 손까지 빌리는 모양이다.
“사장님도 참여하고 있다면서요?”
“자잘하게…보다는 조금 많이. 네. 돕고 있습니다.”
“보니까, 또 혹사 당하시겠구만.”
“제가 이쪽으로 모신 거라서요. 어쩔 수 없죠.”
“듣긴 했는데, 진짠가 보네? 골목 만들 거라면서요?”
“네. 현재는 그림만 그리는 중이지만요.”
“좋지. 바도 결국 골목상권이 되면 좋은 일이거든요. 잘 생각했어요, 아주. 흐흐.”
애초에 바로 이루어진 상권을 만든다는 생각에 이 강성원이라는 사람의 영향이 없진 않았다.
이전 생에는 서로가 모르던 사이였지만, 영향만은 강하게 받았던 정환.
이런 이야기를 이 사람과 이렇게 나눌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정환의 표정이 조금 다채로운 순간이었다.
“주문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 흐흐. 당연한 말씀을. 프로즌 다이키리. 그걸로 부탁합시다. 네.”
“프로즌 다이키리. 네. 알겠습니다.”
단골답게 늘 먹던 거로 주문하는 강 대표. 그의 앞에서 시끄러운 블렌더 돌아가는 소리가 한참 들리고 난 후에야 잘 갈린 프로즌 다이키리가 한 잔 앞으로 나온다.
강 대표는 역시 이 맛이라는 표정을 지어가며 주변 자리에 앉은 다른 손님들에게 이게 원조라는 말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배워서 우리 가게에 쓴 거예요. 흐흐. 몰랐죠? 여기가 원조에요, 원조.”
너스레가 참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재훈 씨 가게는 대표님이 보시기에 별문제 없어 보이던가요?”
“예. 아주 좋던데요? 잘하고 있던데 뭘. 사장님이 디테일 잡아줬죠? 딱 눈에 보여요. 흐흐.”
“간단하게만요. 재훈 씨도 워낙 안목이 좋아서요.”
“역시.”
강 대표는 숟가락으로 얼음을 푹푹 퍼먹으며 아이처럼 웃었다. 해맑은 모습이 잔을 그대로 즐기는 모습이다.
그는 반절 정도를 숟가락으로 떠먹은 후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뭐 온 김에 겸사겸사해서 여기도 와봤어요. 재훈 씨한테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까, 빚도 갚아야 했고.”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저도 도움을 받은 느낌이네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내가 여긴 따로 계산하러 왔는데? 덕분에 우리 사업이 잘됐는데, 내가 빚 한 번 소소하게라도 갚아야죠. 사장님한테도.”
“저…한테요? 아닙니다. 대표님 음식 덕분에 잘 된 거죠.”
“이봐, 이봐. 이런다니까. 안 받으려고요?”
“저야 뭐, 딱히…. 네. 그저 잔을 드렸을 뿐이니까요. 발전시키신 것도 대표님이시구요.”
“어휴, 건실해요, 하여튼. 흐흐. 내가 아직 원금은 못 내도 이자 정도는 내고 싶어서 오늘, 네. 이렇게 왔습니다. 흐흐.”
“이자요…?”
정환에게 배워간 메뉴를 통해 사업이 큰 대박을 쳤다. 다른 사람이라면 응당 빚을 갚으라 먼저 독촉해도 할 말이 없을 상황.
그런 상황에서도 이 바텐더는, 한 번도 강 대표에게 먼저 연락을 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강성원은 그런 건실한 바텐더를 바라보고는 기분 좋은 미소를 한 번 지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이자는.
“사장님. 나랑 방송이나 하나 같이 합시다.”
제법 두둑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