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잔. 너로 정했다!
2.
공중에서 두 바퀴 정도를 빙그르르 돌던 셰이커가 차례대로 지원자의 손에 안착했다.
마치 자석으로 붙인 것처럼 착! 달라붙는 셰이커.
지원자는 이를 과하지 않은 동작으로 몇 번 휘젓고는 한쪽 손을 비워냈다.
그의 손에는 푸어러를 설치한 술병이 들려온다.
술병을 던지고, 또 이를 돌리고. 그런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다.
그저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루틴(routine)이 펼쳐질 뿐.
정환이 저 장윤수라는 지원자에게 도구를 바꾸라 조언한 것도, 또 편하게 해보라는 말을 전한 것도, 전부.
이런 루틴 때문이었다.
플레어 바와 클래식 바의 차이를 잊고 보더라도 바텐더에게 루틴은 중요한 법이다.
저마다 메이킹을 시작하기 전 일정하게 움직이는 동선도 있고 리듬도 있으니까.
특히나 셰이킹 같은 경우는, 이런 루틴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곤 했다.
몸에 익숙한 루틴 없이 또 익숙하지 않은 셰이커를 잡았으니 어찌 제 실력이 나오겠나.
이제야 루틴을 찾은 장윤수 지원자는 아낌없이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촤라아아악!
높게 든 술병에서는 푸어러를 타고 액체가 길게 곡선을 그리며 셰이커로 쏟아졌다.
내려올 때도 평범하진 않은 동작. 허나, 플레어 쇼와는 또 다른, 조금은 간략한 동작이다.
지원자는 이를 몇 번 반복하고는 셰이커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
탁! 탓! 타악!
간단하게 삼분할 된 동작으로 셰이커를 고정한 그가 절도있게 이를 올려 들었다.
살가각! 살가각! 살가각! 살가각!
그리고 시작되는 셰이킹. 엉성함은 찾아볼 수 없는 자세로 소리마저 완벽한 셰이킹이 이어졌다.
이를 듣는 정환의 얼굴에는 평안함이 자리하고 있다.
챠아아악!
연녹빛 액체가 잔에 담긴다.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옆으로 크게 튀지 않는 술.
3년의 경력만으로 저런 실력을 가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과 같은 노력을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터.
그가 보낸 3년은, 아마 남들과 같은 3년은 아니었을 것이다.
“준벅. 나왔습니다.”
장윤수 지원자는 완성된 잔을 조심히 정환의 앞으로 밀어냈다.
밀어내는 모습은 다시 클래식 바를 따라 하듯 엉성한 모습이다.
“긴장을 푸니, 훨씬 보기도 좋고 능숙하시네요. 멋집니다.”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우선 칵테일 먼저 마셔볼게요.”
“네, 넵! 영광입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하지만, 앞에 놓인 잔에서 풍겨 오는 상큼한 향에 더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정환.
정환은 지원자의 말을 잠시 끊고는 서둘러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섞인 준벅이 정환의 손에 들어온다. 파인애플과 코코넛의 은은한 향이 저 멀리서도 정환에게 손짓하는 듯했다.
정환은 이를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호르륵.
!
한 모금의 술이 혀에 닿자, 이내 달콤한 멜론의 맛이 입안 가득 터져 나간다.
정환은 극한까지 눌러둔 멜론의 맛이 입안에서 터져나갈 때, 깜짝 놀라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준벅이란 칵테일을 맛없게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이건 정말 잘 만든 준벅임이 분명했다.
“…맛있네요. 잘 만든 준벅입니다.”
“저, 정말인가요? 정말 맛있나요?”
“네. 마셔본 준벅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아…!”
한참을 닫고 있던 정환의 입이 열리자, 윤수는 감격에 겨운 듯 눈을 감고는 고개를 들어 올린다.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에게 인정받은 게,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맛은 무조건 합격.’
실력은 잘 봤다. 만드는 과정도, 또 결과물도 만족할 정도. 하지만 면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환은 정해진 공식처럼 이어지는 질문을 던졌다.
“‘아무거나’라는 주문에 준벅을 만든 이유가 있으실까요?”
“제일 자신 있는 칵테일 중 하나기 때문입니다!”
앞선 지원자들과 같은 대답이 나오자 정환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스친다.
높아진 기대치 만큼 조금 다른 답이 나오기를 바랐던 게 정환의 내심.
이런 부분은 어쩔 수 없나. 하며 정환의 실망이 짙어지려 할 때.
“그리고! 토요일에 여길 들러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장윤수 지원자의 말이 정환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을 저 멀리 날려 버리고 만다.
“지난 토요일 말씀인가요?”
“넵! 맞습니다!”
“그게 준벅과 무슨 상관이죠?”
“소, 손님을 봤으니까요!”
“손님요?”
“주말에 오신 분들과 스승…, 아니. 사장님께서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습니다! 대부분 처음 오시거나 칵테일을 모르시는 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 손님께 추천하기에는 준벅이 가볍고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 준벅을 만들었습니다!”
“아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일한다는 가정을 하고 만들었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시키셔서…!”
씨이익.
윤수의 입에서 유려한 답이 나오자 이내 정환은 자신의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세상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정환의 입꼬리.
정환은 이전 생에서도 후배들을 가르칠 때 언제나 강조해 왔었다. 신입 때, 또 주니어 때.
그들이 봐야 할 건 선배 바텐더의 모습이 아닌, 바 건너편에 앉은 손님들의 모습이라고.
저 장윤수라는 지원자는 지난 주말, 정환만 본 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앉은 손님까지 함께 보고 간 것이다.
일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제법 제대로 견학을 하고 간 모양이다.
“그랬군요. 좋네요. 흠. 몇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네. 뭐. 편하게 답하시면 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원래는 질문 한 개만을 던지고는 지원자들을 돌려보냈던 정환.
그런 정환이 장윤수라는 지원자에게는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메이킹 하시는 걸 보니 플레어 쪽에서도 실력이 좋으셨던 거 같은데요? 왜, 플레어 바를 그만두려고 하시는 거죠?”
“바, 바텐더란 직업에 회의감이 들던 때…! 사장님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전설적인 아르센의 일화와 사장님의 철학과 손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맛까지…”
“…그만! 방금 질문은 넘어가죠. 네. 그게 좋겠네요.”
살짝만 잘못 건드리면 나오는 존경에 정환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말을 잘라 버렸다.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하는 지원자는 사장의 그런 부끄러움을 1도 모르는 눈치다.
이후로도 정환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시피를 몇 개 묻는 정환에게 그는 즉답했고, 또 클래식 바에 맞게 따로 공부도 하고 있다는 모범적인 답을 들려줬다.
또, 한동안 영업시간 전 일찍 출근해 일을 배워야 할 수도 있다는 말에는 영광이라는 부담스러운 대답까지.
그렇게 그의 면접은 남들보다 두 배는 긴 시간을 쓰고야 끝이 났다.
“차비 챙겨가세요.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는 내일까지 문자로 알려드릴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그냥 일만 배울 수 있어도 좋습니다! 직원이 아니어도 좋으니, 고려해 주십시오!”
지원자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에 윤수는 살짝 자기 어필을 보태 본다.
그의 말을 들은 정환의 눈이 조금 차게 식었다.
“아뇨. 그런 말은…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경력도 있고 실력도 있잖아요. 자기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텐더는 손님께도 인정받지 못해요. 혹시 우리가 함께 일하지 못해도. 그런 말은 다른 곳에서도 하지 마세요. 이건, 같은 바텐더로서 하는 부탁입니다.”
정환은 윤수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혹시나 실망했을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강한 어조에 조금은 마음이 쓰이는 정환.
하지만, 그런 정환의 마음이 무색하게.
“오오오! 며, 명심하겠습니다!”
윤수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정환이 한 말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이미 속으로야 정했던 결심이.
이때는 조금 흔들렸던 것도 같았다.
3.
이틀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평온한 오후.
언제나처럼 아실에 출근해 커피를 한 잔 내린 정환은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한껏 여유를 만끽했다.
오늘은 새롭게 뽑은 바텐더가 아실에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 직원 교육도 할 겸, 또 가게도 안내할 겸. 정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직원을 호출했다.
영업 준비에 영업에 또 직원 교육에.
한동안은 이전보다 더 바빠질 수도 있는 상황.
허나, 조금만 가르쳐 준다면, 새롭게 뽑은 직원은 얼른 이곳에 적응할 거라. 정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향이 좋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과 향기로운 커피 향. 이를 즐기고 있던 정환.
하지만, 이런 정환의 여유는.
다다다다다!
딸라아아앙!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아실에서 일하게 된 장!윤!수! 라고 합니다!”
!
누군가의 등장으로 깨지고 만다.
‘또….’
이런 등장이다.
깜짝 놀라 앞으로 몸을 기울인 정환은 겨우 커피잔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주변에는 커피가 조금 넘쳐 있었다.
“이, 일찍 오셨네요, 윤수 씨?”
“얼른 오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넘게 남았다. 정환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열정에 또 당황하고 만다.
“네…. 좋네요. 열정. 대신, 우리 말에 힘을 조금만 뺄까요? 이전에도 말했지만, 바텐더가 너무 딱딱한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스승님이라거나, 사부님이라거나, 선생님 같은 호칭은 금지입니다. 사장님이라 불러 주세요.”
“아…. 넵. 알겠습니다. 사장님.”
말은 곧잘 듣는다. 정말이지 다행인 부분. 정환은 호칭을 정리한 말에 잔뜩 아쉬워하는 그를 백사이드로 안내했다.
윤수는 백사이드에 간단히 짐을 풀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작은 앞치마가 하나 주어졌다.
아실은 재킷과 조끼의 구분이 없는 캐주얼한 곳이다. 그래도 조금의 차이는 있어야 할 터.
정환은 이를 위해 그에게는 앞치마 안에 깔끔한 티셔츠를 입을 걸 주문했다.
까만 티셔츠 위로 걸린 앞치마가 그리 보기 싫진 않았다.
“이게…아실의…!”
“감격도! 적당히. 적당히 합시다. 뭐든 넘치는 건 좋지 않아요.”
“아. 넵.”
갈 길이 조금 멀어 보이지만, 가기 싫은 길은 아니다. 정환은 새롭게 뽑은 직원에 대해, 후회는 전혀 없었다.
실력도 좋고 마음가짐 역시 나쁘지 않지 않나. 시작이 클래식 바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는 정환이 조금만 손을 봐주면 될 일.
어쩌면, 제법 괜찮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정환 역시 지난 이틀간 내심 기대하며 그를 기다렸다.
“이제 시작해 볼까요? 먼저 바 안에 서는 자세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서는 것도 방법이 따로 있나요?”
“물론입니다. 똑바로 서보세요.”
“이, 이렇게요?”
윤수는 정환의 말에 어색한 차렷 자세로 앞을 보고 섰다. 뻣뻣한 모습이 누가 봐도 부담감이 느껴질 자세였다.
“거기서 한발만 뒤로 빼볼까요? 반걸음 정도.”
“네, 넵. 뺏습니다.”
“이제 상체를 다시 발에 맞춰 정면으로.”
스윽.
정환의 말에 맞춰 몸을 움직이자, 윤수의 몸이 조금은 사선으로 서게 되었다.
정면을 모두 가리는 게 아닌, 비스듬히 서는 자세가 펼쳐졌다.
“좋네요. 손님을 마주하실 때면 이 자세가 제일 좋아요.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저는 이 정도를 추천해요.”
“아, 네. 이런 건 처음이라….”
확실히 이전에 일하던 플레어 바와는 다르다. 자유롭게 움직이며 동적이던 이전 직장과는 달리, 여긴 조금 정적인 느낌이었다.
“바텐더가 정면으로 손님을 마주하면 손님이 부담감을 느낄 수 있어요. 여자 손님이면 더 하시겠죠. 적당히 공간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아아. 그런 이유였군요! 이번에도 역시 손님…!”
“어쨌든 편하게 쉬는 공간이 되어야 하니까요. 플레어 바와 클래식 바는 다른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게 아니에요. 플레어 바는 화려한 기술을 보며 쉬는 곳. 여긴 다른 의미로 쉬는 곳.”
“오오! 넵!”
윤수는 신입답게 정환의 말을 수첩에 적어가며 하나씩 기록했다. 정환은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아 조금씩 말을 반복해서 들려줬다.
정환의 교육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백바와 도구를 정리하는 법, 손님과 대화할 때 주의 사항 등 기본적인 걸 우선 알려주는 정환.
윤수는 하나씩 머리에 이를 집어넣으며 차분히 일을 배워갔다.
어느새 간단한 교육이 끝나고, 드디어 본론이 나온다.
“자. 이제, 메이킹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요? 메이킹 자세나 방식을 조금…. 아주 조금만 손봤으면 해요. 괜찮을까요?”
“전 좋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손봐주셔도…!”
“조금. 조금만 고치도록 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실력 좋고 결과물도 맛있어요. 그냥, 공간에 맞게 조금만 고칩시다.”
“…아. 네….”
결이 조금은 다른 플레어 바의 메이킹 방식을 클래식 바에 맞게 고쳤으면 한다는 정환의 말.
그런 정환의 말에 윤수는 전부 고쳐도 좋다더니, 이내 이어지는 말에는 풀이 조금 죽은 눈치다.
정환은 그런 그를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러세요? 혹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아, 아뇨. 그런 것 보다는….”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같이 일하려면, 그게 저도 편합니다.”
“그럼…. 저도 계속 들으니 어색한 이야기라….”
윤수는 연신 정환의 눈치를 보더니 정환이 말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서야 입을 연다.
어색하게 입을 우물거리던 그는.
“마, 맛있다는 말씀…! 지, 진짠가요!?”
눈을 딱 감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을 물어온다.
‘응…?’
처음에는 농담이나 또 그 찬양인 줄 알았던 정환도.
주먹을 꽉 쥐고는 떨리는 눈빛을 한 윤수를 보고는 이게 진지한 질문임을 서서히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