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잔. 누구냐 넌.
3.
“맞는 거 같죠?”
주말 영업을 시작한 아실.
오늘은 특별히 헬퍼로 온 재훈과 정환이 함께 아실 안을 누비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재훈 덕에 한껏 여유가 생긴 아실은 차분한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며 안에는 가득한 손님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손님들을 맞으며 중간에 찾아온 잠시의 여유. 재훈은 이미 사용한 식기를 씻으며 한쪽 구석에 눈빛을 보내고는 정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눈빛이 향한 곳에는 한 사내가 잔뜩 진중한 표정으로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역시 재훈 씨도 알아보시는군요.”
“딱 보면…. 알 수 있죠. 정환 씨가 유명해지긴 하셨나 봐요.”
바텐더가 수군거리며 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금기되는 행동이다.
프로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이 이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만은, 예외로 해도 될 그런 상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기. 주문 좀 더 해도 될까요?”
마침 그들이 흘깃 보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린다. 재훈은 씻던 식기를 내려두고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네. 주문하시죠. 앞에는 마티니를 드셨네요. 비슷한 종류로 드릴까요?”
“아뇨. 그, 김렛. 김렛으로 부탁합니다.”
“진은 앞에 드셨던 비피터로 쓰면 될까요?”
“이번에는 고든스로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든스 김렛.”
재훈은 간단히 주문을 받고는 손을 움직여 셰이커를 가져왔다.
손님의 앞에서 계량을 시작하려는 재훈의 모습.
허나, 손님은 잠시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한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도 저 바텐더분께 주문을 넣어 주실 순 없을까요?”
“네?”
“죄송합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칵테일을 만들 바텐더를 바꿔 달라는 말이 나온다. 재훈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이내 여기가 정환의 바라는 걸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 씨. 김렛 한잔 만들어 주세요. 저 제일 끝자리요. 이번에는 고든스로.”
“또 저한테 주문하신 건가요?”
“네. 그러시네요. 노골적이에요, 참. 마티니에 김렛이라니.”
“요즘 부쩍 이런 일이 많네요. 허허.”
정환은 머리를 긁적이며 셰이커를 준비한다. 그런 정환의 모든 모습을 눈으로 담으려 잔뜩 눈에 힘을 주는 끝자리의 사내.
정환과 재훈은 그런 사내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저런 손님 역시, 바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만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너무하네요.”
계량을 끝내고 셰이커를 들어 올리는 정환에게 재훈이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진다.
아무래도 재훈은 저 끝자리에 앉은 손님의 정체를 아는 것 같다.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정환의 셰이킹이 시작되자 끝자리 손님의 눈은 더 크게 떠지고는 이제 완전히 상체마저 정환 쪽을 향한다.
조금은 놀란 것 같은 표정과 관찰하듯 고개를 내빼고는 정환의 자세를 구석구석 살피는 그의 모습.
뭐, 사실을 말해보자면 정환 역시 저 손님이 어떤 손님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요즘 부쩍 저런 손님이 늘긴 했으니까.
저렇게 바텐더의 손에 집중하며 뜯어보듯 시선을 던지는 이들은 대부분.
같은 바텐더인 법이다.
“고든스 김렛,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은 잔을 받고는 그대로 코로 가져가 향을 음미했다. 잔을 잡는 손의 모양도 또 코로 향을 모아 냄새를 맡는 모습도.
누가 보아도 딱, 바텐더스러운 손님이었다.
주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터를 보기 위해 마티니를, 셰이킹을 보기 위해 김렛을.
경력 조금 쌓인 바텐더라면 알법한 레퍼토리의 주문과 시선에 재훈과 정환은 이미 저 손님의 정체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SNS와 잡지 덕에 알량한 명성이나마 얻은 덕에 이렇게 찾아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반 정도는 먼저 자신의 직업을 밝히고는 견학을 청했고, 반 정도는 저렇게 아무 말 없이, 구석에서 조용히 정환의 손끝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개 정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이들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환의 나이가 어린 것도 있고 경력 역시 짧지 않나.
그들은 언제나 정환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는 정환을 뜯어먹듯 바라볼 뿐이었다.
끝자리의 사내가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향에서 약간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 그의 모습.
허나, 그 역시. 입으로 김렛이 흘러 들어가고 나자 얼굴에서 평안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
훗.
그럼 그렇지. 재훈의 얼굴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는 표정이 걸렸다.
정환의 잔을 처음 마셔보는 이들은 전부 저런 표정을 짓는다. 재훈 역시 그러했었고.
거기에 정환을 뜯어 보겠다고 찾아와 눈에 힘을 주던 이들도 이건 마찬가지.
그들은 곧 두 잔 정도를 마신 후면 다들 저런 표정을 지으며 축 처진 어깨로 아실을 빠져나가곤 했다.
“김렛은 입에 맞으세요?”
서로가 서로에게 신분을 밝히고 건전한 교류를 하는 게 바텐더간의 불문율.
재훈은 그런 불문율을 어겨가며 자리를 차지한 사내에게 던지듯 한마디를 건넸다.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저기….”
“네. 말씀하시죠.”
“여기 일하는 분은 한 분뿐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새로 일하시는 분인가요?”
“아뇨. 전 하루 헬퍼로 여기 왔습니다. 원래는 마리너스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남동의 마리너스 말씀인가요?”
“네.”
재훈이 자신이 일하는 곳을 밝히자 사내의 표정이 또 바뀐다. 그는 마리너스가 한남동에서도 제법 유명한 곳임을 모르지 않아 보였다.
“좋은 곳에서 일하시네요. 헌데, 여기까지는 왜?”
“배울 게 많은 곳이니까요. 드셔보셔서 아시겠지만, 여기 사장님 실력이 좀 많이 좋습니다.”
“…원래 여기서 일하시는 분은 아니란 말씀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호륵.
사내는 재훈의 마지막 답을 듣고는 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반응이 어설프기도 하고 이미 알아챌 만큼의 모습은 보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자신이 바텐더라는 말은 하지 않는 그였다.
“‘진 리키’로 한잔 더 부탁드립니다.”
사내는 잔을 하나 더 주문하고는 또 홀로 침전한다. 이번에는 탄산과 과일 다루는 실력을 보겠다는 의도일 터.
진 리키는 진에 라임을 통으로 짜서 넣고 머들링 후 탄산을 더하는 칵테일.
이는, 탄산과 과일 다루는 솜씨를 보기에 좋은 칵테일이었다.
“이번에도 사장님께 만들어 달라 말씀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아직 더 볼 게 남았다는 걸까. 재훈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정환에게 주문을 전했다.
정환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진 리키를 만들어 사내에게 가져갔다.
“…….”
진 리키를 마시고도 사내의 표정은 한동안 밝아지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한참을 고뇌하는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감사했습니다.”
배웅받는 순간에도 끝까지 아실을 돌아보며 정환과 바 안을 살피는 사내의 모습.
사내는 그렇게 힐끔거리는 눈빛만을 남기고는 그대로 아실을 떠났다.
4.
“뭐? 경우 없는 놈이네, 그거.”
수상한 사내가 다녀가고 다음 날.
오늘은 아르센의 선배인 정우가 헬퍼로 아실을 찾았다.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우는 있는 그대로의 성격을 보여주며 심기가 불편함을 표했다.
“딱히 피해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기분이 나쁘잖아. 빤히 보는 것도 그렇고. 차라리 구경 좀 하겠습니다~. 하고 보면 누가 뭐라고 하기나 한데?”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안 써요.”
“처음 보는 사람이야? 재훈이도 어디 애인지는 모른 대?”
“모른 대요. 저도 처음 봤구요.”
“강남 쪽은 아니란 말인데. 그래도 경우 없는 건 마찬가지지. 허. 참.”
“괜찮아요. 가끔인데요, 뭐. 또 다른 분들은 오히려 그렇게 보시다가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전 괜찮아요.”
“너도, 참.”
정우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한번 지어주고는 하던 일에 열중했다.
주인이 괜찮다는데, 객이 무어라 말을 보태겠나. 그저 답답하다며 속이나 끓고 마는 그였다.
“휴. 일이나 하자. 일. 많기는 많네. 어제도 이만큼은 다 나갔다는 말이지?”
“네. 평일보다 두 배 정도. 딱 그 정도 나갔어요.”
“너, 이거 감당할 수 있는 거 맞아? 혼자서 말이야.”
“조금…. 부치기는 하죠. 어제도 재훈 씨가 도와줘서 다행이었긴 했어요. 오늘도 형이 와주셨구요.”
“돕는 거도 사실 하루 이틀이야. 다음 주에는 또 우리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이제 뽑아. 한 명 정도.”
“그래야죠.”
정우는 누구보다 아실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식구처럼 드나들고 또 정환이 따로 정우나 기준에게는 숨기는 게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바텐더로서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않나. 요즘 그레인 호텔이라는 큰 업장에서 헤드 바텐더로 일하며 사무도 배우는 그는 지금 아실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내일 중으로 공고를 한 번 내보려구요.”
“나름 유명해져서 오려는 사람은 있을 거야. 기왕이면 경력 좀 있는 놈으로 뽑아. 그게 편해.”
“에이, 경력 있는 사람이 2년 차 바텐더 밑에서 일하려 하겠어요?”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일단 사장인데. 그리고 신입 데려와서 언제 가르쳐서 일 시킬래? 너 당장 손 급한 거 아냐?”
“그렇긴 하죠….”
정우의 말이 제법 날카롭다. 그의 말처럼 정환에게 필요한 건 당장 현장에 투입되어 일할 수 있는 일손.
신입을 데려와 하나씩 가르치기에는 여유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제일 좋은 건 적당한 경력에 적당히 백지인 사람. 그런 사람을 데려와 정환의 색을 입히는 게 최선일 것이다.
“우선 기다려 봐야죠.”
정환은 늘 그렇듯 사람 좋은 웃음을 한 번 짓고는 말을 아꼈다.
정우의 도움 덕에 일요일 영업 역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어제처럼 정환을 빤히 보는 사람도 없었고.
정환은 다음 날인 월요일 하루를 쉬어가며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했다.
“네. 김 교수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새 사람 구하는 것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아. 정환 군. 그거 말이군. 마음대로 하게나. 허허허! 자네가 사장 아닌가? 요즘 매출도 안정적이고, 아무 걱정 없네! 잘 뽑게나! 아. 혹시 우리 애들이 지원하면 잘 좀 봐주고! 끊네-!
“지 교수님. 정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람을 한 명…”
아아. 차 사장. 운영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것보다, 내일 8시쯤 가려는 데, 괜찮겠지?
“아, 넵. 평일에는 언제든 편히 오시면 됩니다.”
요즘 주말에 너무 바빠져서 말이야. 이렇게 잘 되면 난 어디서 술을 마시나! 안 그런가?
“네…. 자중하겠습니다?”
자중은, 무슨. 허허. 내일 보세. 사람은 자네가 잘 뽑게나. 그럼.
제일 처음 처리한 일은 투자자들에게 사람을 하나 더 뽑는 걸 보고하는 일이었다.
매번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일 이야기는 직접 정환이 보고하고 있었다.
요즘 수익이 부쩍 늘어나서인지 김태현 교수는 만사가 형통이었다.
그는 밝은 목소리로 알아서 하란 말만 남기고는 사람 좋게 웃어넘겼다.
이는 지동철 교수 역시 마찬가지. 지 교수는 애초에 운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환이 알아서 하란 말로 모든 걸 일축했다.
명진 역시 해외에서 보내온 메시지로 좋은 사람을 잘 구해보라는 격려가 전부였다.
보고가 끝났으니 이제는 직접 처리할 일이 남았다. 작년에는 일자리를 찾아보러 들어갔던 구직 사이트를 이제는 일자리를 내놓으러 들어가는 정환의 모습.
정환은 자신이 원하는 조건과 대우를 잘 기재해 사이트와 SNS에 글을 올리고는 한숨을 돌렸다.
쉬는 날도, 쉬는 날 같지 않은 요즘이었다.
5.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다.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살폈다.
정환이 보고 있는 건 이번 구인공고에 지원한 사람들의 이력서들.
4, 5명만 지원해도 다행이란 생각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려 10명이 넘는 사람이 지원하며 아실에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SNS에 공고를 함께 올린 게 톡톡히 제 역할을 한 것 같다.
정환이 내걸었던 조건은 여느 바와 같았다. 경력은 1년 이상일 것.
당장에 투입 가능한 전력이 필요한 정환에게, 이 1년의 장벽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요소였다.
그렇다고 너무 경력이 좋은 사람이 들어오는 건 정환에게도 부담스럽다.
제아무리 정환이 12년의 경력이 있다고는 해도 겉으로 보이는 경력은 그렇지 않지 않나.
과한 경력을 가진 이들은, 어쩌면 정환을 역으로 가르치려 들 수도 있고 정환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정환은 그런 기준을 가지고는 서류를 하나씩 쳐내기 시작했다.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도 미안하지만 아웃. 경력이 4년을 넘는 사람도 미안하지만 아웃. 경력 없음도 아웃.
조주기능사는 애매하지만, 우선은 남겨두고.
정환의 오른쪽에는 점점 이력서가 쌓여만 갔다. 사람을 뽑는 일에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건 매번 미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추려진 서류는 총 5장. 정환은 이들을 이번 주 안으로 아실에 불러 간단한 면접을 볼 예정이다.
서류보다는 실제 펼칠 수 있는 퍼포먼스가 바텐더에게는 중요하다.
이건 이전 생에서부터 변치 않았던 정환만의 기준.
서류에서 한 번 걸러낸 이들이라도. 정환은 직접 보지 않은 걸 믿는 사람은 아니다.
‘흠. 다섯 명이라. 나쁘지 않네.’
다섯 장 남은 이력서를 펼쳐 두고는 정환이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씩, 이력서를 보며 얼굴도 먼저 익혀보는 정환.
그러던 중.
“어?”
마지막 이력서에서 정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멈칫했다.
무언가 익숙한 걸 본 표정을 지어보는 정환.
정환은 그 이력서를 높게 들고는 구석에 붙은 증명사진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토요일에 그 사람?’
지나간 주말에 마주했던 끝자리의 그 사내가,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