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잔. In my life.
6.
“정말이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분이군요.”
정환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유정호 대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옅게 걸린 미소가,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유, 유정호?’
옆에서는 갑자기 왜 그런 이름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서성훈 부장과 김 대리가 있을 뿐.
지금 아실의 안은, 아무런 긴장감이 돌지 않는 상태다.
“저기, 유정호…대표님이라면…?”
“제 한국식 이름입니다.”
!
“그걸, 차 사장이 어떻게…?”
“명함을 봤습니다.”
“명함?”
명함이라는 말에 서성훈 부장은 눈을 크게 뜬다. 자신 역시 유정호라는 저 사람의 명함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지 않나.
그런 명함에서 유정호라는 글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한자를 읽었습니다. 일본어 명함 쪽에 본명이 한자어로 적혀 있으시더군요. 버들 유(柳)에 바를 정(正), 그리고 클 호(浩). 일본어로 읽으면 야나기 마사히로지만, 한국어로 읽으면 유정호라는 음독이 됩니다.”
정환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서성훈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품을 더듬었다.
받은 명함을 확인하려던 본능적인 행동. 허나, 이내 이게 실례임을 알고 멈춰보는 그였다.
“괜찮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유정호 대표의 허락이 떨어지고야 그가 지갑을 꺼내 명함을 다시 살펴본다.
자신이 봤던 영문 쪽이 아닌 반대편의 일문 쪽. 거기에는 분명 자신도 아는 한자인, 버들 유와 바를 정, 그리고 클 호가 적혀 있었다.
‘이걸 놓치다니….’
습관처럼, 또 다른 해외 바이어들처럼 영문 쪽만을 살핀 게 실책이었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게 상대방의 본명.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미 일문 쪽 역시 읽어본 적이 있을 거만 같은 그였다.
‘신경을…’
안 쓴 거다. 서성훈 부장은 자신의 지난날을 그렇게 판단했다.
재일교포란 건 알았어도, 한국식 본명이 있을 거라곤 그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서성훈 부장은 생각이 거기에 닿고 나서야 바텐더가 이런 잔을 내어준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야나기. 아니, 유정호 대표는 자신의 본명을 불러주니 저렇게 기쁜 표정을 짓지 않나.
그가 바랐던 건, 그저 그를 일본인이 아닌 한국을 잘 모르는 재일교포로 자신을 봐주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나….”
“꼭 옥보단은 아니었어도 됐을 겁니다. 그저 한국에 없으셨기에 알 수 없었던 잔. 그런 잔이면 되었을 겁니다.”
“전통주는…. 너무 나갔던 거로군….”
“고향에 돌아온 분께서 궁금한 건, 적어도 예전부터 있던 전통 문화재는 아닐 테니까요. 자리를 비운 시절에 변한 것…. 그게 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자라…. 워딩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부디, 무례하지 않게 들렸길 바랍니다.”
“그럴 리가요. 허허. 이토록 좋은 말을.”
유정호 대표는 정환의 말에 호탕하게 웃고는 잔을 들이켰다. 입을 애써 가리려 애쓰지 않는 모습이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무슨 한국 땅에 미련이 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일본에서 이렇게 자랐기에 더 한국에 대한 미련이 쌓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힘든 시간이셨을 테니까요.”
유정호 대표는 자신의 말을 받는 정환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올려봤다.
이것까지 아냐는 그런 표정이 그의 얼굴에 걸렸다.
“차별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대표님 세대에, 대표님처럼 한국식 이름을 그대로 쓰시는 분들은 더 심하셨을 테죠.”
!
“차…별?”
제법 무거운 주제가 나오자 서성훈 부장이 반응했다.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주제가 나오자 당황한 눈치다.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서 부장님께는 아실 필요도 없었겠지요. 뭐, 누군가 알아준다면야 감사한 일입니다만, 당시에서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차별. 특히나, 바텐더분의 말처럼…, 한국식 이름을 쓰는 사람은 더욱 심했지요….”
“그런…일이 있으셨군요. 몰랐습니다. 그저 성공하신 분이기에…”
서성훈 부장은 유 대표를 마주하며 그 뒤로 펼쳐진 자수성가한 사업가라는 배경만을 바라봤다.
허나, 그의 또 다른 뒤편에는 차별받은 한국인이라는 다른 모습 역시 늘 함께하고 있었다.
보려하지 않았기에,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일본에서는 누구도 절 일본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한국에는 가본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방인. 딱 그런 말이 어울렸겠지요. 매번 ‘너희 나라’라며 이곳을 칭했을 정도니….”
“힘든 시간이셨을 겁니다. 또, 존경스럽고요.”
정환은 모든 걸 안다는 표정으로 손님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일본에서 살아봤기에 아는 것도 있다.
정환은 일본에서 저 세대의 재일교포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더 부장님께 투정을 부렸던 걸지도 모릅니다. 못난 이야기지만요…. 여기서만큼은. 그래, 남들이 내 나라라 부르는 여기서만큼은. 날 이방인으로 대해주지 않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한국에서마저 날 일본인으로 대하면…”
더는 자신이 갈 곳은 없다. 유정호 대표는 마치 그런 말을 하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사업을 진행하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얼마나 못난 모습인지는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허나, 가끔은 어딘가에 속해지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이지 않나.
그는 처음으로 마주한, 또 남들이 자신이 속했다고 부르는 그 집단에서만큼은 작은 투정이나마 이렇게 부려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분께 전통주를 들이댔다는 거군요…. 마치, 외국인에게 하듯이….”
서성훈 부장 역시 씁쓸한 눈빛을 하고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한정식에 전통주, 그리고 일본식 바. 서성훈 부장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자신은 유정호라는 사람을 계속 일본인으로 대해왔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적막이 흐른다. 한 명은 투정을 부린 것이 미안해서, 또 한 명은 그를 이방인으로 대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서로는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원하시는 잔을 드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답을 찾은 거 같아 뿌듯하네요.”
묵직하게 내려앉는 분위기를 깨는 건 언제나 그렇듯 바텐더의 역할이다.
정환은 둘의 고개가 떨어지는 이 시점에 적절히 잘 끼어들어 목소리를 밝게 했다.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서로를 향하던 무거운 감정이 바텐더를 앞에 두고는 잠시 내려간다.
“고맙네. 차 사장. 덕분에 못 봤던 걸 볼 수 있었네.”
“저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얼마나 못났었는지가 보이는군요. 거기에, 한국적인 잔도 알아가고, 또 제가 알지 못했던 시절도 배워갑니다.”
“전 그저 손님께서 원하시는 잔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래도, 답을 찾아 기쁘긴 하네요. 기념으로 다음 잔은 제가 한 잔 샀으면 하는데, 어떠신가요?”
“조, 좋네! 뭐든지.”
“차 사장님의 추천이면, 감히 거절할 수 없지요.”
“앞서 보여드렸던 옥보단 말고도 준비했던 잔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함께 드셔보시죠.”
정환은 간단한 술 세 병을 준비하고는 이를 온더록 잔에 담기 시작했다.
큰 얼음을 가운데 두고 세 개의 술을 섞어가는 정환.
바카디 151이라 적힌 정환이 살던 미래에는 단종된 술과 단맛이 일품인 카시스, 그리고 하나의 화이트 럼이 차례대로 잔에 담겼다.
정환은 이를 잘 저어내 간단히 잔을 완성했다. 카시스 특유의 포도색이 잘 묻어나 마치 주스처럼도 보이는 잔이 손님을 향했다.
“이건, 무슨 칵테일인가?”
“흠. 저도 처음 보는 잔이군요.”
“저도입니다.”
서 부장, 유 대표, 그리고 김 대리는 자신들의 앞에 놓인 잔을 알아보지 못한다.
유 대표야 그럴 수 있다. 서 부장도 마찬가지. 허나, 김 대리도 모를 줄은 정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잔 대신, 옥보단을 내보인 게 새삼 다행으로 느껴졌다.
“이건, ‘파우스트’라는 칵테일입니다. 이 역시,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잔입니다.”
“오, 그래요? 파우스트라.”
“이런 잔도 있었군.”
“아아, 파우스트! 들어는 본 거 같네요. 이름만 듣고는 클래식인 줄 알았지만요!”
“파우스트 역시 플레어 바나 웨스턴 쪽에서 시작된 잔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색도 이쁘고 가끔은 불을 붙여 제공하기도 했던 잔입니다.”
“흠. 바카디에 화이트 럼이면 도수가 꽤 높을 텐데요?”
“맞습니다. 취할 의도로 만든 술이니까요.”
정환은 유 대표의 물음에 긍정하며 바카디 151 병을 흔들거렸다.
Proof 151이란 뜻의 저 151은, 한국식 도수로 환산하면 약 75도가 된다.
“한국의 플레어 바에서 마시던 술은 단맛이 강한 술들이 많았습니다. 옥보단만 보셔도 아실 수 있죠. 하지만, 단맛이 강하면 취기가 올라오는 게 느리게 느껴집니다. 그때 그 취기를 한 번에 올려주기 위해 나온 칵테일이 바로, 이 파우스트입니다.”
“한 잔으로 취기를 올릴 수 있는 잔이라. 재료만 봐도 확실하겠군요.”
“한 번 드셔보시죠. 나쁘지 않을 겁니다.”
바텐더의 설명이 끝나자 손님들의 손이 앞으로 향한다. 저마다 잔을 잡고는 이를 올려 향을 맡아보는 손님들.
카시스의 달콤한 향이 알콜향이 치고 오르는 걸 막아줘 단박에 들이키기에도 나쁘지 않은 향이었다.
호르륵.
잔이 세 손님의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향한다. 그제야 느껴지는 묵직한 알콜의 무게.
단맛으로 중화가 되었지만, 분명 취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잔이 확실했다.
“흐음. 적당히 달고 적당히 무겁군요.”
“목적에는 분명 충실해 보이는 잔입니다.”
“카시스란 술도 참 오랜만이네요.”
세 손님은 이미 한 철 유행이 지난 잔을 들이켜며 제법 괜찮은 감상을 들려준다.
점점 올라오는 취기가 싫지 않은 이들이었다.
“저…, 유 대표님.”
독한 잔 덕에 이들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려던 때.
“이전에는 방금 들은 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지요. 사업도 결국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임에도 말입니다. 거기에, 접대라는 개인적인 자리를 맡았음에도 이를 보지 못했던 건 더 큰 실책이었습니다…. 이점을 꼭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취기가 적당해서일까. 서성훈 부장은 앞서 자신이 먼저 그에 대해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벌컥이며 마셨던 서 부장의 파우스트의 잔이 다른 이들보다 더 비어 있어, 마치 일부러 그런 것만 같았다.
유정호 대표는 사과를 듣고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를 똑같이 벌컥이며 반절이나 들이키는 그.
탁!
독한 도수의 잔이 목을 태우며 얼굴에는 취기가 슬쩍 올라온다. 그리고.
“제가 뭐라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 역시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습니까? 감정을 개입하지 말아야 할 일에…괜한 투정을 넣은 것 같아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도 그런 취기의 힘을 빌려 부끄러운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때로는 술이란 참 고마운 존재다. 취기가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이런 말들이 취기란 핑계 아래 줄줄 나오게 되니까.
어쩌면, 이런 타이밍에 독한 술을 건넨 것도 바텐더의 의도일지 모른다.
명함을 먼저 건네 손님의 명함 속에서 어떤 이름을 쓰는지 확인하는 행동도, 또 서로가 막막해 입을 열지 못할 때 취기를 빌려줄 잔을 내미는 것도.
바텐더는 아무 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이걸 마시고 일어나시지요.”
유정호 대표는 조금 남은 잔을 흔들며 서 부장에게 일어나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바는 일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렇게 실력 좋은 바텐더의 앞이라면 더 그렇지요.”
이어지는 그의 말이, 이번 일이 모두 해결되었음을 나지막하게 알렸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후련한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다.
“한적한 가게는 알고 계시겠지요?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으니,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며 앞으로의 일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대표님…?”
서성훈 부장은 여전히 미안함이 남은 눈으로 유정호 대표를 바라봤다.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냐는 무언의 물음.
가끔은 그저 모른 척, 또 아무 일 아닌 척 넘어 가주면 좋을 텐데.
이 서성훈이라는 이도 제법 올곧은 게 나쁘지 않다.
아마, 이제는, 유 대표를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였다.
“갑시다. 더 있으면 취하고 말 겁니다. 저 바텐더는 실력이 너무 좋아요. 더 있다가는 고주망태가 되고 말 겁니다.”
유정호 대표는 서 부장의 입에서 진득한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뒤따라 일어서는 김 대리와 서성훈 부장.
정환도 어느새 바를 빠져나와 그들을 배웅한다.
“다음에는 평범한 손님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은 하지 않을 테니, 반갑게 맞아주시지요.”
“편히 들려주시면 됩니다. 물론, 주문은 더 쉽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주 볼 겁니다. 한국에는 이제 자주 올 거 같으니.”
“언제든 편히 돌아오십시오.”
“허허.”
유정호 대표는 정환의 마지막 말이 싫지 않은 듯 크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못 당하겠다는 그의 표정이, 돌아오란 말이 싫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는 기분 좋게 웃고는 아실의 대문을 넘었다.
“차 사장. 내, 감사의 인사는 다시 와서 꼭 하겠네. 오늘 정말 감사했네. 자네 덕에, 많은 걸 배웠네.”
“아닙니다. 서 부장님. 언제든 편하게 들러주세요.”
“사람하고는. 생색 좀 내도 되네. 오늘은. 곧 들르겠네. 오늘 정말 고마웠네!”
서성훈 부장도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유정호 대표를 따라나섰다.
차오르는 감사야 넘치지만, 지금은 당장 표현하기에 시간이 모자란 그.
그는 훗날을 기약하며 서둘러 아실을 빠져나왔다.
늦지 않은 시간 세 명의 그림자가 종로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다.
들어올 때는 달랐던 셋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나갈 때는 조금은 겹쳐 보인다.
둘에 속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마치 이제야 그 안에 들어간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뒷모습.
그 모습이 싫지 않아 한동안 바라보며 골목에 서 있던 정환.
딸랑.
뒤에서 아실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환은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