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79화 (79/175)

79잔. Come Together.

4.

서성훈 부장이 아실을 다녀가고 이틀 후.

그는 서울 모처의 한 호텔 로비에서 부하 직원 한 명과 함께 다른 중년의 사내를 마주하고 있다.

그의 맞은편에는 꼿꼿한 자세에 눈썹이 가늘지만 굳게 올라간 인상이 강한 중년인이 앉아 있다.

“시간을 다시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야나기 대표님.”

“…뭐. 주변에서 하도 성화를 해서 말이지요.”

야나기라 불린 이는 가볍게 커피잔을 들어 입을 가린다. 표정을 가리고 싶을 때면, 늘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아직, 이전 만남에서의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그에게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대충 듣긴 했습니다만, 제가 드린 문제에 대한 답을 아는 바텐더가 있다지요? 오늘은 마셔볼 수 있는 겁니까?”

“네. 대표님.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한 번 가봅시다. 대신, 오늘이 마지막인 걸 확인해 주셔야겠습니다. 주변에서 한 번 더 만나보란 소리를 듣는 건 이제 딱 질색이니까요.”

“장담 드리겠습니다.”

한국에는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다. 이번마저도 실패한다면, 서성훈 부장 역시 더는 매달릴 염치도 자신 없긴 마찬가지였다.

‘믿자. 한 번 믿을 때는 다 걸고 믿는 거야.’

어차피 자신이 가진 답도 애매해 자신이 없었던 상황. 서성훈 부장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 있게 답을 안다고 말했던 자신의 바텐더를 믿기로 했다.

오랜 세월을 회사란 사회에서 살아남은 그였다. 스스로 자신이 없을 때는 다른 자신이 있는 이를 전적으로 믿는다. 그게 그가 여태까지 살아남으며 터득한 처세였다.

늦지 않은 시간에 호텔 밖으로 세 명의 사회인이 나선다. 서둘러 택시를 한 대 잡아 온 서성훈 부장의 부하 직원.

“종로. 종로로 갑시다.”

택시에 차례로 올라탄 후, 서성훈 부장은 짧게 행선지를 말했다.

셋을 태운 택시는 광화문 거리를 지나 경복궁을 스친 후, 종로의 한 대로에 셋을 내려준다.

“이쪽으로 가시죠.”

라며 안내하는 서 부장의 모습. 그런 열정적인 서 부장의 모습에도 야나기의 표정은 영 밝아지지 않고 있다.

‘또 한옥인가.’

한옥이라면 이제 충분히 봤다. 야나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을지로인가 하는 곳에서 전통주를 마시라며 데려갔던 그곳 역시, 안은 마치 한국의 전통 가옥처럼 생긴 내부를 하고 있었기에 그는 잊지 못하고 있다.

뭐, 마지막이니까. 어차피 한국에 있어야 할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런 생각에 야나기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성훈 부장을 따라 걸었다.

“김 대리. 먼저 가서 확인하고 오게.”

“네. 부장님.”

서성훈 부장은 부하 직원인 김 대리를 먼저 보내 아실의 안을 확인한다.

대관이 마음 편하지만, 대쪽같은 아실의 바텐더는 이번에도 대관 만큼은 거절했다.

대신 선택한 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방문하는 것. 7시 오픈 시간에 맞춰, 이들은 이렇게 아실 앞을 서성였다.

타, 탁.

골목의 한적한 곳에서 야나기가 입에 담배를 문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는 세븐 스타.

서성훈 부장이 라이터를 꺼내기도 전에 그는 홀로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한국 식당은 담배를 못 피우는 곳이 많더군요.”

“술집은 아직 괜찮은 편이지만, 이마저도 곧 피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더군요.”

“흠. 원래는 가게에 앉아 피는 걸 좋아합니다만, 이렇게 들어가기 전에 태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특히, 식당에서 나와 한 대 태우는 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바도 흡연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옥이라….”

“뭐. 괜찮습니다. 일본과는 다를 테니까요.”

실망한 건 아닐까. 불안한 서성훈 부장의 앞에서 야나기는 짧게 한 번 연기를 내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 익숙한 그가, 이런 걸 싫어하진 않을까 겁도 나는 서성훈 부장이었다.

“부장님. 문 열었고, 현재는 손님이 없습니다.”

“그래? 차 사장은?”

“준비되셨다고 합니다.”

김 대리의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자, 서성훈 부장은 손에 들린 담배를 끄고는 야나기에게 다가섰다.

야나기 역시 품에서 작은 종이 팩을 꺼내더니 꽁초를 넣고는 그를 따라나선다.

“아시레? 라고 읽는 겁니까?”

“아실. 아실이라고 읽는 겁니다. 프랑스어로 피난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호오. 한옥에 프랑스어라. 그건 또 나름 괜찮군요. 뜻도.”

“바텐더도 실력이 좋은 사람입니다.”

“제게 답을 알려 줄 사람이면 좋겠군요.”

“들어가시죠.”

세 명의 손님이 아실의 대문을 들어섰다. 좁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과 한옥의 모습은 살렸지만 ‘바’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내부의 모습.

야나기는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듯 유심히 살펴본다. 어색하지 않은 조화가 퍽 싫지 않은 그였다.

딸랑.

문이 열리고 셋이 아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간결한 차림의 바텐더가 이들을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아. 차 사장.”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마다 다른 인사로 반응해주는 손님들.

정환은 그런 손님들을 향해 밝게 웃고는 자리를 안내했다.

“여기로 앉으시죠. 수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체이서는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난 얼음물로 부탁하네.”

“저도 얼음물 부탁드려요.”

“탄산수로 부탁합니다.”

정환은 수건을 건네고 이들이 말한 체이서를 가져간 후 정갈한 자세로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아실의 오너 바텐더, 차정환입니다.”

이어지는 인사와 함께 손님에게 명함을 먼저 건네보는 정환. 이상한 모습이다. 보통은 손님이 먼저 요청할 때가 아니면 정환이 먼저 명함을 건네는 건 드문 일.

헌데도 정환은 오늘 먼저 이를 건네며 마치 상대의 명함도 기다리는 모습이다.

“아. 난 일본에서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명함은 여기.”

바텐더의 명함을 받은 야나기가 정환에게 명함을 건넨다. 그의 명함에는.

미라이 국제 무역 상사 대표 야나기 마사히로(柳正浩).

라는 이름과 직책이 일본어로 적혀 있다. 정환은 천천히, 눈으로 그의 이름을 유심히 살폈다.

“뒷면에는 영어도 있습니다. 잘못 전해드렸군요.”

“괜찮습니다. 미라이 국제 무역이라는 회사를 경영하시는군요. 대표님.”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겁니까?”

“네.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간단한 소통은 가능합니다.”

“그래요?”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말에 야나기의 표정이 조금 밝게 펴진다.

하나라도 통하는 게 있다면,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게 바텐더와 손님의 관계.

서성훈 부장은 정답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보며 밝은 미래를 그려봤다.

하지만.

“헌데, 이런 말씀이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상당히 어려 보이시는군요. 나이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 야나기는 저 청년이 일본어를 할 줄 알아 마음에 드는 건 둘째치고, 실력이 궁금하다.

서성훈 부장의 말처럼 정말 실력이 좋은 바텐더가 맞을까, 그런 의문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너무 어려 보이지 않나.

관록(官祿)이라는 문화가 일본에는 있다. 이는 실력을 예상할 때 언제나 그의 경력을 먼저 보는 일본만의 문화.

일본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또 경력이 오래될수록. 한 분야에서 그를 더 인정해주는 법이다.

“편하게 물으셔도 됩니다. 올해 스물넷입니다.”

!

정환의 나이를 듣자, 야나기는 슬쩍 굳은 표정을 하고는 옆자리에 앉은 서성훈 부장을 바라봤다.

서성훈 부장은 분명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저 바텐더가 찾아 줄 거라 말했다.

과연 스물넷짜리 바텐더의 입에서 옳은 답이 나올지, 의심이 드는 야나기였다.

“…서성훈 부장님. 옳게 온 게 맞겠지요?”

“무슨 생각이신지는 압니다. 그래도 한잔이라도 우선 드셔보시는 게….”

“흠.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잊으시진 않으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야나기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서성훈 부장을 보고는 체이서를 들이켰다.

자신도 저런 경험이 있다. 어딘가 더 큰 기업이나 공무원을 상대할 때면 나오는 저런 자세.

같은 길을 걸어온 자로서 어찌 자비심이 생기지 않겠나.

야나기는 기왕 마지막 기회를 줄 거면, 후배라 칭할 수 있는 저 회사원이 조금 더 신중하길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합시다. 우선 한 잔을 마셔보겠습니다. 대신, 그건 앞서 말했던 한국적인 술이 아닌 다른 술. 다른 술을 먼저 한잔 마셔보고 마저 이야기하시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선, 저 바텐더에게 다른 잔을 하나 주문하겠습니다. 그 잔을 마셔보고…, 그 후에 답을 들을지 말지를 택하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야나기는 최대한 날카로운 어투로 말하면서도 자비로운 말을 들려준다.

저 말은, 결국 한 잔을 마셔보고 자신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답을 듣지 않고 서성훈 부장에게 한 번 더 도전할 기회를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급박한 상황에 몰려 잘못된 줄을 잡은 거라. 야나기는 서 부장의 선택을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다.

“…차 사장. 괜찮겠나?”

“전 괜찮습니다. 주문은 언제든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정환의 괜찮다는 말에도 서 부장은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렇게 어려워하던 과제를 해결해주려는 이에게 또 다른 민폐라니.

저 말은 서성훈 부장에게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지만, 정환에게는 실력을 시험해보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바텐더께서 이해가 빠르신 모양이군요. 이해하셨다면,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쉽게 사람을 믿는 편이 아니라서.”

“아닙니다. 손님은 언제든 바텐더를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관록 역시, 무시할 건 못 됩니다. 저라도 의심했을 겁니다.”

“호오. 그렇게 생각해주는 겁니까? 고맙군요.”

야나기는 정환이 단박에 맥락을 이해한 걸 보고 새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관록이라는 말도 어색하지 않게 쓰는 게, 일본어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가 분명해 보였다.

“첫 잔은 그럼 어떻게 주문하시겠습니까?”

“먼저 주문하시지요.”

“아. 난 적당한 아이리시 위스키 한 잔. 부쉬밀이 좋겠군.”

“전 진토닉으로 하겠습니다.”

서 부장과 그 김 대리는 간단한 주문을 마치고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남은 주문은 야나기 대표의 주문.

그는 바텐더를 유심히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그의 주문은.

“일본적인 한 잔. 그런 한 잔을 부탁합니다. 제 이야기는 미리 들으셨겠지요? 그럼, 주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이번에도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문이다.

서성훈 부장은 눈을 양옆으로 굴리며, 저 주문의 속뜻을 이해하려 애썼다.

일본적인 한 잔이라니. 이건, 거의 앞서 던졌던 물음과 같은 수준의 주문이 아닌가.

마치, 야나기는 저 바텐더가 자신이 이전에 던졌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이를 미리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네, 이해했습니다. 준비해드리죠.”

바텐더는 언제나처럼 거침없이 주문을 받았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문에도 여유가 가득한 그의 얼굴.

그는 한 번 백바를 둘러본 후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간단한 주문들이 이어진 만큼 잔은 빠르게 나왔다. 서성훈 부장의 앞에는 부쉬밀이 한 잔 나왔고 김 대리 앞에는 청량한 진토닉이 놓였다.

마지막으로 나올 잔은 야나기의 잔. 어떤 특별한 잔이 나올까, 모두의 시선이 정환의 손에 집중되고 있던 그때.

달그라라락. 달그라라락.

조금은 복잡한 스터 소리가 들려온다. 믹싱 글라스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가는 게 아닌 좁은 곳에서 복잡하게 돌아가는 스푼의 소리.

이건, 잔 안에서 술을 섞는 스푼의 소리가 분명했다. 이미 계량을 끝낸 바텐더가 스터를 시작한 것이다.

들리는 것처럼 정환은 몸 중앙에 하이볼 잔을 하나 두고는 술을 섞고 있다.

그의 잔 안에는 얼음과 옅은 노란색의 술, 그리고 물이 함께 섞여가고 있었다.

달그라아아악.

20초에서 30초. 딱 그 정도 소리를 더 울리던 바텐더가 손을 멈춘다.

그리고 바텐더는 그대로 잔을 야나기의 앞으로 밀어냈다.

“주문하신 잔, 나왔습니다.”

단출한 잔이 야나기의 앞에 놓였다.

“흠.”

“이건…, 무슨 잔인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야나기 대표의 옆에서 서성훈 부장이 서둘러 잔의 이름을 묻는다.

정환은 여유롭게, 자신이 만든 잔의 이름을 알려줬다.

“위스키로 만든 미즈와리(水割り)입니다.”

!

“미, 미즈와리?”

최근 정환에게 위스키를 배우고 있는 서성훈 부장은 미즈와리라는 이름을 금방 알아들었다.

미즈와리는 찬물에 술을 섞어 마시는 일본의 음용법이다.

찬물을 더하면 미즈와리, 뜨거운 물을 더하면 오유와리가 된다는 걸 그도 최근에 배워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주로 이용되는 음용법이니, 어쩌면 답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서성훈 부장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야나기를 바라봤다.

씨익.

“미즈와리라…. 반 정도는 맞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야나기는 재밌다는 듯 웃고는 이번에도 애매한 답을 들려준다.

“이, 일본에서는 주로 미즈와리를 마시지 않습니까? 차 사장이 제법 괘, 괜찮은 답을 냈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닌가요?”

“글쎄요. 조금 더 답을 들어봐야 알 거 같군요. 안 그런가요?”

야나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 표정을 하고는 바텐더를 향해 눈짓했다.

정환은 그런 손님을 향해 자신의 답안지를 조금 더 보충해 본다.

“위스키를 물으시는 거군요.”

“재패니즈를 쓴 겁니까?”

‘아!’

재패니즈 위스키를 썼냐는 야나기의 물음에 서성훈 부장이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그래, 재패니즈 위스키.

일본은 위스키 증류소도 가지고 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싱글몰트 위스키까지 만드는 나라다.

그런 나라의 음용법인 미즈와리에 또 그 나라의 위스키인 재패니즈 위스키라면.

이건 완벽한 답이 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제가 쓴 건,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입니다.”

!

허나, 바텐더는 조금 다른 답을 들려준다.

수줍게 바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조금은 이상한 모양의 술병. 모서리가 각진 까만 병에는 ‘Old Parr’라는 라벨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밑에 적혀진 당당한 ‘Blended Scotch Whisky’란 설명.

서성훈 부장은 이를 보고는 눈을 질끔 감고 모든 게 끝났음을 느꼈다.

그의 머리에는 강하게 재패니즈 위스키가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성훈 부장님.”

야나기 대표는 따스하게 서 부장을 부른다.

그리고.

“아주 좋은 바텐더를 알고 계시군요.”

이어지는 말로, 저 바텐더의 답이 정답임을 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