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잔. help!
3.
늘 같은 시간에 보이는 풍경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그 풍경이 펼쳐질 거란 믿음을 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정환의 앞에 앉은 저 손님은 무언가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다.
정환은 그런 생각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손님을 맞았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평소 1차를 끝내고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들르던 서성훈 부장. 그런 사람이 오늘은 7시부터 이곳을 찾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오랜 바텐더 경력에 비춰봤을 때 정환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아…. 그런가? 뭐, 어쩌다 보니.”
“잘 오셨습니다. 수건 먼저 드릴게요.”
표정 역시 무거워 보인다. 평소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와도 이내 앉은 후에는 밝게 펴지던 게 저 사람의 얼굴.
바텐더는 단골의 이런 면면을 모를 수가 없다.
“고맙네.”
아실이 문을 열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생긴 단골이 서성훈 부장이었다.
이제는 편해져 서로에 대한 호칭도 조금 달라진 둘.
서성훈 부장은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이곳에 들르며 정환과 마주하고 있다.
“위스키로 드릴까요?”
“오늘은 전작이 없으니, 더블로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위스키를 더블로 주문한다. 한 잔에 담기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주문.
정환의 예감은 틀리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도 손님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을 때 바텐더가 먼저 무슨 일이 있냐며 묻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손님이 말하고 싶다면 그제야 들어주는 게 바텐더의 일. 그전까지 바텐더는 그저 이들을 일상처럼 대하는 게 맞는 일이다.
“부장님을 이 시간에 뵙는 건 처음인 거 같네요.”
“음. 그런가? 좋군. 한적하고. 아니. 평소에도 물론 좋지만.”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간단하게 때웠네. 오늘은 한식도 아니었지.”
“좋은 날이네요.”
“…뭐.”
한참을 잔과 눈싸움을 벌이던 서성훈 부장.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으로 바텐더를 부른다.
정환은 단번에 자신이 필요함을 알아채고 그에게 다가섰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저…. 차 사장. 사실은 오늘 이곳에 일찍 온 이유가 따로 있네만….”
“이유요?”
“일찍 와야 손님이 적을 것도 같고.”
“편하게 말씀하시죠. 전 괜찮습니다. 단골이시잖아요.”
무언가 꺼내기 힘든 말이 있어 보이는 손님. 정환은 그런 손님의 짐을 조금 덜어내 주려 편하게 말하라 했다.
서성훈 부장은 이제야 표정을 조금 풀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낸다.
“이거 말일세.”
“잡지…네요.”
그의 품에서 나온 건, 정환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일전의 그 잡지였다.
“인터뷰 한 건 알고 있었네만, 읽은 건 어제쯤이라. 우선, 축하하네. 좋은 이야기더군. 자네 다운 이야기들도 많았고.”
“과장된 면도 많습니다. 부끄럽네요.”
“아니,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네. 그저…”
잡지 속에서 읽은 이야기 중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 서성훈 부장은 그런 표정을 잔뜩 지었다.
“자네가 예전에 일했던 곳, 아르센 말일세.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나?”
“네. 교류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이곳에 들르기도 하시고요.”
“그래?”
서성훈 부장은 아르센의 바텐더들이 이곳에 들른다는 말에 반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꺼낼 말이, 무언가 아르센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잡지 인터뷰에서 정환은 회귀 후 자신이 보낸 시간과 본 것들을 덤덤히 털어냈다.
거기에는 명진과 정우, 기준, 그리고 다른 손님들과 있었던 이야기가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실려 있었다.
“왜 그러시죠?”
“흠. 다름이 아니라…. 자네의 그, 스승님. 마스터…라고 부르던데. 맞나?”
“아르센의 마스터셨던 이명진 바텐더 말씀이시군요. 제 스승님, 맞습니다.”
“그럼, 그분도 여길 자주 오시고?”
“어,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국내에 계시지 않아서요. 요양차 해외에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몇 개월 정도는 한국에 들어오시지 않을 예정일 겁니다.”
“하아. 그런가.”
손님의 고개가 내려간다. 기대했던 답이 아닌 모양이다.
“저, 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마스터는 왜…?”
“아. 이런, 내 급한 마음에 사정 설명도 안 했군. 다른 의도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네…. 그저, 여기 잡지에….”
그는 정환의 물음에 잡지를 펼쳐 자신이 줄을 그어둔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정환이 아르센과 명진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 잔뜩 밑줄을 그어둔 그였다.
명진의 이름과 긴자라는 단어에는 원까지 그려져 있어 마치 공부한 사람의 흔적처럼 보였다.
“그분께서 긴자 출신의 바텐더라는 말씀이 있어서…, 아닌가?”
“긴자요? 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조금 오래전이지만요.”
“실은 얼마 전에 작은, 아니 작진 않고…. 일이 조금 있어서 말이네. 일본 쪽 바에 경험이 많은 분께 상담을 조금 받고 싶은데, 마땅히 아는 이가 있어야지.”
후우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자네를 통해서 연줄을 좀 대어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나쁜 생각을 잠시 했었네. 미안허이. 내 잠시 판단력을 잃었었네. 무례한 부탁인 게 뻔한 데도….”
서성훈 부장은 정환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단골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무언가 이득을 보려 했다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그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히 해드릴 수 있는 일이었는 걸요. 마스터께서 국내에 계시지 않아…, 지금은 힘들지만요.”
“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어차피 안 될 일었던 거 같네. 내 말은 신경 쓰지 말게나. 잊어주면 더 좋고.”
서 부장은 간단히 손을 한 번 내젓고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애써 웃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바텐더로서 보기 안쓰러운 정환이다.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시면, 저라도 상담해드릴 순 없을까요? 마스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어깨너머로 조금 주워들은 것도 있습니다.”
정환은 잠시 고민하더니, 단골에게 먼저 다가선다. 늘 보던 표정을 보고 싶은 바텐더의 심정으로.
일본 쪽 바와 긴자라면, 정환 역시 명진 부럽지 않은 전문가이지 않나.
정환의 출신이 어디인가. 긴자가 아닌가. 물론, 이를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아, 물론 자네를 못 믿어서 스승님을 찾거나 그런 건 아니네. 오해하지 말게나. 그저…, 긴자도 있고 또, 그 뒤에 페이지…. 보이는가?”
“전통주 관련 언급이 있는 곳이네요.”
정환은 잡지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겨 다음 글을 읽었다. 거기에는 명진이 롭로이를 만들어주며 정환에게 전통주와 관련된 사연을 들려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흠. 전통주도 적당히 관련이 있어서 말일세….”
“긴자랑 전통주요? 쉽게 매치가 되진 않는 이야기네요.”
“그럴 걸세…. 이걸 여기 와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니.”
“괜찮으시면 편하게 말씀해보시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른 일이면 몰라도 술과 바에 관한 문제라면 바텐더가 충분히 도울 수 있다.
정환은 아실에 처음으로 단골이 되어준 저 손님을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부끄럽고.”
“아닙니다. 단골이시잖아요.”
“…단골. 허. 그렇지, 단골.”
서성훈 부장은 단골이라는 말을 씁쓸하게 읊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환의 앞에서 다른 이를 찾은 것마저 조금은 부끄러운 그.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자네 실력이야 내가 제일 잘 알지 않나? 그저,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의 고견을 청해 듣고 싶었던 것뿐이라….”
정환을 두고 명진을 찾은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그는 한 번 더 변명을 뱉어본다.
이해는 된다. 정환이 제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겉으로 보이는 경력은 이제 고작 1년이 조금 넘은 이가 아닌가.
일본 쪽과 연이 닿았을 거란 상상은 누구도 할 수 없었을 게 당연한 일이고.
서성훈 부장이 이런 고민을 하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게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아직은 모르니까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실은 얼마 전 새로 사업을 진행할 기회가 하나 생겼었네. 상대는 일본 쪽 기업이었지.”
“일본이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업체가 한국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우리가 따내야 하는 건이었네. 당연히 일본 업체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건이었고.”
“‘을’이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우리가 을이었지. 거기에 거래 규모는 우리 부서 1년 치 실적에 맞먹는 큰 규모의 거래…. 우리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네. 아직은 다른 회사들과 경합 중이기도 했고.”
“접대…는 필수였겠네요.”
“늘 그렇지.”
서성훈 부장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 테이블 위로 손을 내저었다.
빈 잔만이 잡히는 그의 손. 정환은 얼른 새 잔을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스트레이트가 아닌, 온더록으로 담긴 위스키가 그의 손에 잡혔다.
“헌데, 그 접대 자리에서…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야.”
“부장님께서요?”
정환은 실수했다는 손님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외 바이어를 상대로 수없이 많은 접대 자리를 가졌던 그가 쉬이 실수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욕이 과했던 걸지도 모르지. 요즘 여길 다니며 술에는 조금 자신감이 붙어서.”
짤그락.
서성훈 부장은 가볍게 잔을 흔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유난히, 술을 빠르게 마시는 그.
정환은 이럴 걸 예상해서 그의 잔을 온더록으로 바꿔두었다.
“일본 업체 대표가 제법 까다로운 인물이었네. 전형적인 일본 사업가…. 그런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꼿꼿한 꼰대…. 그런 느낌인가요?”
“그런 느낌이지. 술 좋아하고, 또 성격도 적당히 있는. 그런 사람이었네. 뭐, 특이할 사항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특이할 사항이요?”
“흠. 재일교포였네. 3세였나, 그랬지. 한국과 딱히 접점은 없고, 한국말도 어눌한 정도. 한국에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하더군. 성공한 건 제법 오래되었을 텐데도 말이야.”
“아.”
정환은 재일교포란 말이 나오자 표정을 조금 바꿔본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만큼, 그들과 관련해서는 스치는 게 무언가 있어 보이는 정환이었다.
“뭐, 어쨌든 말도 통하고 하니 첫 자리는 무난했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바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고, 또 긴자를 자주 다닌다더군.”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분들께는 긴자가 일종의 훈장이죠.”
“그렇다더군. 나도 뭐, 자네 덕에 바에서 배운 것들이 있지 않나? 그걸 조금 주저리니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네. 다음 자리는 ‘바’로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강남으로 가신 건가요?”
정환은 접대라는 이야기와 바가 함께 나오니 당연히 강남을 예상했다.
아실로 오지 않은 걸 아쉬워할 수도 있다. 허나, 아실은 첫 만남에 거래처 상대를 접대하기에는 조금 소박한 곳임을 정환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건 아니네. 다른 말도 있었거든. 한국적인 술. 그런 술을 맛보고 싶다는 말이 있었네.”
“그게, 부장님은 전통주라고 생각하신 거군요.”
“그때는 그랬었지.”
서 부장의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다. 그때는 그랬었다는 말은 결국, 그게 아니었다는 뜻으로도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을지로에 새로 생긴 전통주 라운지를 아는가?”
“전통주 협회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고급 라운지라고 들었습니다. 전통주 소믈리에도 항상 상주하는 곳 아닌가요?”
“맞네. 전통주 소믈리에가 있는 곳. 바 같은 느낌에 한국적인 술이라. 딱, 거기가 아닌가. 해서 자신 있게 2차는 거기로 갔네만….”
“반응이 좋지 않았군요”
“응….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 들어서는 순간부터.”
“들어서는 순간부터면…, 맛 때문은 아니 건 같은데요.”
“이유는 나도 모르겠네. 그저, 자신이 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는 말이 전부였네. 한 잔을 억지로 들이켜고는 그대로 나가버리더군. 원래, 일 이야기는 2차에서 시작되는 건데…, 그날은 그렇게 시작도 못 하고 말았지.”
“다른 날이 또 있었군요.”
“사죄의 의미로 약속을 한 번 더 잡았었네. 그때는 자네 말처럼 강남으로 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정환은 어렵지 않게 뒷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해 이렇게 몰라서 어떻게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냐고 화를 내더군…. 자신을 알고 싶다면 하다못해 긴자라도 공부해 보라며…그날도 그대로 가버렸고 그게 끝이었다네.”
무겁게 내려가는 서성훈 부장의 마지막 말이 나오자 정환이 제법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의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한 이의 표정이었다.
“그 뒤로는 쭉 계약이 미뤄지고 있네. 어렵사리 설득해 이번 주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얻긴 했네만, 영 자신이 없어서 말일세…. 나름 혼자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긴 했네. 이것도 일의 연장이 아닌가? 그 결과, 전통주 칵테일…정도면 어떨까, 이걸 자네 스승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것뿐이네. 긴자도, 또 전통주도 잘 아신다고 하시니….”
서성훈 부장은 나름 연구한 답을 내놓으면서도 무언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두 번이나 실패한 사람은 자연스레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어떻게, 차 사장.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통주 칵테일…이면 통할 거 같은가?”
그는 잔뜩 불안한 마음과 맞을 거란 기대를 담아 정환에게 조언을 구했다.
한국적인 술과 긴자의 바. 이 둘을 합친 결과가 그에게는 전통주 칵테일로 다가온 모양이다.
손님의 물음에 잠시 턱을 잡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정환의 모습.
‘일본, 재일교포, 긴자, 한국적인 술이라….’
정환은 머릿속에서 그간 들었던 단어들을 나열하며 필요한 것만을 골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답을 낸 듯한 그는 잠시 고개를 흔들더니.
“아마, 전통주 칵테일로는 안 될 겁니다.”
!
단호한 어조로 서성훈 부장의 기대를 부숴버린다.
“저, 정말인가? 아, 아니…, 그러면 차 사장. 자네는 혹시 답을 알겠는가? 뭐가 잘못된 거고, 또 어떤 걸 대접해야 하는 지 말일세!?”
서 부장은 순간 나온 바텐더의 답에 깜짝 놀랐다가도 이내 기대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고쳤다.
너무 단호한 정환의 말이, 마치 답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손님은 간절함을 가득 안고는 정환을 바라봤다. 정환은 그런 손님에게 세상 든든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
“세 번째는 여기로 모시고 오시죠. 그분이 원하시는 술을 제가 대접해보겠습니다.”
파팟!
단골의 어깨에서는 무거운 짐이 일순간에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