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잔. 이름을 알려라.
1.
탁탁탁탁탁.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건하게 들려온다. 안경까지 갖추고는 서류와 계산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한 중년인.
정갈한 정장 차림이 잘 어울리는 김태현 교수였다.
“음. 이 정도면 첫 달치고는 나쁘지 않네.”
“휴.”
한참을 바라보던 서류를 내리고 뱉는 그의 말에 앞에 선 정환의 표정이 탁! 하고 풀려버렸다.
어느덧 아실이 문을 연 지 한 달하고 조금이 더 지난 시점. 정환은 한 달 동안 운영한 아실의 재정 상황을 정산하고 이를 김태현 교수와 검토했다.
운영까지야 정환의 몫이다. 허나, 투자자들의 돈도 있으니 어느 정도 이런 검수는 받아야 할 터.
이들이 원하진 않았어도, 정환이 먼저 나서 봐줄 걸 의뢰한 상황이었다.
호텔에서 일하며 이런 사정에 밝은 김태현 교수가 적임자였다.
“너무 안심하지는 말게. 아직 그렇게 안정적인 상태는 아니니.”
“역시 그런가요…?”
“흠. 어디까지나 ‘첫 달’로서 나쁘지 않다는 말이네.”
“분발해야겠군요.”
“원래 하나의 가게가 열고 석 달. 보통 그 정도는 수익을 바라는 게 사치인 법이지. 자네 정도면 잘하고 있는 편이니 걱정은 말고. 대신 자만도 마시게.”
“늘 명심하겠습니다.”
“건실하기는.”
김태현 교수는 이제야 안경을 벗어두고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서류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일은 언제나 고역이다.
“머리를 썼더니 지치는군. 휴일인데, 한 잔 괜찮겠나?”
고역이 있었으면 보상도 있어야 하는 법. 오늘은 아실이 쉬어가는 날이지만, 투자자로서 권리를 조금 누려보는 김태현 교수다.
“그럼요. 사이드카로 해드릴까요?”
“척하면 척이군. 사이드카. 좋지.”
클래식한 오센틱 바는 원래 휴일이 없다. 늘 열려있고 닫히지 않는 게 오센틱 바의 특징.
허나, 정환은 새롭게 문을 열며 일주일 중 하루를 아실의 휴일로 잡았다.
아르센처럼 일하는 이들이 많다면 몰라도, 홀로 운영하는 매장의 특성상 일주일 내내 열기는 무리가 있다.
아실이 아르센처럼 운영되려면 정환은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한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도 사람의 체력이란 유한한 법.
언제고 정환이 지친다면 이는 곧 퀄리티 저하로 나타나고 말 것이다.
정환은 이를 생각해 일주일 중 딱 하루. 딱 하루만을 쉬어가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고.
물론, 휴일이라고 해서 마냥 쉬지는 못한다. 이렇게 밀린 정산도 하고 다른 일도 쌓여 있으니까.
바텐더라고 늘 바 안에서만 일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요즘은 점점 손님이 늘어나는 거 같더군. 자네 단골도 제법 있고.”
“아르센에서 뵈었던 분들이 많이 와주셨습니다.”
“용병으로 굴린 효과도 조금 있었고.”
“네. 나쁘지 않았죠.”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운영한 아실. 점점 아실이 자리를 잡아가자 아르센 시절의 손님들과 정환이 용병으로 여러 바를 돌며 모은 인연들이 다시금 정환을 찾기 시작했다.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은 매상을 올릴 수 있었던 건, 그들 덕이 클 것이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자네도 알겠지?”
“새로 유입되는 손님을 늘려야죠. 여긴 상권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래도 여전히 바에는 비는 자리가 있다. 그런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건 새로운 손님.
즉, 신규 손님의 유입이 지금 아실에는 절실한 상황이란 뜻이다.
“워크인은 좀 있는 편인가?”
“적지는 않습니다. 대로도 주변에 있고 한정식집에서 1차를 가지신 분들이 가끔 들려주셔서요.”
“흠. 나쁘지 않군. 그럼, 이제 남은 건 ‘아실’이란 이름을 홍보하는 거군.”
워크인.
즉, 걸어서 그저 가게 간판을 보고 들어오는 손님은 계속해서 늘고 있다.
골목과 어울리지 않은 풍경이 새롭기도 하고 또 가게를 잘 꾸며둔 탓도 있으니까.
허나, 워크인마저도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는 법.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실’이라는 바가 여기 있음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자네, 대회 같은 건 나갈 생각 없나? 입상이 최고의 홍보긴 한데. 적당한 대회라면 입상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을 거고.”
“아직은 가게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가게도 비울 수 없고.”
“하긴. 대회와 가게를 동시에 잡는 건 1인 업장에 무리가 있긴 하지. 다른 바텐더가 또 있다면 몰라도.”
“아직 사람을 쓸 정도도 아니니까요.”
“알고 있네. 그럴 여유도 없고. 그래도 여기서 조금만 더 안정을 찾으면 한 사람 정도는 들일 수 있을 걸세.”
“그런가요?”
“자네도 힘들지 않겠나?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여기를 가득 채운 손님을 혼자서 모두 상대하는 건 무리일 테니.”
정환은 아실의 바 테이블 끝을 가리키는 김태현 교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기다란 바 테이블과 빼곡한 의자들.
확실히, 김 교수의 말처럼 여길 손님이 모두 채운다면, 혼자서는 무리가 있을 것도 같아 보였다.
“뭐,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세.”
“네. 아직 조금 남은 일이니까요.”
“그래도 다른 방법은 한 번 찾아보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아실’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거니.”
김태현 교수는 앞에 놓인 잔을 비우고는 자리를 정리한다. 안경을 챙기고 서류를 정환에게 돌려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내일 보지. 동철이랑 또 오지 싶네. 오늘은 나도 들어가야 해서. 이른 시간에 잘 마셨네.”
“네, 교수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아참. 마스터는 잘 계시고? 오늘 본 서류 같은 것도 마스터께서 한 번 보시면 좋을 텐데. 로드 바는 아무래도 운영해본 마스터가 더 잘 아시지 않겠나.”
“그게…, 지금은 좀 보시기 힘든 상황이라서요.”
“왜? 설마, 또 몸이 안 좋으신 건가?”
“아뇨. 그건 아니고…. 그. 여행을 가셨습니다. 네. 사모님과 크루즈 여행….”
“아. 크흡. 즐거운 시간이시겠군. 굳이 방해할 필요는….”
“네. 몇 달 걸린다고 하시더라구요.”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명진은 일들을 정리하고는 아내와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무리하지 않는 요양 여행 정도는 의사도 허락한 일이기에 그는 지금 남은 인생을 즐기는 중이다.
김태현 교수는 그렇게 아실을 떠나 일상으로 복귀했다. 오늘은 아실이 쉬는 한적한 평일.
아직은 해가 지지 않은 오후였다.
2.
‘자, 여기서 조금 더 각도를….’
김태현 교수가 떠난 아실.
이제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임에도 정환은 여전히 가게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쉬는 날임에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하루. 그는 뭘 하는 걸까.
정환의 앞에는 잘 만들어진 김렛이 한 잔 멋들어지게 놓여있다.
앉은 손님은 없음에도 잔뜩 힘을 줘 만든 듯 보이는 깔끔한 김렛.
정환은 그 위로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연신 최상의 각도를 찾고 있다.
찰칵!
그런 소리를 내려 정환이 온몸의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쿵쿵쿵!
삑! 찰칵!
밖에서 유리를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정환의 손이 미끄러진다.
사진은 보나 마나 망쳤을 게 분명했다.
“하아.”
잔뜩 실망감을 안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리 밖에는 잔뜩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한 신정우가 유리에 볼을 대고는 정환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여러조오~.”
유리에 입을 대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정우. 정환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털며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집중하길래. 재밌잖아.”
방긋.
정우는 한 치의 티 없는 맑은 미소로 정환을 놀린다. 늘 이런 식이다.
“일은요?”
“응. 방금 끝났어. 오늘은 오전 스케줄.”
“그러면 집으로 가셔야지, 왜 여기로 오셔요?”
“너 있을 거 같아서.”
“쉬는 날이거든요?”
“근데 있었잖아.”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정우는 자연스레 손님 자리에 앉고는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가 가져온 봉지에는 맥주 캔이 몇 캔 들어있다.
“마실래?”
“바에 오면서 캔 맥주라니….”
“칵테일 타줄 거면 마시지 말고.”
“잘 마시겠습니다.”
정우가 일하는 그레인 호텔 역시 종로에 있다. 정우는 한 번씩 일이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 이렇게 정환의 가게에 들린다.
“뭐 하고 있었냐?”
“사진 좀 찍으려고 했죠.”
“사진?”
입에 잔뜩 과자를 물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정우. 그런 정우에게 정환은 스마트폰에 띄운 한 화면을 보여준다.
파란 아이콘에 F란 글자가 박힌 익숙한 SNS 아이콘이다.
“페북? 뭐, 자랑하게?”
“아뇨. 홍보하려고요.”
정환은 화면에 몇 번 손가락을 더 가져다 대더니 이내 ‘Bar Asile’이라 적힌 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직접 만든, SNS 홍보용 계정이었다.
“이야. 신세대네, 신세대! 요즘은 이런 거로도 홍보가 되나?”
“아직 팔로워가 많지는 않은데 쏠쏠히 모이고는 있어요.”
“몇 명인데?”
“한 200명?”
“뭐, 그중에 한 10프로만 방문해도 남는 장사긴 하겠다. 뭐 올리는데?”
“칵테일이죠. 칵테일이랑 칵테일 이야기 같은 거 조금씩 올리면서 가게도 홍보하고요.”
정환이 있던 시대야 SNS로 가게를 홍보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허나, 지금은 아직 SNS 홍보의 태동기. 그래도 미래를 경험한 정환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 이를 이용하고 있다.
아직, 그렇게 잘 되는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알고 있는 것과 잘하는 건 어디까지나 큰 차이가 있다. SNS로 홍보하는 게 좋다는 건 알아도. 이걸 크게 키우는 법까지는 알지 못하는 정환이다.
“나름 많이 올렸네?”
“가게 열고 틈틈이 올리고 있어요. 봐봐요. 가게 사진도 있고.”
정환은 형에게 장난감을 자랑하듯 자신이 만든 계정을 정우에게 자랑했다.
조금 칙칙하지만, 나름 감성을 담아 꾸며둔 계정이 그리 나쁘진 않아 보였다.
“괜찮네.”
“괜찮죠? 나름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정우는 시큰둥하게 페북 계정을 보더니 이내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정우 역시 여전히 젊은 축. 그도 이런 SNS를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야, 정환아.”
“네, 형.”
“내가 그거 팔로워, 확! 늘어나게 해줄까?”
“네…? 형이요?”
“응. 확! 늘어날 ‘수도’ 있어, 진짜.”
“에이, 설마요.”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든가.”
씨익.
악마의 속삭임이다. 저렇게 사악하게 웃는 이들은 악마니까. 정환은 정우의 표정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달콤한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또 자영업자들의 간절함은 가끔 이런 말에 넘어가게 하는 법.
정환은 속는 셈 치고 정우에게 넘어가 보기로 한다.
“어떻…게요?”
“폰 줘봐.”
정환의 폰을 낚아채 가는 정우. 그리고 정우는 여기저기 구도를 잡는 듯 카메라로 정환을 비추더니 이내 됐다는 표정을 짓고는 상세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자, 안쪽으로 좀 더 옮겨 봐. 머리도 좀 정리하고.”
“네? 잔이 아니라 절 찍으시려고요?”
“잔도 찍고, 너도 찍고.”
정환은 못 이기는 척 정우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이런저런 자세를 취해본다.
어느새 코스터까지 꺼내 잔 밑에 깔아둔 채 정우는 저 멀리 떨어져 스마트폰 카메라로 정환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 보세요, 여기.”
“이, 이렇게요?”
“쓰읍, 좀 어색한데? 웃을까? 살짝.”
헤벌쭉.
어색한 건치 미소가 정환의 입에 걸린다. 정우는 정색하며 손으로 입을 닫으라 말했다.
“좋다. 딱 그대로 있어. 손가락으로 잔 잡고.”
입을 닫고 은은한 미소가 완성되자 정우는 이제 멈추란 말을 한다.
원하는 구도가 나온 모양.
“간다. 하나, 둘, 셋!”
찰칵!
정우는 그대로 정환의 모습을 담아내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잘 나왔네!”
하얀 셔츠에 앞치마, 그리고 은은한 미소와 멋들어진 잔까지. 나름 보기 좋은 사진이 휴대폰 화면을 채웠다.
“이걸, 이제 대문 사진으로 하는 거지.”
“그걸요? 지금처럼 가게 사진이…”
“조용.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읍시다!”
정우는 휴대폰을 정환에게 쉽사리 넘기지 않고 그대로 사진을 SNS 계정의 대문 사진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휴대폰을 내려두고는 맥주를 들이켜는 정우.
“이제 기다려. 끝.”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뭐. 없으면 말고.”
“아까는 믿으라면서요!”
“어허. 늘어날 ‘수도’ 있다고 했지. 난 확답은 안 했다?”
“하. 참.”
뭐, 딱히 크게 피해를 보는 건 아니다. 자기 가게의 계정이고 정환의 SNS니 무슨 문제가 있겠나.
그냥 정우가 장난친 거라. 곧 돌려놓으면 된다는 생각에 정환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제 더 할 거 없지?”
“네. 이것만 해두고 가려고 했어요.”
“잘 됐다. 저 아래쪽 대로에 이자카야 맛집 있더라. 거기서 한 잔 더 하자.”
“형이 사는 거죠?”
“우리 정환이, 그건 이제 술 좀 마시고 다시 이야기해 볼까?”
정환은 방금 사진에 쓴 잔만을 간단히 씻고는 앞치마를 풀었다.
둘은 그렇게 가게를 나서 간만에 휴일을 즐기러 떠났다.
잔뜩 취해 정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정환.
집으로 돌아오니,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해 몸이 무겁다.
무언가 SNS에 해야 할 일이 남았던 거 같은데.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지고 말았다.
* * *
'Bar Asile'
- Classic Cocktail Bar.
서울 종로구 사직로12길 **-**.
예약 문의 -> Tel. 02) *** - *****.
* 단체 예약 불가.
* 바 좌석 최대 3인 이용 가능.
* 최대 6인(별채).
* 드레스 코드, 커버 차지 없습니다.
* 외부 음식 반입 가능합니다.
* 일부 손님께 폐가 될 시 정중히 퇴실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사장님 한마디>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피난처, 'Asil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