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잔. 위스키와 커피.
3.
벌써 삼 일째인가.
한 그 정도 되었던 거 같다.
정환은 자신의 앞에서 위스키를 니트로 들이켜는 중년의 사내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가게로 들어왔던 게 사흘 전. 사내는 조용히 바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시키고는 말없이 이를 들이켰다.
별다른 대화나 술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그저 홀로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정환 역시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뿐이었다.
바텐더의 접객이라는 게 언제나 붙임성있게 다가가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이에게는 다가가지 않는 것.
그 역시 바텐더로서 손님을 모시는 하나의 접객 방법이다.
“좋군요.”
그래도 매번 마신 술이 좋다는 말을 해준다. 바텐더의 실력이 들어간 칵테일은 아니지만, 저 좋다는 말이 바에 대한 평가일 수는 있는 법.
정환은 언제나 좋게 반응해주는 저 손님이 싫지 않았다.
“흠. 요즘 자주 들렀군요. 이 골목에 올 때마다 들른 거 같으니.”
이제는 여기가 조금 익숙해진 덕일까. 손님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길게 말을 붙이며 바텐더를 바라봤다.
정환은 바뀐 손님의 모습에 맞춰, 접객 역시 조금 붙임성있게 바꿔본다.
“사흘 연속으로 찾아주셨죠.”
“흠.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매번 들려주셔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뭐. 혼자 이렇게 위스키나 한잔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했었습니다. 좋은 곳입니다.”
“위스키를 즐기시나 보군요.”
“좋아는 하는 편입니다.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요. 물론 잘 알지도 못하고.”
사내는 말을 뚝 끊고는 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별다른 위스키 시음법과는 상관없이 잔술 들이켜듯 마시는 사내의 모습이 위스키를 잘 아는 건 아니란 말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 골목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진즉에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문을 연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이제 이 주 정도 된 거 같네요.”
“그래서 몰랐나 보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늦지 않게 알았으니.”
“종로는 자주 찾으시는 편이신가요?”
“흠. 네. 접대 때문에. 주로 외국인 바이어들을 접대하다 보니 늘 오는 곳이 여기더군요.”
“외국분들에게는 한정식이 잘 통한다고 들은 거 같습니다. 한옥에 한정식이면 다들 좋아하실 텐데요.”
“바이어야 좋아합니다. 다만…. 매번 같은 걸 먹는 우리는 고역이기도 합니다.”
사내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고역이란 말을 뱉는다.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는데, 그걸 얼른 지우고 싶은 이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물립니다.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더 이곳에 들어와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긴…, 외관은 한옥이어도 한국적인 느낌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확실히 바에선 한국적인 술을 찾긴 힘들죠.”
손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바텐더의 말에 긍정했다.
자신이 칵테일 바라는 이름만 보고 이곳에 들어온 이유도 그랬지 않나.
칵테일이란 글을 보고 한국적인 걸 기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회사원의 숙명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이제는 지치는군요. 매번 같은 음식과 술을 억지로 먹어야 한다는 게. 마셔야 하는 자리까지는 이해하지만…, 적어도 마실 수 있는 것쯤은 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허허.”
“원래는 따로 좋아하시는 주종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소주나 막걸리는 아닌 거 같군요. 차라리 맥주나 위스키가 나을 정도로.”
“어휴, 그러시다면 매번 한식에 한국식 술로 보내시는 시간이 정말 고역이시겠네요.”
“식사뿐만이 아닙니다. 점심때는 또 어떤 줄 아십니까? 미팅이 점심때 잡히기라도 하면 얄짤 없이 전통 찻집으로 향해야 합니다. 인사동 찻집 골목. 외국인 바이어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죠. 후. 차도, 술도. 결국엔 기호 식품이라던데…. 개인적으로는 커피를 차보다, 또 위스키나 맥주를 소주나 막거리 보다 더 좋아하는 처진데 그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만요.”
손님은 말하면서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넋두리를 뱉어대는 손님의 모양새. 그래도 괜찮다.
바라는 곳은 원래 손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응어리를 풀 수 있는 곳이니까.
바텐더는 이런 손님들의 넋두리를 듣고, 또 때로는 그걸 풀어주는 사람이다.
“그럼 지금만이라도 잠시 즐기시죠. 위스키는 충분히 드셨으니, 커피 한 잔 어떠세요?”
“지금…말씀인가요?”
“네.”
바텐더도 만능은 아니니 많은 걸 해줄 순 없다. 다만, 들은 넋두리 중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나서야 하는 게 바텐더.
좋아하는 커피를 잘 즐기지 못한다는 손님의 말을 듣고는 정환이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작은 기계에 다가섰다.
위이잉!
정환이 다가선 기계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까만 액체를 토해냈다.
정환은 이를 작은 머그컵에 담아 따뜻한 물과 함께 손님의 앞으로 가져갔다.
“드셔보시죠. 그리 좋은 원두는 아니지만 못 드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갑자기 왜 커피를…?”
“이렇게 시간이 되실 때 좋아하시는 걸 같이 즐기셨으면 해서요. 마침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고 해서 한 잔 뽑아봤습니다. 평소에는 못 즐기셔도 이렇게 바에서라도 즐겨보시죠.”
“바에도 커피 머신이 있었군요.”
“웬만한 바에는 다 있을 겁니다. 칵테일 중에는 커피가 쓰이는 것들도 있거든요.”
“허허. 이런 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는 따뜻한 커피를 받았다. 물을 붓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삼키는 모습이 원래도 커피를 즐기는 이처럼 보였다.
“위스키와 에스프레소라…. 여유의 두 상징이군요.”
“잠시지만, 편하게 즐기시죠.”
“허허. 덕분에 잘 즐깁니다. 또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두 음료라 더 마음에 드는군요.”
손님은 자신의 앞에 놓인 두 잔의 음료가 싫지 않은 듯 옅은 미소를 지어본다.
싫은 음식, 싫은 자리가 끝난 후 이렇게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이다.
거기에 자신이 평소 질려가던 것과 정 반대에 있는 음료들이니 그의 만족은 배가 되는 것만 같았다.
“둘이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또 이렇게 같이 즐기니 좋군요.”
호의를 받아서일까, 손님은 먼저 붙임성 좋게 바텐더에게 말을 붙여본다.
위스키와 커피. 두 음료가 흔히 생각해서는 한 자리에서 즐기기 쉬운 음료는 아니니 그저 평범한, 지나가는 시간을 채우는 것 같은 당연해 보이는 말.
허나, 바텐더는.
“아뇨. 둘이 어울리지 않는 음료는 아닙니다.”
조금 진지하게, 손님의 말을 받아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별다른 뜻이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바텐더의 관점에서 두 음료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라서요.”
커피와 위스키가 어울린다라. 이건 무슨 뜻일까. 손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텐더를 빤히 바라봤다.
상식적으로 봐도 커피와 위스키는 그리 가까워 보이는 음료는 아니지 않나.
하나는 잠을 깨우는 카페인이 가득한 음료고 다른 하나는 잠을 재우는 알코올이 가득한 음료.
여유라는 키워드만 빼고 본다면 하나도 상통할 게 없어 보이는 두 음료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손님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괜찮으시면 한 잔 제가 대접해도 될까요? 커피와 위스키, 둘을 좋아하시면 아마 입에 맞으실 겁니다. 이렇게 즐겨보시면 한 번에 즐길 수도 있어 더 좋으실 겁니다.”
사흘을 내리다녀도 묵묵하던 바텐더가 처음으로 다른 잔을 권한다.
저 바텐더가 내어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취향에 거슬리지도 않았기에 손님은 고개를 슬쩍 끄덕여봤다.
조금은 기대도 품어보는 손님의 모습이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바텐더는 다시금 구석으로 가 새로이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려온다.
그리고 준비되는 기다란 잔과 따뜻한 물, 그리고 설탕과 위스키.
마지막으로 크림으로 보이는 것까지 가져와, 바텐더는 준비를 마친다.
“마침, 드시던 위스키도 아이리시 위스키여서요. 이걸 이용해 만들어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바텐더는 뜨거운 물과 에스프레소를 섞은 후 거기에 설탕 시럽을 더했다.
마치 커피를 타는 것 같은 그의 모습.
허나, 이어지는 모습이 지금 그가 만드는 잔이 커피가 아님을 증명한다.
위스키를 계량해 잔에 더하니, 이는 더 이상 평범한 커피는 아니었다.
거기에 위로 올라가는 조금의 크림.
바텐더는 김이 모락 피어나는 잔에 크림을 더하고 크림 위로 커피 가루를 뿌려 잔을 완성했다.
마치 프라푸치노를 연상케 하는 외관의 잔이 손님의 앞으로 나온다.
바텐더는 이를.
“아이리시 커피, 나왔습니다.”
아이리시 커피라 불렀다.
“따뜻한 칵테일인가요? 이런게 있었군요.”
“겨울에 주로 내놓는 칵테일입니다만, 커피도 또 위스키도 좋아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계절에 맞지 않게 내놓기도 합니다.”
바텐더는 점점 물러가는 추위에 어울리지 않아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어떤가. 꼭 추운 날에만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손님은 그저 은은하게 퍼져오는 커피향이 싫지 않아 잔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흐음.”
코로 먼저 잔을 즐겨보는 손님. 따뜻한 기운을 품어 향이 더욱 진해 그저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둔 것만 같다.
조금 전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셨음에도 이 잔에서 풍기는 커피 향이 제대로 전달된다.
아마, 바텐더가 마지막에 뿌린 가루 덕분일 거라. 손님은 그렇게 예상했다.
코로 전부 즐기고 이제는 입으로 가져가 보는 잔. 잔의 표면에는 과하지 않게 크림이 놓여 있어 부드러운 질감이 한층 더해진다.
마치 라떼를 즐기는 것처럼 편안히 입술을 감싸주는 크림이 손님의 입술에 닿았다.
호륵.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듯 조심스레 잔을 삼켜보는 손님. 크림의 부드러움이 한껏 혀를 감싸고 커피의 담백함이 입안을 채운다.
그리고 천천히. 급할 것도 없이 전해지는 위스키의 알싸한 맛. 마치 커피로 가득했던 입안을 정리하듯 위스키는 잔향과 함께 속에서 올라와 입안을 마무리했다.
말 그대로 커피와 위스키의 맛이 모두 살아난, 조화로운 맛이 손님을 편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
노곤한 취기에 따뜻한 맛이 더해지자 몸이 풀어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여유.
커피라는 여유에 위스키란 여유까지 더해지니, 사내는 오늘 일한 것도 잊고는 그대로 몸을 녹이듯 축하고 힘을 빼본다.
이 역시 취기겠지만, 싫지 않은 취기다.
“좋군요…. 커피와 위스키를 동시에 이렇게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니….”
“입에 맞으신 모양이군요.”
“최곱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이렇게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니. 거기에 포근한 여유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군요.”
좋아하는 두 음료가 섞여 최고의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환상적인 맛이나 형용할 수 없는 감동 그런 건 아니다.
그저 필요한 것들을 딱딱 맞게 내어주는 게 좋을 뿐. 바라는 곳이 이런 곳이였나.
손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분히 잔을 즐겼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자리해,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의 그 터덜거리던 축 처진 모습은 더이상 간데없는 그의 모습이다.
정환은 그런 손님이 온전히 잔을 즐기도록 다시 자리를 비워줬다.
손님은 이전처럼 조용히 잔과 독대하며 잔잔한 여유를 즐겼다.
취하기 위해서만이 아닌, 좋아하는 걸 좋은 공간에서 그대로 즐겨보는 손님의 얼굴에는 들어올 때와는 다른 평온한 표정이 걸려있다.
축 처져 터덜거리던 걸음으로 처음 아실을 찾았던 그의 모습은 간데 없는 지금이다.
한참을 앉아 따뜻한 잔을 즐기던 손님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손님에게 다가서는 정환.
“가시는 건가요?”
“오늘은 딱 기분이 좋군요. 여기까지만 마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늘 취기가 가득 오를 때까지 위스키를 들이켜던 손님이었다.
그런 이가 적당히 마시고 만족할 정도였다면 정환의 잔은 제법 적절했던 모양.
바텐더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런 손님을 배웅하기로 한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손님은 당당한 걸음으로 마당을 밟았다. 밖까지 나와 그런 손님을 배웅하는 정환.
이대로 나서서 가려는 걸까, 정환이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아.”
손님은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듯 잠시 돌아서더니 품에서 작은 종이를 한 장 꺼내, 바텐더에게 건넨다.
- 제이 인터네셔널 국제 사업부장 서성훈.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작은 명함. 정환은 손님의 명함을 받고는 자신도 서둘러 새롭게 만든 아실의 명함을 건넸다.
정환의 명함을 받아든 손님은 이를 한번 훑고는.
“또 봅시다.”
라는 바텐더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골목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당당하고 가벼운 걸음이, 처음 볼 때와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그였다.
정환은 한동안 마당에 서서 손님이 건넨 명함을 바라보고 섰다.
명함이야 수없이 많이 받아봤다. 아르센에서 일할 때도 또 이전 생에도.
허나, 오늘 그가 받은 건 조금 특별한 명함.
이건, 아실이라는 곳에서 정환이 처음으로 받은 제법 상징적인 명함이다.
정환은 한참을 마당에 서서 명함을 바라보다 이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아실에도 처음으로.
단골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