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70화 (70/175)

70잔. 시작.

1.

“아실?”

담벼락에 멋들어지게 걸린 동판을 보며 세 명의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동판에는 ‘Bar Asile, Classic Cocktail Bar.’라는 글이 멋들어지게 휘갈겨져 있다.

아르센의 전 마스터 이명진과 김태현 교수, 지동철 교수는 정환이 문을 열 ‘아실’이라는 곳의 실물을 처음으로 접한다.

“네. 프랑스어로 피난처, 또는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흠. 프랑스어에도 조예가 있었나.”

“좋은 이름이군요.”

“한옥에 불어라. 그 사이에서 오는 매력이 있군.”

‘아실’이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떠올린 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도 자신이 생각해 붙였던 바의 이름이 있었기에 그걸 유지할까 고민도 했었던 정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환의 머리에는 ‘Asile’이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았다.

이전 생에서 손목을 다치고는 정처 없이 떠돌던 정환. 그런 정환이 우연히 술에 취해 떠돌던 중 들렀던 그 바의 이름이 바로, ‘Asile’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바를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직 시간 차이가 15년이 있기는 하지만 흔적이나마 있을 수 있으니까.

허나, 서울의 그 어느 곳에도, Asile 이라는 바를 정환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기묘한 일을 겪은 거야.’

무언가 말로, 또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한 일을 겪은 거라. 정환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사실, 회귀라는 말 자체가 설명이 불가한 조화가 아닌가.

어쩌면, 그 바도, 또 마셨던 칵테일도. 정환이 경험했던 건 모두 회귀 중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환상 속의 바 이름은 강렬하게 남았다. ‘피난처’나 ‘안식처’라는 바와 잘 어울리는 네이밍.

특히나 피난처를 찾던 자신에게는 더없이 어울렸던 곳이었기에 정환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없다면 내가 만들면 되는 거야.’

한없이 떨어지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공간. 추락하는 이도 잠시 멈춰 쉬어갈 수 있는 그런 공간.

정환은 그런 공간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 ‘Asile’이라. 그렇게 여기며 자신의 가게에 그 이름을 붙였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정환이 세 투자자를 안으로 안내한다. 한옥의 담벼락을 따라 들어선 안쪽은 잘 조경된 마당이 이들을 반겼다.

크지 않은 마당이지만, 적당히 조경이 되어 보기에는 아늑함을 주는 풍경이다.

“흠. 창은 전부 유리로 바꾼 건가?”

“네.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있게 바꿨습니다.”

“대부분은 안을 감추려 애를 쓰는데, 반대로군.”

“그게 가끔은 바에 들어오길 망설이게 만드니까요.”

“좋은 시도입니다. 한남동도 요즘은 오픈 구조의 바를 많이 시도하는 중이죠.”

“암. 너무 클래식에만 멈춰 있는 것도 좋지 않네.”

마당에서는 ‘ㄱ’자로 꺾인 한옥이 한눈에 보인다. 기와지붕에 서까래와 대들보, 대청을 그대로 살린 한옥이 유리문으로 꾸며져 세련됨을 더했다.

“들어가 볼까.”

만족스러운 표정을 건 투자자들이 바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회랑을 따라 길게 놓인, 바 카운터가 한옥의 내부와 맞물려 어색하지 않다.

뒤로 자리한 원목 백바 역시 이는 마찬가지. 작은 방을 터 더 넓어진 회랑은 완벽한 바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흠. 백바가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모습인데.”

씨익.

바텐더 출신답게 술이 자리한 백바의 모습을 보고는 짓궂게 웃어 보이는 김태현 교수.

그런 김태현 교수의 옆에 선 명진의 얼굴에는 기쁨과 함께 아련함이 걸린다.

“아르센…이군요.”

백바를 보고는 아르센을 떠올리는 명진과 김태현 교수. 이건 무슨 뜻일까.

“진과 보드카 따로, 또 위스키 역시 종류별로. 자주 쓰는 빈도로 구분한 게 아닌 주종에 따른 구별. 거기에 술을 두는 순서까지. 전부 아르센에서 쓰던 그 방식이군.”

자세한 설명을 풀어내는 김태현 교수의 말을 뒤로 명진은 조용히 바 카운터 쪽으로 다가섰다.

아련히 원목의 바 테이블을 쓰다듬으며 백바를 바라보는 그.

아직, 완전히 무언갈 보낸 사람의 표정은 아니다.

“안에 들어가 보셔도 돼요, 마스터.”

정환은 그런 명진에게 바 안쪽으로 들어와 보라 이야기한다. 안에서 보는 풍경과 또 밖에서 보는 풍경은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명진은 인자하게 웃으며 제자의 배려를 거절한다. 이제는 자신이 있을 곳이 거기가 아니라는, 그런 표정의 명진이다.

“자자. 준비들 합시다. 이제 곧 몰려들 올 테니.”

잔뜩 아련해지려는 분위기를 김태현 교수가 환기한다. 손뼉까지 쳐가며 투자자와 정환을 끌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는 김태현 교수.

지금 시간은 오후 6시 반. 이들은 아실의 문 앞으로 가 하나의 목판을 바라보고 섰다.

Close.

라 적힌 영업 상태를 알리는 목판.

“자, 이제 시작하세.”

“흠. 드디어 시작이군.”

“축하합니다. 정환 씨.”

오늘은 바 아실이 프리 오픈으로 문을 여는 날. 관계자와 지인들이 모여, 아실의 상태를 점검하고 간단히 축하하는 자리를 여는 날이다.

거창한 커팅식 같은 건 없다. 축하하는 화환이 들이치지도 않는 분위기.

작지만, 이들만의 소박한 개업식이 이제 시작되려 한다.

정환은 작게 손뼉 치는 중년인들 사이로 걸어 나와 목판을 들었다.

이를 뒤집어 다시금 문에 걸어두는 정환. 반대편 목판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글이 적혀있다.

Open.

그렇게, Bar Asile은 문을 열었다.

2.

“축하합니다!”

“축하하네!”

“축하해!”

“짜식! 벌써 가게를 가지고! 부럽다야!”

조용하고 잔잔할 것만 같은 바 안이 사람들로 붐비며 밝은 분위기를 뿜어낸다.

저마다 큰 목소리를 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웃고 떠드는 바 안.

여기는 종로의 한 골목에 자리한, ‘아실’이라는 작은 바였다.

오늘은 프리 오픈일. 영업을 시작하기 전 관계자들이 모여 작은 축하 파티를 여는 게 바의 작은 전통이었다.

정환은 그간 자신과 관계를 맺은 여러 바텐더와 주변인들을 불러 조촐한 축하연을 열었다.

“정환 씨가 저보다 먼저 개업을 하는군요. 축하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습을 보인다. 정환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남동의 임재훈 바텐더부터.

“정환아! 네가 나 고용해주면 안 되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호텔에서 2년은 더 일하셔야 하면서.”

“정우 군은 ‘아르센2’를 열어야죠.”

“아뇨, 사모님…, 그 이름은 이제 포기에요.”

“정우 씨. 포기가 빠르군요.”

아르센에서 함께 했던 가족들인 정우와 기준, 그리고 현선과 명진에.

“테이블이 10석이면 단가가…”

“오늘은 그런 소리 좀 마시게!”

든든한 후원자인 김태현 교수와 지동철 교수까지.

거기에.

“술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흐흐. 이런 데 초대를 다 받고! 아이구, 친해지길 잘 했네! 흐흐.”

아르센에서 일하면 연을 맺은 강성원 사장까지 오니, 작디작은 바인 아실은 이미 가득 차 지붕이 떠나갈 정도였다.

“여보, 여기가 정말…우리 환이가 운영하는 가게라는 거죠?”

“어허. 왜 이래, 이 사람. 사장 어머니가. 당당하게 있어, 당당하게.”

부모님 역시 자리해 아들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했다. 정환의 어머니인 선진은 이 모든 일이 아직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아실의 바 카운터 자리는 딱 10석. 오늘은 그 자리가 가득 차 풍부한 시작을 알린다.

저마다 즐겁게 떠들며 안부를 전하는 사이, 백 사이드 문이 열리고 잠시 모습을 감췄던 오늘의 주인공이 나온다.

인사를 건네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정환이 바텐더의 복장으로 이들 앞에 섰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복장이다.

“흠.”

“가볍군.”

“그래서 더 어울리고요.”

“이쪽에는 저게 맞아요.”

“잘생긴 놈은 뭘 해도 어울린다니까!”

다들 정환의 복장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멋들어진 정장 차림이 아닌 가벼운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정환의 모습.

‘캐주얼 오센틱’이라는 그의 말은, 복장에도 묻어 있어 보였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환은 바 테이블 중앙에 서서는 손님들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오늘을 위해, 다들 귀한 시간을 낸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좋은 기회에 좋은 인연을 얻어 이렇게 작은 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좋은 기운에 보답하기 위해 좋은 바가 되겠습니다.”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작은 포부를 말하는 정환의 모습.

“좋은 말을 좋게 잘했네!”

“암. 좋고, 말고.”

“이제 맛 좋은 술을 좀 먹읍시다! 예. 흐흐.”

거창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배포가 가득한 말이 끝나자 이내 박수가 쏟아진다.

“그럼 지금부터, 바 아실의 프리 오픈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아실의 프리 오픈.

저마다 새로운 가게를 축복할 선물과 덕담을 건넨 후, 정환의 오너 바텐딩이 시작되었다.

주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오유와리부터 한 잔. 레드 라벨로 해주게.”

“사이드 카로 부탁하네.”

“싱가폴 슬링 래플스 스타일 괜찮지?”

“고든스 김렛을 부탁합니다.”

“당신은 안 돼요! 정환 군. 김렛은 저한테 주세요.”

“파리지앵, 셰이킹으로 부탁합니다.”

“슬래지 해머. 독하게 한 번 타줘.”

“아, 사제락도 마셔야 하는데!”

“흠. 여전히 제약은 걸려있나?”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네 엄마는 무알콜로 다오. 다음 잔은 베스퍼로 하마.”

“흐흐. 난 프로즌 다이키리 부탁합니다! 예. 시워언하게!”

저마다 바텐더와 추억이 묻어 있는 잔을 주문해 보는 이들.

회귀하고는 짧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렇게 돌이켜보니 제법 많은 잔을 거쳐 간 정환의 지난날.

바텐더라는 직업은 이래서 좋다.

평범히 흘러간 나날일지라도 돌이켜 보면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한 잔으로 기억 속에 남아는 사람.

우린 그런 사람을 바텐더라 부른다.

“넵! 주문 확인했습니다! 다들 기다려 주세요!”

정환은 밝게 웃고는 아실에서의 첫 바텐딩을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도 이런 추억과 잔이 쌓여가며 정환의 새로운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정환은 괜스레 그런 기대감에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웃고 떠들며 즐거워 하는 사람들의 풍경.

복잡하지만 따뜻한, 아실의 시작이었다.

3.

아실의 프리 오픈이 끝난 다음 날.

원래라면 재정비를 위해 하루 쉬어가는 이런 날에도 한옥을 개조한 아실은 여전히 빛을 밝히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아실의 모습.

그런 아실을 향해.

또각, 또각.

작은 구두 소리가 울린다.

가벼움을 담은 뾰족한 구두 소리가 한 한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담벼락은 한옥의 것이 아니다. 조금은 현대적인 느낌을 담아 붉은 벽돌로 된 담벼락.

그런 담벼락을 보며 구두의 주인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기대감을 더욱 안았다.

또각, 또각.

걸음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주하는 동판으로 된 가게의 작은 얼굴.

‘바 아실.’

손을 뻗어 만져본 동판의 냉기가 싫지 않아 웃음이 난다. 구두의 주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손에 든 무언가를 뒤로 감췄다.

그리고 빼꼼히 담장 안 한옥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 아무도 없는 고요한 한옥의 마당은 조명만이 자리해 오히려 풍취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흠.’

어색하다. 홀로 이런 곳을 들어서려니 오죽하겠나.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한 발을 내디뎌 보는 그녀.

그녀는 마당 안으로 들어서 유리로 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반겨주는 이는 잘생긴 바텐더. 하얀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아 빛이 난다.

“아. 시은아.”

바텐더는 밝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과하지 않은 구두에 깔끔한 원피스. 그리고 그 위를 두른 봄 코트가 긴 머리와 어우러져 ‘아실’이라 부르는 바와 딱 맞는 모습이다.

“가게가 너무 예뻐요.”

“그렇지? 얼른 들어와. 여기. 여기 앉으면 되겠다.”

정환은 웃으며 시은을 맞이한다. 처음 회귀한 후 과팅에서 만난 연이 아직 이어진 둘은, 이제야 바텐더와 손님으로 이렇게 자리에서 마주한다.

아실의 밖에는 여전히 ‘Close.’라 적힌 목판이 달려 있다. 즉, 오늘은 정상적인 영업일은 아닌 날.

오늘은 누군가 한 사람만을 위해, 가게가 문을 여는 날이다.

“여기, 선물이요!”

시은은 밝게 웃으며 자신이 준비한 걸 건넨다. 화사한 꽃이 피어 계절에 어울리는 화분이 정환의 앞에 놓였다.

별다른 장식 없이, 또 별다른 축사 없이. 그저 꽃만이 담긴 화분이 오히려 소박해 정환은 더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 맛있는 술, 만들어 줘야겠네.”

“이제야 마시는 거예요? 너무 오래 걸렸어요.”

꼭 모히토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텐더가 있다던 시은. 이런저런 일들이 꼬이며 그 바텐더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그녀였다.

프론트에 서고 지인을 초대했던 날이 좋은 기회였지만, 그 날은 안타깝게 스케줄이 어긋나고 말았다.

한 번 어긋난 일은 쉬이 맞춰지지 않는다. 반대로 맞춰줘야 하는 일도, 쉬이 어긋나지 않고.

오늘이 그 둘 중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자, 그럼. 주문하시겠어요?”

정환은 간단히 수건과 마실 물, 그리고 다과를 앞에 두고는 조금 편한 자세로 주문을 물었다.

정장 차림보다 가벼운 복장 탓에 둘 사이의 긴장감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과 포근함만이 가득한 바 안의 풍경.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은은 물로 목을 축이고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그녀의 주문.

“모히토요!”

밝게 웃으며 상기된 볼로 주문하는 그녀의 모습에 바텐더는 절로 입꼬리를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네! 모히토. 잠시만 기다리세요!”

늦지 않은 시간, 종로의 골목 안 작은 바에서 남녀의 웃는 목소리가 싫지 않게 들려온다.

새롭게 시작하는 바처럼, 두 남녀의 관계도 새롭게 시작되는 것만 같은 날.

봄바람이 살랑 불어와 시작을 알리는 처음의 계절임을 나타낸다.

‘바 아실’도, 또 알 수 없는 두 남녀의 관계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평범한 봄날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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