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잔. 기나긴 이별.
3.
“…….”
“…….”
“…….”
마지막 무대를 시작하는 명진의 앞에서 제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도 큰 반응은 없었던 제자들.
직접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이들 역시 예상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진이 의식을 잃었던 동안 이들은 매일 같이 병원을 방문했다. 저 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주치의와 마주치기도 여러 번.
그와 대화까지 나눈 이들은 그의 입을 통해 명진이 다시는 바텐더로 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알고는 있다. 이렇게 마지막 무대를 가질 수 있는 바텐더 역시 많지 않다는 것을.
바텐더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중 3분의 2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누구는 몸이 상해서, 누구는 가게가 망해서, 또 누구는 실력이 도태되어서.
저마다 이유는 별개지만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 바텐더의 현실.
그런 현실과 비교하면 명진은 제법 영광스러운 은퇴를 하는 거란 것도 이들은 모르지 않았다.
허나, 그런 이성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감정이라는 건 따로 있지 않나.
이들의 감정은 이성적인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스윽. 스윽.
명진은 그런 제자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이 할 일을 한다.
재료를 챙기며 자신이 만들 잔을 준비하는 명진.
그의 앞에는 그가 즐겨 마시던 고든스 진과 Rose’s라 적힌 라임 주스가 한 병 놓여 있다.
온더락 잔을 가져와 큰 얼음을 넣고는 진과 라임 주스를 섞어가는 명진의 모습.
평소처럼 술에 대한 멋들어진 설명도 아직은 시작되지 않았다.
달그라아아악. 달그라아아악.
고개 숙인 제자들 앞에서도 그의 스터는 유려하게 흘러간다.
정확히 잔의 벽만을 타고 도는 그의 바스푼은 쓰러져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완벽함을 자랑하고 있다.
20년의 세월 동안 몸에 익은 걸 뺏어가기에 석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흐르는 스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제자들.
여전한 모습이다. 하얀 재킷에 멋들어진 자세와 완벽한 소리까지.
아팠던 사람이란 걸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명진은 완벽한 바텐딩을 선보이고 있다.
탁.
명진은 바스푼을 잔에서 빼내고는 잔을 앞으로 밀어낸다. 제자들의 앞에는 명진이 만든 잔이 놓여있다.
투명한 액체에 연한 녹색 빛이 감도는, 그리고 위에는 라임이 가니쉬로 장식된 은은한 향의 칵테일이었다.
“챈들러 김렛…인가요?”
이를 얼른 알아보는 정환의 말. 정환의 말이 터지고 나서야 정우와 기준 역시 고개를 들어 잔을 제대로 응시한다. 이들의 앞에는 명진이 평소 즐겨 마시던 김렛과 비슷한 이름의 칵테일이 놓여 있다.
“챈들러 김렛을 아시나요?”
“진짜 김렛은 진과 로즈 사(社)의 라임 주스를 반씩, 그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그런 말이 있었죠.”
“레이먼드 챈들러를 알다니, 정환 씨는 매번 절 놀라게 하는군요.”
정환과 명진은 앞에 놓인 잔을 보며 레이먼드 챈들러란 이름을 계속 언급했다.
뭘까. 유명한 바텐더라도 되는 걸까.
아쉽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란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작가 이름이다.
영국에 ‘셜록 홈즈’와 ‘코난 도일’이 있다면, 미국에는 ‘필립 말로’와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
일본에서는 챈들러의 인기 역시 대단했기에, 정환은 저 이름을 모르지 않았다.
바텐더로 몇 년 일하다 보면, 자연스레 듣게 되는 이름이기도 했고.
그런 챈들러의 유명 소설 속 등장하는 칵테일이 바로 챈들러 김렛.
김렛의 원형이라고도 전해지는 칵테일이 바로 이들의 앞에 놓인 저 잔이다.
“드셔보시죠.”
명진은 잔을 제자들 쪽으로 한 번 더 밀며 잔을 권한다. 마지못해 이를 들이켜 보는 제자들.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마시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건 이별이니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이별에 이들이 잔을 들어 올린다.
“다네요….”
“답니다….”
“달아요….”
같은 말을 토하는 제자들의 입. 이별이라는 상황과는 맞지 않게 유독 단맛이 강한 칵테일이 이들을 반겼다.
“달죠. 챈들러의 소설 속에서도 이 김렛은 단맛으로 유명합니다. 여러 상징이 있지만, 그 소설 속에서 김렛이 가지는 의미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마지막이죠.”
“…주인공은 결국 마지막에 김렛을 피하지 않나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가 던지듯 말을 건넨다. 바텐더로 일하다 보면 술과 관련된 책에 대해서는 듣는 말이 많다.
그 역시 레이먼드 챈들러와 김렛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다.
“정우 씨도 피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너무 달아요…. 지금이랑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우는 이별이라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잔을 보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명진의 시선까지 피하는 그의 모습이, 소설 속 주인공과 조금 닮아있다.
명진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하나 더 준비해 온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병과 그 병보다 큰 라벨이 달린 앙고스투라 비터스가 들려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김렛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며 잔을 피하죠. 전 그건 핑계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실은 너무 달콤한 맛은 이별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피한 건 아닐까 하고요.”
명진은 제자들이 한 모금 마신 잔을 재차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무언가를 더하려는 걸까.
“바텐더라서 그런지 몰라도 소설을 보며 이런 호기심도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피한 그 술을 마시게 할 방법은 뭘까 하고요.”
“바텐더 아니시랄까 봐. 참….”
“직업병이죠.”
명진은 이제는 아니게 될 자신의 직업을 언급하며 제자들의 잔 위로 비터스를 가져갔다.
툭. 툭. 툭.
세 방울 정도의 비터스를 잔에 떨어트리는 명진의 모습. 약초로 만든 리큐르인 진갈색의 비터스가 떨어지자, 투명한 녹색의 챈들러 김렛이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김렛의 색. 이전에는 맑고 투명한 녹색이 돌던 잔이 붉은색을 더해가며 색을 진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붉지는 않고 그런 기운만 가져가는 잔의 색. 색은 붉어지기 직전인 분홍 즈음에서 변화를 멈췄다.
핑크. 딱 핑크라는 말이 어울리는 색이 완성된다. 진에 비터스를 더해 마시는 핑크진.
거기에 라임 주스를 더한, 어쩌면 핑크 김렛이란 말이 어울리는 잔이 새로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이별을 피하는 이들도 받아들일 수 있길 바라며 만든 잔. 이름은 김렛이 나오는 챈들러의 소설에서 따온 ‘기나긴 이별’입니다.”
아무런 파동도 없이 고요하게 잔을 다시 밀어주는 명진. 그는 자신만의 오리지널 칵테일을 제자들에게 선물했다.
처음일 거다. 명진은 클래식함이 가득 묻은 바텐더로 시그니처나 오리지널 같은 칵테일을 선보인 적은 없었으니까.
마지막에야 맛보는 명진의 오리지널 칵테일을 제자들은 감히 삼키지 못한다.
“드셔야죠.”
인자하게 웃으며 애원하는 투의 말을 전하는 명진. 제자들은 이를 피하고 싶은 표정을 잔뜩 지었지만 이를 피할 수 없음 역시 알고 있다.
“마셔요. 우리.”
정환은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잔을 들어 올린다.
스승이 그런 고민 끝에 만든 잔이라면 제자로서는 맛을 보는 게 당연한 도리일 터.
정환은 눈을 질끔 감고는 명진이 만든 기나긴 이별을 삼켰다.
연달아 잔을 들어 올리는 정우와 기준. 이들은 또 한 번 무언가를 흘리며 잔을 삼킨다.
기나긴 이별이 입을 타고는 이들의 속으로 향한다. 코를 자극하는 비터스의 풀 내음에 라임 주스의 향이 섞여있다.
가공된 주스가 아닌, 마치 신선한 라임을 직접 짜 넣은 것 같은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런 향이 지나간 후 남는 진한 비터스의 쓴맛. 명진은 이를 애써 죽이지 않고 그대로 잔에 담아낸 거로 보였다.
달콤했던 시절을 넘어 쓰게 다가오는 기나긴 이별.
마지막으로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잔향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다시금 상쾌하고 달콤했던 첫맛의 추억이 올라온다.
바텐더의 손으로 만들어 낸 기나긴 이별이란, 그런 맛이었다.
“맛은 어떠신가요?”
“깔끔합니다. 더는…매달리지 못할 정도로요.”
“달고 쓰고…, 돌이켜 보니 다시 달콤하네요.”
“맛있습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요. 다른 형들에 비해 저는 단맛이 너무 짧았거든요….”
맛을 물어오는 바텐더에게 이들은 저마다 느낀 감상을 들려줬다.
조금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감상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과거를 회상하듯 이후로는 말없이 잔을 들이키며 이런저런 표정만 지어볼 뿐이다.
지나간 시간이, 저 잔에는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명진은 자신의 마지막 잔을 들이키는 제자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김렛을 마시기에는 분명 이른 시기다. 허나, 이를 결국에는 마시고 있는 제자들.
이별을 피하려는 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칵테일이라는 명진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통한 걸지도 모른다.
이거면 된 거라. 명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밝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고, 그는 그렇게 자평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제자들이 잔을 전부 비워냈다. 어느새 아련함을 지우고 이제는 후련함을 담은 그들의 표정.
정우는 온전히 기나긴 이별을 받아들인 듯 평안함을 얼굴에 띄웠다.
그리고.
“이 칵테일은 맛만 느껴도 충분히 괜찮은 칵테일이네요. 아르센의 시그니처로 삼으면 어떨까요?”
제법 매니저다운 생각을 해보는 그.
아르센에는 따로 시그니처 칵테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진은 시그니처나 모던 칵테일보다는 클래식 칵테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이참에 명진이 만든 이 잔을 아르센의 시그니처 메뉴로 만들자는 정우의 제안은 제법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아뇨.”
명진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며 이를 거절했다.
“그, 그런가요? 네, 뭐. 마스터만의 오리지널로 두는 거도 나쁘지 않죠. 하하. 참. 욕심쟁이시라니까.”
너무 단호한 태도로 거절하는 명진의 말에 뻘쭘하게 너스레를 떨어보는 정우의 모습.
정우는 훈훈했던 분위기를 되살려 보려 애써 웃음을 지었다.
허나, 조금은 무겁게 변하는 명진의 표정.
달콤했던 분위기에 비터스가 더해지려는 것만 같다. 조금은 씁쓸하고 텁텁한. 그리고 쓴맛이 강한 그런 비터스가.
그제야, 정우와 기준, 그리고 정환은 명진이 이들을 모은 게 그저 마지막 무대 때문만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불안한 표정의 이들이 시선을 둘 곳을 잃는다.
“…아니죠? 아니잖아요? 기나긴 이별…, 마셨잖아요! 그건 ‘바텐더’ 이명진과의 이별이지, 이건 아니잖아요!”
불안함을 온전히 느낀 정우는 따지듯 소리치며 눈가를 붉힌다. 떨려가는 그의 목소리.
각오했던 이별, 그 이상을 마주한 이의 모습이 정우의 몸에서 발한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입니다. 이게 맞습니다.”
“제발요…. 아니에요. 이건 진짜….”
명진은 울면서 매달리듯 말을 이어가는 정우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무겁게 내려가는 그의 눈.
이번에 뱉을 말은 그 역시도 버거운 모양이다.
휘청.
그의 몸이 슬쩍 흔들린다. 놀라서 일어서려는 이들을 손을 들어 만류하는 명진의 모습.
그의 아내 현선만이 다가가 그를 부축하고 곁에 서 있다.
그는 무겁게 감았던 눈을 뜨고는 결심이 아린 표정을 지었다.
방금처럼 흔들릴 뻔도 했지만, 결국에는 결심이 선 모양이다.
어느새 중심을 잡은 그의 입은.
“‘바텐더’ 이명진과 함께 ‘아르센’도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조금 더 무거운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