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잔. Show must go on.
1.
“다른 수치는 전부 정상입니다. 석 달이 어떻게 보면 길지만 어떻게 보면 또 짧은 시간입니다. 걷는 것도 곧 가능하실 겁니다. 하루에서 이틀 정도만 재활을 받으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뇨. 깨어나 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선생님을 발견한 분. 그분께도 감사드려야 할 겁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으니까요.”
명진의 주치의 윤형화는 새벽 시간에도 환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명진의 몸 곳곳을 살폈고 이내 안심하며 정상이라는 소견을 내려줬다.
명진의 아내 현선은 그제야 참던 눈물을 마저 흘리며 남편과의 해후를 즐길 수 있었다.
보통은 의식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부 들린다던데.
실상은 다른 걸까.
명진은 아내와 아련한 시간을 잠시 보낸 후 지나간 석 달, 그리고 자신이 쓰러진 날 이후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아르센의 막내인 정환이 자신을 살린 이야기부터 아르센이 계속해서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병원에 제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의 얼굴이 인자하게 펴졌다.
“그랬군요….”
“다들 장하지 않아요?”
“전화기를 좀 주시겠어요?”
“아, 그래요. 정우 군에게 전화해야죠. 다들 기다릴 거예요. 얼마나 기뻐할까. 호호.”
현선은 전화를 찾는 명진의 말에 당연히 제자들을 떠올렸다.
자녀가 없는 부부 사이에 정우를 비롯한 제자들은 정말 아들 같은 이들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명진이 전화를 건 상대는 정우를 비롯한 제자들은 아니었다.
이명진입니다.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무거운 인사말로 시작하는 그의 통화 내용이 제자들을 향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명진은 상체만 겨우 일으킨 상태로 진중한 통화를 몇 군데 이어갔다.
곁에서 그의 통화를 들은 현선의 얼굴이 조금 무거워졌다.
“당신….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요. 원래는 석 달 전에 정리했어야 했던 일들인걸요.”
“…그래도.”
남편에게 소중한 게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현선은 아련한 눈빛만 보내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현선의 손을 꼭 잡아주는 명진.
“괜찮아요. 정우 씨에게는 따로 연락해둘게요. 이런 모습은…보여주기 그러니까요.”
“뭘 새삼스럽게요. 다들 돌아오길 기다렸을 텐데요.”
“돌아가야죠. 그럼요.”
명진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는 듯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돌아가야 한다는 말. 이미 돌아온 이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2.
명진이 깨어나고 나흘이 지난 무렵.
“허억…, 허억, 헉.”
시간은 아직 햇볕이 따사한 오후 2시 정도.
강남의 한적한 골목, 아르센 앞에는 두 명의 젊은 청년이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고 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타악!
마지막으로 건장한 체격에 무뚝뚝한 인상의 청년까지. 그는 연신 땀을 흘리며 이곳까지 달려와 뚝! 하고 멈춰서 버린다.
“기준 형!”
“늦었어, 인마!”
아르센의 바텐더 세 명이, 한곳에 모였다.
아르센의 출근 시간은 오후 5시. 아직 출근까지는 한참 이른 시간에 이들은 가게 앞에 모여 뭘 하는 걸까.
남들은 어떻게든 출근 시간 전에는 직장 근처로 가지 않으려 한다던데.
이들의 행동은 조금 남달라 보였다.
“…진짜인 거죠?”
“응. 확실해.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
“빨리! 빨리 들어가요!”
자신이 들은 걸 믿지 못하는 기준과 확신해주는 정우. 그리고 그런 둘을 보채는 정환이 서둘러 아르센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들은.
오래도록 기다리던 전화를 한 통 받고는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정우 씨? 이명진입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스터, 명진의 전화. 정우는 순간 전화기까지 놓쳐가며 넋을 놓고 말았다.
조금 섭섭한 점도 없진 않다. 이미 깨어난 건 나흘 전이라던데 왜 이제야 연락을 준 걸까.
한동안 병원에 오지 말라던 현선의 말이 나흘 전이었으니, 어쩌면 또 명진이 고집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
당장에 달려가겠다고 정우는 울면서 소리쳤다. 허나, 이를 만류하는 명진의 말.
아르센으로 오시죠. 기준 씨와 정환 씨. 모두 불러주세요.
명진은 조금 상징적인 장소로 이들을 불러 모았다.
기준과 정환은 정우의 전화에 바로 뛰쳐나왔다. 아직은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상태.
둘은 반신반의에 더해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까지 지으며 아르센을 바라본다.
이 육중한 문 너머에는 마스터가 있다는 그런 기대감과 함께.
“가자.”
정우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전화로 소식을 듣는 것과 실제로 깨어난 이를 눈으로 마주하는 건 다른 일이다.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그도 잔뜩 긴장하며 아르센의 문을 열었다.
딸랑.
영업 전에는 늘 떼어두던 종이 울린다. 마치, 지금 아르센이 영업 중이라는 듯이.
세 바텐더는 잠시 고개를 들어 이를 한 번 살피고는 짧은 복도를 향해 걸었다.
저벅. 저벅. 저벅.
걸음이 묵직하게 나려 앉는다. 이제 코너만 돌면 바로 바 테이블이 보일 터.
꿀꺽.
하는 침을 한 번 삼킨 이들은 ‘얼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
“마스터!”
동시에 터져 나오는 그리운 호칭. 그들이 바라본 바 테일블 안에는 언제나처럼 인자하게 웃고 있는 명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정말…이죠?”
“……!”
그저 크게 탄성만 터트린 정우와 슬쩍 눈물 한 방울을 떨궈보는 기준, 그리고 애써 이런 이들의 뒤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정환이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이들을 반기는 여전히 인자한 명진의 어투.
“어서들 와요.”
변한 건 없다. 늘 누워있는 모습만을 봤기에 이렇게 야윈 줄은 몰랐지만.
살이 쭉 빠져 앙상한 몸에 애써 정장을 걸친 명진의 모습이 재회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만 같다.
마치,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기준은 나이가 무색하게 자리에서 주먹을 들어 눈가를 닦았고 정환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감정을 참는다.
그리고 이런 후배들 앞에서 아, 아! 하는 탄식만을 내뱉던 정우가 명진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다가섰다.
하지만.
스윽.
그를 막아서는 하나의 신형.
“선생님…?”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던 명진의 주치의 윤형화가 손을 들어 정우의 몸을 막는다.
“지금…심장이 안정적인 상태긴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감동적인 재회에 죄송합니다만, 격한 감정을 표하는 건 자제해주세요.”
그는 이를 꽉 깨물고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토했다. 아마,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는 모양이다.
드르륵.
세 바텐더가 잠시 멍하니 사태를 파악할 때, 백사이드의 문이 열리고는 또 하나의 익숙한 모습이 나타난다.
“정우 군. 아, 다들 함께 왔군요.”
명진의 아내, 현선이다.
“사모님…? 이게 다 뭐죠?”
“이이가 또 고집을 부려서…. 선생님이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말리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지 뭐예요. 죄송스러워 죽겠어요, 아주.”
현선은 여전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젓고는 백사이드에서 꺼내온 것을 명진의 앞에 놓았다.
죄송하다는 말에 형화는 그저 안경만 슬쩍 올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고집을 부렸다는 걸까.
이들의 의문은, 명진의 앞에 놓인 것들을 보고 나서야 풀리고 만다.
“마스터, 설마 바텐딩을 하시려고요?”
명진의 옆에는 셰이커와 지거, 그리고 믹싱 글라스를 비롯한 바텐딩에 필요한 바툴이 놓여 있다.
그리고 현선이 가져온 건 다름 아닌 라임.
바텐딩이라는 추측이 제법 적절했다.
실상은 정확히 이들이 추측하는 것과 같았다. 몸을 겨우 회복해 이제는 일상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명진은 제자들을 아르센에서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제는 퇴원도 괜찮다고 말하던 주치의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바텐딩을 할 거냐 떠봤고, 명진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노발대발하던 것도 잠시. 형화는 이 환자의 어떠한 한 말 때문에 결국 그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안 됩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안 돼요!”
“마, 맞습니다! 저도 반댑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마스터. 일단 더 회복을 하시고…!”
오히려 세 바텐더가 의미 없는 만류에 더 힘을 쏟는다.
“괜찮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을 거고, 딱 세 분의 손님만 맞으면 되니까요.”
!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들을 이겨버리는 명진의 고집.
“선생님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허락은 아니었습니다만. 일전에 제때 입원시키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이죠. 말씀드리지만, 길게는 안 됩니다. 제가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주치의까지 굴복한 걸 보고 난 후에야 세 바텐더는 자신들의 만류가 부질없음을 알아챈다.
잠시 멍하니 있는 이들에게.
“앉으시죠.”
명진은 바 안이 아닌 손님의 자리를 가리키며 앉을 것을 권했다.
“저희…가요?”
“모실 손님이 세 분이라고 하진 않았습니까? 마침, 여기 딱 세 분이 계시군요. 손님으로 모시기, 더할 나위 없는 분들로.”
이제는 자연스레 코스터와 젖은 수건까지 올려두는 명진을 보며 이들은 잠시 생각이란 걸 잊는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함께 끄덕이고는 자리로 향해가는 이들.
바 테이블 제일 끝에 앉은 주치의를 지나쳐 이들이 중심부에 서 있는 명진의 앞에 자리했다.
걱정은 된다. 허나, 오랜만에 저 하얀 재킷을 입은 스승의 모습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사실.
이들은 자연스레 의자에 앉아 명진의 그 모습을 감상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 돌아오셔서.”
그리고 겨우 입을 열어보는 정환. 명진의 쓰러진 모습을 그대로 봤던 정환은 이렇게 돌아온 명진의 모습이 유독 울컥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눈앞에서, 그것도 바 안이라는 공간에서 소중한 사람이 명을 달리했다면.
정환은 저 바라는 테이블 너머로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정환 씨가 적절한 시간에 와주셔서 겨우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또 도움을 받았군요.”
“아닙니다.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했어요. 그래서 도와드렸다면….”
쓰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에 명진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터질 일은 언제고, 어떻게든 터지는 법이다.
“정우 씨.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군요. 얼굴이 반쪽이네요.”
“…헤. 누가 누구한테요. 마스터 얼굴은 삼분의 일쪽이에요.”
“그런가요? 허허. 푹 쉬었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차차 회복해야죠. 기준 씨. 언제까지 우실 거죠? 이런. 바텐더가 별로인 모양이군요. 손님을 울게 만드는 바텐더는 실격인데.”
“아, 아닙니다! 그, 그치겠습니다. 흐끅.”
이제야 서로에 대한 안부와 오랜만에 만난 감정을 풀어보는 이들.
명진은 자연스레 이들에게 대화를 건네며 언제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농담 섞인 너스레에 인자함이 묻어나오는, 익숙한 모습을.
“다들 제가 없는 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예전 같지 않았겠죠. 건강 관리까지 바텐더의 역량입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절도 있는 명진의 사과. 그는 정확히 손을 옆에 붙이고는 허리를 접어 이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너무도 경건하게 내려가는 상체에, 이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 걸요!”
“마, 맞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얼른 고개 들어주세요, 마스터!”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젓는 바텐더들.
명진은 자신이 만족할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인 후에야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휴! 하는 소리가 젊은 바텐더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당연한 고생이란 건 없습니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그에 책임감 역시 느끼고요. 그 고생을 피하려 했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이렇게 배우는 거죠. 좋은…경험이었습니다. 정환이랑 기준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직 애들인데.”
정우는 좋은 경험이라는 말에 조금 망설임을 보였다. 좋다고만 하기에는 마음고생이 심한 석 달이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명진은 자신보다 후배들을 먼저 생각하는 정우를 보고는 기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애가 애 보고 애라니. 명진의 눈에는 이 역시 귀엽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이 공간을 지켜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이 공간이라 말한 곳을 명진이 훑어 본다.
구석구석 자신이 직접 꾸몄던 곳이고 오래도록 추억이 깃든 곳을 살펴보는 그의 얼굴에 아련함이 묻는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의 감상을 배려하듯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명진은 한참이나 아르센을 훑어본 후에야 감상을 마칠 수 있었다.
“손님을 너무 기다리게 했군요.”
“마스터.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요? 저희가 손님이면 천천히…”
“아뇨.”
손님이라는 말에 명진의 건강을 생각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우.
정우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이런 자리를 갖자는 말을 하려 하자 명진은 얼른 정우의 말을 잘라버린다.
“다들 제가 돌아올 공간이라며 이곳을 지켜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바텐더가 바 안에서 쓰러졌으니, 돌아와 마무리해야 한다, 그게 여러분의 뜻 아니었나요?”
“그건 그렇지만….”
“꼭 오늘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정우와 기준은 마냥 명진이 걱정되고 정환은 무언가 불안한 감정이 머리를 스친다.
그런 제자들에게 명진은.
“오늘이어야 합니다. 바에서 마치지 못한 일…. 그걸 마무리하는 날. 원래라면 그날이었어야 했죠.”
자신이 쓰러진 날 준비하던 바텐딩이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날도 저희가 손님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아무래도 단순한 퇴원 축하 파티는 아닌 모양이다. 이제는 불안함이 정우와 기준에게도 닿고 있다.
“물론입니다. 꼭 여러분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 오랜 생각이었습니다.”
“…….”
점점 불안한 생각이 굳게 다가온다. 그런 생각에 정우는 듣기 싫다는 듯 슬쩍 고개를 돌려본다.
허나, 귀는 더 가까워질 뿐이다.
“이제 시작해보죠. 그날 다하지 못했던 바텐딩….”
명진은 말을 이어가며 손을 움직였다. 2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바툴을 자신의 앞에 내려두는 명진의 손.
바툴을 쓰다듬으며 바텐더는 한 명씩 앞에 앉은 손님과 시선을 맞췄다.
신정우와 한기준을 지나 차정환까지.
제자라 부를 수 있는 손님들을 한 번씩 훑고 나서야 바텐더는.
“‘바텐더’ 이명진의 마지막 바텐딩을.”
덤덤히 자신의 마지막을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