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잔. 녹슨 못.
5.
“3일. 딱 3일만 쉬고들 오자.”
명진이 바텐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정우는 이내 자신이 내린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배들에게 3일의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이었다.
자신 역시 시간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
이대로 바로 바 안으로 들어선다고 해서 바로 바텐더로 돌아가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기둥처럼 여기던 스승이 쓰러진 상태고,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은 당연히 필요한 터였다.
“마스터가 뭐 때문에 바텐딩을 준비하신 건지는 아직 몰라. 뭐, 김태현 교수님을 뵈려고 하셨으니까 다른 손님들을 뵈려던 걸 수도 있고 영업시간에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신 걸 수도 있겠지.”
“시간은 조금 안 맞지만요.”
“응.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라는 정우의 말에 강하게 반점이 찍힌다.
이유야 알 수 없다.
이유를 말해 줄 사람은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허나, 이들 역시 바텐더이기에 느낄 수 있는 건 있다.
스승이, 이명진이, 한 바텐더가.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텐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이는 바텐더인 이들에게는 제법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수술이 끝나면 더는 바텐더로 일하지 못하는 걸 알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응. 억지로 하루만 더 달라고 하셨다는 말씀도 들었어.”
“그래서 오셨던 거겠죠.”
바텐더로서 바 안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명진은 그런 바람에 아르센을 찾은 거란 게 제자들의 예상이었다.
“열고, 기다리자. 어떻게 될지는 몰라. 아니, 오실 거야. 누군지 모르지만, 손님을 두고 가실 분은 아니잖아.”
“당연하죠. 오실 거예요. 곧…. 멀쩡하게.”
스승이 마지막 바텐딩을 준비하다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남아서 그 공간을 지켜가고 또 스승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이들의 결심 밑에는 그런 잔잔하고도 명진스러운. 이들만의 진심이 담겨있는 걸지도 모른다.
“3일이면 오늘까지 포함해서죠? 주말만 쉬고 오면 되겠네요.”
“그래. 주말 동안 다들 마음 잘 추스르고, 월요일에는 평상시처럼 보는 거야. 한동안 힘들어질 거야. 예전처럼 쉬는 날…, 보장은 못 해줘 알지?”
“벌써 그런지 오래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그래….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야. 대신 각오들은 좀 하자고.”
“넵!”
“넵!”
기준은 정우의 말에 크게 답하며 애써 힘을 끌어올려 본다. 정환 역시 이는 마찬가지.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라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적어도 12년의 경력을 가진 정환이 보기에 지금의 사태가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니까.
허나, 정환은 기운을 끌어올리는 이들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함께 목소리를 높여봤다.
약속한 3일의 시간이 지나고, 아르센은 다시금 문을 열었다.
바텐더들은 각자 마음을 추스르며 주말을 보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마주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이들은 주말이라는 시간 내내 명진이 입원한 병실을 찾으며 계속해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만 오라는 명진의 아내 현선의 말이 있었지만, 명진의 제자답게 한 고집 하는 이들을 말릴 순 없었다.
딸랑.
익숙한 소리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함께 아르센의 영업 재개를 알렸다.
“영업…하는 거지?”
당연한 말을 소심하게 물어보는 손님의 방문.
아르센은 3일‘이나’ 되는 시간 동안 문을 닫았다. 이제껏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던 아르센이기에 단골들에게는 충분히 낯설 수도 있는 상황.
“네, 들어오시죠. 영업하고 있습니다.”
“아. 금요일에 왔었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말이지. 아르센이 이런 경우가 잘 없어서 깜짝 놀랐지 뭔가. 친구가 지나가며 봤다는 데 주말에도 닫혀 있었다고 하고.”
“사정이 조금 있었습니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앉으시죠. 오늘은 제가 먼저 한 잔 사겠습니다.”
정우는 최대한 아무런 일이 없는 척, 아르센의 매니저답게 낯설어하는 단골을 맞이했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음을 말할 필요는 없다. 바라는 곳은 손님에게 무거운 소식을 전하지 않는 게 좋은 곳.
이들이 직접 마스터에게 있었던 일을 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바씬이 좁은 만큼. 이들 역시 곧 알게 되겠지만.
영업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첫날은 대부분 지난 시간에 대한 간단한 해명과 수습, 그리고 아르센이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
첫날만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아르센의 영업 재개.
허나, 언제나 그렇듯.
위기라는 건 서서히,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은 모르게 은밀히 다가오는 법이다.
아르센의 바텐더들은 이를 처음 느낀 건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6.
“어…?”
어느 직장에서나 들려선 안 될 소리가 아르센에서 들려온다. 다행히 바 안은 아닌 백사이드에서 나는 소리.
정환과 기준은 밖에서 영업을 준비하다 들려온 수상한 소리에 백사이드로 향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또 이건 무슨 서류고? 대금 납입도 안 되었다고 연락이…”
그들을 마주한 건 온갖 서류에 쌓여 머리를 매고 있는 매니저 정우의 모습.
한 달은 별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명진이 마지막으로 처리해둔 일들 덕분.
그간 명진은 꾸준히 자리를 비우면서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아르센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그는 자영업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이런 사무를 처리해두고 떠났었다.
매니저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이다. 허나, 정우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매니저.
어린 매니저를 배려하던 명진의 마음이 이제야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정우는 어깨너머로 겨우 보던 사무를 처리하는 데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다.
“아니,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정우는 어느 때보다 당황하며 연신 서류를 뒤진다.
당장에 다음 달에 필요한 재료와 술, 그리고 필요한 집기에 대한 발주를 넣어야 하는데 장부가 보이지 않는 상황.
각종 업체와 연관된 대금까지 납입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쳐지니, 정우로서는 우왕좌왕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황스럽겠지….’
이전 생에서 명진의 몸이 안 좋아진 후 아르센이 흔들렸던 것에는 이런 요소 역시 함께였을 거라. 정환은 직감적으로 이를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일이고 이를 알려줄 사람 역시 곁에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
우왕좌왕하는 사이 사무는 꼬였을 것이고 바에는 필요한 물품 역시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금이 꼬이고 이는 결국 채무로 넘어가기까지.
한 업장의 사장이 사라진다는 건, 이런 과정까지 포함해 위기라 부르는 게 분명했다.
정환은 이전 생의 아르센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지자 아찔한 기분이 들어 상상하기를 멈춘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그래, 그래도 그건 이전 생의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차정환이라는 막내가 아르센에 없었을 때의 이야기.
우선은 행동에 나서는 정환이다.
“응? 정환이 네가?”
“네.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좀 큰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한 적이 있어서요.”
“아. 그거랑은 좀 다르지 않을까? 나도 매니저 1, 2년 하긴 했는데…, 이건 아예 안 해본 일이라서….”
“일단 한 번 볼게요.”
정환은 다를 거라 말하는 정우를 밀어내고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빠르게 서류를 살펴보며 해야 할 일을 정리해보는 정환.
정우의 말처럼 일반적인 가게의 일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니, 애초에 다른 식당에서 일한 적도 없었기에 그건 별문제가 아니다.
정환은 그저 일본에서 제일 큰 호텔 바와 아르센보다 네 배 정도 큰 바에서 매니저로 일한 적이 있을 뿐.
그 경험이 오히려 지금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음. 우선 발주가 문제네요. 발주 자체는 형이 하실 수 있잖아요, 그죠?”
“마스터가 주시는 장부대로 하긴 했지만…, 할 줄은 알지.”
“이번 달 발주를 넣으려면 비교할 자료가 필요하긴 한데…. 그 장부가 안 보이네요? 마스터께서 따로 두신 거 같네요. 쓰읍. 재고를 먼저 확인해야 할 거 같아요.”
“그래야겠지? 그럼, 기준아. 부탁 좀 하자. 백바랑 백사이드 재고, 정리 좀 해줘. 술이랑 과일까지.”
“네, 형. 확인하고 올게요.”
“음, 우선은 기준 형이 재고 확인부터 하고 주류 업체에 작년 이맘때랑 저번 달 발주 자료 좀 보내 달라 해서 그거 두 개 봐가면서 주문 넣으면 발주는 될 거 같아요. 빨리 장부부터 찾아야겠어요.”
“그, 그래. 그러면 되겠다. 거긴 우리랑 오래 거래했으니까, 자료도 다 있을 거야.”
“네. 과일도 그렇고 얼음도 그렇고 다 업체에 연락 넣으면 자료는 보내주실 거예요. 급한 대로 우선은 그렇게 처리하죠.”
“응. 다들 마스터가 오래 거래한 곳들이니까.”
“그리고 대금 같은 경우는 이때까지 마스터가 직납하셨었네요.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니까, 통장이 필요한데…. 가게에는 없어 보이죠? 형이 관리하신 것도 아니고?”
“응…. 대금이나 이런 건 마스터가 직접 하셨거든. 매상 정도만 내가 입금하고 그랬지.”
“사모님께 연락드려서 대금 통장이 따로 있는지 먼저 여쭤봐야 해요. 매상 입금하는 계좌랑 대금 통장이랑 다를 수도 있거든요. 우선 그거부터 확인하고 정리해요.”
“그, 그렇지. 내가 바로 전화해볼게!”
매니저라는 직책을 달고도 아무것도 몰랐구나. 정우는 스스로를 그렇게 자책하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받고 있을 때는 몰랐다. 자신이 명진을 배려하며 도움이 되고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허나, 실질적으로 그 배려와 도움을 주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둘의 관계는 반대였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정우였다.
정환은 이제 완전히 정우의 사무를 받아와 자신이 직접 처리한다.
매상 장부부터 재고와 발주, 거기에 업체와의 계약까지 직접 관리하는 정환.
다행히 명진의 아내 현선이 집에서 찾은 장부도 있었고 통장 역시 그녀가 전해줘 대금 같은 것도 밀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정우는 정환이 나서자 해결되는 일을 보며 다시금 정환이 없었을 경우를 상상해봤다.
아찔한 생각에 정우는 그저 따스하게 정환의 어깨만 다독였다.
바라만 보던 등에 이어, 이제는 기댈수 있는 어깨도 생긴 것만 같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가고도 정환은 장부를 놓지 않았다. 어느덧 명진 없이 두 달을 버텨 낸 아르센.
허나, 이맘때쯤에는 이런 사무 말고도 또 다른 위기 역시 아르센을 덮쳐오고 있었다.
장부를 관리하며 매상까지 훤하게 보고 있던 정환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빨리 알 수 있었다.
‘매상이 점점…’
줄고 있다. 자료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 눈에 띄게 줄어가는 매상이 수치로 표현되자, 정환은 아르센에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딱히 눈에 보이는 실수나 바텐더들의 모자람이 있는 건 아니다.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단 한 가지가 보일 뿐.
‘마스터….’
마스터 이명진이라는 이의 부재. 정환은 매상이 줄어든 이유를 거기서 찾고 있었다.
바라는 곳은 신기한 곳이다. 여러 명의 바텐더가 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상징적인 오너와 마스터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바라는 곳.
이는 바의 분위기나 모든 스타일이 결국에는 오너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바가 있다는 긴자만 해도 3분의 1에 해당하는 곳이 간판에 마스터의 이름을 내건다.
마스터란 바 자체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사람이며 곧 바의 정체성과 같은 존재.
특히나 단골 위주로 장사하는 클래식 바의 경우는 그런 존재의 영향을 더욱 받고는 했다.
아르센 역시 클래식하기로 유명한 바. 거기에 간판 역시 작디작은 판자 하나가 전부인 곳으로 단골 위주의 장사란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바로 아르센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매상이 줄어든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당연히.
‘단골들이 떠나고 있다는 뜻이겠지.’
심각한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단골이라는 이름에 착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들이 그저 ‘아르센’이라는 곳의 단골이라는 착각.
실상은, 그들은 그냥 아르센이 아닌 ‘이명진이 있는 아르센’의 단골이었음에도 말이다.
단골은 돈과 노력, 시간을 써서 바를 찾는 이들이다. 제아무리 가게에 정이 들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돈과 노력,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바텐더가 없는 바에서 쓰고 싶은 이는 없을 터.
수치로 보이던 불안한 결과는 곧 시각적으로도 다가왔다. 명진이 쓰러지고 이제 막 석 달이 되던 날.
“오늘은… 한산하군.”
주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산한 풍경을 보며 단골 중의 단골인 김태현 교수가 혀를 찼다.
바 안에는 김태현 교수와 지동철 교수를 빼고는 고작 두 명의 손님만이 더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주말 저녁이면 단골로 가득 차던 아르센과는 분명히 다른 풍경이었다.
“이제는…, 포기들 하는 거겠지.”
“흠. 의리도 두 달이면 충분하니.”
“씁쓸하군. 두 달로도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현실이네. 손님과 가게 사이의 어쩔 수 없는 현실.”
두 교수는 이런 상황이 씁쓸한 듯 애써 혀를 차며 술을 들이켰다.
그들의 앞에는 연한 위스키 색의 잔이 놓여 영롱한 빛을 뿜는다.
이전처럼 붐비는 모습은 없다.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시끌벅적한 소리도 간데없는 지금.
바텐더와 내기하는 손님들을 지켜보던 눈들도, 또 아버지에게 멋들어지게 잔을 내미는 바텐더의 모습을 지켜보던 손님들도.
이제는 아르센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마스터의 부재에도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을 거라 여기던 정환마저 지금의 일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명진이라는 사람이 세월을 들여가며 쌓아둔 자신만의 탑이었으니까.
역설적이지 않나. 이를 지키려는 이와 이를 떠나는 이들의 이유가 모두 그 탑을 쌓은 사람 때문이라니.
지동철 교수는 들고 있던 잔을 내리고는 아르센 안을 쭈욱 둘러봤다.
여전히 잘 꾸며진 공간이 그를 반긴다. 앞에는 실력 좋은 바텐더들이 서 있고.
허나, 바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술도 바텐더도 아닌 손님.
그리고 그런 손님의 빈자리를 다른 것들이 채우고 있다. 젊은 바텐더들의 얼굴 속 그늘이 길게 늘어져 손님의 공간마저 채우는 것만 같다.
저들 역시 이제는 한계를 느끼며 더는 어쩔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동철 교수는 그런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잘그락.
다시금 올려 드는 그의 잔에서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려온다.
위스키보다는 진한 향이 그의 코에 닿을 때.
“러스티 네일….”
그는 읊조리듯 자신이 마시는 칵테일의 이름을 불러본다.
스카치 위스키에 드람뷔라는 리큐르를 섞어 만든 간단한 칵테일이 러스티 네일.
그의 손에 들린 러스티 네일의 영롱한 색이 조명을 받아 더욱 두드러져만 보인다.
“…….”
“…….”
“…….”
바 안이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그의 목소리가 바텐더들에게 닿고 말았다.
그리고 내려가는 바텐더들의 고개.
그들의 머리에는 하나의 단어만이 스친다.
러스티 네일의 뜻인.
‘녹슨 못’이라는 단어가.
‘마스터….’
정환마저도 그 말이 자신들을 뜻하는 것만 같아 괜스레 명진이 그리운 날.
아르센은 이렇게 또.
하루를 겨우 버텨냈다.
7.
삐. 삐이. 삐.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이미 석 달을 넘게 들어온 소리에 현선은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경과가 나쁘지는 않다. 적어도 푸우우우. 하는 산소호흡기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까.
수술 경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심정지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경향은 있지만, 검사 결과는 양호합니다. 이제는 의식만 돌아오신다면, 일상적인 생활도 가능하실 겁니다.
주치의의 희망적인 말까지 보태져 현선은 언제고 저이가 다시금 돌아올 거라, 그런 믿음을 놓지 않고 있다.
“어휴.”
현선이 몸을 일으켰다. 수건을 적셔와 정성스레 명진의 얼굴을 닦는 그녀.
“얼른 일어나요. 다들 당신만 기다리잖아요. 바텐더 못하면 어때요? 멋진 제자들이 있는데. 다들 당신 기다린다고 아르센에서 고생도 아니에요. 모르죠, 당신? 참 부러워요. 그런 거 보면.”
원체 인자한 표정만 짓던 사람이라 그런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얼굴에는 인자함이 그득하다.
현선은 그런 인자한 얼굴을 정성스레 닦으며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원체 손님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 아닌가. 제자들 역시 언제고 그랬던 사람이라며 명진의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이제는 병원의 일상.
현선은 그런 멋진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 역시 명진에게 말을 걸어가고 있다.
띠링.
현선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비는 손으로 이를 확인하는 현선.
사모님, 가게 걱정은 마세요. 오늘도 영업 잘 끝냈습니다.
‘정우 군도 건실하기는. 매일 이럴 필요는 없는데.’
언제나처럼 전해지는 아들 같은 신정우의 문자에 현선이 슬쩍 미소 짓고 있던 그때.
!!!!!
명진의 이마에 두었던 그녀의 손에 느껴질 리 없는 감촉이 전해진다.
따스하고 인자했던,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손길이 느껴지는 그녀의 손.
“여, 여보…?”
현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발’과 ‘설마’라는 단어를 함께 떠올리며.
그리고 떨리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가진 이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