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잔. End of the road.
5.
뭘까.
그런 손님에게 드릴 수 있는 잔이 하나 있습니다.
란 바텐더의 말에 정우와 기준은 동시에 머리를 기울였다. 의문이 많이 가는 말이다. ‘그런 손님’이란 말도, 또 ‘잔’이 있다는 말도.
둘은 바텐더가 말속에 담은 뜻을 알지 못한다.
“농담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아뇨. 손님이 필요하다면, 내어 드려야죠. 이럴 때 필요한 게 바고 바텐더니까요.”
이제야 감이 잡힌다. 이럴 때라.
사람은 언제 바를 찾을까.
일상이 평온할 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다.
허나, 바를 잘 찾지 않는 사람이, 또 바에 잘 올 수 없는 사람이 굳이 시간을 내어 바를 찾는다는 건, 또 바텐더를 찾아 왔다는 건.
그의 일상에 평범하지 않은 일이 다가왔다는 뜻일 것이다.
바텐더는 그런 손님에게 꼭 내어주고 싶은 잔이 있어 보였다.
“고민이 가득한 손님이라면 더더욱요.”
정환은 완전히 바텐더로 모습을 바꾸고는 정우를 대한다. 정우는 이런 정환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장난치지 말라며 그만두게 해야 할까. 평소라면. 그러니까 일상적인 날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오늘만은.
그에게도 바텐더가 필요하다.
그것도, 실력 좋은 바텐더로.
“고민이라…. 가득하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게 고민이야.”
!
정우는 덤덤히 한참 후배인 바텐더를 향해 심정을 고백해간다.
“그냥 마스터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는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그러면 곧 오시겠지. 곧 오셔서 또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겠지. 라고 하면서. 근데…, 이렇게 되고 내가 다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진짜, 하나도.”
“…정우 형.”
이런 이야기를, 또 구체적인 감정을 담아서 동생들 앞에서 풀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기준이 아는 신정우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기준은 안쓰러움과 공감의 눈빛을 담아 정우를 쓸어내렸다.
정우는 바텐더가 된 이후 오로지 한 등만을 바라보며 이곳까지 왔다.
언제나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건 스승이라는 커다란 등.
정우는 갈림길에 설 때면, 항상 자신이 바라보던 이가 갔던 길을 택하며 그렇게 나아갔다.
그게 맞는 길이라고, 자신은 그거면 된다고.
늘 그렇게 여겼던 정우에게, 처음으로 스승이 간 적 없는 길이 나왔다.
언제나 하나의 이정표를 보고 걷던 이가 이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제자리에 멈춰 버린다는 것.
지금 정우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정환은 정우의 말을 듣더니 무심하게 술병을 몇 개 가져와 잔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카치 위스키 한 병과 캄파리 한 병, 그리고 그린 샤르트뢰즈 한 병을 준비하는 정환.
정환은 이 세 가지 술을 믹싱 글라스에 1대1대1의 비율로 넣더니 얼음과 함께 이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또르르륵, 또르르르륵.
언제 들어도 완벽한 소리가 아르센을 채운다. 저런 소리와 경쾌한 셰이킹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나 기대하기 마련이다.
맛있는 칵테일과, 또 바텐더의 멋들어진 답변을.
정우는 턱을 모으고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봤다. 바텐더지만, 사실 저렇게 만드는 칵테일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레시피네요.”
“응. 또 인터넷으로 배워온 건 가봐.”
일전에 교수들과 내기를 하며 정환은 고작 1년 전에 탄생한 칵테일을 그들에게 선보인 적이 있다.
클래식이 아닌 모던 칵테일.
아마, 지금 나오는 것도 그런 것이라. 바텐더들은 자신들이 저 칵테일을 모르는 이유를 거기서 찾았다.
촤아아아아아!
믹싱 글라스의 벽을 타고 돌던 스푼이 멈추고는 스트레이너가 위로 올라왔다.
이를 잡고 잔 위로 술을 쏟아내는 정환.
그의 몸 중심선에서 쏟아지는 연갈색 액체는 정확히 일직선을 그리며 잔으로 낙하했다.
완벽한, 잔의 완성이었다.
연갈색으로 조금은 투명한 액체가 잔에 담겨 나온다. 맨해튼과 비슷한 색이지만 아무런 가니쉬가 없는 단출한 잔.
정환은 이런 잔을 정우와 기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드릴 잔은 이 잔입니다.”
“이게, 내 고민에 대한 바텐더로서 차정환의 답이란 말이지?”
“네.”
“이름이 뭔데?”
정우는 바텐더로서 경력깨나 있는 자신도 모르는 잔의 이름을 묻는다.
차정환이라는 저 바텐더 역시.
이명진이라는 이만큼, 잔에는 말이 많은 바텐더임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잔의 이름은 ‘엔드 오브 더 로드(End Of The Road)’입니다.”
!
정환의 말을 듣는 순간 정우의 눈이 크게 뜨인다. 기준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정우는 슬쩍 입꼬리를 떨더니, 이내 반응하기 시작했다.
“엔드 오브 더 로드? 막다른 길…이란 뜻 아냐?”
차근히, 그리고 논리적으로. 바텐더가 전한 칵테일의 이름을 풀어보는 정우.
어쩌면, 그의 상황이 지금과 같아서 이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과 비추어 본다면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막다른 길에 막힌 상황.
딱, 자신의 처지와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뇨. 다른 뜻도 있으니까요.”
“다른 뜻?”
바텐더의 입은 같은 문장이 가진 다른 뜻을 설명한다.
“엔드 오브 더 로드. 이 길의 끝. 즉, 목적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목적지…라. 차라리 막다른 길이 지금은 더 어울리는 거 같은데?”
“글쎄요. 어떤 잔을 기대했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사실…, 바에 와서 고민을 말하는 분들이 전부 답을 듣고 싶어 말하는 건 아니니까요. 바텐더가 항상 답을 내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 같은 바텐더끼리 배려가 부족하긴 했네. 일방적인 말만 듣고 결론을 내려줄 만큼 바텐더들이 늘 완성된 인간은 아니지.”
정우는 순간, 정환에게 의지하려던 작은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올 뻔했다.
자신의 상황을, 그리고 아르센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당연히 신정우 자신이 아닌가.
‘의미 없는 잔이라는 건가….’
잔에, 또 바텐더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주지 마라.
정환은 그런 말을 칵테일로 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엔드 오브 더 로드라는 이름만 듣고 정우는 막연히 자신의 상황을 잔에 빗대었다고 생각했다.
허나, 같은 문장이라도 다른 뜻이 존재하는 법. 해석은 바텐더가 아닌, 각자의 상황에 달렸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말일 거라.
그런 의미라.
정우가 씁쓸히 웃으며 잔을 들려 할 때.
“대신, 바텐더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도 분명히 있습니다.”
!
정환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말을 꺼낸다.
“바텐더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
“결론을 내려드릴 순 없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결론으로 가는 길. 그 정도는 바텐더가 조언을 건네도 건방지지 않지 않을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타인이기에 객관적으로 건넬 수도 있구요.”
“…….”
정우는 들려던 잔을 내리고는 정환의 말을 곱씹어 본다. 결론을 내려줄 순 없지만, 결론까지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이라.
‘어떻게 해야 한다. 무얼 해야 한다.’는 그런 답이 아닌, 결국 바텐더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무얼 해야 할지.’. 그걸 정하는 과정에 대한 조언이 전부라.
정우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바텐더는 손님의 얼굴에 이해가 자리하자, 자신의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저 역시 바라보던 등이 있었습니다. 늘 등을 보며 그렇게 걷고 싶다고 생각했죠. 흔들릴지언정, 뒤섞이지 않는 그런 등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을 섞어가며 말을 풀어가는 바텐더.
괜찮다.
정우가 같은 직장의 동료가 아닌, 손님이었다면 저게 어떤 사연을 품은 이야기인 줄 몰랐을 테니까.
지금이야 알고 듣는 이야기지만, 정우는 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손님의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에 다시 그 등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전히 흔들리지만 뒤섞이진 않았던 등이었죠. 저 역시 그렇게 걸어야겠다, 생각도 했고요.”
“…만약 그 등이 없어지면, 그때는 어떨 거 같은데?”
정우는 마치 정환의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한 것처럼 말을 물어간다.
비슷한 상황이다.
바라보는 등이 있었고, 그런 등을 닮고 싶었고.
여전히 바라보는 등이 있냐, 없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글쎄요. 힘들긴 할 거 같습니다. 따라 걸으려 했던 등이니까요.”
“역시…, 그렇지?”
“네. 하지만, 저라면 그래도 계속 걸어는 갈 거 같습니다.”
!!
“응?”
정우는 갑작스레 방향을 트는 바텐더의 말에 의문을 표한다. 잘 나가다더니 또 이건 무슨 말일까.
그가 고개를 갸웃할 때.
“등만 보고 걸은 건 아니니까요.”
정환은 자신의 눈앞에 그 등이 보인 것처럼 수줍게 웃고는 짧은 문장만을 남긴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이 제법 강렬하게 정우의 가슴에 닿아 울린다.
쿠웅!
하는 그런 느낌으로.
‘등만 보고 걸은 게 아니다…’
바텐더는 여기에 덧붙이는 말이 없다. 전할 말은 전부 전했을 터.
이제는 손님의 영역.
바텐더의 조언이란 이런 식이다. 마치, 불가의 화두(話頭). 화두를 던지는 것과 같은 식.
누구는 추상적이라며, 누구는 회피라며 비난하는 그들의 이런 방식이, 때로는 손님에게 필요할 때도 있다.
마치, 지금처럼.
“…등만 보고 걸은 게 아니다….”
정우는 여전히 내려오지 않은 정환의 입꼬리를 보며 넋을 놓았다. 곰곰이 되씹으며 말을 음미함에도 한 번에 이해는 되지 않는 말.
무슨 뜻인지 한 번 더 물어볼까. 정우가 그런 고민을 하던 즈음.
그의 눈에 바텐더가 내민 잔이 들어온다.
‘엔드 오브 더 로드(End of the road)’라는 잔이.
!!!
그제야 무언가 빛이 스치는 정우의 머리. 정우는 이제야, 바텐더가 저 잔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등을 보고 걸으면 여러 가지를 보겠지…. 거기서 최종적으로 봐야 할 건…”
정우는 말을 하던 중 잔을 들어 바텐더를 향해 보여준다. 짙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텐더.
“그 등이 향하던 목적지, 길의 끝(End of the road)….”
정우는 짙게 웃는 바텐더를 보며 잔을 한 번 더 응시했다. 그제야 올라오는 텁텁한 칵테일의 향기.
쓸 것 같다.
아니, 당연히 써야 한다. 위스키 중에도 매운맛이 강하다는 피트(*이탄)가 가득 든 위스키에 텁텁함의 대명사인 캄파리, 그리고 허브가 잔뜩 들어간 샤르트뢰즈를 섞은 술이 아닌가.
씁쓸한 맛이 향에서부터 느껴지며 ‘엔드 오브 더 로드’로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정우는 잠시 떨리던 눈빛을 하더니, 이내 이를 고쳐잡고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흐음.”
쓰다. 텁텁하고.
독하다. 혀가 저려올 정도로.
허나,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 칵테일의 풍미가 정우는 싫지 않았다.
“딱히 그런 의도를 담은 잔은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은. 스승의 등을 보지 말고, 스승이 향하던 곳을 봐라. 명언인데, 아주?”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 어디서 들은 말이에요, 사실.”
“여튼.”
정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우의 너스레를 받아낸다. 이는 사실 일본의 시인 바쇼의 말을 옮긴 것.
‘스승을 쫓지 말고 스승이 쫓는 것을 쫓아라.’는 일본에서는 유명한 격언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본 것이다.
많은 뜻이 담긴 잔을 받아든 손님의 얼굴에는 결심과 비슷한 무언가가 보인다.
자신이 바라보던 등, 스승인 이명진이 바라보던 곳이 어떠한 곳인지 정우는 모르지 않았다.
결론은 정우에게 맡겨졌다. 다만, 바텐더는 그런 결론에 참고할 중요한 요소를 이렇게나마 전해본 것뿐이다.
‘아마 마스터라면…’
결론을 짊어진 정우의 눈에는 깊은 확신이 서려갔다.
정환은 그를 보고는, 이제는 바텐더라는 이름을 내려두려 한다.
“이제, 영업 끝내겠습니다.”
“응. 고생했어. 고마웠고.”
“맛있었어. 무슨 뜻인지…, 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정우는 무언가 확신이 선 것 같고, 기준은 아직 뭐가 뭐인지 잘 모르는 눈치다.
정환은 그런 이들 사이로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올까 한다.
“형은 이제 정하신 거죠, 어떻게 하실지.”
“응. 난 정했다. 곧 정리해서 말해줄게.”
“전…, 형이 정하는 걸 따를게요. 그게 맞는 거 같아요.”
기준은 아직 스스로 무언가를 정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그는 정우의 말을 따르려 한다.
“저도 형이 어떤 결정을 하시든 따를 거예요.”
정환 역시 정우에게 힘을 실어주긴 마찬가지.
“짜식들. 훈훈한 척하기는.”
정우는 이런 분위기가 싫지 않아 애써 장난을 걸어본다. 허나, 그런 장난스러운 와중에, 무언가를 의미심장하게 꺼내는 정환의 모습.
“뭐든지 따르긴 할 건데요…. 이미 결정하셨다니까, 이거 좀 봐주세요.”
정환은 이제야, 명진이 쓰러지기 전 준비해두었던 그의 바툴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준다.
정우와 기준은 그게 무엇이고 누구의 것인지, 단박에 알아본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마스터 전용은 따로 챙겨뒀을 텐데?”
“아까 정리하면서 봤는데, 이게 바 테이블 아래에 나와 있더라구요.”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하냐. 정우의 표정은 그런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맞서는 정환의 말.
“형이 바텐더라고 하셔서 말씀을 못 드렸죠. 이제는 막내니까 보여 드리는 거구요. 형이 막! 응! 바텐더라고 바 테이블 톡톡 치고! 그러셨으면서!”
정우가 정환을 바텐더라 칭한 순간부터, 정환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바텐더는 손님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조언을 건네는 역할. 그게 전부니까.
정환은 정말 막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까지 지어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허, 참.”
명진이 저 바툴을 준비했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 이는 정우의 결심이 지금 정환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면 한 방에 바뀔 수도 있는 요소.
정환은 그럼에도, 이를 꺼내지 않고 결정으로 가는 길에 대한 조언만을 정우에게 건넨 것이다.
정우는 그런 정환의 모습에 학을 떼며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마스터의 도구가 왜 나와 있는 걸까요?”
기준은 그런 모습 사이에서 의문을 표해본다.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건 정우와 정환 뿐.
둘은 한 번 숨을 고르더니, 동시에 입을 열며 같은 답을 들려준다.
“바텐딩을 준비하신 거겠지.”
“바텐딩을 준비하신 거죠.”
당연한, 아주 당연한 그런 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