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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58화 (58/175)

58잔. 바텐더가 필요한.

4.

이맘때쯤.

아니, 어쩌면 더 빨리.

정환이 회귀라는 걸 하기 전에도 이명진이라는 걸출한 바텐더는 지병으로 인해 쓰러졌을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아르센도, 또 이명진이라는 이도 정환은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

지금까지의 흐름을 본다면, 명진과 아르센에게 지금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정환 역시 확신할 수 있었다.

차정환이라는 변수가 없었으니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정환이 없었기에 더 빨랐을 수도 있고 더 늦었을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한 건.

이전부터 명진의 건강을 갉아먹던 저 지병이 명진을 쓰러지게 만든 건 분명했다는 것이다.

아마 조금 더 빨랐을 거라.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르센은 신입을 받았다. 그게 무려 일곱 달 전쯤.

이번에야 차정환이라는 비범한 신입이 들어왔지만, 이전 생은 그렇지 못했을 게 뻔하지 않나.

바라는 곳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일이 편해지는 곳이 아니다.

정확히는 일이 편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곳.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바텐더들의 동선은 꼬이고 가르쳐야 할 일과 수습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아마, 명진은.

이전 생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몸을 혹사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지병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사고가 있었던 무렵, 혹은 그 조금 뒤.

명진은 오늘처럼 쓰러졌을 것이고, 그때는 정환처럼 명진을 발견한 사람 역시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 끝은 어땠을까.

이번처럼 의식만 잃은 채 끝났을까, 아니면 최악의 결과?

문제는 거기서 끝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르센이라는 이름까지 대입하면 더더욱.

명진이 의식만 잃었다면, 아르센은 더 세차게 흔들렸을 것이다. 정우나 기준, 그리고 누구였을지 모를 그 신입은.

명진이 없는 아르센을 이끌어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당연했으니까.

아무리 부재 중인 마스터였다지만, 그는 가끔 아르센에 들러 이것저것 꼭 해야할 일은 처리해두고 떠났다.

그런 그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점점 손님이 떨어졌을 것이다. 바는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을 거고.

그리고 바텐더들은 커리어라는 게 얽혀, 또 감정이 격해져. 바씬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이는 명진이 그대로 최악의 결과를 맞았어도 마찬가지.

정환은 여기까지 머리로 그려보다, 이내 생각하는 걸 멈추기로 한다.

더는, 그런 암울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왔네.”

그렇게 정환의 생각이 끝날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르센의 매니저, 신정우였다.

“들어…가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이어지는 기준의 목소리.

정우와 기준, 그리고 정환은 명진의 병원을 떠나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들의 보금자리이자, 직장. 그리고 명진이 쓰러졌던 아르센을 향해서.

육중한 문을 바라보고 세 명의 바텐더가 서 있다.

기준은 명진이 쓰러진 그 현장을 눈으로 보는 게 못내 힘들어 보이는 모양이다.

“정환이도 있잖아. 기준아.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네. 형.”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를 안고 세 명의 바텐더가 아르센의 문을 연다.

바쁜 와중에도 정환이 문을 잠그고 가 아르센은 명진이 쓰러졌던 당시의 상황 그대로였다.

늦은 시간, 그리고 처음으로 아르센이 영업을 멈춘 날.

이런 특별한 날에도, 바텐더들은 아르센을 찾았다.

드르륵.

육중한 문이 열리자, 독한 술향기가 짙게 퍼진다. 깨진 술병에서 퍼지는 독기에 바텐더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독한 향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을, 스승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이들이 이곳에 찾은 이유 역시 저 깨진 술병과 관련이 있다. 아르센이라는 업장을, 그래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우선 정리는 하자.”

“네. 형.”

“기준아, 저기 가서 밀대랑 청소 도구 좀 챙겨 와. 정환아. 넌 안에 들어가서 살릴 만한 거 있나 좀 보고. 힘들면 말해.”

정우는 매니저답게 직원들에게 할 일을 분배하며 자신의 몸도 움직였다.

기준과 정환에게 할 일을 나눠주고 자신은 백사이드로 향하는 정우.

그는 아르센이 쉰다는, 절대는 만들 리 없을 거 같던 작은 공지를 만들러 백사이드로 향했다.

정환이 바 안으로 들어선다. 오늘 낮에는 자신이 뛰어넘었던 그 바 테이블을 돌아서 들어가는 정환의 모습.

바텐더로 살면서 이 바 테이블을 뛰어넘는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높지 않은 아르센의 바 테이블이, 오늘은 감사했던 정환이다.

‘온통 유리 조각이네….’

낮에는 몰랐다. 이렇게 유리 조각이 많을 줄은. 그저 명진만 보고 뛰어들었던 게 정환.

지금에야 살펴보니 유리 조각이 제법 많아, 바 안이 위험해 보일 정도다.

정환은 슬쩍 고개를 올려 백바를 바라봤다. 명진은 무얼 하려던 걸까.

바 안에서 바텐더가 쓰러지고, 또 넘어지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다.

특히나 신입이나 어설픈 바텐더라면 더러 있는 일.

허나, 그럴 때도.

지금처럼 백바에 있는 술이 함께 넘어지는 경우는 잘 없기에 정환은 이를 살펴보려 했다.

일반적인 바텐더의 동선에 따르면 쓰러질 때 건드릴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깨지는 것들은 잔과 바툴이다.

백바는 바텐더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또 손을 뻗지 않는다면 굳이 술병이 넘어지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백바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정환은 그런 결론에 닿을 수 있었다.

정환이 몸을 일으켜, 바 테이블 아래쪽을 살핀다. 손님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공간.

바텐더들이 집기를 두고 또 재료 같은 걸 올려두는 작은 공간에.

개수대와 잔을 두는 공간, 그리고 과일을 담는 통, 거기에 제빙기와 얼음을 두는 냉동고까지.

바 테일블 보다 한 단 아래에 있는 바텐더만의 공간은 제법 다양한 도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거길 보며 차분히 명진의 지난 행적을 쫓는 정환의 모습.

!!

아니나 다를까.

정환은 멀쩡히 남은 그곳에서 명진이 준비하던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건…?’

셰이커와 믹싱 글라스, 그리고 지거가 정환의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인 풍경이다. 바 테이블 아래에는 바텐더들이 쓰는 바툴이 언제나 있으니까.

허나, 정환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저 셰이커와 믹싱 글라스, 그리고 지거는.

명진만이 쓰는 그의 전용 바툴이었기 때문이다.

정환이 다가서 이를 살핀다. 깨끗하게 씻겨 언제든 사용될 준비가 끝난 바툴들.

그리고 옆으로 놓인 몇 개의 재료들까지.

뒤를 돌아서 다시 백바를 살펴본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지?’

제일 처음. 그러니까 명진의 손이 닿았을 곳에 눈을 주는 정환.

제일 위에 난 빈자리는, 명진이 꺼내려던 술일 게 분명했다.

아래에 난 빈자리를 따라 정환의 눈이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빈자리에 닿는 정환의 눈.

정환은 명진이 꺼내려던 술을 발견하고 만다.

‘진인가….’

평범한 진(Gin)이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비피터, 고든스, 그리고 탱커레이까지.

명진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 진이 아닌가.

명진은 진으로 무언갈 만들려 했던 걸까.

허나, 바툴 옆에 자리한 재료는 조금 이상하다. 진으로 만드는 칵테일 중 저런 재료를 쓰는 칵테일을 정환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거기, 괜찮아?”

청소 도구를 챙기러 갔던 기준이 돌아온다.

드르륵.

“다 챙겼어?”

백사이드가 열리며 정우 역시 함께.

셋은 함께 청소 도구를 나눠 들고는 아르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진 술병과 바닥에 눌어붙은 술들. 그리고 퍼져가는 독한 술향기들까지.

결국, 이들은 오늘도 술병과 또 술과 씨름하는 바텐더가 되고 만다.

아르센은 문을 닫았어도 말이다.

기준이 눈을 찔끔 감는다. 그의 밀대가 지나가는 곳에는 진득한 핏자국이 술과 섞여 있다.

기준은 그 핏자국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에 이를 그대로 지나치진 못한다.

정우는 별다른 말이 없다. 깨진 술병과 아직은 쓸 수 있는 술병,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고는 재고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

그는 이대로 아르센을 다시 열려는 걸까.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문득, 병원에서 방황하던 그의 모습이 정환을 스친다.

정리는 빠르게 끝났다. 술병이야 한곳에 모아 포대에 담아 버리면 그만이고 남은 자국은 밀대질 몇 번이면 끝이 아닌가.

바텐더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냈다.

그리고 찾아오는 또 다른 침묵.

어느덧 시간은 늦어 아르센이 폐점할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말이다.

불이 전부 켜진 바 안은 제법 밝은 모습이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는 볼 수 없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바텐더들이 저마다 의자에 몸을 앉히고는 생각에 잠긴다.

정환은 백사이드로 들어가 남은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부여잡은 정우와 홀로 고개 숙인 기준. 이들에게 정환은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아마, 아무것도.

아무 위로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옳을지 모른다. 적어도 막내인 자신보다는 이들이 명진을 더 크게 여기고 있을 테니까.

같은 식구로서, 막내로서, 역설적이게도 선배로서. 이들에게 정환이 건넬 수 있는 말은 없다.

“후.”

정환이 바 안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던 때. 정우가 먼저 입을 연다.

“이렇게 있으니까 그냥 평범한 폐점시간 같다. 그지?”

최대한 어른스럽게.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말을 꺼내오는 그.

“…….”

기준은 그런 정우의 옆에서 홀로 침전한다. 아직, 기준에게는 이런 큰일이 있고 난 뒤 아무렇지 않게 구는 행동이 어렵다.

“그러게요. 평범한…폐점시간 같네요.”

“보통 우린 이 시간에 뭐 하냐?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그냥 농담하고, 야식 이야기하고. 아니면, 한 잔 더 하고. 그렇죠.”

“그렇지?”

이런 일이 있어서일까. 정우는 이들 셋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언제가 가장 좋았을까.

바 안에서 함께 일하던 때? 그때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 어색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문득 정우를 스치는 건.

함께 모여 힘든 날을 보내고 그를 잊으려 잔을 기울였던 시간.

정우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환을 바라본다.

“그때 참 재밌었는데. 사고 났던 날. 같이 밤새 술 마시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가?”

“…딱히 큰 사고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정환이 네가 만들어준 술…. 참 맛있었는데.”

“…싱가폴 슬링도요.”

기준 역시 대화를 듣더니 그날이 떠오르는 듯 한마디를 보태본다.

슬픈 기억을 몰아내는 건, 언제나 좋았던 날의 추억이다.

“형….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세요? 아르센은…?”

책임감 때문일까. 정환은 그런 회상 속에서도 자신이 꼭 해야 할 말을 먼저 꺼내 본다.

이제 아르센을 어떻게 할 거냐.

제법 현실적인 말로 이들의 회상에 끼어든 정환. 명진이 없는 아르센은, 전적으로 정우의 손에 달려 있다.

“정환아.”

“네, 형.”

“어떻게 해야 하냐?”

!

“그걸…왜 저한테…?”

묻는 곳이 잘못된 게 아니냐. 정환은 그런 눈빛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톡톡.

정우는 주먹으로 자신이 앉은 자리 앞에 있는 바 테이블을 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정환을 가리킨다.

둘이 마주한 곳은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둔 곳.

손님과 바텐더의 자리다.

“…….”

이건 무슨 의미일까.

정환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자리에 멈췄다.

그런 정환에게 정우는.

“한 잔 만들어 줘. 그날처럼.”

손님으로서 주문까지 마친다.

“나도….”

기준 역시 마찬가지.

그래, 어쩌면.

바텐더들에게 어느 때보다 바텐더가 필요한 순간이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바텐더의 하루가 끝난 시간에 문을 여는 바는 없으니까.

“주문은…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정환은 그런 이들을 위해 잠시 바텐더로 돌아가려 한다. 옷 소매를 걷고는 손을 씻는 정환의 모습.

잔을 필요로 하는 손님이 있다면 바텐더는 언제든 잔을 건네야 한다.

그게, 자신에게 힘든 하루였을지라도 말이다.

정환은 바텐더의 숭고한 숙명을 받아들이려 한다.

적어도 앞에 앉은 이들보다는 자신이, 이런 일에는 익숙하니까.

“뭘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손님…. 그런 손님에게 어울리는 잔은 뭐가 있을까?”

“…나도 같은 거로.”

정우와 기준의 입에서는 조금 어려운 주문이 나온다. 바텐더와 바텐더 사이의 배려를 잊는 주문.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지금 바텐더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형.”

“농담이야. 네가 알아서 한 잔 주라.”

정우는 앞서 한 말이 실언이었다는 듯 손을 저으며 알아서 달라는 말을 전한다.

실언은 아니었을 거다. 농담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저 바텐더에게 의지하고 싶은 한 사람의 작은 마음이 발한거라.

바텐더로서 오래 살아온 정환은 그런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정환의 눈이 감긴다. 어떤 잔을 줘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눈을 뜨고는 주변을 돌아보는 정환.

명진이 두고 간 도구들이 보인다.

그를 한 번 훑어본 정환은.

“그런 손님에게…드릴 수 있는 잔이 하나 있습니다.”

손님에게 내어드릴 잔을 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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