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55화 (55/175)

55잔. 손님과 바텐더.

4.

“뭐 하자는 거죠, 이건?”

명진의 묵직한 말이 날아와 정환에게 꽂힌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이제 적막과 긴장감이 흐른다.

명진의 얼굴에는 처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인자함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눈빛에 다른 감정이 맺힌다.

불안과 비슷한, 그런 감정이.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바텐더는 자신을 향해 따져오는 손님의 시선을 피하며 즉답을 피한다.

손님은 점점 불안감이 짙어져 갔다.

“손님께 어울리는 한 잔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이게…, 그 잔이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

명진은 나지막하게 답을 전해오는 제자를 눈으로 질책한다. 이게 무슨 의미냐는 강한 어조가 그의 눈빛에 서려있다.

“따로 주문하신 칵테일이 없어 제가 임의로 택한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잔을 드리겠습니다.”

“그 역시, 이와 비슷한 잔을 주겠죠….”

“…….”

또 답을 피해버리는 바텐더.

아니란 말은 할 수 없다.

바텐더는 손님에게, 거짓을 말해선 안 되는 거니까.

정환은 명진의 잔에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서 새로운 자세를 개발한 정환은 멋들어지게 이 자세를 성공시키며 잔을 완성했다.

훈훈하게 주고받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덕담은 덤.

노즈를 맡을 때까지만 해도 평온하게 펴지던 명진의 얼굴이 지금은 여러 감정으로 뒤섞여 복잡하기만 하다.

그는, 바텐더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불안한 눈치다.

“‘버진 피나 콜라다’…라니요. 왜 이러는 겁니까?”

그리고 나오는 칵테일의 정체.

정환이 명진에게 준 ‘피나 콜라다’는, 다른 수식어가 하나 더 붙는 그런 피나 콜라다였다.

도대체 ‘버진 피나 콜라다’가 뭐길래 명진은 이렇게 반응할까.

답은 간단했다.

칵테일 앞에 ‘버진(Virgin)’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칵테일은 그 소속이 바뀌기 때문이다.

버진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들은 알코올 도수를 전혀 함유하고 있지 않은 논 알코올 칵테일이 된다.

정환이 명진에게 내민 ‘버진 피나 콜라다’는 그저 파인애플 주스에 코코넛 밀크, 그리고 약간의 코코넛 워터가 더해진 음료수였을 뿐이다.

딱히 정환이 명진을 속인 건 아니다. 애초에 정해진 칵테일을 주문받아 만든 것도 아니며 정환은 무얼 주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거기에 칵테일을 내밀며 칵테일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철두철미함까지 보이지 않았나.

바텐더로서는, 할 말이 많은 상황이다.

“말씀드렸듯이, 손님께 제일 어울리는 잔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겁니다.”

바텐더가 내뱉는 변명에도 이유를 물어오는 손님. 바텐더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답을 들려준다.

“술을 드셔선… 안 되니까요.”

!!!!!

바텐더의 입이 열리자, 명진의 눈은 갈 곳을 잃는다. 크게 떨려가는 명진의 동공.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술을 마셔선 안 된다니요. 왜…”

아차!

강하고 빠른 어조로 바텐더의 말을 부정하던 명진의 머리로 그런 말이 스쳤다.

그리고는 말을 전부 이어가지 못하는 명진의 모습.

명진은 순간, 자신이 이성을 잃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당했군요.”

당했다. 명진은 자신이 생각한 단어를 그대로 뱉어봤다. 저 바텐더라면, 이미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봤을 게 뻔하니까.

평범한 날이었다면 명진은 이렇게 흥분하며 말하지도, 또 강렬한 눈빛을 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왜 그러냐며 너스레나 떨었을 게 그의 모습.

마침 누군가 다녀간 날에, 마침 손이 망가졌다는 다른 바텐더의 이야기를 들은 날에.

모든 상황이 겹쳐지지만 않았다면, 명진은 방금과 같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저 바텐더가.

이마저 염두에 두고 내민 잔이겠지만 말이다.

명진의 표정이 무거워지며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마스터. 우선 물부터 드세요.”

정환은 시선을 깔고는 잔뜩 무겁게 내려앉은 마스터를 향해 물을 한 잔 권했다.

명진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숨을 가다듬는다.

“…그저 짐작이었나요?”

“…다녀가신 분이 의사처럼 보였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이렇게까지 찾아갈 정도면 예삿일은 아니겠죠. 거기에 늦은 시간 굳이 약통까지 찾으러 다시 오실 정도면….”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셨는데, 통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좋은 분입니다. 환자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의사는 많지 않겠죠. 그래서 명함도 주소도 알려드리지 않았던 거지만요.”

전해지는 덤덤한 고백에 정환은 얼굴을 무겁게 했다. 듣는 말도 무겁고, 치고 오르는 자신의 감정도 무거운 순간이다.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직 모릅니다. 더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사고 때 한 검사에서 좋지 않은 징후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셨어야죠.”

정환은 단호한 어투로 명진에게 말했다. 오히려 너무 단호해 감정이 흘러넘치는, 그런 어투로.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낮에 병원이라도 간다면, 밤에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죠.”

“그러니 더더욱…!”

“그만.”

제자의 간절한 말을 스승이 끊는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명진의 모습.

자신도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걸 명진은 말하고 싶었다.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시나요?”

“아뇨. 정우 형과 기준 형은 아직 모를 겁니다.”

“아직 말씀을 안 하신 모양이군요.”

“확신은 없었으니까요. 내일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흠.”

알리기 싫은 거다. 정환은 명진의 반응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 상태가 알려지면 정우나 기준이 흔들릴 건 불 보듯 뻔한 일.

명진은 무슨 일이 생겨도 이를 홀로 감당하려는 게 분명했다.

“말씀하셔야 합니다. 말씀하시고 도움을 받아 한동안 푹 쉬면서 치료에 전념하셔야죠. 검사도 다시 받으시고.”

“한동안은 비밀로 해주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조금은 간절함이 묻은 부탁에도 정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말하겠노라. 그런 뜻이 담긴 단호한 표현이었다.

명진은 그런 정환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진이 승복한 걸까.

정환이 담담히 그의 답을 기다릴 때.

명진은 조용히 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가져온다. 버진 피나 콜라다가 명진의 입을 향해 올라갔다.

호르륵.

많이도 아니고 조금. 하지만 확실히 음료를 삼킨 명진이 잔을 내려둔다.

탁.

그리고.

“분명히 마셨습니다. 정환 씨가 만든 한 잔.”

!

명진은 자신이 마신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방금의 행동이 가진 의미를 바텐더에게 표해본다.

‘설마…?’

정환은 그 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바텐더 앞에서 한 손님의 이야기니, 다른 곳에서 말해선 안 된다. 이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바텐더는 손님의 이야기를 다른 곳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

“바텐더의 직업윤리 같은 거죠. 차정환이라는 바텐더가 이를 어기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

직업윤리라. 그래, 좋은 말이다. 정환으로서는 여태껏 어겨본 적도 없고.

허나, 제아무리 잘 지켜온 직업윤리라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면, 정환은 언제든 어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씀하셔야 합니다. 제아무리 바텐더라도…”

어길 수 있다. 정환이 이런 말을 하려 할 때.

“잠시면 됩니다. 계속 숨기겠다는 말도 아니고. 손님의 사정을 좀 봐주시죠.”

명진은 얼른 말을 자르며, 그런 일이 없길 바란다는 기색을 비춘다.

“왜 그렇게까지…하시는 겁니까?”

“한동안은 모르고 있는 게 좋습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입니다.”

“…….”

생각이 있다는 말은 진심인 걸까. 계속되는 명진의 설득에 정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명진이라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언제나 복안이 깊은 사람이 그가 아니었나.

그는 대책 없이 무언가를 밀어붙일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닌 사람이란 걸 정환은 알고 있다.

“시간이라면…, 얼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길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는 못 기다려드립니다.”

“한동안이면 충분합니다.”

결국, 지는 건 바텐더다.

“대신, 마스터도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이제는 무리하지 않으시겠다고요. 병원도 꼭 가셔야 하고요.”

“약속드리죠. 무리하지 않겠다고. 병원도 가겠습니다. 시간만 조금 주세요.”

명진이 말하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이 들어 정환은 거기서 더는 말을 묻지 못한다.

“이렇게 정환 씨의 잔을 마시는 것도 한동안 못하겠군요.”

“건강을 찾으시면 어느 때보다 맛있는 김렛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기대해야겠군요. 길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연습 시간도 낮으로 옮기려 합니다. 이제는 이 시간에 오셔도 전 없을 겁니다.”

“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저 역시 이전처럼 자주 나오진 못할 겁니다. 정환 씨와의 약속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정환은 자주 보지 못한다는 말에 감사하다는 답을 했다. 조금은 나오는 말과 대답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

둘 사이에는 다시금 어색한 정적이 자리했다.

“가야겠군요.”

명진은 그런 정적을 깨며 앞에 놓인 잔을 비워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는 그.

달그락거리는 외투 속의 소리가 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

외투를 입고 나서던 명진이 잠시 멈추더니 정환을 돌아본다.

“제일 처음 제게 김렛을 만들어 준 날을 기억합니까?”

“네. 기준 형 데뷔전 날이었죠.”

“그때, 제가 한 말도 기억하시나요?”

“…서로 도와가며 일하라고 하셨죠.”

정우 씨와 기준 씨. 많이 도와주세요. 제가 없을 때는 더더욱.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환은 후련함과 아찔함이 스쳤던,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조금은 순화된 언어로 정환이 그날의 기억을 꺼내 본다.

“잘 기억하고 있군요. 조금은 다른 거 같지만. 어쨌든 다시금 말씀드리죠. 잘 도와주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없을 때는 더더욱.”

“…금방 오실 거잖아요. 그런 말씀마세요.”

“물론입니다.”

명진은 애써 밝은 척 미소를 한 번 짓고는 아르센을 떠났다.

홀로 남은 정환만이 잠시 아르센을 둘러보는 시간.

역시나 좋은 곳이다. 얼마나 머물지도 몰랐고, 또 얼마나 함께할지 아무런 대책 없이 들어왔던 곳.

그런 곳이 이렇게 좋은 곳일 줄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왜인지 오늘은 무언가 하나가 결핍된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안에서 없어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정환은 그런 기분이 싫어, 얼른 자리를 떠났다.

5.

“흠.”

“이거, 아주 좋군.”

호평이 나온다. 어느덧 정환이 새로운 셰이킹을 익힌 지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정환은 이제 새로운 셰이킹으로 만든 칵테일을 손님에게까지 내보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바텐더가 자세를 바꾸면 맛까지 잃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이 바텐더는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새로운 셰이킹으로 만드니 풍미가 달라진 거 같군. 아주 성공적이야. 축하하네.”

“다음 잔도 아무거나 이런 거로 주게. 젓지 말고 흔들어서. 크흡.”

김태현 교수와 지동철 교수는 호평을 한마디씩 뱉고는 여느 때처럼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 앉은 자리 맞은 편에는, 젊은 바텐더 셋만이 아르센을 지키고 있다.

“그나저나, 오늘도 마스터는 안 나오신 건가? 요즘 통 뵙기 힘들군. 내가 적어도 일주일에 4일은 이곳에 오는 거 같은데.”

“흠. 나도 그 생각을 하던 참이네. 요즘 뵙기 영 힘든 거 같아. 지난주에 뵌 게 마지막이었나?”

두 손님은 자연스레 잔을 마시며 마스터 이명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를 듣는 바텐더 중 한 명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아린다.

“저희로 만족해주세요. 보기는 더 좋잖아요? 그리고 두 분은 맨날 정환이 칵테일만 드시면서.”

그런 두 손님을 맞이하는 건 매니저 신정우의 너스레. 마스터 이명진이 없는 곳은 신정우가 책임을 지며 지키는 중이다.

조금은 부족할지는 몰라도.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아르센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지 않나.”

“암. 그렇고말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 묵묵한 얼굴, 그리고 잘생긴 얼굴 말고도 인자한 얼굴도 보고 싶네. 가끔은.”

“잘생긴 게 저겠죠?”

“크흡. 여튼.”

두 교수의 말처럼, 한 바를 지키는 마스터란 존재는 단지 칵테일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하는 게 사실.

이를 잘 아는 두 손님은 걱정과 농담, 그리고 아쉬움을 섞어 바텐더들에게 말을 건네 본 것이다.

“마스터는 요즘 몸이 안 좋으셔서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나오셔요.”

“흠. 많이 안 좋으신가?”

“뭐, 올해 들어서 계속 그러셨죠. 그래도 이렇게 안 나오시는 거 보면 쉬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그렇군. 오히려 자네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겠어.”

“그럼요. 얼마 전 새로 검사도 받으셨데요. 곧 결과도 나올걸요? 푹 쉬셨으니, 좋은 결과일 겁니다.”

정환과 손님으로 마주쳤던 마지막 날, 명진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건강에 대해 알리지 말아줄 것을 청했다.

정환은 한동안, 그리고 무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이를 받아들였고.

명진은 그에 충실 하려는 것인지, 요즘은 일주일 두 번에서 많아야 세 번 정도만 아르센에 나오는 정도였다.

거기에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건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정우에게 설명한 모양이다.

물론, 의사가 찾아올 정도고 약통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음 주, 검사 결과가 나옵니다. 그때는…, 모두에게 말씀드리죠.

명진은 일주일 전 마주친 정환에게 스치듯 이런 말을 남겼다.

정환은 이제 딱 며칠만 참으면 되리라.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더 참아 보기로 한다.

“헌데, 자네들 셋만으로 힘들진 않나?”

지동철 교수와 대화를 주고받는 신정우를 보며 김태현 교수가 던지듯 말을 보태본다.

업장이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아는 그는, 한 명의 인원이 줄어든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정환이가 있잖아요. 얘가 요즘 두 명 몫을 해요. 혼자 바쁘다니까요.”

“흠. 정환 군이?”

확실히 한 사람이 비면 그 자리는 크게 나는 법이다. 이를 알고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변인이 힘들 법도 한 일.

정환은 마치 이렇게 될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명진의 몫을 해내려 몸을 던지고 있다.

마스터와 같은 큰 역할을 하진 못한다. 그래도 한 명의 바텐더가 빈자리만큼은 분명히 채워주고 있는 정환이다.

“그럼요. 그뿐인 줄 아세요? 매번 일찍 나와서 연습도 하고 준비도 먼저 하고. 매니저보다 더 바빠요, 요즘은.”

“그건 딱히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네만.”

“그런가요?”

“매니저가 더 바빠야지. 사람하고는. 허허.”

“뭐…그렇긴 하죠. 흐흐.”

정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반응이야 저렇지만, 정환은 알고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바쁜 사람은 명진의 몫을 해내는 자신이 아닌, 매니저 신정우라는 걸.

정우는 명진이 비어버린 스케줄을 채우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기준과 정환에게 넘길 수도 있는 스케줄을 감히 양보하지 않는 그였다.

“에이, 정우 형이 얼마나 큰 역할이신데요.”

정환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그런 정우를 변호한다.

이상적인 모습에 흐뭇하게 웃어 보이는 김태현 교수.

이래서 이 아르센이라는 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만 같다.

만족스럽게 웃는 손님들을 두고 바텐더들이 뒤로 물러난다. 이것저것 정리하며 움직이는 바텐더들.

“내일도 연습할 거지?”

정우는 자신의 옆에서 잔을 정리하는 정환에게 내일을 묻는다.

바쁜 요즘 그나마 연습까지 소화하는 이는 정환이 유일했다.

“그래야죠. 조금 더 속력을 붙일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처리하는 잔이 늘어나면 좋잖아요.”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가 다 감당 안 해도 돼. 너한테 바라지도 않고. 준비도 따로 해두지 마. 같이 하면 되니까.”

“자기만족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누가 뭘, 감당하려 한다구요. 참.”

“짜식이. 형이 좋게 말을 해주면 그냥 듣지, 확?”

“어? 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겁니다?”

장난치듯 목을 감싸는 정우를 웃으며 밀어내는 정환의 모습.

바텐더들은 아무런 힘듦이 없다는 듯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바 안을 채웠다.

제법 큰 빈자리에도, 아직은 굳건한 아르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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