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잔. 스승과 제자.
3.
“허.”
멀리서 들은 소리와 언뜻 본 것만으로 자신의 속을 읽어오는 명진을 보며 정환이 혀를 찼다.
명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인자한 표정만이 걸려있다.
“소리가 다르더군요.”
“정말 귀신이세요.”
“이 바닥에 오래 있다 보면 이런 잡기도 생기는 법이지요.”
“잡기라뇨. 실력이죠.”
명진은 정환의 말에 어깨만 으쓱하고는 인자하게 웃는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그나저나 의외군요. 지금 자세도 나쁘지 않은데, 새로운 자세라니.”
“작은 단점이 보여서요. 조금 보완하려 합니다.”
“보완이라…. 좋죠. 늘 발전하려는 태도가 보기 좋습니다.”
명진은 아직 부족한 게 있어 보인다는 정환의 말에 밝게 웃었다. 따스한 눈빛을 보내보는 그.
홀로 연구하고 발전하려는 젊은 바텐더가, 어찌 어여쁘게 보이지 않겠나.
“아직 미완성인 거 같더군요. 아닌가요?”
“적당한 자세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함께 고민해봅시다. 조금 전 연습 중이던 자세들을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그 자세를요?”
“저도 나름 바텐더라, 도움은 될 겁니다.”
“저야 감사하죠. 해보겠습니다!”
이명진이라는 바텐더는 마인드뿐 아니라 실력 역시 좋은 바텐더다.
이는 그의 칵테일을 직접 마셔봤고, 또 함께 일하는 자신이 보증할 수 있는 것.
정환은 그런 명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으려 한다.
“앞서 준비하던 건 총 세 가지 자세였습니다.”
정환은 셰이커 속을 채우고는 이를 들어 올렸다. 받침점을 대략 잡아두고는 셰이커를 고정하는 그.
잠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더니 이내, 그의 셰이킹이 시작된다.
샤카! 샤카! 샤카!
스트로크가 절도있게 뻗어 나가며 의도한 소리가 난다. 셰이커 속에서는 물과 얼음이 정환이 그려놓은 의도대로 흐르며 섞여가고 있다.
하지만.
까각!
또.
또 스냅을 주는 순간, 소리가 이상하게 틀려버린다. 잡아둔 받침점을 놓친 것이다.
이건, 스냅을 주는 자세가 일그러진 탓이다.
정환은 여기서 첫 자세를 그만두고 다음 자세로 넘어갔다.
결과는 비슷했다. 이는 세 번째 자세까지도 마찬가지.
스트로크까지 잘 나가던 셰이커가 이내 스냅에 들어가면 계속해서 받침점을 잃고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정환의 자세를 모두 본 명진은.
“스냅이 문제군요.”
단박에 그의 고민을 알아챈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스트로크는 거침없이 뻗지만, 스냅에서 매번 미끄러지고 있잖습니까.”
그대로 자신을 향해 오는 직설적인 평가에 정환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스냅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를 어떻게 고칠지. 그게 문제였지만.
“지금 쓰는 스냅은 왜 버리려는 거죠?”
“딱히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바꿨으면 해서요.”
“이유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이유를 묻는 명진에게 정환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15년 뒤에 자신의 손목에 병이 온다. 그래서 미리 자세를 바꿔 이를 예방하려 한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정환은 잠시 눈을 굴리다, 다른 말을 꺼내 본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바텐더가 스냅에 무리를 주다가 손목이 망가졌다고요. 물병도 잡지 못해 결국은….”
“바텐더도 그만두었겠군요.”
“…네. 제가 쓰는 스냅이 그 사람이 쓰던 스냅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덤덤히 전해지는 자신의 과거에 정환이 표정을 어둡게 했다.
이는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닌, 온전한 자신의 이야기다.
“흠. 그런 건가요.”
명진은 잠시 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내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흔한 이야기다. 몸에 문제가 생겨 바텐더를 그만두는 이야기.
허나, 오늘만큼은.
명진은 저 이야기가, 남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요컨대, 현재처럼 스트로크는 주되, 스냅을 적게 해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자세. 하지만, 결과물은 지금처럼 나오는 자세. 그런 자세를 찾고 있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정환은 명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정확히 자신이 찾는 자세는 명진이 말한 저 자세가 맞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살짝 헛웃음이 나온다.
장점은 그대로 취하면서 단점만 빼낸다는 게, 조금은 허망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환이 홀로 그렇게 쓴웃음 짓고 있을 때.
“그런 자세라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
명진은 정환이 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들려준다.
“네?”
“흠. 잠깐 괜찮을까요?”
테이블을 짚고 몸을 힘겹게 일으키더니 바 안으로 향하는 명진.
멋들어진 재킷 대신 셔츠만을 입은 그가 바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매의 단추를 풀고 이를 걷어 올리더니, 정환의 손에 들린 셰이커를 가져갔다.
“정환 씨 역시 이 스타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별다른 기술 같은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는 한마디를 건넨 후 가볍게 자세를 취해보는 명진.
그의 자세가 독특하다.
파지법부터 다르다.
평소처럼 셰이커를 감싸 준다는 느낌의 파지법이 아닌 말아쥔다는 느낌의 파지법.
정환의 눈이 거기까지 따라갔을 때, 명진은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카차카차카! 차카차카차카!
절도있는 소리와 함께 3단으로 나뉘며 앞으로 뻗어지는 셰이커.
명진은 스트로크에 힘을 주며 셰이커를 위, 아래, 중간의 세 방향으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팔꿈치는 평소처럼 아래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직각을 그려 조금 삐져나온 모양새다.
챠카챠카챠카! 챠카챠카챠카!
정환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명진이 셰이킹을 하는 모습은 정환도 본 적이 있다.
지금과는 달랐던 그의 자세.
평소 명진은 평범하고 정석적인 셰이킹을 구사하는 바텐더였다.
허나, 지금 명진이 보여주는 건 힘이 가득 실린 열정적인 셰이킹.
정환은 저렇게 펼쳐지는 셰이킹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하드…셰이킹?’
하드 셰이킹.
이는 별다른 기술이나 고급진 기법이 아니다.
그저 열심히, 또 열정적으로 흔드는 겉모습만을 보고 붙은 하나의 이름이자, 스타일.
셰이킹 자세는 바텐더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 바텐더의 스타일이 수십 년간 유지되고 또 자신만의 맛을 내게 되면 이는 곧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이 ‘하드 셰이킹’이란 자세가 딱 그런 경우였다.
일본 긴자의 한 바텐더로부터 시작된 이 스타일은, 정환이 있던 시대에는 일본을 넘어 서양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바텐더까지 사용할 정도로 자주 사용되던 스타일이었다.
아직, 이 시절 한국에.
이를 구사하는 바텐더가 있단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휴우.”
명진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이내 셰이커를 내려둔다. 말 그대로 열심히(Hard) 흔들어준 대가는 땀방울이 되어 명진의 얼굴에 맺혔다.
“하드 셰이킹인가요?”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이걸 구사하는 바텐더가 신기할까, 아니면 고작 반년 경력에 이걸 알아보는 바텐더가 신기할까.
답을 알 수 없는 난제 속에서 두 바텐더는 눈을 마주친다.
“일본에서 일을 배울 때 이런 셰이킹을 구사하는 선배 바텐더가 있었습니다. 실력도 좋고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죠.”
“제가 생각하는 ‘그분’인가요?”
“허허. 글쎄요.”
명진은 확답은 피하면서도 과거를 회상하듯 기쁜 웃음을 짓는다.
아마, 그 사람이 맞는 거라.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국가로부터, ‘현대 명장’이라는 장인 타이틀까지 받은 그 사람이라고.
“어떻게 도움이 되셨나요?”
명진은 흘린 땀을 닦으며 기쁘게 물었다.
고생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한 답은 아니란 답이다.
정환 역시 이 스타일을 고려한 적은 있었다.
하드 셰이킹은 분명 좋은 스타일이다. 격하게 흔들고 열정적으로 흔들어 셰이킹의 효과를 극한까지 올려내는 스타일이 바로 이 하드 셰이킹이니까.
다만, 이는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드 셰이킹으로 만들어진 칵테일은 일반적인 칵테일에 비해 희석과 질감이 크게 변한다.
즉, ‘하드 셰이킹 칵테일’이라는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정환이 추구하는 맛은, 이와는 거리가 있었다.
‘가끔은 괜찮지만…’
모든 칵테일을 이렇게 하는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정환은 그렇게 여겨 이를 포기했었다.
“하드 셰이킹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만드는 칵테일과는 스타일이 달라서…”
자신이 이를 택하지 않았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는 정환.
그런 정환에게.
“제대로 보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명진은 정환이 논점을 놓쳤음을 알려준다.
“네?”
“지금 정환 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뭐였죠?”
“그야 손목…”
!!
정환은 명진의 말을 들은 후에야 자신이 놓쳤던 걸 떠올렸다.
하드 셰이킹이란 스타일은, 스냅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을.
“트위스트(Twist)라고 하죠. 보통은 스냅을 통해 공기층을 넣어 줍니다만, 강하게 흔드는 과정에서는 이게 쉽지 않습니다. 해서, 팔의 움직임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겁니다. 안쪽을 향해 팔을 틀어 셰이커를 돌려주는 것. 하드 셰이킹에서 정환 씨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부분이죠.”
“굳이 하드 셰이킹을 할 필요는 없다. 대신, 거기서 필요한 것만을 가져온다. 그런 말씀인가요?”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명진은 정환이 자신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이자, 접었던 소매를 내린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바 밖으로 나가 다시금 자리에 앉는 명진의 모습.
그런 명진을 두고, 정환은 홀로 명상에 빠진다.
‘3단도, 또 강하게 흔들 필요도 없다면…’
자신이 원래 추구하던 스타일의 칵테일을 그대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 부족한 스냅을 대신해 줄 트위스트까지 적용된다면 손목에 무리 역시 가지 않을 터.
정환은 차분히 스트로크와 트위스트를 조합한 자신만의 자세를 머릿속으로 설계해 나갔다.
명진은 조용히 명상에 빠진 정환을 지켜본다.
처음이다. 이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에게 자신이 기술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친 것은.
명진은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몰려와, 정환의 모습이 더욱 가깝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제자라는.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를, 이제는 정환의 앞에도 붙일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까지 그를 스친다.
그의 입꼬리가 기다렸던 순간을 만난 사람처럼 올라갔다.
정환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입술을 물고 잠시 눈을 옮기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는 그.
“새로운 자세가 떠오른 모양이군요.”
명진은 그런 정환의 내심을 읽어낸다.
“네. 떠오른 자세가 하나 있긴 합니다. 아직 확신은 없지만요.”
“그럼, 시험 해봐야죠.”
“지금 말씀인가요?”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바도 있고, 술도 있고, 또 바텐더와 손님도 있으니.”
명진은 손님이란 말을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바텐더는 정환을 말할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정환 씨의 칵테일을 맛보는 것도. 새로운 셰이킹으로 한 잔 만들어 주세요.”
손님다운 자세로 앉아 바텐더에게 주문하는 명진의 모습.
여기까지는 매번 영업이 끝나고 정환이 연습할 때면 찾아와 김렛을 주문하던 명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바텐더가 이 주문을 받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
“…….”
주문을 받은 바텐더는 평소와 달리 손님의 시선을 피하며 답을 망설인다.
주문을 피하는 모습이다.
“왜 그러시죠? 자세에 문제가 있나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게 신경 쓰인다.
정환은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한다.
“굳이 김렛이 아니어도 됩니다. 새로운 자세니, 원하는 칵테일로 마음껏 시험해보세요. 저 역시 부담 없이 한 잔 얻어 마시겠습니다.”
그런 바텐더를 재차 보채며 주문을 재촉하는 손님.
바텐더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평소처럼 손을 움직인다.
“어떤 칵테일이죠?”
“…셰이킹이 많이 들어가는 칵테일로 해보겠습니다.”
“좋지요.”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손님 앞에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는 정환.
그가 몇 개의 재료를 넣더니 셰이커를 들어 올린다. 그의 자세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챠카!
셰이킹이 시작되자, 거침없는 스트로크가 앞을 향해 뻗어갔다.
그리고 셰이커가 끝에 닿을 때, 빠르게 돌아가는 정환의 팔.
착!
셰이커는 이게 성공적인 움직임이었다는 듯, 절도 있고 깔끔한 소리를 들려준다.
정환은 정확히 팔만을 회전시켜 셰이커를 움직이게 했다. 명진이 말했던, 그 트위스트란 방식이다.
챠카착! 챠카착!
바뀐 건 이뿐만이 아니다.
강하게 뻗어진 셰이커가 돌아올 때는 조금 아래로 쳐지며 돌아온다.
마치, 2단으로 나뉘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셰이커의 모습.
‘하드 셰이킹처럼 격한 게 아니라면 트위스트만으로 스냅을 대체하기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단을 나눠 셰이커를 뻗을 때와 당길 때 한 번씩 아래와 위를 바꿔주겠다.
정환은 부족한 공기층의 유입을 위해 이런 방식을 택했다.
이는 성공적인 걸까.
- 챠카착! 챠카착!
아마, 성공인 거 같다.
울려 퍼지는 셰이킹 소리 사이로 잔잔히 퍼지는 명진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 촤아아아악!
정환은 기다란 잔을 가져와 칵테일을 쏟아냈다. 연한 살구색 액체가 멋들어지게 잔으로 떨어졌다.
파인애플과 체리로 잔을 가니쉬를 마친 정환은 손님에게 잔을 밀어냈다.
“피나 콜라다군요.”
명진은 바텐더답게 그 칵테일의 정체를 알아본다.
“강한 셰이킹이 필요한 칵테일이죠. 색도 그렇고, 보기에는 질감도 좋군요.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자세를 완성했군요.”
그리고 전해지는 축하 인사.
정환은 허리를 접어 스승에게 감사를 전한다.
“마스터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크게 배웠습니다.”
“제가 뭘요. 그저 참고할 자세를 보여준 것뿐입니다. 완성은 정환 씨가 한 것이죠.”
“아뇨. 제 스타일과 다르다고 신경도 쓰지 않던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활용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마스터 덕분입니다.”
“허허. 비행기가 심하군요.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이 첫 잔을 제가 마시다니, 영광입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훈훈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끝나고 명진은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노즈를 먼저 맡으려는 그의 모습.
파인애플의 달콤한 향과 코코넛의 은은한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향긋한 피나 콜라다만의 향을 완성했다.
그리고 곧 터지게 될 럼의 향기.
셰이킹이 잘 된 피나 콜라다는 끝까지 럼의 향을 눌러두고는 끝에야 터트리고 만다.
명진은 그 터짐을 조용히 기다렸다.
향이 점점 연해진다.
이제 곧 느껴질 마지막 향.
그 마지막 향이 명진의 코에 닿자.
!!
“뭐 하자는 거죠, 이건?”
명진은 굳은 표정을 하고 정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