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잔. 새롭게
1.
‘바텐더’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어떤 이들은 화려한 조명 속에서 불 뿜는 셰이커를 던지고 놀며 춤을 추는 플레어 바텐더를 상상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매체 속에서 접하던 정장 차림의 멋들어진 자세를 생각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을 상상할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저기, 괜찮은 거지? 정환 씨?”
한적한 시간대의 아르센.
강성원이라는 손님을 보내고 다시 복귀한 정환은 둘 정도의 손님만 바에 앉힌 채 이들을 접객하고 있다.
둘 모두 단골이라 불리는, 아르센의 오랜 손님들이다.
그중 백발이 진한 한 손님이 백사이드 쪽을 가리키며 괜찮냐는 말을 묻는다.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야야, 조금 더 붙어 봐.”
“방금, 예약 어쩌고, 그리고 미뤘다는 뭐, 그런 말을 하던데요?”
잘 차려입은 두 명의 바텐더가 백사이드의 문에 붙어 귀를 대고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바’라는 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괜찮습니다…. 아마도요. 그, 죄송합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되니, 편하게 있으시죠. 제가 한 잔 사겠습니다.”
“어, 정말? 나야 뭐, 신경은 안 쓰는데. 허허. 주는 잔이야 마다할 순 없지.”
정환은 씁쓸하게 웃고는 손님에게 서비스를 건넨다. 그나마 이게 싸게 치는 거라, 제 선에서 일을 무마하는 정환이다.
정환은 앞서 강성원이라는 손님을 배웅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와 부딪혀 그를 안내하게 되었는데, 그가 찾던 곳은 다름 아닌 아르센이었다.
이명진 씨. 이명진 씨가 바텐더로 있는 바를 아십니까?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을까. 명진의 이름을 들은 정환은 당연히 손님을 아르센으로 모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손님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명진은 정환과 함께 들어선 사내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일방적으로 명진을 아는 건 아니었던 상황.
그리고 명진은 그 사내를.
손님의 자리가 아닌, 바텐더의 영역인 백사이드로 안내했다.
‘손님이 아니란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네.’
정우와 기준은 그런 명진을 보며, 일이 심상치 않아 보여 백사이드에 귀를 대고 무어라도 들어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 사내를 대하던 명진의 모습이, 그리 평범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마스터가 쩔쩔매는 거 봤지?”
“그러게요. 뭘까요? 나이는 마스터보다 어려 보이던데.”
“응. 한 40 초중반? 아님 30 후? 그랬지?”
“아마도요. 뭘까요? 설마…, 숨겨둔 아들…?”
“에이. 그건 아니지. 마스터 나이가 있는데.”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기준아. 닥쳐라.”
“넵.”
“더 들어 봐.”
둘은 갑자기 찾아온 이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한산한 평일이고 한산한 시간대가 아닌가.
강성원이라는 걸출한 손님이 다녀가긴 했지만, 그 역시 이른 시간대였기에 지금은 딱히 아르센이 붐비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들은 막내인 정환에게 바를 맡겨두고 열심히 다른 짓을 하는 중이다.
‘그래봤자….’
꽉 닫힌 백사이드 내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정환은 저들의 노력이 성과를 내지 않을 걸 알고 있다.
뭐, 정환도 사내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상 가는 정체가 있기도 했고.
그와 함께 아르센으로 들어오던 정환은 그에게 명진과의 관계를 물어봤다.
그저 평범한 질문이었다.
손님이거나 다른 업장의 바텐더일 수도 있고, 또 주류나 과일 등을 영업하러 온 회사원일 수도 있지 않나.
허나, 그에 대한 사내의 답은.
본인 외에는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조금 형식적이고 수상한 답이었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본인 외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기에 그와 부딪혔던 때까지 고려하면, 정환의 머리에는 스치는 직업이 하나 있긴 했다.
툭! 달그락!
커다란 가죽 가방, 그리고 달그락거리는 수많은 작은 통의 소리까지.
거기에 명진의 반응과 선배들이 잡아낸 ‘예약’과 ‘미룸’이란 단어까지 조합한다면.
‘의사…’
라는 직업이 정환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마, 달그락거리던 소리는 통속에 알약들이 흔들리던 소리라. 셰이커에 작은 알약 크기의 견과류를 넣고 흔들어본 정환은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
‘진료 예약일에 안 가신 건가? 설마?’
확실한 건 아니다.
의사가 매번 알약을 가지고 다닐 리도 없고.
그의 가죽 가방이 왕진 다니는 의사들이 주로 쓰던 가방처럼 생겼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정환은 여전히 확답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래도 생각이 거기에 닿자, 정환의 얼굴에는 조금 어두운 표정이 자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환자를 직접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자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다. 정환이 의사는 아니니까.
하지만, 정환이 바텐더이기에 알 수 있는 것 역시 있었다.
뭘까. 바텐더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니까. 그런 꿈 같은 생각을 정환이 하는 걸까.
아쉽게도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의사와 바텐더 사이에도 묘하게 통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도, 바텐더도.
결국에는 공간을 지키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수술실과 진료실을 지킨다. 바텐더가 지키는 건 바라는 공간.
이 말은, 이들은 웬만하면 일을 하면서 이 공간을 떠날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공간을 떠나서도 이들이 직업에 묶이는 순간은 어떨 때일까.
정환은 그 생각을 하다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손님과 관련해 무슨 일이 있을 때.’
상상하고 싶지 않은 명제가 떠올랐다. 의사라면, 저 손님이란 단어가 환자란 단어로 치환될 것이다.
드르르륵.
그렇게 정환이 한참 불안함에 잠길 때, 백사이드의 문이 열리고는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온다.
“흡!”
“헛!”
백사이드에 귀를 대고 있던 두 바텐더는 깜짝 놀라며 딴청을 부려본다.
사내는 그들을 흘끗 보더니, 명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계약서는 그렇게 작성해서 가져오시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
그리고 나오는 갑작스러운 말.
명진은 그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린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죠. 꼭. 꼭 오셔야 합니다. 그럼.”
사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아르센을 벗어났다. 백사이드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명진은 손을 살짝 뒤로 숨겼다.
정환은 슬쩍 눈을 돌려 그의 손을 살폈다. 큰 손등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플라스틱 통이 조금은 불안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뭐예요? 마스터. 뭐 파시는 거예요? 집? 가게? 설마 우리 파산?”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시골에 땅이 조금 있어서….”
“아. 난 또 뭐라고. 깜짝 놀랐네. 예약이니 미뤘다니, 하시길래. 그게 땅이구나.”
“그래도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요. 업장까지 찾아와서.”
정우는 대충 둘러대는 명진의 말을 듣고는 힘이 빠지는 표정이다.
기준은 업장까지 찾아온 사내가 못마땅한 모양.
“…땅이 많이 탐나는 모양입니다. 허허.”
명진은 어색하게 웃고는 백사이드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숨기더니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이 조금은 어색하고 싱숭생숭하다.
“회식 쏘세요. 땅 파셨으면 돈 많이 버셨겠네.”
“부자 되는 거 아니세요?”
걱정 반, 기대 반이던 바텐더들은 어느새 긴장을 풀고는 일상에 복귀했다.
조금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일인 모양이라, 그들은 그렇게 여겼다.
“원래 부자시거든?”
“그건 그렇죠.”
“하하…. 회식, 조만간 한 번 하시죠. 제가 크게 쏘겠습니다.”
명진은 자연스레 인자한 표정을 찾고는 바 안으로 돌아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원래 모습을 찾는 명진의 모습.
역시 바 안에 있어야, 뭐든 완벽해지는 그였다.
장난스레 농담을 주고받는 바텐더들 사이로 막내의 표정만이 무겁다.
선배들이 옆에서 장난스레 손님들과 마스터에 대한 농담을 나누고 있을 때.
정환은 조심히 명진의 곁에 다가섰다.
“괜찮으신 거죠?”
“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뭐든지요.”
“흠. 또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무슨 문제가 있어 보이나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명진은 어느새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는 완벽히 자신의 그늘을 가려 버렸다.
바 안의 집기를 만지며 답하는 그의 모습이 아무 일이 없었던 사람의 모습, 그자체였다.
본인이 저렇게 나오는 데 정환이 나서서 무어라 말을 더 붙일 수 있겠나.
또, 정환의 예상이 정말 기우일 수도 있고.
정환은 잠시 침전하더니.
“꼭 가세요. 다음 주 약속. 꼭 가셔야 해요.”
라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다. 그의 진심이 꼭꼭 담겨있어, 말투가 제법 무거웠다.
“…….”
명진은 어색하게 만지던 잔을 내려두고는 인자한 미소를 발한다.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인자함이다.
“그래야지요. 꼭.”
정환의 찝찝한 기분 속에서, 아르센은 그렇게 영업을 마쳤다.
2.
샤카! 샤카! 샤카! 샤카가가각!
영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아르센.
그런 아르센의 바 안에서는 영업 중에나 들릴 법한 소리가 들려온다.
경쾌한 셰이킹 소리가 울리더니, 점점 줄어든다. 마치, 중간에 셰이킹을 멈춘 것 같은 소리였다.
자기가 뒷정리하겠다며 다른 선배들을 모두 보낸 한 바텐더. 그는 셰이커를 내려두고는 안에 든 내용물을 개수대에 부어 버렸다.
‘이번 자세도 아닌 거 같은데….’
그의 셰이커 속에선, 맹물과 함께 마모된 얼음만이 토해질 뿐이다.
술은 아니었다.
바텐더가 셰이커에 담는 게 늘 술은 아니다. 바텐더는 셰이킹을 연습할 때, 가끔 이렇게 술 대신 물과 얼음만 넣어 연습하곤 했다.
때로는 콩이나 아몬드 같은 견과류를 넣기도 했고.
술이라는 게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제아무리 인자한 가게 사장이 술을 마음껏 써도 좋다는 말을 했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고용된 이의 입장이다.
“후.”
정환은 셰이커 속에 다시금 물과 얼음을 채우고는 한숨을 뱉는다.
무언가 벽에 막힌 것처럼 답답해 보이는 그의 얼굴.
“아니지. 아니지. 해야지.”
그는 혼자 다짐하듯 읊조리고는 다시금 셰이커를 들었다. 그리고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 그의 손.
샤카아!
스트로크(Stroke)라고 부르는 앞으로 내뻗는 자세가 제법 멋들어지게 펼쳐졌다.
그리고 이어져야 할 건 스냅(Snap).
셰이킹이란, 기본적으로 이 두 자세를 활용해 음료를 섞어주는 걸 말했다.
바텐더 중에는 둘 중 하나만을 쓰는 바텐더도 있다. 다만, 정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이 둘을 모두 해주는 것.
스트로크만을 해주면 직선 운동만이 남아 냉각과 희석에는 좋아도 혼합과 공기층의 유입에는 무리가 있다.
반대로 스냅만 해줄 경우, 혼합과 공기층의 유입은 좋을지언정, 냉각과 희석이 덜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중요한 건 둘의 적절한 조화.
정환은 늘 이 둘의 섞은 셰이킹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환의 손이 스트로크 이후 스냅에 들어가는 순간.
까가각!
셰이커에서는 들려선 안 되는 소리가 난다.
이는 스냅을 잘못 줬을 때 나는 소리.
스냅이란 건 냅다 흔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받침점이라는 일종의 기준선을 두고 흔들어야 하는 게 정석적인 스냅.
지금 저 소리는, 정환이 스냅을 주며 그 받침점을 놓쳤기에 나는 소리다.
“하.”
정환은 탄식을 뱉으며 또 셰이커 속 물을 부어낸다. 12년의 경력이 있는 정환이 왜 자꾸 이런 실수를 하는 걸까.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추론인데.
문제가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같은 셰이킹은 지금도 충분히 할 수는 있다. 다만, 정환이 지금 시도하는 건 새로운 자세의 셰이킹.
정환은 스냅을 최대한으로 줄인, 하지만 효과는 그대로 가져가는 그런 셰이킹 자세를 찾고 있다.
지금처럼, 그러니까 12년간 해온 것처럼 셰이킹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그의 손목에 똑같은 질병이 찾아오게 된다.
‘키엔벡 병?’
인가 뭔가 하는 이름도 생소한 그런 병.
정환의 꿈을 한 방에 날려버렸던, 바로 그 병이 말이다.
이번 생에서는 2년이나 빨리 바텐더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빨리 그 병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
당시의 의사는 분명 손목에 ‘무리’를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손목을 덜 쓰게 된다면 이는 해결될 터.
스터는 어쩔 수 없다. 크게 손목을 쓰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셰이킹이라면.
반드시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게, 정환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습관이 된 자세를 바꾸는 게 쉽지는 않다.
적절한 방식의 자세를 찾는 건 더 쉽지 않고.
그렇게 정환이 세 번 정도 셰이커를 비웠다가 채웠다가를 반복하고 있을 때.
샤카! 샤카! 살그락!
하는 경쾌한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든다.
고요한 바 안을 울리는 인자한 목소리다.
“정환 씨…?”
“마스터?”
정환은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입구 쪽을 바라보는 정환.
그리고 입구에는, 사복을 입고 잠시 바에 들른 명진이 자리하고 있다.
“무슨 일이세요? 퇴근한 거 아니셨어요?”
“…물건을 두고 가서요. 집까지 갔다가 돌아왔지 뭡니까. 허허.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군요. 조만간 레시피도 까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설마요.”
명진은 정환을 보고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지나쳐 백사이드로 향했다.
드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는 무언가를 챙기는 명진. 문이 덜 닫혀서인지, 안에서는 달그락하는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정환의 표정은 조금 굳어갔다.
드륵.
명진이 다시 백사이드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가려는 걸까.
정환이 그를 불안하게 보고 있을 때.
“모처럼이니, 정환 씨 연습하는 걸 잠시 보고 갈까요?”
명진은 돌아가던 발길을 멈추고는 인자한 표정으로 정환을 돌아본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그럼요. 딱히 무리가 오진 않았습니다. 오늘은 한산했으니까요.”
“그래도 들어가서 쉬시는 게….”
“그렇게 말씀하니, 더 남고 싶군요. 허허.”
명진은 짓궂은 말을 한 번 하더니 외투를 벗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손님의 자리에 앉아 정환을 빤히 보는 그.
한 번 짙게 웃은 명진은.
“자세를 바꾸려는 겁니까?”
!!
또 모든 걸 안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