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잔. 프로즌 다이키리.
3.
“믹서기…?”
성원은 갑작스레 올라온 블렌더를 보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술과 블렌더는 그리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생각 외로 바에서 블렌더는 많은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가니쉬용 재료를 갈아내 고운 가루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부재료를 미리 갈아놔 주스나 스무디 형식으로 저장해 두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칵테일 그 자체를 만들 때까지.
바에서는 온갖 용도로 쓰이는 게, 바로 이 블렌더였다.
“처음 보시는 모양이군요.”
“아니, 믹서기를 처음 보진 않죠. 허허. 바에서 처음 봐서 그렇지.”
“가끔은 이렇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게, 이번 술이랑 관련이 있다? 재밌네. 얼른 보여줘 봐요.”
“잠시만 기다리시죠.”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손님을 두고는 블렌더 안에 재료를 넣기 시작했다.
평범한 모습이다. 지거로 계량하고 술을 넣고. 넣는 곳이 셰이커나 믹싱 글라스가 아닌, 블렌더라는 것이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럼과 라임 주스, 설탕 시럽을 계량해 넣은 정환이 얼음을 한 컵 가져왔다.
그리고 이를 함께 블렌더에 넣는 그의 모습. 블렌더의 뚜껑은 얼음이 들어가고 나서야 닫혔다.
그리고 시작되는 블렌딩.
와아아아아아앙!
가가가가가가가각!
얼음이 들어가서인지, 조금은 거친 소리를 내며 블렌더는 재료를 섞어갔다.
블렌더는 그렇게 잠시간 더 굉음을 뿜고 난 후에야 결과물을 토해낸다.
바텐더는 뚜껑을 열더니 바스푼을 찍어 이를 맛본다.
“흠.”
만족스럽진 않아 보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앙!
블렌더가 다시 운다.
그리고 똑같은 바텐더의 행동.
정환은 이번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잔을 가져와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담기 시작했다.
하얀 얼음 조각을 머금은 액체가 잔에 담겼다. 스무디. 말 그대로 스무디의 형식으로 담기는 칵테일.
바텐더는 모양까지 신경 쓰며 이를 정성스레 담아냈다.
소복하게 쌓여 설산 같은 모습의 잔이 손님의 앞으로 내어졌다.
설산에는 작은 스푼과 함께 스테인리스로 만든 빨대가 꽂혀있다.
“‘프로즌 다이키리’입니다.”
“허. 이게 다이키리란 말이죠? 신기하네. 이건 어떻게 먹어요?”
“조금씩 빨대로 빨아 드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걸리는 게 있다면 스푼으로 치워가며 드시면 됩니다.”
“신기하네. 내가 알기로는 저 셰이킹이란게 그냥 섞는 용도는 아니라던데? 이렇게 막 섞어도 되는 건가?”
잔을 맛보지 않고 고개만 기웃거리는 손님. 그런 손님에게 바텐더는 우선 맛부터 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칵테일은 언제나. 만든 직후가 가장 바텐더가 의도한 맛에 가깝다.
“아, 예예. 우선 먹어봅니다. 잘 먹을게요.”
쪼옥.
빨대로 쭉 칵테일을 당겨 보는 손님. 스테인리스 빨대를 타고 오르는 냉기가 그의 입을 그대로 채운다.
냉기는 타고 올라 머리를 울렸고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
그런 인상을 향해 치고 오르는 강한 럼의 술맛.
몰랐다. 가까이 갔을 때는 별다른 술 향이 강하게 나진 않았으니까. 얼음이 들어가 술맛은 모두 죽었겠거니 했던 게 그의 예상.
하지만, 그의 예상이 단박에 깨어지고 말았다.
깨어진 예상은 비단 술맛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연달아 치고 오르는 달콤한 라임의 맛이 럼과 뒤섞여 풍미라는 걸 만들어 낸다.
느껴본 적 있는 풍미다. 이건.
다이키리의 그 풍미가 분명했다.
“말도 안 돼….”
늘 높은 텐션을 유지하던 그의 입이 쩍 하고 벌어진다. 만드는 방법이 다를 텐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걸까.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내 바텐더가 나섰다.
“말씀하신 것처럼, 셰이킹의 목적은 단지 음료를 섞는 게 아닙니다.”
차분히, 그리고 별거 아니란 듯 묘리를 풀어내는 고수처럼 설명을 시작하는 바텐더.
성원은 입을 닫고 시선만 옮겨 바텐더의 입에 집중했다.
“혼합과 냉각, 그리고 질감의 변화와 술의 농도까지. 셰이킹의 목적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 중 질감의 변화와 술의 농도를 낮추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공기층의 유입이죠. 스터가 아닌 셰이킹을 택하는 칵테일은 대부분 이 공기층의 유입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이키리 역시 그렇고요.”
바텐더는 차분히 전문적인 말을 뱉어갔다.
“바텐더가 셰이킹으로 만든 칵테일과 비전문가가 만든 셰이킹 칵테일이 맛이 다른 이유도 여기서 옵니다. 공기층을 얼마나 잘 조절해서 적당히 칵테일 속에 풀어놓느냐. 그게 셰이킹 칵테일에선 중요한 요소니까요.”
이를 듣는 성원의 고개가 그대로 끄덕여진다.
요식업계에서 나름 전문가로 통하는 그 역시, 이런 디테일한 곳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럼, 블렌더를 쓰면 그 차이가 덜하다? 이상한데? 블렌더에는 공기가 안 들어가지 않나?”
말을 듣던 손님이 제법 날카로운 부분을 건드려 바텐더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씨익.
그런 질문이 기쁘다는 듯 웃어 보이는 바텐더. 바텐더는 입꼬리를 쭈욱 올리고 나서야, 답을 들려준다.
“블렌더로 방금 같은 재료를 넣고 갈게 되면, 공기층 대신 다른 것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셰이킹이 아님에도 다이키리의 맛이 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다른 거? 뭐요?”
“얼음.”
바텐더는 단호히 말을 뱉으며 손으로 프로즌 다이키리가 만든 설산을 가리킨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내려가던 성원은.
!
그제야 바텐더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
“그렇지. 원래 다이키리는 얼음을 걸러내고 주는 칵테일이니까! 이게 재료가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거네! 여긴 얼음이 그대로 들어가 있고!”
그는 바텐더의 설명 덕에 찾아낸 원리에 목소리를 높인다.
“맞습니다. 잘게 갈린 얼음이 더해져 질감은 더 부드럽게 변하죠. 여기서 공기층의 유입이 필요 없는 이유가 처음으로 달성됩니다. 그리고 술의 농도 역시 원래는 걸러내었던 얼음들, 즉 잘게 갈린 얼음이 점차 녹아들며 달성되죠. 블렌더로 갈아도 다이키리와 비슷한 맛이 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거기에 잘게 갈렸으니까 빨리 녹을 거고. 그래서 뒤로 갈수록 술맛이 옅어지고 다른 재료가 살아난다! 맞죠?”
“맞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다. 바텐더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님을 향해 짙게 웃는다.
“이야! 이걸…!”
손님은 자신이 찾던 걸 마침내 찾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감탄을 내뿜는다.
다이키리라는 이름도, 또 맛도. 거기에 만드는 방법까지 모두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이거면 누구나 만들 수 있겠는데? 그죠?”
“같은 제조사에 같은 믹서기, 그리고 같은 시간과 같은 계량을 사용하면 맛은 통일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바뀌어도 맛도 안 변하고!”
짝!
이제는 손뼉까지 치며 감탄하는 손님의 모습. 바텐더는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다른 손님이 멀찍이 앉은 걸 보고 딱히 그를 만류하진 않았다.
바텐더는 여기서, 손님에게 조금 더 팁을 줘볼까 한다.
사심이 적당히 섞인 그런 팁을.
“이런 방식이면 사실 변형을 주기도 쉽습니다. 바텐더들 사이에 유명한 방식은 과일을 넣고 얼음이나 시럽을 줄인 후 함께 갈아주는 방식. 제철이 아니라 보여드리진 못하지만, 딸기가 들어간, ‘스트로베리 프로즌 다이키리’ 정도가 있겠네요.”
“딸기? 이야. 딸기 들어가면 맛있긴 하겠다. 별미겠는데?”
“여름에는 수박도 있고요.”
“계절 별로! 어허! 이거 대박이네!”
손님은 바텐더가 던져주는 팁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표정을 마구 지어본다.
정환은 이를 활용한 조합을 몇 개 더 일러주고는 오늘의 수업을 마치기로 한다.
아직 알려줄 칵테일이 더 있지만, 훗날을 기약하기로 하는 그였다.
“자, 잠시만! 나, 이거 다 적으려면 시간 좀 줘야 해요. 기다려요.”
쏟아지는 정환의 팁을 손수 기록하는 성원의 모습.
정환은 그런 성원에게, 마지막 사심을 담아 무언가를 하나 더 건네본다.
“이거 받으시죠.”
고개를 숙이고 메모하던 손님의 고개가 들린다. 그의 앞에는 작은 크기에 멋들어진 모양을 갖춘 명함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정환의 명함이다.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연락 주셔도 됩니다.”
“후회하실 텐데? 나 수시로 연락해요, 그러면?”
“대신 가끔은 직접 찾아주세요. 직접 와서 보시는 게 더 이해하기 좋을 테니까요.”
“에이, 나 자주 올 거 같은데? 단골 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씨익.
바텐더는 명함을 손에 쥐여주고는 밝게 웃었다. 명함을 건넬 때는 사심이 담겼지만, 그의 마지막 웃음에는 아무런 사심이 없다.
언제든 바에 오는 손님은 환영이다.
“자, 받아요. 그럼.”
손님은 정환의 명함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슷하게 생긴 걸 하나 건넨다.
이 역시, 명함이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 더 궁 코리아 대표이사 강성원.
이라는 제법 큰 직책이 걸려있다. 확실히, 밥장사하는 이의 명함은 아니다.
바텐더는 바 밖으로 나가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그의 손에 제법 큰 명함이 쥐어졌다.
몇 년 후에는, 더 커질 그런 명함이.
“연락할게요. 번호 저장해요! 나중에 전화했는데, 누구세요? 하기 없기. 알겠죠? 흐흐. 술 선생님으로 저장해야지. 음식 쪽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 나도 신세 갚을 테니까요. 흐흐. 또 봅시다!”
손님은 마지막 말만 남기고는 사람 좋게 웃고 아르센을 떠났다.
정환은 바 밖으로 나가 그를 배웅했다.
평범한 풍경이다.
다만, 그의 손에 남은 게 조금 평범하지 않은 날.
제법 큰 인맥이 정환의 손에 들어왔다.
“가셨나?”
정환은 배웅을 끝내고는 고개를 들어 거리를 살핀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강성원의 모습.
정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바로 들어가려 할 때.
툭! 달그락!
뒤로 도는 정환의 몸에 누군가 살짝 부딪히고 만다.
정환과 부딪힌 사내는 인상이 조금 날카롭고 고급진 안경을 쓴 모습이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의 손에는 커다란 가죽 가방이 하나 들려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가방 안은 무언가 작은 통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뒤를 못 살폈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뭘 좀 찾느라….”
사내는 살짝 옷을 털고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정환의 모습을 보고는 눈매를 좁히는 그.
그의 시선이 정환의 명찰에 닿자.
“바텐더…세요?”
그는 대뜸 직업을 물어온다.
“네.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뭘까. 취객이 바텐더에게 시비라도 걸려는 걸까.
일본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정환이 슬쩍 긴장하고 있을 때.
“아, 잘 됐군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요. 괜찮으시면 바를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마치 사막 위 오아시스를 찾은 이처럼 정환을 반겼다.
힘이 축 빠지는 정환.
“아. 네. 물어보시죠. 좋은 가게를 찾으시는 거면, 추천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환은 사내의 질문을 듣더니, 잘 찾아왔다는 표정을 하고는 당당히 답했다..
바를 찾는 이가 우연히 부딪힌 게 바텐더라니.
사내는 운이 좋은 게 분명했다.
“아뇨. 딱히 손님으로 온 건 아니지만…. 찾는 사람. 찾는 사람이 있는데, 아마 바에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있는 바를 찾습니다.”
“사람…이요?”
찾는 사람이 있단 말에 정환이 망설인다.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바씬은 좁고, 강남 바닥에서 바와 연관 지어 사람을 찾을 정도면 그는 유명한 바호퍼일 테니까.
허나, 그게 아르센의 손님이라면 바텐더로서 말해주기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다.
바텐더는 손님의 정보를 바 밖에서 흘려선 안 되니까.
하지만.
“네. 이명진 씨. 이명진 씨가 바텐더로 있는 바. 혹시 아십니까?”
!!
사내는 다행히 손님이 아닌, 바텐더를 찾고 있었다.
조금 익숙한 이름의 바텐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