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잔. 보내는 사람.
1.
“죄송했습니다.”
정환의 아버지가 다녀가며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던 아르센.
그날은 그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누구도 정환에게 입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정환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이었다면 말이다.
두 부자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저마다 가슴에 남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날따라 유독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
그게, 아르센이라는 공간이 기억하는 그날의 전부였다.
날이 바뀌고 다시금 아르센을 찾은 정환이 바텐더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직장이라는 곳에 부모라는 존재를 모시고 온 건. 바라는 특성에도 동료들에게 민폐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 우리야 괜찮긴 한데. 그, 다음부터 미리 말 좀 해주라. 응? 식겁했다고. 특히 난 목발 놓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좀 겁나더라. 아버지께서 신사적이셔서 다행이었지. 우리 아버지였으면. 어후야.”
“아버지랑 통화는 했어? 잘 들어가신 거지? 그럼 됐어.”
정우와 기준은 별다른 군말 없이 정환을 이해한다. 이들 역시 한 번쯤은 겪었기 때문이다.
바텐더라는 직업과 부모님의 반대 같은 걸 말이다.
이들은 스스로 그 난관을 헤쳐나온 정환이 대견스러울 뿐이다.
“더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아버님께서 실망하시진 않으셨나요?”
명진 역시 아무 말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난날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이 명진은 그저 정환과 아버지의 관계만을 걱정한다.
“좋은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응원은 못 해도 지켜봐 주신다는 말씀도 하셨구요.”
“다행이군요. 하마터면 큰일이 나나 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좋은 바텐더를 잃을 순 없으니까요.”
“이제 무사히 아르센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환은 아버지와의 일이 잘 풀린 것을 기뻐하며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아르센에 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런 정환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는 명진.
“바텐더로 남았다는 것. 그게 중요한 일입니다. 아르센의 바텐더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바씬 전체에 좋은 바텐더가 많아지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니까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더 키워주셔야죠.”
“허허, 제가 언제 누굴 키웠다고. 더 정진하세요. 한동안 못 갔지만, 연습도 계속하시고요. 곧 방문하겠습니다.”
명진은 사고가 이후, 정환이 칵테일 연습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사고에서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 일 이후로 좋지 않던 몸에 무리가 온 탓이다.
딱히 가르침을 주는 건 없다. 명진은 손님처럼 앉아 정환이 만든 술을 마시기만 한다.
그게, 건강에 좋지 않아 요즘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마스터께서 알려주신 덕분이에요.”
“제가요? 제가 뭘?”
“명찰이요.”
정환은 웃으며 명진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가슴팍에 붙은 명찰을 톡톡 건드려본다.
명진은 이런 행동을 통해 정환에게 자신의 직업과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를 일깨워줬었다.
“흠, 그저 명찰이 비뚤어져 있어 바로 달아라, 말한 것뿐입니다.”
“네?”
“바른 자세를 보여줘야죠. 아버님이고, 또 처음 오신 손님이니까요.”
“에이, 설마요.”
“진짜입니다. 이상한 분이군요. 제가 뭐라고. 허허.”
명진은 크게 한 번 웃고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을 한다.
진실은 알 수 없다. 아마, 거짓인 것도 같고.
허나, 정환은.
요즘 바라보는 등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자자. 영업 시작합시다. 다들.”
영업을 알리는 마스터 이명진의 목소리가 조금 밝게만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곁에 남아 기쁜 말투였다.
2.
“그, 어제는 미안했네.”
“아니, 우리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보통 바에 앉은 손님은 대게 바텐더를 향해 낮은 태도를 보이진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자신의 시간과 돈, 그리고 이동을 통해 온 곳인데, 그곳에서 손님이 애써 자신을 낮춰야 할 이유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게 단골이라는 이들에게까지 범위를 넓히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단골이라면. 가끔은 바텐더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 믿고 있었네! 그렇지. 자네가 잘 해결하리라, 믿은 거네.”
“나도! 나도 그렇네. 자네가 보통 바텐더인가? 어디. 암.”
둘은 아무 말 없이 둘이 늘 마시던 술을 차례대로 내어오는 바텐더에게 연신 변명하기 바쁘다.
“괜찮습니다. 두 분. 진정하시죠.”
전날 큰 폭풍을 겪은 바텐더만이 차분히 답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바텐더의 모습이다.
“정말 괜찮나?”
“자네, 삐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정환은 바텐더다운 멋스러운 자세로 두 사람에게 잔을 내밀며 불안한 말을 일축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전날, 부모님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도움을 주겠노라, 당당히 다짐했던 두 교수.
허나, 두 교수는 정환의 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내자 그대로 자리를 뜨려다 검거당하고 말았다.
아르센에서 입이 가장 가벼운, 한 바텐더에게.
‘매니저!’
‘정우 군!’
강렬한 두 교수의 눈빛만이 아르센의 한 바텐더를 향했다. 그는 콧노래만 부르며 모른 척이다.
“괜찮습니다. 가족 사이의 일이니 끼어드시기 힘드셨겠죠. 이해합니다.”
“무, 물론이네. 혹여나 일이 잘 안 풀렸다면 언제든 도와줄 생각이었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네. 내가 자네를 이곳에 추천한 장본인이 아닌가. 허허. 기회를 보고 있었지.”
조금 풀어지는 바텐더의 반응에 곧바로 안심하는 두 교수. 하지만.
“네.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에 지불 하는 비용에는 ‘거짓말’을 할 비용도 포함되니까요. 손님께서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말입니다. 신뢰의 문제겠지만요.”
!!
바텐더의 입이 조금 모질게 그들을 향하며 잔도 함께 내어온다. 이들이 늘 마시는 각자의 사제락.
유독 독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 강한 술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다.
‘머, 먹고 죽으란 말인가?’
‘폭탄인데?’
두 교수는 조용히 바텐더가 내민 잔을 받아 든다. 맛이 평소와 달라도 할 말은 없다.
열어놓고 살펴보면 같은 재료를 비율만 조금 다르게 조절했을 뿐일 테니까.
이 바텐더의 독함과 철저함을 모르지 않는 두 사람은 여기서 더는 따져 들지 못한다.
맛있는 술을, 그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술을 만드는 바텐더 앞에서.
이 둘은 언제나 약자다.
“다음에는 꼭 돕겠네···.”
“언제고 꼭 한 번···. 부모님만 아니었어도···.”
둘은 다시는 이 바텐더 앞에서 거짓을 뱉지 않겠노라, 속으로 다짐할 뿐이다.
독한 술이 다짐을 굳게 만들며 두 교수의 속을 태웠다.
두 명 정도의 손님이 조금 골탕을 먹은 것 외에는 평범한 나날이다.
손님들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바텐더를 흔들만한 다른 유혹도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어제 역시 평범했던 일상이었을지 모른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오고, 때로는 불청객도 찾아오는 곳.
그리고 그런 손님을 맞이하는 바텐더가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바’라는 곳이니까.
3.
청담동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남동.
그런 한남동의 거리에도 제법 괜찮은 바는 많은 편이다.
“이거 재밌네.”
그리고 그런 바 중 한 곳에서 잔을 바 테이블에 올려둔 손님이 팔짱을 끼고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조금은 통통한 그의 몸매가 식음료에 대한 많은 경험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맛은 괜찮으신가요?”
그런 손님에게 다가가 맛을 물어보는 바텐더. 정장보다는 편한 차림에 데님으로 이뤄진 앞치마까지 걸친 모습이 청담동 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차림새다.
“아, 재훈 씨. 이거 재밌는데요? 허허.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데?”
손님은 그런 바텐더를 보며 친근하게 말을 묻는다. 제법 가까워 보이는 둘의 사이.
손님이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앞에는 파리지앵이라 불리는 칵테일이 아름다운 색을 내뿜고 있다.
“클래식 칵테일을 편하게 드실 수 있었으면 해서요. 만드는 방법을 조금 바꿔봤는데, 괜찮으세요?”
“허허. 아이, 괜찮지, 그럼. 아니. 좋아요. 진짜. 이건 클래식 아니래도 믿겠는데? 편안한데, 또 나름 클래식한 맛도 있네. 이야, 재밌다. 재밌어. 허허.”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상권과 손님을 분석하라는 사장님 말씀 덕분입니다.”
“크으. 영민해. 이러니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지 않을 수가 있나. 흐흐.”
여기는 청담동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는 한남동의 바, 마리너스.
임재훈이라는 젊고 실력 괜찮은 바텐더가 일하는 곳이다.
“내가 찾는 게 딱 이런 건데. 아휴. 오길 잘했네.”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신 거군요.”
“이번에 가벼운 펍 같은 거 하나 해보려고 그러죠. 좀 맛있고 새로운 술도 팔고. 흐흐. 안주는 뭐. 말할 필요나 있나. 난데.”
“사장님 음식 솜씨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죠? 흐흐. 역시 청담동보다는 한남동이 재밌다니까. 아휴. 오길 잘했네.”
재훈의 앞에 앉은 손님은 가볍게 한남동과 청담동을 비교하며 재미를 논했다.
크게 여러 가게를 놓고 비교하는 말은 아니다. 청담동의 바텐더가 들어도 기분 나쁠 말은 아니고.
허나, 저 말처럼 간단히 두 동네를 구분 짓는 말도 없을 것이다.
바씬으로만 놓고 본다면 청담동은 조금 더 클래식한 맛이 있는 동네였고 한남동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기풍이 강한 동네였다.
말 그대로, 재미만 본다면 한남동의 칵테일이 조금은 더 재밌는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거, 내가 베껴가면 안 되나? 아니지. 배운다고 해야지. 내가 로얄티도 줄게요. 어때요?”
“레시피를 말씀하시는 거면 얼마든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파리지앵이라는 칵테일에서 크게 변형한 것도 아니고요.”
“이렇게 쉽게? 나도 뭔가 줘야겠는데? 에이. 그러지 마요. 너무 쉬우면 수상한데?”
“아뇨. 같은 레시피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은 다르니까요. 제가 만든 파리지앵의 맛은 저만 낼 수 있는 맛이니 괜찮습니다.”
“흐흐. 자신감이 넘쳐, 아주. 그럼 가르쳐 줘 봐요. 대신 내가 보답은 꼭 할 테니까. 나 믿죠?”
“그럼요. 대신 보답은 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 해주셔야 합니다.”
“다른 곳? 뭔 말이래, 그건 또?”
“이게 제가 고안한 방식은 아니라서요.”
재훈은 밝게 웃고는 담담히 이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뭇 솔직한 모습에 앞에 앉은 손님이 밝게 웃는다.
“청담동에 아르센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아르센? 처음 듣는 거 같은데요? 나, 바 잘 몰라요. 칵테일은 좀 알아도.”
“청담동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아르센.’ 이라고요.”
“어휴, 멋진 말이네. 흐흐. 청담동이 클래식은 참 잘한다던데. 맨해튼. 이런 게 참 맛있고. 쓰읍. 생각하니까, 먹고 싶다. 아휴.”
손님은 고개를 들고 머릿속으로 클래식 칵테일을 그린다.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뱉는 말에 진심이 담긴 모양이다.
그는 팔짱을 낀채로 고개를 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지금은 그러면 안 되지. 나 일하러 온 거라니까? 흐흐. 팔 수 있는 거. 재밌고 새로운 거. 클래식한데 좀 대중적이고 그런 거 찾아야 해요. 청담동이 그런 맛을 내는 곳은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르센에 한 번 가보시죠. 거기 새로 들어온 바텐더가 있을 겁니다. 아는 것도 많고 실력도 좋은 바텐더입니다. 물론, 재미도 있을 겁니다.”
“새로운 바텐더? 얼마나 됐는데요?”
“이제 반년 정도일 겁니다.”
“에? 경력직인가? 벌써 칵테일을 만든다고?”
“실력이 좋아서요.”
재훈은 실력이 좋다는 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웃는다. 그의 경력을 생각하니, 자신이 생각해도 수식하는 말과 꾸미는 말이 그렇게 어울리진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재훈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 파리지앵도 그 바텐더가 알려준 방식으로 만든 겁니다. 한 번 찾아가 보시죠.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마 사장님께서 찾는 칵테일도 그 바텐더가 더 잘 알 겁니다.”
“그래도 되려나? 계속 도와준 건 재훈 씨인데. 섭섭해하는 거 아녜요? 이걸 만들었다니까, 흥미는 생기네.”
“괜찮습니다. 저도 사장님께 도움을 받고 있고, 또 바는 원래 이런 식이니까요.”
“하여튼. 건실하다니까.”
보통 동종의 업장은 다른 곳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꺼려한다.
결국은 경쟁 업체가 아닌가.
허나, 바씬만큼은 달랐는데, 바는 언제고 손님이 좋은 곳을 묻는다면 거리낌 없이 다른 바를 추천해 주곤 했다.
이는 하나의 문화이자 바텐더들만의 자신감.
다른 바를 가도,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내는 칵테일의 맛은 그들이 만든 것과 다르다는 바텐더들의 자신감이 만든 하나의 문화인 것이다.
백 명의 바텐더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맛이 존재한다. 바텐더들은 언제나 다른 바와 바텐더를 추천함에 거리낌이 없다.
“조만간 청담동에 한 번 나가봐야겠네. 고마워요. 근데, 그 재밌다는 바랑, 바텐더. 이름이 뭐라고요? 안 들었나? 기억이 안 나네.”
손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하며 재훈에게 추천받은 바와 바텐더의 이름을 묻는다.
재훈은 작은 메모지를 꺼내 한 바의 주소와 누군가의 이름을 쓴 후 답과 함께 이를 건넸다.
“‘아르센’이라는 바의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