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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48화 (48/175)

48잔. Shaken, but not stirred.

9.

!

“흔들릴지언정···, 뒤섞이진 않는다···?”

영균은 바텐더의 말을 곱씹으며 눈을 껌뻑였다. 머리로는 정리가 조금 필요한 상황.

과한 은유에 그가 머리를 앓을 때. 바텐더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수많은 역경을 겪으며 악당들로부터 고문과 회유를 받습니다. 유혹이죠. 그리고 그런 유혹의 끝에도 본드는 흔들릴지언정 그들과 뒤섞여 함께하진 않으니까요.”

“···그게 나와 왜···?”

“손님도 같으십니다.”

- 쿵!

무언가 묵직한 감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영균은 아들의, 아니 바텐더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그런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조금은 떨려오는 그의 입꼬리.

“내가 본드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평범하디 평범한 삶이 아니었나.

무미건조하게 말했지만 드러머라는 꿈을 꾸었고 현실과 타협해 이를 포기했다.

덕분에 가족이라는 새로운 꿈을 얻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소시민적이지 않나. 본드라는 걸출한 영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삶이라, 그렇게 자평하던 게 자신의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바텐더는 조금 다른 말을 들려준다.

“친구분들이 그렇게 되시기 전에도 충분히 유혹은 많았을 겁니다. 밴드를 나올 때, 한량이라 부르시던 그 삶이 손님을 유혹하진 않았나요?”

- 쿵.

“다른 모두가 술자리에서 술에 잡아 먹히고 있을 때, 나도 남들처럼만. 딱 그 정도만. 그런 유혹은 없으셨고요?”

- 쿵!

재차 아려오는 가슴.

영균은 바텐더의 말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저는 모릅니다.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다만, 지금에야 보이는 건 있습니다.”

그런 영균을 강하게 바라보는 한 바텐더의 눈빛.

“그런 모든 유혹에도···, 손님은 그들과 뒤섞이지 않았다는 것. 바텐더로서 제가 알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이 술을 떠올린 이유 역시 그 때문입니다.”

- 콰르릉!

바텐더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영균은 이제 입꼬리를 떨고 눈을 감는다.

한량이라 불렀고, 소시민적이라 평했던 삶이었다. 본드. 그래, 제임스 본드라는 이와는 다른 삶이라 생각했던 그런 삶.

그런 삶을, 본드와 같다 평해주는 바텐더가 있다니. 거기에 그런 바텐더가 자기 아들이라니.

영균은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겨우 끌어 내린다.

“환아···.”

“더불어 사과드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과?”

“이번 칵테일은 바텐더로서 저 혼자 만든 술이 아닙니다.”

바텐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일어섰다. 명찰을 떼어 내 바 테이블 위로 올려두는 바텐더.

바텐더는 이내 공범의 정체를 밝힌다.

“아버지···.”

!!

영균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아들의 직장에서 그 모습만은 보이지 않겠노라, 꾹 다짐하는 영균.

적어도 방금 들은 위로를 전하는 이가. 형식적으로나마 아들이 아니었길 바라는 영균이다.

하지만.

“이건 아들로서 제 생각 역시 함께 담은 술입니다. 바텐더로서 손님께, 그리고 아들로서 아버지께.”

정환은 단호하던 눈빛과 멋들어진 자세를 풀고 눈을 둥글게 만든다.

익숙한, 아들의 눈빛이다.

“저는 아쉽게도 제임스 본드 세대가 아닙니다. 칵테일 때문에···, 공부로 배우긴 했지만요.”

조금은 형식이 없어진 그의 말. 아무런 꾸밈이나 의도는 없다.

그저, 이건 아들인 정환이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말일뿐.

“대신 저도 지켜보며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인물은 있습니다. 저만의 본드. 제임스 본드겠죠. 그리고 그 사람 역시 본드처럼···, 흔들릴지언정, 남들과 뒤섞이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위기다. 영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감정을 겨우 잡아 챘다. 바텐더가 의도하지 않은 액체가 바 테이블에 닿을 뻔했다.

정환은 그런 영균에게 최대한 많은 뜻을 담아 마지막 말을 전한다.

“그래서 이 잔은 아들로서 제게는 다짐입니다. 수많은 유혹에 흔들리지언정, 저 역시 뒤섞이진 않을 겁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정환은 마지막 말을 남기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뜻은 충분히 전해졌을 거라, 그렇게 믿어보는 정환이다.

영균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들이 남긴 다짐을 곱씹어 본다.

‘흔들릴지언정, 뒤섞이진 않겠다라···.’

술과 함께할지언정, 그 술에 잡아 먹히진 않겠노라. 영균의 귓가에는 아들의 다짐이 그렇게 들렸다.

- 호르르륵.

영균은 스스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자신을 상징한다는, 또 아들의 다짐이라는 잔을 들이켜보는 영균.

영균이 권하지 않은 잔을 손에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한 모금을 삼킨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무수히 많은 술병과 맞은 편에 앉은 취객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채우고 서 있는 바텐더들.

그의 시선 속에서, 술에 섞여들지 않은 이들은 바텐더들뿐이다. 그들 역시, 흔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균은 몸을 의자에 조금 깊게 기대며 힘을 풀어본다. 눈에는 적대감도, 고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조금은 애처로운 눈빛과 깊은 고민이 전부였다.

말이 없는 영균의 모습. 그가 한참을 침전하고 나서야 그의 입은.

“···쉽지 않을 거다.”

이전과는 다른 결의 말을 들려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셨을 거란 것도.”

“말 그대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경험담인데도, 해보겠다는 말이냐?”

“제 다짐이니까요. 보고 자란 것도 있고요.”

영균은 자세를 고쳐 조금은 바르게 앉았다. 풀었던 몸이 꼿꼿해, 원래 영균의 모습 그대로다.

그의 눈에는 애처로운 눈빛이 지워져 있다. 다시 찾아온 그의 눈빛이 앞에 선 누군가와 닮아있다.

“응원하진 않는다. 나 역시 섞여들지 않고 살아왔으니. 지금도 네 말에 흔들리고는 있다만.”

“아버지···”

“대신.”

무어라 정환이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영균은 아들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 버린다.

“지켜는 봐주마.”

!

“네가 정말 흔들려도 섞여들지 않는지. 술이란 놈의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지. 내가 널 지켜봐 주마. 그리고 혹여라도 네가 흔들려 섞여들려 하거든···.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난 널 여기서 빼낼 거다. 이 바텐더라는 업계에서. 그때는 너도 군말 없이 날 따라 나와야 할 거다.”

드디어. 영균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온다. 여전히 단호하고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이제는 바뀌어버린 방향의 말.

정환은 그 말에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아버지를 끌어안고 싶을 걸 겨우 참아냈다.

지난 생에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버지의 이해였다. 그때는 그저 포기였을 뿐.

겉으로야 강하게 말하고 있다. 허나, 영균의 저 말속 속뜻은, 정환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우선은 아무런 입을 대지 않겠다는 말임이 분명했다.

정환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영균은 다시는 정환을 이 업계에서 빼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가 꼭···.”

“말은 더 필요 없다. 행동으로 보여다오.”

영균은 아들을 다독이는 옅은 미소와 함께 남은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조금은 급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정환이 이를 걱정한다.

“천천히 드시고 더 계시다 가시죠.”

“아니. 늦었구나. 일어나야겠다.”

“괜찮습니다. 제가 모실 테니, 조금이라도 더···”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지금은 근무 시간이 아니냐? 넌 지금 바텐더가 아닌 내 아들이고. 난 아들을 만나러 왔던 건데, 만났구나. 그러니 이제는 가야겠다. 넌 바텐더로 돌아가거라.”

영균은 그대로 자리를 뜨며 아련한 감정을 지우려 애쓴다. 그는 무언가를 참으려 노력 중이다.

“걱정하지 마라. 기분이 상한 건 아니다. 그저···, 혼자 좀 걷고 싶구나. 슬쩍 오르는 취기가 나쁘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집으로 가시나요?”

“아니. 내일은 휴가를 내놓고 왔다. 서울에서 자고 갈 거고. 신경 쓰지 말거라. 네 엄마한테도 말해 두었다.”

영균은 얼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서자, 우르르 반응하는 바텐더들.

정우는 우당탕! 하며 중간에 발까지 한 번 걸리고 겨우 몸을 빼냈다.

“가시는 겁니까? 더 계시지 않고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갑작스레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들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불쑥 찾아와 죄송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아드님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영균은 자신을 잡는 이들을 만류하고는 허리를 잔뜩 접어 인사를 남긴다.

서로가 허리를 접는 양 진영의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럽다.

“가시죠. 배웅하겠습니다.”

“됐다. 들어가거라.”

“아뇨. 원래 해야 하는 거라서요.”

그런 영균을 문 앞까지 따라나서는 정환.

영균은 자신을 따라나선 아들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큰 키에 하얀 재킷으로 갖춘 정장이 제법 잘 어울려 보기 좋은 모습이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는 영균. 그대로 감상을 전하려다, 그가 조금은 돌아서 아들에게 다가간다.

“네 엄마가 이 모습을 봐야 할 텐데.”

“좋아하실까요?”

“암. 잘만 꾸며 놓으면 좋아할 게다. 네 엄마야 멋진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냐.”

“아버지 드럼 치던 모습처럼요?”

“흠. 그때는 제법 괜찮았지. 네 외모가 누굴 닮았을까.”

“멋졌겠네요. 보고 싶을 정도로요.”

“네 엄마가 반할 정도였다. 다음에 한 번 보여주마.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언제든지요. 그리고 다음에는 엄마랑 같이 한번 오세요.”

“네 엄마는 술도 못 하는데?”

“무알콜도 많아요.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다른 잔도 있고요. 베스퍼. 어떠세요?”

“그건 뭐냐, 또?”

“007에 나오는 칵테일이에요. 본드가 사랑한 여자 이름이죠.”

“흠. 네 엄마를 꼭 데려와야겠구나.”

영균은 마지막 말에 농담처럼 웃고는 아들을 다시 살폈다. 정환의 재킷에는 아직, 명찰이 없다.

“명찰은?”

“이제 붙여야죠.”

“이리 다오.”

- 착.

영균은 아들의 명찰을 받아 직접 가슴팍에 붙여준다. 그리고 툭툭 건드려보는 넓은 어깨.

영균의 손이 조금 위로 올라가야 했다.

응원하지 않겠노라 말했지만, 언제나 말처럼 행동하는 게 쉽지 않은 게 부모란 이들이다.

묵직한 응원에 정환의 어깨가 절로 펴졌다. 그의 모습에 점차 바텐더 차정환이 찾아오고 있다.

“바텐더, 차정환이라.”

영균은 그런 아들의 명찰을 한 번 읽고는 애써 웃어 보인다.

여전히 걱정은 있지만, 이제는 지켜보기로한 그였다.

“가마. 쉬는 날에 한 번 들르거라.”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락드릴게요.”

정환은 언제나처럼 허리를 접어 아버지를 배웅했다. 이제는 완전히 바텐더로 돌아가야 할 시간.

손님이 아니라서일까.

정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허리를 펴고 떠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커다란 등이 강남의 대로변을 향해 멀어지고 있다.

늦은 시간, 강남의 대로변에는 취객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취객들 사이를 걸어가는 커다란 등의 사내.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그의 걸음이 조금은 흔들거려 보인다.

하지만, 정환에게 걱정은 없다.

그의 제임스 본드는 흔들릴지언정, 저들과 뒤섞이진 않을 테니까. (Shaken, but not stir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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