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47화 (47/175)

47잔. 보드카 마티니.

8.

“이름은 들어본 거 같구나.”

마티니란 이름이 나오자, 영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반응했다.

마티니는 유명한 칵테일이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재료를 쓰는 칵테일인지는 몰라도 누구나 이름 정도는 들어본 칵테일.

그게 바로 마티니였다.

“바의 상징과도 같은 술입니다. 드라이 진과 드라이 베르무트, 그러니까 텁텁한 증류주에 텁텁한 과실주를 섞어 만드는 술이죠.”

“그게 바의 상징 같은 술이다? 어째서?”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정환은 자세한 설명을 위해 영균의 앞으로 믹싱 글라스를 들어 보인다.

- 달그락, 달그락.

가볍게 믹싱 글라스의 벽면을 타고 돌아가는 정환의 바 스푼.

“스터라고 하죠. 얼음과 물만 더해 간단히 저어주는 기법입니다. 마티니는 앞서 말한 두 술에 얼음을 넣어 섞어주면 끝. 아주 간단한 칵테일이죠.”

“흠, 뭐 별거 없는 술이란 소리가 아니냐? 그게 무슨 바의 상징이라고.”

“만드는 방법이 별거 없는 건 맞습니다. 용량과 방법만 알면 누구나 만들 수 있죠. 비단 바가 아니라도요. 다만···”

정환은 돌리던 믹싱 글라스를 내려두고 눈에 힘을 주며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은 멋들어진 자신감이 걸린다.

“맛있는 마티니는 바텐더만이 만들 수 있으니까요.”

!

“바텐더는 기술이 있어서 맛이 다르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네. 다루는 얼음의 온도, 또 녹는 물의 양. 거기에 섞이는 회전의 수까지. 바텐더라면 각자 달라도 자신만의 계산이 있는 법입니다. 바텐더의 수가 백 명이라면 마티니의 맛도 백 가지라는 유명한 격언도 있을 정도니까요.”

영균은 멋들어지게 마티니를 설명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웃지 못한다.

정환이 하는 말을 전부 들은 영균의 머리에는 아들의 의도가 보여왔기 때문이다.

정환은 아직, ‘바’라는 곳을 영균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녀석, 아직도 내게 바를 보여주려···’

지난 이야기를 듣고도 아들은 느끼는 게 없는 걸까. 영균의 마음이 조금 씁쓸해지려 했다.

‘···그래. 우선은 마셔보마. 그리고···’

별다를 게 없다면 그때는 확실히 널 설득해 집으로 데려가겠다.

영균은 그런 마음을 먹으며 눈에 힘을 줬다.

“앞서 말씀드린 것 외에도 마티니가 유명해진 이유는 많습니다.”

보내오는 따끔한 눈빛에도 바텐더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지거라 불리는 계량컵을 들어 술을 몇 잔 계량하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

“대중 매체에 많이 등장한 칵테일이기 때문이죠. 007시리즈. 혹시 보셨나요?”

“아, 설마?”

007시리즈란 말이 나오자 영균이 눈을 번쩍 뜬다. 무언가 생각도 못 했던 걸 들은 이의 표정을 보여주는 영균.

“거기 나오는 술이 마티니였나? 젓지 말고 흔들어서. 분명 그런 대사였지, 아마.”

영균은 눈에 힘을 잔뜩 주던 것도 잊고 옛 명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요즘에도 인기가 있다지만, 007시리즈의 전성기는 분명 이들, 아버지 세대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계셨군요. 베이스가 되는 술이 진에서 보드카로 바뀌긴 하지만, 거기 나오는 술의 이름도 마티니가 맞습니다.”

“어찌 본드를 모를까. 그래, 마티니였어. 그 술이. 본드가 매번 같은 대사로 주문하곤 했지.”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일 겁니다. 아마.”

“흠, 우리 때야 자막으로만 봐서 영어는 모른다. 그래도 분명 그런 대사가 있었던 건 같구나. ‘젓지 말고 흔들어서.’ 자막은 그랬지.”

“제임스 본드의 배우는 바뀌어도 그 대사는 한동안 바뀌지 않았다죠.”

“그래. 그랬던 거 같구나. 아, 물론 네가 아는 본드와 내가 아는 본드는 배우가 다르겠지만.”

“피어스 브로스넌인가요?”

“아니, 그 이전. 정확히 이름이 떠오르진 않지만···, 얼굴에 작은 점이 있는 쾌남이었지. 턱도 두 개였고.”

“로저 무어군요.”

“음, 그랬나? 그런 이름이었던 거도 같고. 닮고 싶었지. 멋의 상징이었으니. 누가 싫어했을까. 그 정의의 사도를. 한량 시절에는 그렇게 사는 인생도 꿈꿨었지.”

“제임스 본드를 좋아하셨군요.”

“흠, 열렬한 팬은 아니었어도, 좋아했다. 동경했고. 허허. 그나저나, 너랑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전 생에서도 또 지금까지도. 영균과 정환은 옛날이야기라는 걸 나눠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을 기준으로 본다면 정환은 수험생을 끝내고 들어간 대학 생활, 그것도 자취를 거쳐 군대에 다녀왔다.

아버지와 평범한 대화도 재밌게 나눠보기엔 부족했던 시간.

이전 생 역시 이는 마찬가지였다. 감정이 한 번 격해진 후로는 해외에 살며 겨우 안부나 주고받던 사이가 영균과 정환의 사이였을 뿐이다.

“평범한 일입니다. 바에서는 늘 이렇게 손님과 마실 술에 대한 잡담을 나누니까요.”

영균의 기분이 조금 아련해지려 할 때, 바텐더는 그런 기분을 깨고 만다.

정환은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지만, 이를 듣는 영균의 표정이 굳는다.

아차! 하는 빛이 스친 듯한 영균의 얼굴. 아들이 또 바라는 곳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만 같아, 영균은 얼른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눈빛을 가져온다.

어느새 술을 모두 계량한 정환의 손이 얼음을 넣고는 셰이커의 뚜껑을 닫는다.

영균은 조금 전 들었던 설명과 다른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보여준 도구와 다른 거 같구나.”

정환은 마티니를 설명하며 믹싱 글라스와 바 스푼을 들어 영균에게 보여줬었다.

헌데, 지금 정환이 드는 건 믹싱 글라스가 아닌 셰이커.

잘은 몰라도 두 개가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영균이었다.

- 씨익.

정환은 한 번 웃고는 셰이커를 들어 올린다. 아직 셰이킹을 시작하진 않은 상태.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마티니를 대접하려 합니다.”

자신이 만들 술을 관해 설명을 이어갔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눴던 007시리즈 속에 등장했던 마티니.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시는 보드카 마티니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물론, 젓지 않고 흔들어서.”

!

영균의 눈에는 작은 기대감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함께 걸린다.

무슨 마티니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그저 바에 대해 알게 해주려는 술인 이상 어떻게든 아들을 끌고 갈 생각은 여전하니까.

그래도 본드, 제임스 본드가 즐겨마시는 그 마티니라면. 한 번쯤은 맛보고도 싶은 영균이다.

정환은 그런 아버지의 잡념을 날리려는 듯, 경쾌한 소리로 셰이커를 흔들기 시작했다.

- 샤카! 샤카! 샤카!

경쾌하게 앞으로 뻗어 나가는 정환의 손. 무언가 평소보다 과하게 하는 건 없다.

그저 늘 하던 대로. 그런 모습으로 정환은 셰이커를 쥔 손을 강하게 내뻗을 뿐이었다.

다만, 이를 바라보는.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은.

‘······!’

그 모습이 너무나 화려하게 보여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잘한다. 바텐딩이란 걸 모르지만, 영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어떤 업종이나 분야든 멋들어진 자세와 절도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실력이란 게 꼭 필요한 법이니까.

언제부터 아들이 저런 걸 준비해온 걸까. 이제는 그런 생각까지 드는 영균의 머리.

드럼이라는 악기를 연주해본 그는, 한 사람의 자세가 저런 균형을 잡을 때까지 수없이 많은 연습이 필요함을 모르지 않았다.

‘한순간의 헛바람은 아니란 건가···.’

아무래도 아들이 바텐더라는 직업을 준비한 건, 제법 오래전부터였을 지도 모르겠다.

- 샤카! 샤카! 샤카!

경쾌한 셰이킹 소리는 몇 번을 더 울리고야 끝난다. 조금 긴 이 셰이킹은.

- 차악!

하는 소리로 끝나더니,

- 촤르르르륵!

하는 소리로 이어지며 잔을 향해 간다. 투명하지만 약간의 색을 머금은 술이 아래로 떨어졌다.

- 샤악.

마지막은 레몬 껍질에서 뿜어지는 옅은 오일 조금. 정환은 한 번 짜낸 레몬 껍질을 꼬아 보드카 마티니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잔의 완성이었다.

- 스윽.

“보드카 마티니, 나왔습니다. 젓지 않고 흔들어서.”

차분하게 잔을 밀며 서빙 하는 바텐더의 모습. 영균은 넋을 잃고 보던 기색을 얼른 지우고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게 보드카 마티니···. 그래. 영화에서 보던 그 투명한 술이구나.”

평범하다. 겉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그저 투명한 액체에 잔이 조금 이쁘다는 것이 전부.

허나, 이게 자신의 우상이 마시던 그 술이란 생각이 드니, 그의 입에도 군침이라는 게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마시면 되는 거냐?”

“코로 향을 한 번 맡으시고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드신 후 코로 바람을 내쉬면 잔향이 올라올 겁니다. 독하니 나눠서 드시죠.”

바텐더의 말이 끝나자 영균은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그리고 전해지는 시큼한 과일의 향.

!

영균은 고개를 들어 바텐더를 바라봤다. 드라이하다고. 텁텁하다고. 또 독하다고.

온갖 겁이란 겁을 준 술에서 올라온 상큼한 향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드시는 마티니기에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포도를 원재료로 만든 시락(Ciroc) 보드카를 베이스로 강하게 흔들어봤습니다. 강하게 흔들면 기포가 섞여 독기도 사라지고 원재료의 향이 올라오는 편이라서요.”

정환은 그런 영균에게 파란 병에 담긴 시락 보드카를 보여주고는 해맑게 웃었다.

여느 바텐더와 같은 모습이다.

“흠. 어디 그럼.”

향에서 독기가 빠지니 망설임도 사라진다. 영균은 그대로 잔을 입으로 향했다.

시원한 액체가 입술을 타고 넘어 영균의 혀를 감싼다.

독하다. 들은 말처럼 술이란 단어에 잘 어울리는 독기가 혀를 반겼다. 허나, 그리 역하지는 않은 독함.

앞서 코를 간지럽힌 미세한 과일 향 덕에 독함은 제법 기분 좋은 통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 후우우우.

어렵지 않게 이를 비워내고 잔향을 뿜는 영균. 뒷맛 역시 포도 향이 살며시 올라와 혀를 진정시켜준다.

씁쓸하고 무겁지만, 타협이 가능한.

그리고 다른 독함에 비해 기분이 좋은 독함이 영균을 채웠다.

영균은 잠시나마, 자신이 제임스 본드가 된 거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맛은 어떠신지요?”

“맛있구나. 술이란 걸 이렇게 맛있게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확실히 맛있는 술이다. 과연 본드가 좋아할 술이구나.”

“감사합니다.”

절제되었지만 나름의 극찬을 듣고야 정환이 밝게 웃는다. 맛에 더해지는 본드 이야기까지 바텐더로서는 만족할 반응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게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그 한 잔이냐? 바를 알려줄 수 있는 잔? 손님과 즐겁게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기억을 불러와 또 그 술을 내어준다. 멋들어진 자세와 실력까지 보여주고. 그게 바라는 곳이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냐?”

“······.”

“아쉽구나. 그게 끝이라면.”

잔을 내려놓고 이어가는 아버지의 말이 그의 웃음을 깨트린다.

그는 잠시간 느꼈던 제임스 본드의 환상에서 금방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이 술을 마셨음에도. 아니, 마셨기에. 난 생각에 변화가 없다. 환아. 실력, 좋더구나. 안다.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

자그마치 12년이다. 영균은 알 리가 없다.

“잠시간 옛 추억에 젖기도 했고. 다만, 그런 모든 조건 속에서도. 아비는 네가 아직 저 술들 사이에서 일하는 걸 막고 싶다. 이렇게 맛있는 술이라면 더욱 유혹은 강해질 테니 말이다.”

영균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절제했다. 여전히 단호한 영균에게 정환은 무어라 답할까.

영균이 답을 기다릴 때.

“아닙니다.”

바텐더는 조금 다른 답을 들려준다. 웃음기를 지웠지만,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하다.

아직은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뭐가 아니란 말이냐?”

“저 술을 만들어 드린 이유가 바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단호한 바텐더의 답에 영균이 얼굴로 재차 묻는다. 그의 얼굴에는 ‘그럼 왜?’라는 표정이 걸려있다.

그러자.

“제가 저 잔을 대접한 이유는 그저 손님께 저 한 잔이 제일 어울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

바텐더는 조금 큰 한 방을 보여준다.

영균은 잠시 시선을 둘 곳을 잃고는 여기저기 눈을 굴려본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바 안을 방황했다.

“그게 무슨···?”

“한 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구요. 그래서 제가 느낀 걸 잔으로 풀어봤습니다.”

“······.”

앞서 영균은 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흘렸다고 생각했다.

바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 안달 나 흘렸다고. 그런 건 아니었던 걸까.

영균의 머리가 복잡해질 때.

바텐더가 다시 입을 연다.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마티니를 주문하는 말, 기억하십니까?”

“벌써 잊었을까. 젓지 말고 흔들어서. 였지. 분명.”

“영어로는 Shaken, not stirred. 라고도 말씀드렸었죠.”

“흠. 그랬었지.”

“간단히 해석하면 젓지 말고 흔들어서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또 다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뜻···?”

“영화에도 나오는 표현입니다. ‘Shaken, but not stirred.’란 형식이었죠. 적들이 제임스 본드를 칭하기도 하는 이 말의 다른 뜻은···”

정환은 한 번 뜸을 들이고는 영균과 눈을 맞췄다.

“‘흔들릴지언정, 뒤섞이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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