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잔. 바텐더의 방식.
4.
일정까지 바꿔가며 당당히 다녀왔던 본가.
허나, 정환은 그런 본가에서도 기대했던 결과를 내진 못했다.
회귀라는 걸 하고 난 후 승승장구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던 나날이었다.
모든 건 정환의 뜻대로 흘러갔고, 정환이 그중 놓친 거라곤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제법 무겁고도 아린 문제만 빼고는 말이다.
정환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아르센으로 향했다.
“왔어? 집은 잘 다녀왔고?”
그런 정환을 반겨주는 또 다른 식구들.
먼저 출근해 있던 기준은 반갑게 정환을 보며 안부를 묻는다.
“어, 정환이 왔어?”
그리고 백사이드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빼보는 정우와 명진.
무거운 발걸음 때문인지 오늘은 정환이 제일 늦은 모양이다.
다들 정환이 어제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고 있다. 모두의 표정에 궁금함이 맺힐 무렵.
정우가 백사이드에서 완전히 나오며 정환을 반긴다.
“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 보이는데? 대화가 잘 풀린 모양···”
무언가를 옮기며 언뜻 정환을 살폈던 정우. 그런 정우의 시선이 정환의 얼굴에 닿자.
“···은 아닌 것 같네···. 응.”
“다녀···왔습니다. 옷···갈아입고 올게요.”
그의 말이 행로를 틀어버린다. 딱 보기에도 정환의 얼굴에 그늘이 깊어 보였기 때문이다.
“···안 좋은 거 맞지?”
“그렇게 보이네요···. 그래도 다시 온 게 어디에요.”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나. 제법 친하고 가깝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다.
가족 사이의 일에는 함부로 입을 대기 조심스럽다.
“힘···내자! 응? 뭐, 그, 뭐라더라? 그래! 자식 이기는 부모님 없다잖냐! 힘내! 그래!”
“그게 지금 할 말은 아니죠···”
“그, 그런가?”
“······.”
“······.”
내공이 부족하다. 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바텐더를 찾아본다.
이곳에서 가장 내공이 깊고 또 경력이 오래된 바텐더, 마스터 이명진을 말이다.
무어라도 힘을 좀 실어달라, 그런 간절한 눈빛이 명진을 향했다.
정환은 축 처진 어깨로 백사이드를 빠져나왔다.
“···가셨던 일이 잘···안 된 모양이군요.”
명진 역시 조심스러운 건 마찬가지. 어떻게든 정환의 처진 어깨를 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는···않네요. 그럴 걸 알았지만요.”
그래도 명진은 명진이다. 그나마 정환이 의지할 경력에, 실력을 갖춘 이가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
다른 선배들의 말에는 애써 괜찮다며 반응하던 정환이 명진의 앞에서는 살짝 입을 열어 본다.
정환은 정성스레 잔을 닦는 명진의 옆에서 어제 있었던 일을 술술 풀어가기 시작했다.
“···해서, ···하니까, 저도···되더라구요. 네. 제 잘못도 큽니다. 근데, 또···”
정환은 마치 하소연하듯 명진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들어주는 명진.
잔을 닦는 그의 손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다.
“그랬습니다···. 네.”
“흠. 그랬군요.”
말이 끝나고도 명진의 반응은 여전하다. 그저 듣기만 하려는 걸까.
정환 역시 별다른 기대를 안 하고 있던 그때.
“조금 이상하군요.”
!!
명진의 입이 떨어지고 정환의 고개가 돌아간다.
“네?”
“아뇨. 별다른 뜻은 아닙니다만···. 제가 평소 알고 있던 정환 씨와는 달라서···”
말꼬리를 흐리는 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 나쁜 미소는 아니다. 마치, 누군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어 그를 귀여워하는 표정이다.
“···바텐더와 아들은 다르니까요, 아무래도.”
정환은 그런 명진의 말뜻을 모르진 않았다. 바텐더로서만 보던 것이 이들의 모습.
이들은 서로의 바 밖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
막내답지 않은 모습만 보이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귀여워하는 거라. 정환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도···, 이상하긴 합니다. 적어도 바텐더 차정환 씨라면, 그렇게 대화를 시도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명진의 말.
“어제···는 아들이었으니까요.”
“흐음.”
명진은 고개를 돌리고 정환을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정환 씨는···, 어떤 손님이 만족시키기 편한가요?”
“네? 갑자기 그걸 왜···?”
왜 묻냐는 말에 명진은 그저 따스한 시선만 보낸다. 묻는 말에나 답하란 뜻이다.
“···아무래도 잘 아는 손님일 거 같습니다. 그분의 배경, 또 취향 등등을요.”
“그래요. 그런 분이 편하죠. 바텐더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손님의 배경에 맞춰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또 그에 맞는 잔을 내어주고. 그게 바텐더의 일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헌데···, 어제는 그러지 못한 거 같군요.”
!!
“어···, 그건···”
“왜 반대하시는지···, 무엇이 그리 문제인지. 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요. 들으려 한 것 같지도 않고.”
“네···.”
“바 밖에서까지 바텐더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저도 추천하지는 않아요. 다만···”
명진은 이제 완전히 몸까지 돌리고는 정환을 바라본다. 얼굴에는 여전히 인자한 표정이 걸려있다.
“적어도 바텐더와 관련된 일이라면···, 또 바텐더로서 인정받기 위한 일이라면. 한 번쯤은···, 바텐더의 방식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명진은 마치 지나가는 말인 듯 눈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명진을 바라보는 정환의 눈에는 무언가 확신 같은 것이 서린다.
마치, 듣고 싶었던 말을 후련하게 들은 이의 표정이다.
“역시 그런가요.”
“이미 알고 계셨던 거 같군요.”
“뒤돌아서고 나서야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습니다. 이미 늦었었지만요. 확신도 없었고···”
“음, 제가 괜한 말을 한 건가요?”
“아뇨. 확신을 주신 거 같아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정환도 이런 방법을 떠올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바텐더처럼 다가가 바텐더처럼 대화하는 방식.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환은 어제 어머니 이선진의 손에서 명함을 본 순간 바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면 이라는 상황을 짧게나마 떠올려 봤었다.
정환이 명함을 두고 온 이유 중 이런 이유가 있기도 했고.
주된 목적은 일하는 곳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고. 요즘의 바는 이렇다고.
주된 의도는 그런 의도였지만, 그 속에는 바텐더로서 아버지를 마주해보고 싶다는 마음 역시 없진 않았다.
“떠나기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다시 해드려야겠군요. 한 번 더 다녀와요. 당당하게. 아르센의 ‘바텐더’로.”
명진은 바텐더라는 말에 힘을 주며 정환의 어깨를 다독인다.
제법 멋진 모습이다. 한 번 실패를 겪은 제자를 다독여 다시금 도전하게 만드는 그런 멋진 모습.
하지만.
“저어···, 그래서 말입니다만···, 마스터.”
“네? 더 하실 말씀이라도?”
“굳이···, 다녀오진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
이어지는 정환의 말이 명진의 훈훈함을 조금 깨트린다.
정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명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점점 굳어지는 명진의 얼굴.
“······!”
명진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말없이 고개를 절레 흔드는 모습이, 아니지? 라고 되묻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환은 야속하게도.
-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들은 게 맞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이제는 손까지 올리며 손사래 치는 명진의 모습.
둘 사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정우와 기준은 명진의 이런 모습을 거의 처음 보는 것만 같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저러셔?”
“당황···하신 거 같은데요?”
“에이, 마스터가 당황? 설마?”
이들이 다시 명진과 정환에게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한숨을 푹 내쉬는 이가 정환에서 명진으로 바뀌어 있다.
5.
“저, 정우 씨! 이곳. 그리고 저곳. 먼지가 너무 많습니다. 청소를 다시···. 기준 씨. 오래된 집기는 안으로 넣으세요. 잔도 한 번 더 닦아야겠습니다! 저, 정환 씨! 옷! 옷에 주름이···!”
당황스럽다. 아르센에 제법 다녀본 손님 중 오늘 아르센을 방문한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말을 머리로 떠올리고 있다.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인자함과 여유로움을 간직한 이가 아르센의 마스터 바텐더 이명진.
그런 명진이, 지금은 안절부절못하고 조금은 산만한 모습이다.
“저기, 무슨 일 있나?”
손님 중 한 사람이 정환에게 말을 묻는다. 정환은 그저 죄스러운 표정만을 지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별일···, 예. 아닐 겁니다···. 제가 말을 잘못 전한 듯합니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마스터가 저러시나? 통 당황하지 않는 분인데.”
“······.”
손님의 물음에는 답해야 한다. 이건 바텐더의 기본임에도 정환은 아무런 답을 할 수 없다.
명진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마스터.”
“네, 정환 씨. 셔츠는 갈아입으셨나요? 아니, 아직···”
“오늘이 아닐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안 오실 수도···”
“오늘일 수도 있고, 오실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군요.”
“그게···”
괜히 말했나. 정환은 그런 생각마저 하며 죄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저 추측이기는 했다. 그래도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라면, 자신이 남긴 그것을 봤을 때 한 번쯤은 찾지 않을까, 정환은 그렇게 예상했기에 마스터에게 미리 언질을 준 것.
헌데, 그 언질이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것만 같다.
“가, 갑자기 왜 이러셔?”
“모릅니다. 저도.”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한데?”
“그러니까요. 오늘따라···”
과하게 가게 모습에 신경 쓴다. 마치 별이라도 내려오는 군부대의 모습처럼, 명진은 안 하던 행동마저 하고 있다.
“진짜 누가 오나?”
“에이, 누가 온다고 이렇게 신경까지 쓰실 분은 아니죠.”
“그렇긴 한데···”
그렇게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그때.
- 딸랑.
아르센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걸음 소리.
- 뚜벅, 뚜벅, 뚜벅.
남성용 구두 특유의 둔탁한 소리가 중년의 남성이 이곳을 향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보다 먼저 들리는 소리는.
- 꿀꺽.
하는 긴장감이 가득 담긴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 의외로 이 소리는, 명진의 목에서 나는 소리다.
걸음 소리가 멎고 복도 끝에 실루엣이 보일 때가 되어서야.
“휴.”
하는 명진의 안도와 함께.
“오셨군요, 교수님.”
다른 바텐더들의 인사가 발한다. 아르센을 찾은 이는.
“오늘도 또 왔네. 허허!”
정환의 초대 이후 이곳을 매일같이 들르는 김태현 교수였다.
“나도 왔네만. 크흡.”
그리고 연달아 들어오는 지동철 교수의 모습. 두 교수는 언제나 아르센에 함께 찾는다.
이는 정환이 없었던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아, 지 교수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죠?”
기준과 정우는 반갑게 이들을 맞이했다. 정환이 없던 동안에도 두 교수는 아르센을 찾았었다.
두 교수는 자연스레 붙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보낸다. 이들이 앉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반응하는 바텐더들.
“방금 마스터 긴장하신 거 봤어?”
“당황도 하신 거 같았어요.”
“맞지? 이런 모습 처음인데?”
“저도 처음 봅니다.”
“야, 내가 처음이면 너도 당연히 처음이지.”
“아무튼요.”
“진짜 뭔 일이 있긴 있으려나 보다.”
“···저 녀석은 뭔가 아는 거 같은데요?”
작당모의 하듯 대화를 나누던 두 바텐더는 막내 바텐더 정환을 바라봤다.
명진의 눈치와 함께 자신도 잔뜩 긴장해 보이는 모습의 정환.
둘 사이에는 무슨 말이 오간 걸까. 이들은 머리를 뭉쳐봐도 이를 알 수가 없다.
“집에 다녀왔다지?”
“네. 교수님.”
“허락도 받으러 갔었고.”
“맞습니다.”
“잘···되었나?”
“아직요.”
“흠.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하게. 내가 이리 보여도 아직은 자네 학과의 교수가 아닌가.”
어제 이곳에서 정환이 부재한 이유를 들은 지동철과 김태현은 정환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정환의 모습에 그늘은 없다.
비록 개인적인 일이 있어도, 이를 손님 앞까지 가져올 정도로 정환은 어설픈 바텐더가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흠, 그러게나. 언제든지!”
“나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게. 나 역시 이쪽 방면에서는 교수네, 나름.”
지동철과 김태현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잔을 들이켠다. 이들에게야 그저 지나가는 말이다.
실제로 정환이 집까지 가서 이들을 찾을 일도 없을 거고.
그럼에도, 말로나마 아군이 있노라, 힘을 실어주고 싶은 두 교수였다.
평범한 바의 모습이 계속된다. 문이 열릴 때면 명진이 조금씩 당황하긴 했으나, 그 또한 이제는 줄어든 상태.
이대로 아르센은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나 싶을 그 무렵.
- 딸라아앙.
유난히도 강하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아르센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린다.
- 저벅, 저벅, 저벅.
조금은 무겁게 복도를 걸어오는 걸음 소리. 걸음 소리에는 묵직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으로 보이는 신형이 복도 끝에서 나타난다.
고상한 인상에 눈썹이 짙은 중년인의 모습. 눈빛이 살아있어 기운이 넘쳐 보이고 고집도 있어 보였다.
누군가와 닮은 듯 제법 잘생긴 외형의 중년인.
처음 보는 손님의 모습에 기준은 얼른 나가 그를 맞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을 막는 누군가의 손.
아르센의 막내, 정환의 손이다.
자신이 나가려는 걸까, 기준은 눈으로 왜 그러냐는 신호를 연신 보내본다.
“뭐해? 나가야지?”
정우 역시 다가와 둘 사이로 끼어든다. 기준과 정우가 눈치를 보며 손님을 향하려 할 때.
“아버지···.”
!!!!!!!!!!!!
정환의 입이 열리자, 그 자리에 있던 바텐더와 손님 모두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명진의 눈마저 찔끔하고 감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