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잔. 가족.
2.
- 덜컹. 덜컹.
흔들리는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어쩌면, 익숙하다는 말조차 착각일지도 모른다.
십 년이란 세월이면 강산이 변한다. 정환은 이미 15년 후의 풍경이 익숙한 사람.
15년 전 고향의 풍경을 보는 그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그 풍경을 눈에 담고 있다.
덜컹거리던 버스가 터미널에 닿는다.
터미널에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길.
대로변의 시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춰 시청 청사를 바라봤다.
‘아버지···’
시청을 보면 떠오르는 이는 자신의 아버지.
지금 정환이 만나러 가는 그 사람이다.
정환의 아버지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그 시절에 공무원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다만, 기억이 있는 시절부터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
정환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업과 가정의 형편은 그러했다.
남들이 다 다니는 학원을 정환도 다녔고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적절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대학 역시 학자금 대출 없이 다닐 수 있었으며, 이 역시 부모님의 지원 덕분이었다.
정환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며 집으로 향하는 이유 역시 이것.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그 대학에 맞는 길을 가다 중간에 이탈했다.
이를 부모님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난 경험을 살펴보면 그리 유쾌하게 받아들이시진 않을 것같다.
철없던 시절처럼 한 몇 년을 숨기는 것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허나, 이미 그런 경험이 있는 정환은.
가족과 연이 끊겼던 그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직접 부딪히자. 깨지더라도···.’
정환은 주먹을 꽉 쥐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 네가 뭐가 부족해서! 왜 술을 따라!
이전 생에서 아버지는 바텐더를 그저 술 따르는 이라 불렀다. 이해는 한다.
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거기에 정말 의외의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입에 술을 잘 대지 않는 분이셨다.
어려서 정환이 봐왔던 아버지란 분은 그런 분이셨다.
술을 아예 드시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가끔이지만 얼큰하게 술에 취해 잔뜩 기분이 상한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삶을 사셨기에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허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께서는 그저 ‘술’과 관련된 무언가에 반감이 있다는 것. 그게 정환이 아는 전부였다.
이전 생에서 나눴던 깊은 대화 중에도 이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그때는 그저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고, 업계에서 성장 중인 자신의 위치를 설명했다.
시간마저 제법 흐른 후였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해를 받았던 지난 생.
이제는, 그런 것 없이. 정환은 한 명의 바텐더로서 아버지와 마주하고 싶다.
이전처럼 업계에서 인정받은 명성은 아직 없다. 또, 그때는 취득했던 자그마한 학위도.
어쩌면, 그에 더해 그나마 적을 두었던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까지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은 험난할 것 같지만.
정환은 이에 도전하려 한다.
생각이 그쯤에 닿을 때.
정환의 앞에는 익숙하고도 그리운. 그리고 지금은 조금 두려운.
자신의 본가라 불리는 작은 단지의 아파트가 놓여 있었다. 무거운 걸음이 아파트의 입구를 향했다.
3.
“시끄럽다! 나가! 나가란 말이다!”
아파트 단지를 울리는 큰 소리에 몇몇 집은 아마 창문을 닫았을지도 모르겠다.
고요하고 평화롭기로 유명한 한 집에서 높은 음성이 터져 나온다.
“나가!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아버지. 대화를 하셔야죠. 말씀드리려고 온 거잖아요.”
“그걸 왜···!”
정환의 아버지 차영균은 혈압이 오르는 듯 뒷목을 잡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마, 왜 이제야 말하냐. 그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이제라도 말씀을 드리려는 거예요.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해요.”
“네가 얼마나 부모를 가볍게 생각했으면 그랬겠느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러실 줄 알았으니까요.”
“알았어도! 거기에, 뭐? 바텐더? 바텐더!”
영균은 연신 몸을 크게 부풀리며 소리를 질렀다. 울긋불긋한 그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하다.
당연한 모습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피땀 흘려가며 모은 돈으로 편안한 미래를 준비하라며 교육시킨 아들이 그간 걸어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걷겠다는데 어느 부모가 평온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부모가 있을 수는 있다 해도, 영균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바텐더···가 어때서요. 아버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정말로.”
처음에는 논리적인 말을 준비했던 거 같다. 정환은 분명 그랬다.
이전 생에 겪었던 일도 있고 또 나눴던 대화들이 있으니까.
헌데, 이미 나이를 먹었어도, 또 경험이 있어도. 가족 사이의 일과 대화라는 건 언제고 준비한 것처럼, 또 마음먹은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반대할 것쯤은 예상했다. 헌데도 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니 반발심마저 드는 것도 사실.
정환은 처음 준비했던 말들은 잊은 채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언쟁을 나누는 중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술···! 그놈의 술···! 그것도 모자라 술을 따르는 직업을 하겠다니! 네가 왜! 네가 뭐가 모자라서!”
“모자라서가 아니라 뛰어나서라고 생각해주셔야죠. 아들이잖아요. 제가 잘하는 일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술 따르는 걸 잘하는 게 자랑이더냐?”
“···그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평범하게 살란 뜻이다! 평범하게! 이제까지 잘 해왔지 않냐? 왜 갑자기 헛바람이 들어 이러는 거냐?”
“헛바람 아니에요. 진지합니다, 저는. 바텐더가 뭐가 어때서요, 아버지.”
“술이 좋거든 차라리 마시기를 하거라! 사람들이 바텐더를 어떻게 보는지를 네가 몰라서···! 그런 취급을 받으라고 널 키운 게 아니다! 내가 왜···!”
“아버지···!”
직업에 대한 자부심 정도는 정환에게도 충분히 있었다. 이런 말들을 들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날 선 말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나오니, 정환 역시 감정적인 대처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잘 설득하리라. 진심을 전하리라.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정환은 아버지와 눈빛을 맞추며 대립하는 중이다.
바텐더로서 차정환과 아들 차정환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제발 그만들 해요. 제발!”
그리고 여느 집안처럼 이런 이들을 말리는 건 어머니의 역할.
정환의 어머니 이선진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며 울먹이는 표정을 지어본다.
“정환 아빠! 왜 애한테 소리만 지르고 그래요! 말로 하자잖아요, 말로. 정환이 너도! 아버지한테 미리 말씀도 안 드려놓고 이제 와 뭐가 이렇게 당당해? 우리가 모든 걸 해주진 못했어도 네가 뭘 하고 살지! 그걸 들을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니?”
“······.”
“······.”
적당히 끼어들어 맞는 말만 하는 선진의 말에 두 사내는 꼼짝할 수 없다.
영균은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였고 정환은 고개를 숙인 채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였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다.
한동안의 소강이 이어지려 할 때.
“···가거라. 바텐더인지 광대인지! 그리도 하고 싶거든, 네 맘대로 살란 말이다!”
영균은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 쾅!
하고 닫히는 방문의 소리에는 노기와 함께 섭섭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함께 서려있다.
“저이는 맨날···”
옛날 사람이라서일까. 아버지는 늘 그랬다. 화가 나고 감정이 올라오면 상황을 피한다.
대화를 나누려던 정환도, 또 이를 중재하려던 선진도. 자리를 떠나버리는 영균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 이런 식이네요···.”
여기서 말하는 ‘또’가 언제인지는 정환만이 안다. 오늘 있었던 일이야 정환의 실수도 적진 않았다.
허나, 이미 자리를 떠나버린 사람 앞에서 무얼 더 할 수 있겠나.
“우선 가. 여기 머문다고 해결될 일 아닌 거 알잖니? 우선 가. 그리고 다시 오너라. 대신···, 그때는 너도 태도는 고쳐야 해.”
“···네. 엄마. 아버지께 말 좀 잘 해주세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네 아빠 편이다. 바텐더? 환아. 오래 생각은 한 거니? 너 이제 전역한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정환이야 이미 십 년이 넘게 바텐더로 살아왔고 그 이전에도 오래도록 직업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있었다.
단지 그게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 몇 달 만에 결심하고 직업을 정한 것처럼 보이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생각보다 일하는 곳에서도 인정받고 있고요. 미래까지 그려보고 있어요. 제 가게도 하나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목표도 있어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아버지보다는 편해서일까. 정환은 준비했던 말을 아버지 앞이 아닌 어머니 앞에서야 술술 풀어놓기 시작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선은 아들을 토닥여 보는 선진.
“생각이 없진 않았다는 말이구나. 그래···. 아버지께도 차라리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
“들으려고 하시질 않으니까요···.”
“네가 이해하거라. 아버지···도 이유가 다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 이유가 대체 뭘까. 이전에도, 또 지금도 듣지 못한 정환은 그저 입을 삐죽일 뿐이다.
비범한 바텐더도 바 밖에서는 그저 평범한 아들로 변하고 만다.
“엄마가 잘 좀 말해주세요.”
“내가 말한다고 들을 사람이니?”
“그래도요···.”
“네가 해결해야지. 네가 한 일이고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
“···엄마.”
아직은 대학생이고 어리다는 이유 때문일까. 이전에는 따쓰히 편을 들어주던 어머니의 태도가 단호하다.
“다시 아버지 뵙고 말씀드려. 우선 오늘은 돌아가고. 여기 더 있다고 해결될 사람 아냐, 너희 아빠.”
“네···.”
“주말에는 다시 올 수 있지?”
“아뇨. 주말에는 바빠서···”
“주말도 없는 일이니, 그 바텐더라는 건?”
“손님 맞는 일이니까요.”
“참. 나도 모르겠다. 환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올게요.”
“그래. 아빠랑 엄마 입장도 잘 생각해보고.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갈게요.”
어머니의 입에서조차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정환은 말을 끊었다. 가겠다는 말만 남기는 그.
어머니 이선진의 말처럼,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다고 아버지는 마음을 돌릴 사람은 아니었다.
정환 역시 알고는 있었다. 첫 대화에서 아버지가 마음을 돌리고 인정을 받는 그런 시나리오는 없을 거란 걸.
그저 오늘은 뜻을 전했노라.
거기서 만족하며 정환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렇게, 신발장에 몸을 기대 나갈 준비를 하던 정환.
“가게는 괜찮은 곳 맞니? 일은 안 힘들고?”
그런 정환의 옷깃을 어머니 이선진이 잡아본다.
“좋은 곳이에요. 다들 잘 해주시고요.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야죠. 근데, 그것마저 편의를 봐주셔요.”
“술 근처에서 일하면 거친 일이 많다더라···. 일이야 어떻게 되든 늘 몸조심하고. 험한 일 당할 거 같으면 언제든 그만두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 없어요.”
“그래도···”
선진은 못내 아들이 걱정이 모양이다. ‘바’라는 곳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곳이 그저 어둡고 유흥가와 관련 있다는 사실밖에는 떠올리지 못한다.
“······.”
정환은 조용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아린 걱정이 정환에게도 보일 무렵.
정환의 주머니 속 손에 작은 상자가 하나 닿는다.
전날 명진이 가져가라던 자신의 명함이다. 정환은 손으로 그걸 쥐고는 밖으로 꺼냈다.
“여기, 제 명함이에요. 무슨 일 있거나 걱정되면 여기로 전화하세요.”
“명함···? 벌써 명함이 나왔어?”
“인정···받고 있다니까요.”
정환은 명함을 선진의 손에 건네면서야 조금 자신 있게 웃어 보인다.
명진이 준 명함 덕에, 그래도 조금의 체면치레는 할 수 있는 정환이다.
“엄마. 걱정하지 마요. 다시 올게요. 아버지···랑 다음에는 대화로 잘 풀어 볼 거구요.”
“그래. 믿고 기다릴게. 네 아버지도···내가 잘 다독여보마.”
선진은 아들이 건넨 명함을 중요한 문서라도 되는 듯 꼬옥 손에 쥐고는 정환을 안아줬다.
현실적인 일들이야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
그래도, 선진은 정환의 어머니였다.
한참을 어머니의 품에 있던 정환. 그런 정환의 눈에 어머니 손에 꽉 들린 명함이 들어온다.
그리고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빛.
“저, 엄마.”
“응. 환아. 왜?”
“이거 하나 더 받으세요.”
그리고는 선진에게 하나의 명함을 더 건네는 정환.
“명함? 이미 하나 받았잖니?”
“아뇨···. 이건···.”
정환은 말로 하는 답 대신 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한 방을 바라봤다.
굳게 닫힌 문이 유독 외로워 보이는 한 방. 아버지, 차영균이 들어간 방이었다.
“그래···. 네 아버지께도 한 장 드려야지.”
“네. 꼭 좀 부탁드릴게요.”
“녀석, 그게 그리도 자랑하고 싶었니? 알았다.”
딱히 자랑하려거나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건 아니다. 그저 정환이 이 작은 명함을 아버지에게 전달하려는 건,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이걸 보신다면···. 그래 거기서라면···.’
자신의 이름이 멋들어지게 적혀 있는 그 아래에 살짝 시선을 주는 정환.
정환은 그 명함을 어머니에게 꼭 쥐여주고 나서야 문을 나섰다.
한참을 아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선진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뒤로 돌아섰다.
널따란 식탁 위에는 멋들어진 아들의 명함이 놓여 있다. 영균이 나온다면, 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 끼익.
정환이 집을 나서고 얼마가 지난 뒤.
닫혔던 안방의 문이 열린다.
선진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간 걸까. 영균은 조심히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한 잔 꺼내 마셨다.
그렇게 냉수를 단박에 비워낸 영균의 눈에 무언가 작은 명함이 하나 들어온다.
마치 자신이 보란 듯이 선진이 둔 것같은 작은 명함.
조심히 이를 들어 살펴보는 영균.
그 명함에는.
- Arsene’s Bartender 차정환.
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다. 미세하게 올라가는 작은 입꼬리.
‘아르셍···?이라 읽는 건가?’
익숙하지 않은 글도 있어 어색하게 읽어보는 영균.
그런 그의 눈이 아들의 이름 아래에 적힌 작은 문구에 닿는다.
거기에는.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8*-*8, 1층.
이라는 한 가게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