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잔. 폭풍후야.
1.
“정환아. 사이드카랑 김렛, 모스코 뮬까지. 세 잔 부탁할게.”
“넵! 사이드카, 김렛, 모스코 뮬. 확인했습니다!”
평소랑은 다른 모습이다. 원래라면 주문을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바뀌어야 맞는 게 아르센의 풍경.
오늘은 기준이 주문을 넣고 정환이 이 주문을 받고 있다.
다른 건 그것만이 아니다. 주문을 넣는 기준의 말투 역시. 이전보다는 편해진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지 않았다.
주문을 받은 정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사이드카와 김렛을 만들 셰이커를 준비하고 모스코 뮬을 위해 머그잔을 차게 식혀두는 정환.
조금의 버벅댐도 없이 물 흐르듯 손을 옮기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를 지켜보는 아르센의 손님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정환 씨가 데뷔했었나···?”
“그러게···. 나도 오랜만이라서···. 이제 넉 달이 조금 지났을 텐데 어떻게 벌써···?”
그나마 아르센에 자주 찾던 단골들조차 어색한 풍경. 신입이 이렇게 빠른 기간에 칵테일 메이킹을 허락받았다는 건, 이들도 처음 보는 상황이다.
- 샤카! 샤카! 샤카!
정환은 그런 손님들의 어색함을 날려버리듯 경쾌한 소리로 셰이킹을 시작했다.
누구는 ‘벌써’라는 말을. 누구는 ‘설마’라는 말을. 그리고 누구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시선과 말은 곧, 정환의 셰이킹이 시작되자 쏙하고 들어간 지 오래다.
입을 꾹 닫은 손님들은 눈앞에서 정환의 실력을 보자 이내 의심이나 다른 말보다는 더 강한 감정이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맛보고 싶다!’
강한 식욕. 탐스러운 먹거리를 봤을 때 느껴지는 그런 욕망이. 바를 제법 다녀본 이들의 입가에 침으로 나타났다.
바텐더라는 이들을 제법 만나본 사람들에게는. 저 셰이킹 끝에 나올 술이 맛있을 거라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뭐···. 일한 기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렴. 아르센이 대충 넘어갈 곳도 아니고.”
“일단 마셔보면 알겠지.”
그들은 어느새 자세를 고쳐 안고 자신의 주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사이드카, 김렛, 그리고 모스코 뮬 나왔습니다.”
“음, 고맙네!”
“이야, 완성도가 꽤 높은데?”
“사이드카 색이 예술이네. 황옥빛이 그대로···!”
“모스코 뮬로 향이 아주 좋네. 이거 계피인가? 태운 불 향도 나고!”
잔을 받아든 손님들의 반응이 다양하다. 그리고 대부분은 호평 일색.
- 꿀꺽.
이들은 마지막 호평을 침 넘어가는 소리로 장식했다.
실물을 눈으로 접하니 욕구가 더욱 용솟음친다. 손님들은 서로의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그대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럽게 흘러드는 각자의 칵테일.
잔에서 입술로, 또 혀로, 그리고 목으로.
뻔한 과정을 거친 후 잔을 내려놓은 이들은.
“······!!!”
놀란 표정으로 연신 술값을 치른다. 이후에 쏟아지는 말들이 제법 많았기에, 정환은 전부 귀로 담지 못했다.
대부분은 맛있다는, 그리고 놀랍다는 당연한 말들이었다.
“입에는 맞으십니까?”
서로의 칵테일이 더 맛있다며 열변을 토하는 단골들. 그런 단골들의 앞에는 또 다른 바텐더가 다가섰다.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이다.
“아, 마스터! 이거 대박입니다! 정환 씨가 언제 이런 실력을···?”
“마스터가 직접 가르치신다더니 정말이었군요. 역시 아르센입니다.”
“자자, 마스터. 그러지 말고 이거 한 번 드셔보십쇼. 정말 예술입니다!”
과하게 쏟아지는 찬사에 명진이 기쁜 듯 인자한 미소를 더욱 진하게 했다.
손님들의 즐거움은, 곧 이 공간을 만든 이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다행이군요. 사정이 있어 급하게 데뷔하게 됐습니다. 미안한 일이죠. 손님들께는 죄송한 일이고. 그래도 입에 맞으시다니···, 부디 새 바텐더를 이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희야 좋은 바텐더가 늘어나면 마냥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하하. 새로운 바텐더가 나오면 언제나 즐겁지요.”
“아, 거기에 실력도 좋고. 허허허.”
아직은 바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게 그리 활발하지 않은 시기였다.
들어오는 이들이 있다고는 해도 금방 지쳐 떨어지거나 실력이 형편없는 경우도 다수.
흔히 말하는 ‘바 호퍼’나 ‘나이트 캣’처럼 바를 자주 찾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바텐더의 등장은 언제나 즐거운 요소였다.
거기에 실력까지 좋은 바텐더이니, 정환에 대해서는 더 말해 뭐하겠나.
어쩌면, 이들의 입을 타고 고작 넉 달 만에 프론트에 선 바텐더에 대한 소문이 곳곳에 퍼져나갈지도 모른다.
명진의 이쁘게 봐달라는 말 속에는, 그런 뜻도 함께였을 것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명진은 한 번 더 허리를 접고 정환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런 명진을 총총 뒤따르는 정환. 손님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대화를 꽃 피웠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하루라도 더 쉬지 않으시고요.”
“괜찮습니다. 정우 씨가 강권해 하루 정도 쉰 거니, 충분합니다. 병원도 이제는 지겹구요.”
“그래도···”
“아닙니다. 이게 더 편합니다. 걱정은···, 정우 씨가 더 걱정이죠.”
꼭 입원하라는 말을 남겼던 정우가 오히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발등이 시리다던 그는, 오늘 오후 병원을 찾아 한동안 목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정우 형도 참···, 그걸 모르다니.”
“오늘도 나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습니다. 우선은 한 며칠 푹 쉬게 할 생각입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아침에 오라는 말도 안 듣고 오후 늦게서야 병원에 왔더군요. 참, 정우 씨도···”
“······.”
오후 늦게야 병원에 왔다는 말에 정환은 입을 닫고 눈을 피했다. 정우가 오전에 병원을 가지 못한 이유는. 아침까지 다른 바텐더들과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명진이 소중하게 넣어둔, 귀한 술을. 그것도 25년짜리로.
몸이 좋지 않은 명진이 아직 두 번째 술장을 열어보지 않은 건 이들에게 행운이다.
“그동안 정환 씨가 고생을 더 해줘야겠군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직 어색할 텐데···.”
“아, 아닙니다, 마스터. 저야 이런 기회에 한 번이라도 더 프론트에 서 보는 거죠.”
명진은 기회란 정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기회라. 다른 신입이 같은 상황에 놓여도 이를 기회라 부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거라. 명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어설프게 찾아오는 기회는 그저 시련일 뿐이다.
정환이야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를 듣는 이에게는 너무도 당당한 선언으로 들렸다. 자신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그런 선언으로.
“그래도···,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데뷔시켜 미안할 따름입니다. 데뷔전을 열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괜히 데뷔전이라고 하면 부담도 되고요.”
“그래도···. 흐음.”
명진은 인자함과 우직함을 동시에 뿜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에야 데뷔전을 열어주는 곳이 잘 없음에도, 그런 이벤트 없이 프론트에 정환을 세운 게 미안한 모양이다.
“간단하게 지인들만 한 번 초대 할까 합니다. 저도···, 주변에 자랑도 조금 하고 싶고···.”
“지인들을요?”
명진의 눈빛이 변했다. 흥미가 가득한 눈빛으로 정환을 훑는 명진.
“그래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그렇게 합시다. 언제든 초대하세요. 대신, 그날은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 굳이 안 그러셔도···”
“쓰읍.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마음이 편합니다. 편히 초대하세요. 몇 명을 불러도 상관없으니. 데뷔전을 이렇게 여는 거로 하시죠.”
“···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초대할 날짜를 정해서 말씀해주세요. 그럼.”
“네···, 마스터. 감사합니다.”
명진이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아르센의 누구도 꺾을 수 없다. 정환은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한다.
“그럼···, 저번에 그 여자친구도 오는 건가?”
!
명진과 정환의 대화가 결착에 이르던 즈음. 옆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둘 사이에 하나 끼어든다.
홀로 움직이며 조용히 대화를 엿듣던 기준이다.
“네?”
“왜, 저번에 왔던 그, 있잖아. 모히토.”
“아···, 그게···”
갑작스레 치고 오는 기준의 말. 정환은 당황하며 얼굴만 붉어지고 있다.
“제가 없을 때 왔었다던 그분이군요.”
“맞습니다. 딱 정환이도 쉬는 날이었죠.”
명진 역시 그날의 일을 알고 있다. 그날 분명 명진은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정우 형···이겠지?’
정환은 조금만 생각해보니, 금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오시라고 하시죠. 이번에는···모히토를 만들어 줄 바텐더도 있으니.”
“······!!”
정환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며 기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우가 없기에 우선은 향해 본 곳. 허나, 기준은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아님을 표하고 있었다.
역시, 말이 나간 곳은 신정우임이 분명했다.
“아뇨, 그···여자친구는 아니고···”
“흐음, 썸인가요?”
“네에? 마스터, 그런 말도 아세요?”
“요즘은 그런 말을 많이 쓰신다더군요. 손님께 들었습니다.”
바텐더는 의외로 유행하는 단어와 말들을 잘 아는 편이다. 이는 나이가 있어도 마찬가지. 배울 의지만 있다면, 이들은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손님은, 좋은 교육 소재이며 정보원이다.
딱 이맘때쯤.
20대를 중심으로 썸이란 말이 막 유행하긴 했었다.
“썸인 거 같네요. 마스터.”
“네. 썸이군요.”
“네, 썸.”
계속해서 같은 단어를 말하는 명진과 기준 사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일단! 주변에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정환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던지듯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버렸다.
기준과 명진은 그런 정환의 뒷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아르센의 일상이었다.
2.
‘흐음···.’
누굴 불러야 할까.
백지에 여러 이름을 끄적이던 정환의 얼굴에 고민이 아린다.
‘시은이는 시간이 안 된다고 했고···. 상호랑 석훈이···’
- 오상호.
- 강석훈.
.
.
.
하나, 둘 채워가는 정환의 메모지. 정환은 명진과 나눴던 대화처럼, 아르센에 초대할 사람을 골라보고 있다.
친구들의 이름으로 칸을 채우니, 이내 꼭 불러야 할 사람들도 떠오른다. 정환은 떠오른 이름을 얼른 적어 내려갔다.
- 김태현 교수님.
- 지동철 교수님.
슥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는 펜.
정환이 과거로 돌아온 후 쌓은 인연들의 이름이 종이에 적힌다. 아르센을 소개해준 김태현 교수와 정환이 먼저 다가섰던 지동철 교수의 이름.
정환은 이 둘의 이름을 꼭 초대해야 하는 사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아마 저 둘은.
정환이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장에라도 달려올 기세일 것이다.
‘자 다음은···’
슬쩍 기울어진 손이 무언가를 적다가 멈칫한다. 전부 적었지만, 정환의 펜은 그 단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펜대에 잔뜩, 상념이 끼어 있다.
- 부모님···
부모님이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단어가 종이에 적히자,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끝에서.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음을 정환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슬슬 말씀드려야겠지···’
아직 정환은 가족들에게 바텐더가 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피하고만 싶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전 생에서 한 번 겪었던 일이기에, 정환은 그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이미 알고 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의 연이, 일시적으로나마 단절되었던 게, 바로 그때였다.
부모님을 가게로 초대해볼까. 아니, 아마 그건 좋은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오히려 부모님께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선···’
- 슥, 슥.
정환은 펜을 들어 메모장에 무언가를 긋기 시작한다. 부모님이라 적힌 글자 위로 두 줄이 그어졌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초대 자리에는, 부모님을 부르는 걸 보류하는 정환이다.
“후우.”
뒤로 기대어 짧은 한숨을 한 번 뿜는다.
무거운 숨이 바닥에 닿고 나서야.
정환이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