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33화 (33/175)

33잔. 듣고 싶은 말.

8.

“네. 아닙니다.”

!!

단순한. 그리고 너무도 명료한 부정이 정환의 입을 탄다.

이를 지켜보던 기준은 조금 더 길게 말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조금 더 강하게 아니라고 주장해주길 바라는 이의 눈치다.

허나, 정환은 이거면 됐다는 자세로 여전히 정우와 눈을 맞추고 있다.

“그래···, 아니란 말이지···.”

믿지 못하는 걸까. 정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잔을 입에 가져갈 때까지. 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호르르륵.

그렇게 잔이 정우의 입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서로 어긋나는 둘의 시선.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아르센의 안을 채웠다.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는 둘 사이에서 기준만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 탁.

내려오는 정우의 잔. 잔을 내려둔 정우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이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열리는 그의 입.

“그래. 그럼 됐다.”

!!!

파팟!

분명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음에도. 정우의 입이 열리자 기준은 무언가 파팟하는 소리가 들리며 긴장감이 끊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정우의 얼굴에는 장난기와 웃음기가 돌아와 있다.

‘이게 무슨···?’

기준은 서둘러 정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환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혹여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가득하던 그때.

‘···!’

정환의 얼굴에는 진득한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다. 정환의 웃음은 진득하고 또 따스하게. 정우의 얼굴에 닿는다.

조금 전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었던 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정환 씨···, 괜찮아?”

“네? 뭐가요?”

“놀란 건 아니고? 방금 정우 형이 조금···”

“아뇨. 괜찮아요. 물으실 수도 있는 거죠.”

기준은 혹여나 정환이 놀라진 않았을까, 걱정되는 말을 해본다. 신경 써주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초에 정환은 놀라거나 긴장한 적이 없었다.

정환의 눈에는 정우의 말과 행동, 또 눈빛이 선명하게 읽혀왔기 때문이다.

정우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심이 없었다는 걸.

정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질문부터 이상했다. 질문까지 닿는 과정은 더욱 이상했고. 거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눈빛까지.

심지어 정환은 정우가 일부러 그런 신호를 보내진 않았나. 그런 생각까지 하는 중이다.

‘정우 형도 참···’

신정우는 자신의 행동을 함에 있어 거침이 없는 인물이다. 속에 있는 말은 언제고 뱉어야 하는 사람이고, 이를 돌려서 말하는 건 잘 못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론까지 닿기 위해 말을 차곡히 쌓았다. 계속해서 자신이 이런 질문을 하는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고. 이는 분명, 평소와는 다른 화법이었다.

정환은 제일 처음 거기서. 정우의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연달아 나오는 질문. 그래, 의심은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 매니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심이고.

오히려 그런 의심을 한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아르센을 아끼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마지막으로 던져졌던 정우의 말은.

- 넌 아니지?

너도 그렇냐가 아닌, 넌 아니지? 라는 간접적인 말.

이는, 내심에서 아니란 말을 듣고 싶은 이의 말투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뿜어지는 기세만큼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는지 보겠다는 정우의 눈빛만큼은 진심으로 느껴졌으니까.

허나, 그런 눈빛 속에는.

전혀 떨림이 없는 확신에 찬 동공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바텐더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물론 칵테일도 만들고 재료도 준비하고 또 청소까지 한다.

그래도 이 모든 일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은.

언제나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듣고 대답하고 또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흔히들 접객이라 부르는 바텐더의 일은 늘 이렇다.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아도 경력이 제법 쌓인 바텐더에게는 생기는 작은 기술이 있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보는 기술. 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닌 자연스레 생기는 일종의 버릇일지도 모른다.

동공을 보는 것과 또 대화의 흐름을 읽는 것, 말하는 이의 어투를 보는 것 등.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신경 써서 하진 않는 그런 행동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마치, 정환이 방금 한 것처럼 말이다.

정환은 결론까지 가는 정우의 화법과 어투, 또 쏟아내는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떨리지 않는 그 동공은 무언가를 꿰뚫어 보겠다는 눈빛보다는 확신에 가득 찬 이의 눈빛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묻는 말에 나올 대답을 확신하는 이의 눈빛 말이다.

“앉아, 인마. 별일 아니니까.”

“아, 아니···! 더, 더 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환 씨···, 아니 정환이 너도 변명도 조금 더 하고···!”

분위기가 급변하자 홀로 긴장했던 기준만이 목청을 높인다. 그는 혹여나 남아있을 서로의 감정을 풀어보려 행동을 과하게 하고 있다.

“애초에 크게 의심하지도 않았어. 오버하지 마. 그냥 분위기만 조성해 본 거야.”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기준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이 옆에서 느꼈던 정우의 눈빛은.

정말로 누군가를 잡아먹을 듯한 그런 강렬한 눈빛이었다. 자신에게도 그 기세가 전해질 정도로.

“말했잖아. 그냥 정환이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고. 말했으니까, 된 거지. 아니라네. 끄-읕.”

“그,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다. 왜?”

“······.”

기준은 홀로 얼굴을 붉히며 눈을 열심히 굴렸다. 이제는 완전히 본래의 모습을 찾은 정우와 여전히 여유로운 정환의 미소가 그를 더욱 민망하게 만들었다.

“아까 말했잖아. 이미 마스터랑 이런 시간 보냈을 거라고. 그럼 된 거지. 마스터가 어디 쉬운 사람이냐?”

“그럼 애초에 의심을 안 하셨으면···!”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냐? 의심은 자연스레 생기는 건데. 그걸 덮어두고 있는 게···, 오히려 나쁜 거지.”

“예?”

“작은 의심이라도 덮으면 더 커지거든. 그래서 그냥 물어본 거야. 어차피 아닐 거란 생각은 있었으니까. 정말 크게 의심했다면···, 이런 식으로 알아보진 않았을 거고. 차라리 뒷조사를 했겠지? 나이만 봐도 경력이 있을 거 같지도 않고.”

“하아. 형도 참.”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아닌 걸 아는데, 당사자 입으로 아니란 말을 직접 듣고 싶을 때가. 오늘이 그런 거였어. 그냥.”

정우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털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야 원래 알던 장난기 가득한 매니저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였다.

“바텐더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죠.”

정환은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호오. 그걸 안다고? 이거 의심이 다시···”

“마스터께 들었습니다.”

“너···이 치사한···!”

정우가 다시금 장난을 걸어오자, 정환은 마스터란 단어로 응수한다.

아무런 딴지를 걸지 못하는 정우. ‘마스터’라는 세 글자는 신정우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단어였다.

“그건 또 무슨···?”

기준은 그저 앞선 정환의 말에 고개를 가로 기울였다.

“바텐더는 보이잖아요. 가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손님들이.”

“응. 적지 않지. 아주 심해, 어떨 때는.”

“글쎄요. 전 아직···.”

“이러니까. 의심을 안 할 수 있나. 기준이도 모르는걸.”

정우는 팔을 뻗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말은 의심을 꺼내면서도 밝게 웃는 그였다. 그는 한 번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티가 나지. 나중에 경력이 쌓이면 보이거든. 저게 거짓이다, 이게 진실이다. 이 사람은 가짜다, 저 사람은 진짜다. 이런 게. 뭐, 알아도 아무 말도 할 수는 없지만.”

“들은 적은 있습니다. 바에 지불하는 비용 중에 거짓을 말할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그래. 그거야. 바텐더가 손님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래도 나중에는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 이게 아부인가 접객인가 하면서.”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군요.”

“특히 오래 보고 싶은 손님이면 더 그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다시 오진 않거든.”

“오래 보고 싶은 손님이라···”

“거짓말은 언제나 불안한 법이야. 들키진 않았을까, 알면 어떡하지? 자신에게 늘 되묻거든. 그걸 피하는 방법은 한 번 거짓말한 상대를 다신 보지 않는 거고.”

“흠···.”

“정을 준 손님이라면 더 아쉽지. 그럴 때는 정말이지 얼마나 묻고 싶은지 몰라. 그거 거짓말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달라고.”

“알면서도 묻는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관계도 유지할 수 있을 거고···. 이제야 이해가 되는 거 같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아니. 오늘에야 한 번 했네. 반대로 이번에는 아니란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만.”

“뭡니까.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정환은 기준과 진중하게 나누는 정우의 대화를 보며 따스하게 웃었다.

저 말은 결국.

정환을 오래 보고 싶었다는 말이 아닌가.

믿음에 더해 유대감까지, 오늘은 가방이 무거운 정환이다.

“하. 하여튼 진 빠지는군요.”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내가 제일 피곤할걸?”

“정환이 기분도 살피시죠. 섭섭할 수도 있잖습니까.”

“에이, 괜찮지, 정환아? 섭섭해?”

정우는 건들거리며 정환에게 말을 물었다. 정환은 그런 정우의 모습이 싫지 않다.

“섭섭···은 하죠.”

“너···, 뒤끝 있는 성격이었냐?”

“기억력이 좋아서요. 아시다시피···, 제가 다 잘하잖아요.”

“허어.”

괜스레 정우에게 장단을 맞춰 장난을 쳐보는 정환. 정우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전보다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둘의 모습이다.

“오늘···, 아쉬운데 한 잔 더 어떠십니까?”

기준은 지금의 분위기가 싫지 않은 듯 한마디를 툭 던져본다. 이미 늦은 귀가. 오히려 이럴 때 회식 한 번은 어떤가 하고.

“그럴까? 정환이는?”

“전 좋습니다.”

“뭐를 마셔야 하나···.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은 없을 거고.”

“칵테일은 좀 그렇죠. 각자 만들 거 아니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야. 차라리 여기서 보틀을 까자.”

“형이 사시는 겁니까?”

“···저어기 두 번째 술장 보이냐?”

“네?”

정환이 계산을 묻자, 정우는 손가락을 뻗어 아래에 놓인 두 번째 술장을 가리켰다.

명진이 개인적으로 쓰는, 귀한 술이 든 술장이다.

“오늘···, 우리 정환이 고생도, 기준이 고생도. 또 내 고생도. 사실 마스터의 지분이 조금 있지. 몸만 좋으셨어도 이런 일은 없잖아? 거기다 정환이한테는 특별한 날이고. 한 병 정도는···괜찮지 않을까?”

“상당히 흥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정우가 작당을 모의하고 기준이 장단을 맞췄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정환.

바텐더가 백바를 건드리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비싼 거로 골라.”

정우는 무심하게 작전을 지시한다.

“그럴 줄 알고 하나 골라봤습니다.”

그리고 정환은.

12년의 경험과 모든 지식을 동원해 제법 괜찮은 술병을 하나 골라 본다.

- THE YAMAZAKI SINGLE MALT WHISKY 1984.

딱 이름만 봐도 한정판으로 보이는 위스키가 정환의 손에 들렸다.

정환이 이 술병을 바 위로 올리자, 기준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이건···”

굳은 얼굴로 정우를 향해 조심히 고개를 돌리는 기준.

재패니즈 싱글몰트 위스키 중에서도 25년 숙성, 그리고 1984년을 기념하는 한정판 보틀이 분명했다.

제발 거절해라. 기준은 그런 생각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너···! 이 담대하고 안목 있는 기특한 짜식!”

정우는 이미 눈이 돌아간 이후였다.

“후우. 맥캘란 71년 올드 보틀 앞에서 조금 망설였습니다만···. 그건 진짜 범죄가 될 거 같아서···. 겨우 참았습니다. 아아. 이것만 해도 손이 떨리더라고요.”

“괜찮아. 괜찮아. 충분히 괘씸하고 잘 골랐어. 셋이서 나눠서 혼나고 끝나기엔 이 정도가 딱이야. 맥캘란은 형사고발감이고.”

두 사람이 눈을 풀고 괴상한 대화를 나눈다.

이미 기준의 말은, 정환과 정우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정환이까지···’

얘도 술 앞에서는 정상이 아니다. 당당하게 마스터가 따로 빼둔 유럽판 고든스를 가져와 건넨 놈이 이놈이 아닌가.

떡잎부터 다르다는 걸 알아봤어야 했다.

정환의 입가에는 벌써 침이 흐르고 있다.

저건 2012년에야 적당히 비싼 가격대의 위스키지만, 정환이 있던 곳에서는 웃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술이었다.

‘하아.’

기준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즐길 수밖에 없는 것.

“나중에 똑같이 혼나야 합니다?”

기준은 모든 걸 내려두고 병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한정판 병의 진기한 기운이 그의 손에 느껴졌다.

그 역시 바텐더이기에, 귀한 술병에 대한 욕망은 숨길 수 없다.

“어차피 마스터는 몸이 안 좋아서 금주하셔야 해. 응. 이건 다 마스터 건강을 위한 거야. 일종의 효도라고 효도.”

“효도라면···, 저도 빠질 수가 없겠군요.”

“제가 다 잘합니다. 효도까지도.”

앞다퉈 뱉는 바텐더들의 정당화를 마지막으로.

- 솨아아아아.

진득한 위스키의 향이 잔뿐만이 아니라 아르센을 함께 채운다.

멀리서, 술병 주인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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