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잔. 매니저.
7.
영업이 끝난 아르센에는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바텐더들이 지친 몸을 겨우 가누고 있다.
“하아. 이제야 끝이네요.”
털썩! 소리를 내며 기준이 의자에 몸을 기댄다. 겉으로야 여유로운 모습의 그였지만, 속으로 가졌을 부담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까지는 또 어떻게 가냐.”
정우 역시 마찬가지. 오늘 하루를 가장 길게 보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정우였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유난히 긴 하루였네요.”
반면 멀쩡한 사람은 오로지 차정환이라는 이름의 바텐더, 딱 한 사람이다.
몸을 의자에 반쯤 눕듯 기댄 정우의 시선이 정환에게 향했다. 바 안에 서서 뒷정리를 벌써 시작한 그의 모습이 참 독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야, 정환아.”
“네, 정우 형.”
몸을 일으키는 신정우. 그는 어느새 손님처럼 바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앉혀둔 상태다.
“칵테일 한 잔 만들어주라.”
!!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을 부탁하듯. 정우는 계속해서 이를 떠올리며 담담히 말을 전했다. 여기서 무언가 특별함을 가미한다면, 이는 곧 서로에게 부담이 되고 만다.
“네? 갑자기요?”
“몸도 지치고 목도 마르네. 싫냐?”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오늘 메이킹 시작했잖아. 아무리 급했어도 내가 맛은 한 번 봐야지. 잘했을 거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니까.”
매니저는 관리직이다. 오늘 손님에게 처음으로 칵테일을 대접한 바텐더의 실력을 평가하겠다는 말이 무리한 부탁은 아니다.
“기준아. 너도 일로 와.”
“저도요?”
“두 잔. 한 잔은 슬래지 해머로. 나머지 한 잔은···”
정우는 기준을 보며 턱을 까딱였다. 주문을 해보라는 신호였다.
“···싱가폴 슬링. 래플스 스타일로.”
“오. 빡세게 가는데?”
“···아뇨. 뭐.”
기준 역시 정환의 칵테일을 맛본 적은 없다.
스터디를 하며 조언을 받고 그에 따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맛본 경험은 있지만, 그건 정환의 실력은 아닐 터.
거기에 스터디에서 만든 것은 바텐더가 바에서 만드는 칵테일과는 다른 맛일 것이다.
“시험···같은 거라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봐. 손님께 내어드린다는 생각으로.”
“···네, 그럼. 슬래지 해머와 싱가폴 슬링 래플스 스타일. 알겠습니다.”
긴장되지는 않는다. 그저 갑작스러울 뿐. 정환은 갑작스레 칵테일을 만들어 보라는 정우의 의중을 모르지 않았다.
대놓고 실력을 보겠노라. 정우의 눈빛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와 애써 실력을 숨길 생각은 없다.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니까.
이미 정환은 먼저 나서서 프론트에 서겠노라 선언했고 이를 해냈다.
넉 달 차 신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과.
어쭙잖게 숨기는 것보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실력을 이들에게 보여주고 인정받는 것이 정공법일 것이다.
- 척, 척, 척!
바툴을 전부 정리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손에 닿는 대로 그대로 빨려 들어오는 셰이커와 바스푼.
기주는 따로 묻지 않아도 좋다. 이들의 취향 정도야 함께 일하며 익힌 지 오래니까.
단골 정도 되는 손님이 주문하며 따로 기주를 설정하지 않는 건, 전설의 ‘늘 먹던 거로.’와 같은 의미다.
정환의 손이 우선해서 만드는 건 싱가폴 슬링. 일전에 기준이 데뷔전에서 큰 실수를 할 뻔했던 바로 그 술이다.
복잡한 레시피만큼 시간이 제법 걸리는 칵테일이기에 정환은 이를 먼저 택했다.
진부터 시작해 코앵트로, 베네딕틴, 체리 리큐르 등 수많은 재료가 셰이커 속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이를 간단히 셰이킹하는 정환.
이상적인 색의 싱가폴 슬링이 기준의 앞으로 나왔다.
연달아 정환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정우의 주문인 슬래지 해머. 슬래지 해머는 진과 라임주스를 섞는 김렛의 기주를 보드카로 바꿔 만드는 간단한 칵테일이다.
‘지금은···’
정환은 정말 손님을 대하듯 정우를 한 번 보고는 셰이커를 닫았다.
그리고 시작되는 셰이킹.
- 샤카! 샤카! 샤카! 샤카! 샤카!
평소보다 조금 긴 셰이킹이 정환의 손에서 펼쳐진다.
- 샤카칵!
과하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들고 난 후에야 정환이 셰이커를 멈췄다. 그리고 잔에 부어지는 연한 녹색의 슬래지 해머.
얼핏 김렛과 비슷한 라임 향이 코를 찌르는 듯했지만, 정환의 메이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끼긱. 토옹.
셰이커 안에서 마모되어 동그랗게 변한 얼음이 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음이 닿자 이내 변하기 시작하는 슬래지 해머의 향.
향은 얼음이 술 위로 올라간 순간.
더욱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싱가폴 슬링과 슬래지 해머, 나왔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잔이 앞으로 밀려왔다. 잠시 이를 바라보는 기준과 얼른 들어 코로 가져가는 정우.
신입의 손끝에서 이런 속도가 나온다는 것쯤은, 이제는 이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 축에도 끼지 못한다.
“흐음.”
정우는 느낌이 변한 슬래지 해머 속 라임향을 그대로 코로 받아냈다. 과한 셰이킹에 얼음을 더하는 것까지. 향이 죽을 법도 한데, 잔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노즈는 잘 잡혀 있다. 다만, 셰이킹이 과했던 만큼 맛이 너무 밍밍하진 않을까. 향만으로는 이를 평가하기에 부족해 보였다.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입에서 나올 것이다.
정우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잔을 입으로 옮겼다.
- 호르르륵.
거침없이 입술을 타고 흐르는 칵테일.
“······!!”
그리고 이내 정우의 두 눈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술을 삼키자, 잔잔하게 퍼지던 향은 분명히 사라졌다. 하지만, 연달아 콰광! 하는 소리를 내듯 강대하게 혀를 때리는 술의 맛.
말 그대로 해머로 때린듯한, 그런 맛에 정우는 재밌다는 듯 미간과 눈을 꿈틀거렸다.
아마 보드카 특유의 알싸함이 이런 효과를 냈을 것이다. 이는 곧, 베이스가 되는 술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는 뜻이고.
“후우우.”
표정을 얼른 갈무리하고 피니쉬를 위해 바람을 불어본다.
그러자 입속을 훑고 넘어가며 사라졌던 라임의 향이 몸속에서부터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전의 콰광! 하던 충격을 향이 감싸 안아, 다시금 위로해주는 느낌.
“아아.”
포근한 향에 자연스레 턱이 올라가며 만족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걸린다. 이미 정우의 눈가와 입가는 웃음기를 머금은 지 오래다.
“참나. 허.”
어느 순간 감았던 눈을 뜬 정우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저 맛있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다.
바텐더이기에, 정우만이 알 수 있는 것도 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그는 정환이 셰이커를 과하게 흔든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맛있네요···. 이제까지 마셔 본 것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싱가폴 슬링을 마신 기준의 입에서도 호평이 나온다.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평하는 그였지만,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마셔 볼래?”
“네, 그럼.”
기준은 옆에서 건네는 정우의 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잔을 건네는 신정우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조금 아려있다.
그리고.
- 호르륵.
“윽. 뭡니까? 이건?”
정우가 건넨 잔을 한 모금을 삼킨 기준의 표정이 팍! 하고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를 재밌다는 듯 웃으며 감상하는 정우의 모습.
“맛없지?”
“알고 계셨어요? 맛있는 것처럼 반응하시더니···”
“맛있어. 없긴. 내 입에만 맞춘 거지. 나한테는 맛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맛없는···. 아마 그런 맛일 거야.”
- 씨익.
정우의 말을 들은 정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린다. 바텐더의 의도를 알아주는 손님은 언제고 감사하다.
“맞지?”
“지친 하루를 보내신 손님이셨습니다. 바쁘셨죠. 운전에 사고에 또 일에. 해서 술을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몸이 지치면 혀는 민감해진다. 평소에는 편하게 잘 마시던 술도 혀에서 부담감을 느끼기 마련.
그래서 정환은 정우의 술을 일부러 더 과하게 섞어 부드럽게 만들었다.
다른 이가 맛본다면 싱겁다고 여길 정도로.
그게 지금 앞에 앉은 손님에게 낼 수 있는 최고의 한 잔이라.
바텐더의 판단은 그러했다.
잘 만든 칵테일이다. 맛도 있고.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손님의 자리에서 평가했을 때의 결론.
바텐더, 그리고 아르센의 매니저인 신정우라면. 생각을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래, 좋지. 손님의 상황을 보는 거. 바텐더로서 이상적이고. 그런데···’
이게 과연 오늘 처음 프론트에 선 바텐더가 할 수 있는 생각일까. 정우의 머리에 의문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과연 이 차정환이라는 사람이 신입은 맞을까, 또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하는 그런 원초적인 의문으로.
정우는 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날을 한 번 훑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다.
- 호르륵.
- 탁.
잔을 내려두고는 눈을 고쳐 뜨는 신정우. 그의 눈빛이 무겁게 정환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환아.”
“예, 형.”
“우선···, 술은 잘 마셨다. 맛있네.”
“감사합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입에 맞춰 내놓은 술이니 입에 맞는 게 당연하다. 정우는 너스레를 떠는 정환을 보면서도 웃지 않았다.
“근데, 내가 뭐 하나만 물어도 될까?”
“네?”
장난기와 웃음기가 쫙 빠진 정우의 얼굴은 오랜만이다. 옆에 앉은 기준 역시 이상한 기류를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길게 말은 안 할게. 내가 생각이 그렇게 깊은 사람은 아니거든. 근데···, 오늘 일 겪으면서 하나는 알겠더라고. 어쩌면 넌 이미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있을 거야. 아마···마스터랑.”
“······.”
정우는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처럼. 정환은 앞서 명진과 불편한 독대를 나눈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너가 계속 남아있다는 건···, 마스터가 납득을 했다는 말일 거고. 또 오늘 일에 별다른 말씀이 없는 걸 보니···제법 널 믿고도 있는 거 같고···. 아냐?”
“······.”
“형···. 갑자기 왜 그래요···?”
옆에 앉아 있던 기준은 갑작스레 변하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다.
정우는 가볍게 손만 올려 기준의 말을 막았다.
“마스터가 납득하셨다면 난 상관은 없어. 널 못 믿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한 번은 네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정환의 얼굴에 닿은 정우의 눈빛이 점점 힘을 얻어간다. 마치 강대한 기운이 정환의 얼굴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이건···’
명진과는 다른 결의 눈빛이다. 명진의 눈빛이 노련한 능구렁이의 눈빛이라면 정우의 눈빛은 사냥감을 향해 적의를 그대로 표하는 맹수의 눈빛.
조금의 동요라도 보인다면. 당장에 정환을 덮칠 것만 같은. 사납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맹수의 그런 눈빛이다.
“···어떤 말씀을···?”
“다른 건 모르겠고. 난 매니저거든. 이런 말은 낯간지럽지만···, 스스로는 마스터의 제자라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이해하고 들어줬으면 해.”
“······.”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어. 바에 경력을 속이고 들어와서 무언가 이득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천재니 뭐니 하며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 말이야. 바의 입장에서는 이게 난감한 일이거든. 아무래도 신뢰의 문제니까.”
정우는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보이지 않는다.
“바는 손님을 속여선 안 된다···. 다들 들어본 적 있지? 손님의 신뢰를 잃으면···, 바는 거기서 끝이거든. 난 매니저로서 아르센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건 막고 싶고.”
때로는 독백처럼, 때로는 추궁처럼. 정우는 차곡히 자신의 말을 쌓아갔다.
“그래서 말인데, 정환아.”
한 발. 두 발. 서서히 맹수가 정환의 앞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힘을 풀고 때로는 힘을 주며.
그리고 맹수는.
“넌 아니지?”
정확한 거리에서 사냥감을 향해 뛰어들었다. 정환의 얼굴에 닿는 시선이 이제는 완전한 적의로 바뀌었다.
앞에 앉은 정우의 몸이 유독 크게만 보였다.
“저, 정우 형···!”
기준은 갑작스레 쏟아진 정우의 의심에 얼른 몸을 날렸다. 적어도 기준이 생각하기에는. 정환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너한테 안 물었어.”
단호하게 기준을 밀어내는 정우의 말. 기준은 말에 묻은 냉기에 놀라 입을 다물고 만다.
정우의 시선은 여전히. 정환의 눈에 고정이다.
정환은 차분히 한 번 숨을 고르고는 정우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냈다. 흔들림 없는 정우의 동공이 정환을 응시하고 있다. 정환은 저런 눈빛을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신다라···’
의미심장한 생각을 하며 입을 움찔거리는 정환. 정환은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길지 않은 침묵이 아르센에 내려앉았다. 조금은 차가운 기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순간.
정환은 고개를 잠시 끄덕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답을 들려줬다.
“네. 아닙니다.”
단순하고 평범한 부정이 그의 입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