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잔. 믿음의 범위.
6.
“청담동이요! 아저씨, 최대한 빨리!”
- 타앙!
택시의 문이 거칠게 닫히며 다급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급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지금 시간은 그렇게 막히지도 않아요. 숨 좀 돌려요.”
느긋하게 손님의 긴장을 풀어주는 기사의 말에도, 사내의 표정은 전혀 풀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밤 11시 무렵. 남들에게는 하루가 끝나는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시간이 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운전대를 잡은 택시 기사도, 또 뒤에서 땀을 연신 닦아내는 바텐더도 말이다.
‘제발···, 제발···’
별일이 없길. 뒷자리에 앉은 사내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건 오로지 단 하나였다.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저희요? 저흰 영업하고 있습니다.
아홉 시였나. 딱 그 즈음.
병원이며 보험사, 경찰 등과 계속되는 연락 속에 아르센의 매니저 신정우가 직장과 연락이 닿은 건 딱 그 정도의 시간쯤이었다.
몸이 좋지 못한 명진을 살피고 또 사고를 수습하랴 한두시간을 지체한 게 이런 일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자세한 사정을 본다면야 정우에게도 할 말은 많다.
옆에는 몸이 좋지 않은 부모와 같은 스승 이명진, 그리고 주변은 5중으로 이어진 연쇄 추돌까지.
다행히 뒷부분만이 조금 쓸려나간 덕에 크게 다치진 않은 두 사람이었으나, 사고 현장의 분주함을 비켜나가지는 못했던 그들이었으니까.
큰 사고의 현장 속에서 몸이 멀쩡했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끌려다녔던 게 딱 두어 시간.
그는 그제야 겨우 닿은 가게와의 통화에서 믿지 못할 말을 듣고 말았다.
영업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 정환이라는 넉 달 차 신입이 프론트에 나서기로 했다는 것.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연락이 늦어진 이유 중 연락이 없다면 알아서 장사를 접었을 거란 생각 역시 없진 않았다.
둘은 고작해야 합쳐도 정우의 경력의 반도 안 되는 초짜들이 아닌가.
그들이 무슨 담으로 자기들끼리 영업을 해나갈 용기가 있겠나.
정우는 그런 안일한 믿음 덕에 가게에 연락하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상황을 정리하는 것에 먼저 신경을 쏟은 건지도 모른다.
- 띠리리링.
“예, 마스터. 택시 탔습니다. 병원 수속은 다 해뒀으니까요, 제대로 검사받고 하루 푹 쉬세요. 네네. 우리 과실은 거의 없다네요. 뒤에서 박은 거라. 네. 사모님이 곧 오실 테니까, 하루는 꼭 병원에서 쉬세요. 네. 경찰서랑 보험사는 제가 다 이야기 해뒀어요. 네네. 가게···만 처리하면 될 일이죠.”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명진의 전화를 받았다. 사고로 혼란스러운 지금이지만, 요즘 들어 몸이 안 좋은 명진에게 자신의 내심을 비출 순 없다.
다만, 너무도 덤덤히 자신이 들은 소식을 듣더니,
- 그럴 거라 믿었습니다. 좋은 바텐더들이군요, 역시.
라고 말하며 짙게 웃던 명진이 오늘은 조금 얄밉게도 느껴지는 정우였다.
“지금 바로 가보려고요. 아뇨, 일은 못 해도 일단 가서 상황은 제가 봐야죠. 수습도 해야 할 거고.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네네. 일단 그 후로 별다른 연락이 없으니까···, 별일은 없는 거겠죠?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우선 푹 쉬세요. 가게는 저한테 맡기시고요. 네네. 가게에 들른 후 연락드릴게요.”
무소식은 분명 희소식이다. 이를 알고 있음에도, 현장의 상황을 모르는 관리직의 머리에는 언제고 최악이 먼저 그려진다.
‘후우.’
정우는 휴대폰을 내려두고는 몸을 시트에 기댔다. 차창 밖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불빛들이 요란하게 움직인다.
‘기준이 녀석···’
평소에는 그리 대범하지도 않은 놈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대범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걸까.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에 닿는다.
‘차정환···’
기준 혼자였다면 절대 영업에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기준을 누구보다 옆에서 오래 지켜본 정우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라 다른 신입이 옆에 있었어도 이는 마찬가지.
차정환이라는 제법 믿음직하고 기준이 요즘 들어 의지하는 그 신입이 아니었다면, 기준은 정우의 예상대로 문을 닫고 연락을 기다렸을 것이다.
차정환이라.
처음부터 예사롭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도 좋았고 그에 따라오는 실력과 눈치, 그리고 바텐더로서 갖춰야 할 인성까지 가지고 있던 인물이 차정환.
그런 정환을 누구보다 높게 평가하고 인정하는 사람 중에는 정우 역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니, 차마 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어울릴지 모른다.
눈으로 본 걸, 믿지 않을 정도로 정우는 꽉 막힌 이가 아니었으니까.
대신, 정우는 눈으로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보태는 사람 역시 아니었다.
정우는 정환이 직접 칵테일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 만들어낸 칵테일의 맛도, 또 이를 손님에게 내는 모습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고 있다.
‘언제든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라···’
기준이 수화기 너머로 작게 읊조리던 가게를 연 이유가 정우의 머리를 스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자신의 스승이자 아르센의 마스터인 명진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
그래, 스승의 신념이고 아르센의 상징이니 인정은 한다.
허나, 그런 신념이 과연 손님들이 아르센에 가지고 있는 기대와 평가, 그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순간에도 지켜야 하는 것인지는.
정우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고가 왜 하필 오늘 났을까. 일이 조금만 더 늦게 터지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해보길 잠시.
정우는 모든 게 소용없는 일임을 직시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건 서둘러 아르센에 자신이 도착하는 것. 그리고 사태를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것.
그게 전부일 것이다.
택시는 빈 도로를 달려 어느덧 강남의 대로에 닿았다. 청담동의 명품 거리가 즐비한 골목 한구석에서 잔돈을 받지 않고 뛰어내리는 정우.
정우는 쉬지 않고 골목을 달려 아르센의 문 앞에 닿았다.
평온한 분위기가 감돈다. 시끌벅적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까.
바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중 고성 같은 시끄러운 소리는 곧 안 좋은 일임을 알리는 소리일 것이다.
“후우. 가자.”
정우는 눈을 한 번 고쳐 뜨고는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먼저 안에서 열리고 마는 문.
누군가 문밖으로 나서려는 모습이다.
- 끼익.
문이 열리고 얼큰하게 취한 사내 둘이 밖으로 나선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가득한 것이 이미 몇 잔을 연거푸 마신 상태.
혹여나 안 좋은 일로 나가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마저 정우가 떠올리고 있을 때.
“아르센은 언제와도 좋구만.”
“그러니까. 오늘 마신 뉴욕은 최고였지.”
“그래? 마가리타도 좋았는데, 다음에는 모던한 걸 마셔봐야겠네.”
다행히 아르센을 칭찬하는 말이 정우의 귓가를 스친다.
‘이 복도가 이렇게 길었나···’
아르센의 입구에서 바까지 향하는 짧은 복도. 정우는 한 번도 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 복도가 오늘은 마친 긴 산길처럼 느껴졌다.
저 끝에 기둥이 보인다. 이제 저것만 돌면 바가 보이고 또 바텐더와 손님이 보일 것이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거침없이 이를 통과한 정우의 눈에는.
“와하하하하!”
“아니, 이거 지인-짜! 맛있어요!”
“기준 씨. 실력이 갈수록 느는걸?”
“한 잔 더 부탁드려요.”
“저두요! 난 이번에 정환 씨가 만들어 주는 거로!”
화기애애한 바의 풍경과 손님, 그리고 바텐더의 모습이 펼쳐졌다.
정우의 머리를 채우던 수많은 안 좋은 생각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
그래, 좋은 일이다. 분명 아무 일 없었던 게 분명하고 지금의 상황도 좋아 보이는.
하지만 상상했던 풍경과 너무 달라서였을까. 정우는 그 풍경을 목격하자 아무 말 못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서 오세···요? 어? 정우 형?”
정환은 손님에게 무언가 주문을 받다 입구 쪽에서 나타난 신형에 서둘러 인사를 건네려 했다.
입구에 나타난 신형은, 아쉽게도 손님은 아니었다.
“정우 형? 오신 거예요? 못 오실 수도 있다더니.”
기준 역시 정우를 발견한다. 손님 사이로 벙찐 표정의 정우를 맞이하는 둘의 표정이 짐짓 여유로운 와중이다.
“···어, 그게···”
불안해서 서둘러 왔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둘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정우는 차마 말을 전부 뱉지 못했다.
“이야, 매니저 아닌가? 이제 출근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정우를 반겨주는 또 다른 사람. 아르센에 자주 오는 단골 중 한 명이다.
“아, 최 사장님.”
“늦었네?”
“오늘 사정이 조금 있어서요.”
“좋겠어, 아주. 이제는 이렇게 가게를 비워도 든든하고 말이야.”
“네?”
“실력들이 좋아. 주니어들도. 보통 바가 주니어만으로 주말을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역시 아르센일세. 이런 배포가 있다니까. 허허허.”
“······.”
배포라.
그간 불안에 떨던 모습을 보면 감히 그런 단어를 쓰기 부끄러워진다.
정우는 그저 쓴웃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둘러 바 안으로 들어섰다.
“별일 없었던 거야?”
“네. 괜찮았어요.”
“정말···?”
“네···?”
문득 자신의 첫날을 생각해보는 정우. 괜찮았다는 저런 말이 여유롭게 나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나, 정우는 그날을 회상하다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잔을 깨고 또 주문도 실수하고. 주문을 엉터리로 받아 고성이 오가고.
또, 그걸 명진이 수습하고.
그런 풍경만이 가득했던 예전을 떠올리자, 지금 이게 정환의 첫날이 맞나, 정우는 그런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아냐. 그, 그 하던 일 해.”
여기에는 백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원래 뛰어난 놈들이 그렇다. 범재의 심정을 자신들이 어찌 알겠나.
정환이 아무렇지 않게 해냈던 모든 일들을 생각하니, 정우는 정환에게서 답을 찾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다.
정우는 정환을 지나쳐 기준에게 향했다. 뒤로 돌아 잔을 정리하고 있는 기준.
“괜찮았지···?”
“네, 형. 무난했어요.”
“···기준아. 이거 정말 미안한데. 난 진짜 불안했다. 처음 전화 받았을 때는 어이도 없었고.”
“···네, 형. 이해합니다.”
“근데···, 이건···.”
너가 생각해도 너무 별일이 없지 않냐. 정우는 그런 말을 묻고 싶었다.
기준은 정우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잔을 내려두고는 정우의 귓가로 다가갔다.
“괴물이에요. 저거.”
정우는 뒤를 돌아 정환을 바라봤다. 기준이 괴물이라 말한 그 사람을.
- 샤카! 샤카! 샤카!
앞으로 뻗는 스트로크에 끝에서 흔들어주는 스냅까지. 완벽이란 말이 모자라지 않은 셰이킹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허어.”
괴물이란 기준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그였다.
“형. 마스터는 괜찮으신 거죠?”
“어···? 아. 응. 외관상 이상은 없는데, 혹시 몰라서 하루 입원하시라고 했어. 검사도 할 겸. 사모님 오신다는 말씀 듣고 나왔고.”
“다행이네요. 형은요? 괜찮아요? 사고란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별일 아니라 얼른 말해주셔서 다행이었지···.”
“나야 뭐···. 젊잖아. 이것저것 처리하다 보니까 연락이 힘들었지···. 미안했다.”
발등이 조금 시린 감은 없지 않아 있었다. 검사를 받으라는 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당장에는 아르센에 대한 걱정이 앞서 그대로 달려온 그였다.
멋대로 문을 연 것에 한껏 호통을 쳐주려던 정우는, 어느새 사과의 말도 함께하고 있다.
“주문하신 화이트 레이디입니다.”
옆에서는 정환이 주문에 맞게 만든 술을 조용히 밀어냈다. 손끝으로만 밀어냄으로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완벽한 서브.
정우는 눈으로 본 걸 전부 믿지 못하고 있다. 누그러진 정우의 태도는 어쩌면 저 광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게 정말 첫날이란 말이지? 그것도 갑자기···.”
“괴물이라니까요.”
기준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털었다.
보면 뭐하겠나. 본들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인데.
“와···! 화이트 레이디에서 이런 맛이 날 수도 있는 거군요. 그냥 상큼한 칵테일인 줄 알았는데!”
“앞에 드셨던 잔이 독했던 잔이라 이번에도 맛을 조금 강하게 넣었습니다. 아직 주량을 넘지는 않으신 것 같아서요.”
“딱 좋아요. 최고예요.”
전작을 기억하고 그에 맞춰 내는 후작. 그리고 맛이 서로에게 끼칠 영향에 대한 계산까지.
만약 모르고 봤다면. 정우는 노련한 바텐더의 퍼포먼스라 그리 믿을 정도였다.
“아까 한창 사람 몰릴 때를 보셨어야 했는데.”
“왜? 어땠길래?”
“그냥 기술만 좋은 게 아니에요. 손님 핸들링부터 좌석 배치, 접객, 잔 나가는 순서까지···”
“그걸 정환이가 다?”
“제가 보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
기준의 담담한 고백에 정우는 침묵으로 답했다. 딱히 뭐라 말을 더하겠나. 직접 옆에서 함께 일한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는데.
정우는 가만히 서서 정환의 등을 바라봤다. 유독 크게 느껴지는 등이 자연스레 아르센의 바를 오갔다.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풍경이다.
“여기, 물 좀 더 주세요!”
그리고 그런 정우의 감상을 깨는 손님의 목소리.
정우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를 털고 몸을 움직였다.
“네, 가겠습니다!”
아르센의 영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