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26화 (26/175)

26잔. 말이 많은 바텐더.

2.

“바텐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

“······.”

명진의 앞에 선 주니어들은 저마다 굳게 입을 다물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강한 울림도, 또 돌아보는 듯한 그런 성찰도. 이들에게는 한 번에 몰려온 순간이었다.

바텐더란 그런 존재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 존재의 의미가 돋보이는 사람.

어쩌면 명진은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주니어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각자의 개성이 강하고 또 맛있는 술이다. 이를 섞으면 맛이 조화롭지 못할 것도 분명한 사실.

하지만, 이를 굳이 섞는다.

스터라는 하나의 기술을 통해. 또 얼음과 물, 믹싱 글라스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고 바텐더의 그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은 결국에 결과를 내고 만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바로 바텐더라는 이름의 칵테일.

주니어 바텐더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같은 이름의 액체를 보며 머리에 수많은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

이들과 같은 주니어 바텐더,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였다.

아쉽게도 정환은 다른 이들처럼 많은 생각이 들거나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느끼고 그러진 않았다.

그런 감동을 받기에는, 정환은 이미 저 칵테일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경력이 오래된 참이었다.

그저 정환이 이 광경을 따스하게 보는 이유는.

‘역시 긴자 사나이···’

마스터 이명진의 화법 때문이다.

요즘의 바텐더는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한 잔의 술로 손님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는 그런 만화 같은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너무도 가까이 들어오는 타인은 언제고 밀어 내지기 마련인 세대가 요즘의 세대.

허나, 명진의 세대는 달랐다.

칵테일 속에 말이 많은 세대.

흔히들 말하는 낭만의 세대.

그들만이 전할 수 있는 칵테일이 저것임도 분명했다.

한 잔 속에 의미를 담고 또 그를 전달하는 바텐더.

또, 그를 통해 손님의 상처를 감싸는 바텐더.

정환은 오랜만에 낭만 세대의 바텐더를 옆에서 구경할 수 있어 마냥 따스한 눈빛을 발산할 뿐이다.

“자자, 다들 드셔야지요? 보기만 하면 칵테일이 서러워합니다.”

“아, 네!”

“아.”

“넵!”

잠시 침묵의 시간이 드리우자, 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이를 환기했다.

너무 생각에 빠트리는 칵테일도 그렇게 좋은 칵테일은 아닌 법이다.

바텐더들이 바텐더를 들어 입으로 삼켰다.

상큼하면서도 섬세한 맛이 입을 치고 가며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술이 이들의 혀를 감쌌다.

풍미는 와인의 것, 맛은 이들의 맛을 모두 합한 맛, 거기에 남은 잔향은 생전 처음 보는 과일 바구니 속에 묻힌 향.

맛있는 것들을 섞는 게 어렵다는 말이 무색하게, 너무도 맛있는 술이 이들의 목을 타고 넘었다.

말뿐이 아닌. 맛까지 함께 가진 술이었다.

바텐더라는 의미 있는 한 잔을 비우고 나서야 주니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마스터.”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역시 아르센이네요.”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저마다 오늘의 감상을 전하는 주니어들.

“언제든 다시 오세요. 아직 드시지 못한 술들이 많으니까요. 다음에는···, 조금 더 특별한 술을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준비 중인 것도 있으니 꼭 바텐더분들이 먼저 맛봐 주셨으면 합니다.”

“어휴,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죠.”

“꼭 다시 오겠습니다. 기억할 겁니다!?”

“마스터께서 준비 중이라고 하시니 더 기대되네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조심히들 가시길.”

아르센의 둔탁한 문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에는 진한 만족의 표정이 걸려 있다.

명진은 후배 바텐더들에게 고개를 서슴없이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정환아, 너가 배웅 좀 하고 와.”

“네? 제가요?”

“그럼, 기준이 보낼까? 그나마 사회성 좋은 너가 가라.”

“아, 넵.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흔들며 쫓아내는 정우의 말에 정환은 문밖까지 나서서 이들을 배웅했다.

기준보다야 아직 관계가 덜한 정환에게 얼굴을 한 번 더 익히고 오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뭐, 바텐더끼리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요. 오늘은 손님이신걸요.”

“그래도 정환 씨 덕분에 아르센에 한 번 와보네요.”

“그러니까요. 정환 씨가 도와줘서 이렇게 와본 거지, 기준 형은 또 안 된다고 하셨을걸요?”

“다음에는 우리 가게도 들려줘요!”

밝게 인사하고 떠나는 바텐더들.

정환은 평소처럼 허리를 접어 이들을 배웅했다.

강남의 대로와 맞닿은 골목 끝으로 저들의 발걸음이 사라질 무렵.

슬쩍 허리를 펴보는 정환.

그리고 그런 정환의 앞에는,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은 임재훈 바텐더가 밝은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늘··· 이렇게 배웅하는 겁니까?”

“할 수 있다면요. ···아직 안 가셨네요.”

재훈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쭈뼛거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색한 사람들은 언제고 반응이 비슷한 모양이다.

“···뭐, 별다른 건 아닙니다만···, 아까 마지막 전에 나왔던 칵테일 있지 않습니까?”

“바텐더, 말씀이군요.”

“차정환씨는···아는 칵테일입니까?”

“···네?”

“아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재훈은 계속해서 시선을 정환에게 나누고 있었다. 그런 재훈의 눈에 들어왔던 건 바텐더라는 칵테일을 처음 접한 이가 아닌 원래 알던 이의 모습.

재훈은 정환이 그 칵테일을 원래 알던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알긴 합니다만···, 왜?”

“음, 저···, 그···, 제가 절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라···”

볼까지 긁어가며 잔뜩 쑥스러운 티를 내는 재훈. 그런 재훈을 보며, 정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펜 있으세요? 종이랑.”

“네?”

“레시피. 레시피 알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세요?”

“아니, 뭐···”

이제 석 달이 조금 넘은 신입에게 이런 걸 묻는 게 부끄러운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재훈은 그저 다른 가게에 와서 이런 걸 묻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워낙 특이한 칵테일이고 책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네. 그렇게 대중적인 칵테일은 아니죠.”

그걸 신입인 당신은 알고.

라는 말이 목에 걸렸으나, 재훈은 차마 뱉지 못했다.

재훈은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정환에게 건넸다. 거침없이 레시피를 적어나가는 정환.

이 시절에는 아직 번역된 칵테일 북도, 또 인터넷 검색으로 나오는 레시피도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또는 번역이 덜 된 원서로. 그렇게 공부하던 게 이 시점의 바텐더들.

칵테일과 술에 대해 공부하기 좋은 시대는, 아직 몇 년은 더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라도 더···’

하나라도 더 빚을 달아놓자. 언제고 성공할 사람이고 안목도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 바텐더로서 나쁘지 않은 마음가짐까지.

정환은 재훈이 해달라는 건 크게 무리가 없는 한 모두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스터하는 법도 조금 자세하게 써 봤는데, 직접 해보시면서 익히는 게 더 좋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매번. 저번에 알려주셨던 파리지앵도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너무 부담가지진 마세요. 언제고 제가 도움을 받을 날도 있을 거니까요.”

“꼭···다음에는···”

재훈은 그저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많은 감사의 말보다 숙연히 내려가는 그의 고개가 더욱 진심이 실려 보였다.

정환은 한동안 재훈이 사라질 때까지.

강남의 골목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3.

“맛이 갈수록 좋아지는군요.”

잔에 담긴 녹색 김렛을 들이킨 명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이렇게 맛있는 김렛을 마실 수 있는 건 요즘 그가 즐기는 하나의 특권이다.

“단골이시니까요.”

“제 입맛에 맞춰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아무렇지 않게 명진의 말을 들으며 다른 칵테일을 연습하는 정환.

아르센이 마친 후 텅 빈 가게 안에서 둘은 칵테일 공부란 핑계로 이렇게 독대를 즐기고 있다.

바텐더는 하루가 끝나도 바에 갈 수 없다.

바텐더의 퇴근 시간에 문을 여는 바는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명진에게는 행복할 뿐이다.

마스터가 직접 칵테일 공부를 봐준다고는 하지만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함께 실습하는 모습은 없다.

정환은 홀로 연습하고 명진은 앞에 앉아 자신의 술을 즐긴다.

몇 번을 반복하며 이러한 상황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두 사람이다.

“오늘 몸은 괜찮으세요? 평소보다 무리하셨을 텐데···.”

“아직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바텐더가 잔 수를 세면서 손님을 맞아서 쓰나요.”

“완고하십니다, 정말.”

“싫은가요? 사장이 너무 완고하면 직원들이 고생이긴 하겠군요.”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해서 남아 있을 수도 있죠.”

“그러길 바라고는 있습니다만.”

빈말은 아니었다.

완고해서, 굳건해서, 또 구식이어서.

이는 분명, 정환이 명진의 곁을 떠도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 주니어 바텐더들에게 대접한 칵테일만 봐도 그렇다. ‘바텐더’라니.

긴자의 고풍스러운 오래된 바에서도 잘 주문받지 않는다는 그 칵테일을 이렇게 풀어 낼 줄은, 정환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말이 많은 바텐더라···’

말이 많은 바텐더는 실제로 말이 많은 바텐더를 말하지 않는다.

칵테일이라는 잔 속에 많은 뜻을 담는 사람.

그래서 촌스럽고 또 그래서 낭만적인 사람.

옛 시절의 바텐더를 칭하는 말이라. 정환은 스스로 그 단어를 그렇게 정의했다.

“바텐더···라는 칵테일을 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주니어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텐데요.”

“잔을 내는 이의 의도를 잔을 받는 이가 무조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내미는 것. 그리고 그 속에 담는 것. 거기까지가 바텐더의 영역이죠.”

“오늘은 성공적이었겠군요. 다들 표정이 느끼는 바가 있어 보였습니다.”

“좋은 바텐더들입니다. 배우려는 분들을 보니 뭐라도 하나 더 드리고 싶더군요.”

“너무 낭만적이세요, 마스터는.”

예전에야 같은 업계란 이름 아래에서 기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알려주는 일들이 허다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몇 년 전까지의 이야기.

요즘은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도 쉽사리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서 같은 가게도 아니고 다른 가게의 신입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겠다니.

과연 낭만 시대의 바텐더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아까 마지막에 하셨던 말씀은 뭔가요?”

“어떤 걸 말씀이시죠?”

“준비 중인 술이 있다고 하시던데···”

- 다음에는···, 조금 더 특별한 술을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준비 중인 것도 있으니 꼭 바텐더분들이 먼저 맛봐 주셨으면 합니다.

주니어들이 떠나던 때 명진이 흘리듯 남겼던 마지막 말. 정환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남겨 두었다.

“아.”

그걸 기억하냐는 듯 웃어 보이는 명진.

“마스터가 준비 중이신 거면 평범한 술은 아닐 거 같은데요?”

“별거 아닙니다. 요즘 관심이 생긴 주종이 있어서요.”

“흠, 궁금하네요.”

“한 번 맛보시겠습니까?”

“네?”

말은 먼저 꺼냈지만 여기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맛보겠냐는 말을 들으니, 바텐더로서 욕심이 생기는 정환이다.

“허락만···해주신다면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바텐더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정우 씨는 이제 입맛이 저랑 완전히 비슷해졌거든요. 남들에게 보여주기는 그렇고···.”

명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환을 향해 손짓했다. 바에서 나와 자신과 자리를 바꾸자는 뜻이다.

“그렇게 비싸거나 특별한 술은 아닙니다. 다만···, 접하기 힘든 술은 맞을 겁니다.”

백바의 아래에 있어 손님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작은 술장을 살피는 명진.

개인적으로 쓰는 두 번째 찬장을 열고서야 명진이 하나의 술병을 꺼내온다.

일반적인 술병과는 다른 모양의 술병이 나오자, 정환은 이내 그 술의 주종을 알게 된다.

‘전통주···?’

바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술이, 정환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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